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성 아우구스티노)

나뭇잎숨결 2022. 9. 7. 08:57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성 아우구스띠노)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을 위한 자유로

 

 

[연 중 제 23 (다 해) 2022. 9. 4. Luc. 14,25-33]

 

 

 

1.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심보선)

 

 

심보선의 「청춘」을 읽어본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우리는 모두 청춘에 끌린다.

 

심보선 시인의 「청춘」은 <~했을 때>의 반복을 통해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와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로 모아진다. 그때가 봄이었고, 청춘이었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사랑이 무엇인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 때가 청춘이지만, 그런데 그때가 오욕칠정과 마구 뒤섞인 질풍노도의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 시간의 아름다움을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데 있다. 청춘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체험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청춘은, 가장 본질적인 것을 향해, 어떤 계산도 하지 않고, 온 몸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사방으로 찢기어진 너무나 많은 자신을 감당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장 풍요로운 시간이면서 가장 가난한 자신을 맛보는 때가 청춘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데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풍요의 빈곤이 청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은 그 어떤 방어기제도 작동하지 않고, 질주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그때>가 푸르른 봄이고, <그때>가 일생에 단 한번뿐인 <청춘>이라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

 

청춘을 끌고가는 힘은 분명 자유다. 그러기에 청춘은 기존의 관습과 사물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행위는 분명 자유인데 그 자유는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는 무차별적 자유에 해당한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소설 제목처럼 말이다. 이 자유는 다시 자유에 구속 당하는 자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청춘에 끌릴까? 방향도 목적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파토스가 자유의 한계를 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으로부터 오는 모든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활짝 열어놓는 일일 것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 마음과 마음의 안테나가 있어/인간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나이와 상관없이)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네(사무엘울만,「청춘」)

 

그런데, 심보선 시인의 「청춘」 은 사무엘울만과는 달리 청춘의 또 다른 면을 바라보고 있다.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모아지는 청춘!  이는 청춘의 자유가 자유를 자유케 하지 못하게 하는 원심력만 지닌 자유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묻게 된다. 자유로우면서 그 자유에서조차 자유로워진 자유는 어떤 자유인가?

 

 

 

 

 

 

 

 

 

 

2. 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을때

 

 

세계가 오로지 자연으로만 존재한다면 이 세계에 <자유>가 있을 자리는 없다. 그러기에 <자유>는 이 자연세계의 법칙을 초월해 있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인간의 의지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실천적 행위는 이 <자유>를 바탕으로써만 가능하다. <자유>의 원인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그것은 예지적으로 직관한 선험적 원인에 가깝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규정받는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또한 <자유>의 원인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나아가, 이 세계에서 또 이 세계밖에서까지 아무런 제한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선하다고 볼 수 있다면,  존재하는 것들에 <선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민했던 이들 가운데 지난주에 살펴본 칸트를 생각해볼 수 있다. 흔히 칸트하면 정언명령으로 철저하게 자유를 윤리에 귀속시킨 것으로 절대론적 윤리주의자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 평가만큼 칸트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도 없을 것이다.

 

칸트 철학의 출발점이 <자유>라는 것,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것은 타율개념이 아니라 자율개념이라는 것이 칸트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선의지에 기반한 인간의 행위를 '신성하다'고 할 정도로 자유의지의 자율성을 주목한 철학자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원론』(1785)에서 정언명령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보편적 법칙의 법식'(Formula of Universal Law) :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그대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둘째로, '자연법칙의 법식'(Formula of the Law of Nature) : "그대 행위의 준칙이 그대의 의지를 통하여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듯이 행위하라"

 

셋째로, '목적 자체의 법식'(Formular of the End in Itself) :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넷째로, '자율의 법식'(Formula of Autonomy) : "보편적 법칙 수립적 의지로서의 모든 이성적 존재로서의 의지라는 이념"으로 이는 곧 '각각의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의지가 보편적 법칙을 자율적으로 수립하는 의지인 듯이 행위 하라

 

다섯째로, '목적의 왕국의 법식'(Formula of the Kingdom of Ends) : "의지가 자신의 준칙을 통해 동시에 자기 자신을 보편적 법칙을 수립하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의 이 다섯 가지의 정언명령은 『실천이성비판』(1788)에서 다시 두 가지로 축약한다.

 

너의 의식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렴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이 두 개의 정언명령은 <~하라>는 당위 명제의 형식으로 제시되지만, 그 내용은 <~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바로 <선의지>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선의지>는 이타주의나 대의, 혹은 공존을 위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다수에게 이롭기 때문에 <선의지>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지> 그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유의지에는 이미 선의지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자유와 인격의 관계를 동시에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이를 의지의 법칙에 대한 자유로운 복종의 형식은 모든 경향성에서, 이성에 의해 가해지는 불가피한 ‘강제’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무릇 그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의지>는 감성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실천적 강제'라고 본 것이다. <선의지>가 당위적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위는 강요된 행위이고, 그런 뜻에서 필연적이다. 또 이 강제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이성에 의한 <’자기강제‘>이므로, 이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기강제>의 규칙이기에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자기경제를  <자율>이라고 보았으며 인격은 이 자율