끌어당김의 법칙, 마주침의 우연성과 펼쳐짐의 필연성
-The Law of Attraction, the Coincidence of encountered and the Inevitability of Spread
[연 중 제 24일 (다 해) 2022. 9. 11. Luc. 15,1-32 ]
1. 이상의 「거울」과 이성복의 「거울」
이상의 「거울」을 읽어본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또꽤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의 「거울」은 자의식의 상관물인 ‘거울’을 통해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대응시키고 있지만 그 둘은 끝내 합쳐질 수 없는 자아분열 상태에 있다는 자기진단의 시다. ‘나’라는 어떤 환자의 용태에 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성복의 「거울」을 읽어본다.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 막았습니까/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가득차 있습니다/거울처럼
이성복 시인의 「거울」은 ‘당신’이라는 세계를 통해 ‘당신’과 ‘나’의 관계를 진단하고 있다. ‘당신’이라는 세계와 ‘나’라는 세계는 거울에 비친 얼굴처럼 닮아 있다.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길을 열어주는 열린 관계가 아니라, 죽음이나 두려움 혹은 길을 숨기거나 가로막은 닫힌 관계라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이상의 「거울」이 자의식과잉의 상태를 보여준다면, 이성복의 「거울」은 타자의식의 과잉을 보여준다. 자의식 과잉이든 타자의식의 과잉이든 ‘과잉’은 강력한 ‘끌어당김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엔은 2022년 11월 세계인구추이를 80억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연한 만남처럼 보이는 인연들은 80억의 사람중의 한 사람과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이성복 시인에게 '거울'은 무엇인가?
1930년대 식민지 지식인이었던 이상에게 ‘나’는 하나의 기호다. 아버지 상실의 시대라고 불리는 1930년대는 지식인의 심장을 끌어당기지 못하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실종의 시대에 지식인인 화자가 유일하게 끌렸던 대상은 ‘나’ 자신밖에 없다. 자기 애증도 일종의 끌림이다. 내가 나에게 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나’는 지식인이 갖고 있는 나르시시즘이라는 기호에 해당한다. 자학 혹은 자조도 정도를 넘으면 나르시시즘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세계라는 출구가 원천봉쇄된 상황에서 자의식이라는 현미경으로 ‘나’를 관찰하는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확인된 것은 세계로 향한 출구만 막혀버린 것이 아니라 나는 나에게마저 차단되었다는 점에서 '열림과 차단'이라는 '거울상'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시를 써야했던 이성복 시인에게 ‘나’와 ‘당신’의 관계는 어떤 '거울'일까? 아마도 그것은 세 겹으로 살펴볼 수 있을 거 같다. 먼저, 사랑의 배타성에 관한 사랑의 기호로 읽어볼 수 있다. 사랑의 길이 막힌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이들의 타나토스의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타나토스의 충동은 두 사람에게는 열락이지만 대신 세상으로 난 길이 모두 차단된다는 점에서 '거울'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은 하나(헤겔)라고 강요하는 세계에서, 사랑은 둘의 사건(알랭 바디우)이라는 것을 감당하는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누가 내려준 관념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라고 해도 문제고 둘이라고 해도 문제'라는 점에서 이 역시 '거울'이다. 또 시인은 누구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 속에서 ‘당신’이라는 바깥에서 시인은 사유하도록 운명지어진 비자발성(우연한 마주침)의 강요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거울처럼 '열림과 차단'의 기호라고 읽을 수 있다.
이렇듯, 거울이라는 기호는 우리가 어떤 세계에 감싸여져 있으며, 우리가 모르는 세계들이 어떻게 그 신비의 휘장을 걷고 펼쳐지는지를 가늠하게 만드는 '열림과 차단'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읽고, S대 진원준 군이 보내준 단상-거울은 나와 상을 분리시키면서 전체 모습 또한 보여주지 않고, 네모난 유리 안에서만 모습을 보여주죠. 어찌보면 상당히 잔혹하고 일방적인 관계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2.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질 들뢰즈)
질 들뢰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무의식적인 기억의 나열이 아니라 어떤 사유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바라보고 있다. 그 과정이란 과거의 시간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기호들이 그리는 추억의 궤적들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오늘 펼쳐지고 있는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다음과 같이 바라본다.
①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목수나 의사 같은 이런 천직은 늘 어떤 기호에 대한 숙명이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기호들과 관계가 있는데, 과거를 상기시키는 기호들은 즉 우리가 과거의 어떤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지만 그 기억은 동시에 과거를 넘어선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찾기'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기호가 방출하는 시간의 스펙트럼 속에서 시간의 통일성과 다원성을 끄집어낸다고 보고 있다.
②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들뢰즈가 바라본 사랑은 무언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고 보고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하나의 기호, 단 하나의 영혼으로 우리 앞에 예고없이 나타난다. 출몰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 세계를 표현한다. 해독하고, 해석해야할 세계는 사랑받는 사람 속에 있고, 동시에 감싸져 있으며,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기적처럼 펼쳐보인다는 것이다.
③기호는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 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은 마주침의 우연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잃어버리는 시간-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의 동선을 그린다.
④우리는 기호가 의미하는 것을 기호가 지칭하는 존재나 대상과 혼동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마주침들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우리는 그 마주침들이 우리에게 내리는 명령을 피해버린다(55)
기호의 해석이 어려운 것은 절반쯤은 대상 속에 싸여 있고, 절반은 우리 자신 속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준 가장 아름다운 마주침들도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다. 기호가 내뿜는 찬란함, 아름다움, 즐거움을 사유 혹은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⑤왜 예술의 기호는 다른 모든 기호들보다 우월한가? 그것은 다른 기호들은 모두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방출 양태 때문에 이 기호들은 물질적이다. 예술의 기호들만이 비물질적이다.
예술의 기호 외에 다른 기호들은 대부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이유는 기호들이 방출되어 나온 원천 때문이다. 또한 그 기호들이 절반쯤 대상 안에 싸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들만의 고유한 전개양식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기호들은 대부분 물질적인 기호들이다. 바로 여기서 삶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 종교의 초월성이 나온다.
예술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성하고 그 존재의 고유한 차이를 이해하고 개별적인 이름으로 불러준다. 대상의 존재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존재의 '차이'에 싸여 있는 본질의 세계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의 시작에 해당한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박경리의 <토지>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 <베드로대성당> 건축물은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다. 하느님이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에게 창조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여주게 한 것과 같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의 기호는 언제나 세계의 시작이고, 우주의 시작이며, 근원적인 시작이다. 그래서 예술과 종교는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원초적인 말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제와 시인은 같다고 칼 라너가 바라본 그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⑥사랑과 관련해서 진실은 너무나 늦게 온다. 사랑의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헛되이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이것이 시간의 네 개의 시간선이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을 통해 감각적 기호가 주는 영원의 이미지는 시간의 영원성 뿐 아니라 영혼불멸이기도 하다.(132)
사랑의 기호는 기호의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사랑에 빠진 자아가 사라졌을 때에만 어떤 세계가 펼쳐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을 통해 감각적 기호가 주는 이미지는 시간의 영원성 뿐 아니라 영혼불멸까지도 드러낸다. '부재의 현존'이 의미하는 트랙이다. 이것은 대상을 환기시키는 어떤 기호를 통해 대상이 차곡차곡 비축해둔 사랑의 의미들을 부재중에 비로소 하나하나 바라보게 되고, 그것을 통해 무한히 사랑했고 사랑받았음을 알게된다고 할 수 있다.
⑦사유한다는 것은 그것은 그러므로 해석하는 것이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 상징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마주침의 우연성과 사유의 필연성 그것이다. 기호 속에 감싸여져 있으며, 사유되기 위해 의미 속에서 펼쳐진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들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들이다. 그 우연한 마주침이 사유의 재료, 그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은 우연성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책 넘기는 소리, 포크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 홍차와 함께 먹은 마들렌의 맛, 몸을 한쪽으로 귀우뚱 하게 했던 포석...등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우연한 마주침들이다. 그 우연한 마주침에서 과거의 어떤 시간을 떠올리고 그 기억을 매개로 미래로 넘어간다. 관념으로 떠돌던 영원, 불멸, 사랑, 희망...이런 유령같은 언어들이 자신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세계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과학과 철학에서 지성은 언제나 먼저 온다. 연역으로 어떤 사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이 나중에 오는 한에서 그리고 지성이 나중에 와야하는 한에서 기호는 지성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 기호는 자립적이고 훨씬 더 많이 비자립적으로 우리에게 사유를 강요한다. 우리가 사유하도록 강요받을 때에만 본질들은 사유에 붙잡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연한 사건 속에 있는 필연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사유하는 존재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3.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1-32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1-32)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라고 전하는 루카 15,1-32에서, 회개가 무엇이고 죄란 무엇인가하는 신학적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 글은 예수님 가까이로 모여드는 사람들과 예수님 주변에서 '저 사람'이라고 호칭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끌어당김의 법칙(기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루카 15장은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4-7/마태오18,12-14),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8-10),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11-32)가 나온다. 이 세가지 기쁨은 <잃음과 찾음-되찾음과 기쁨-하느님의 기쁨>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잃음과 되찾음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와 ⒞의 비유는 루카복음에만 있는 특수사료에 해당한다. 특히 루카복음 사가는 죄와 회개라는 주제를 다른 공관복음보다 더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회개하다>는 동사가 루카복음에 아홉 번, 사도행전에 다섯 번이 나올 정도로 루카복음 사가는 진정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회개는 중심부 담론에서 분리된 소외된 이들이 예수님 가까이로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상선벌악 혹은 인과응보에 초점이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비, 연민, 자유, 평화, 희망, 기쁨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루카 복음 15장의 청자가 바라사이파와 율법학자인 것을 감안한다면 루카 복음사가가 회개에 관한 비유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그들에게 들려주었다는 것은, 정작 회개할 당사자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기쁨에 대한 초대를 그들은 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까?
예수님 가까이로 모여드는 사람들과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이들의 면면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관계가 내장하고 있는 끌어당김의 두 가지 법칙을 바라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사랑이고 또 하나는 두려움이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1절)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2절)
Ⓐ의 끌어당김을 사랑의 끌어당김이라고 한다면 Ⓑ의 끌어당김은 죄책감이 바탕이 된 두려움의 끌어당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를 사랑(영원한)의 끌어당김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율법(유한한)의 끌어당김이리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영혼이 매개된 끌어당김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몸이나 물질의 끌어당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예수님의 끌어당김이라면 후자는 에고의 끌어당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끌어당김의 두 가지 측면을 바라보려는 것은, 우리 역시 사랑하거나 사랑을 등질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자는 의미에서이다.
특히 Ⓑ의 사람들을 성서에 나오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라고 예수님의 대척점에 있는 부류정도로 치부해버린다면 우리 자신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사랑에서 등지고 멀어진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의 기호를 결코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에 끌리고 있으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각성된다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찰라에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습관이다. 언제나 우리 자신을 시작 앞에 세우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뒷끝 작렬하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랑이 아니다. 자신의 유산을 모두 탕진한 작은 아들에게, 옷과 반지와 신발을 신겨 줄 수 있는 분이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라고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큰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신 분이다.
그렇다면 Ⓑ의 사람들은 왜 그들 중심에 하느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주애인>에 끌리지 못한 것일까?를 질문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없이 우리를 끌어당기지만, 하느님의 사랑인 우리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만큼 강하기에 하느님의 사랑에서 등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이 글은 헬렌 슈크만이 전한 이 문장에 의지해서 쓰게 되었다)
그렇다면, Ⓐ와 Ⓑ의 사람들이 내장하고 있는 그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기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인간이 자기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그는 어느 때, 어느 형식로써나 타인인 ‘너’에 위해 수락되어야 한다(요셉 라씽거)
Ⓔ인간은 무조건 수락되고 긍정되며 사랑받는 자로서 자신과 남들을 모든 상황과 모든 조건하에서 수락하고 긍정하며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한다.(W. 카스퍼)
Ⓖ하느님은 한없이 그대를 끌어당기지만, 하느님의 권능인 그대의 권능은 하느님의 권능만큼 강하기에 그대는 사랑을 등질 수 있다.(헬렌 슈크만)
요셉라씽거추기경. 카스퍼, 헬렌 슈크만은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그의 인간적 품위가 결정될 수 있음에 주목한다. 그것을 영성가들은 약한 이들의 에고를 지원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것은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다음에는 내가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는가에 의해 여전히 나와 타자의 품위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타자와 하늘을 연결한 빛을 판단으로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타자의 모순을 무조건 수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빛의 자녀>라는 사실, 그것 만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모순을 지원하지 말고 빛을 지원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타자를 바라보는 '비전의 선택'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인-사랑과 두려움이 만들어 진다고 할 수 있다.
루카 15,1-32으로 돌아외서,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1절)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2절)
우리가 알다시피 Ⓐ의 세리와 죄인이라고 특징지워진 사람들은 중심부담론에서 축출당한 사람들이다. 인간 존엄성을 타자에 의해 이미 판단받고 규정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약자다. 스스로의 존엄을 알 수 없기에 지킬 수도 없었던 이들이기에 약자다. 돈이나 건강, 명예가 없어 약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품위를 어디서 찾아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약자다. 타자에 의해 자기 존엄의 자리를 빼앗긴 이들이기에 약자다. 이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써 함께 먹고 마시며, 또 신으로써 그들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무조건적으로 수용되고 긍정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그들은 기적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 ‘가까이 몰려들었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늘이 그들만을 선택했다는 선민의식이 분리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한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질곡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과 율법주의가 만나면서 모세의 법에도 없는 율법들을 만들고, 지키면서 그들은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신의 개념을 유포한다. 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신의 본질적인 내용을 지우면서 신을 형식화하는, 그래서 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뭔가 제물을 바쳐야만 될 것 같은,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한없이 작은 신을 세상에 퍼뜨렸다. '두려운 하느님' 개념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사람을 성스러움과 비천함으로 나누게 된다.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들어갈 수 없는 사람까지 분류했다. 그래서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겼다. 신도 인간도 하향평준화되어 권능이 아닌 위력이나 권력의 신으로, 인류 역사에 집단무의식화 되다시피한 이 분리의 개념은 무신론을 조장하기에 넘치고 충분했다. 부처의 적은 불자고 예수의 적은 신자라는 말을증명했다. 그 저변에는 하느님을 팔아 자신들의 영욕을 달성하려는 보신주의와 물질주의가 놓여 있고, 죄인이라는 죄책감을 이용하여 약자와 분리의 벽을 쌓으면서, 그들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그들 자신의 생존의 '두려움'을 방어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랑도 열정도 없이 하느님의 이름과 성전을 점유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에고가 만들어 낸 두려움을 믿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주제로 돌아가서, 이천년전, 세리나 죄인들, 그리고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그들 앞을 지나가던 한 나자렛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이 마주침의 우연성에서 그들은 동시에 끌렸다고 할 수 있다. 다가간 사람도 투덜거리며 예수님 주변을 서성이던 그들 모두가 그분의 신적 아우라라 불리는 끌어당김의 법칙에 휘감겼다고 할 수 있다.
이 우연한 마주침은 그들에게 필연의 섭리에 해당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들에게 이 만남을 사유하도록 강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만남은 무엇인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는 너에게 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 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는 본 것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라고 선언하는 <저 분은 누구인가?>를 곰곰이 물었어야 했다. 그것이 펼쳐짐의 필연성이다. 한쪽은 그분 가까이, 그분을 더 알아 들으려고, 그분에게 두려움없이 다가갔다. 그분이 눈군지 알면 알수록 그들 자신이 누군지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것이 영원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라는 것도 모른채 그분에게 가까이 몰려들었 것이다. 그렇게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이 펼쳐졌다면, 다른 한쪽은 그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던 죄악으로 그 우연한 만남을 비극의 장으로 펼쳤다는 것이다.
[보충] 여기서 끌어당김의 법칙은 다른 말로 찰라의 법칙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가? 찰라다. 흔히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말한다. 그 마음먹기의 시간은 얼마나의 시간인가? 찰라다. 찰라가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간의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시간이 영원의 문을 연다. 어마어마한 기도를 해야지만 닿을 수 있는 축복이 아니다. 화살기도를 바치는 그 만큼의 시간일 것이다. 그걸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앞을 지나가는 찰라에 해당하는 우연의 기호들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은총과 축복의 초대라는 사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우연이 사랑인가? 두려움인가를 가던 길을 멈추고 찬찬히 바라보면 된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만남, 우연한 마주침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우연한 마주침이 지시하는 기호를 읽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섭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도착한 축복임을 알아 볼 수 있다. 그 섭리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 생의 모든 순간을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결정하게 하라>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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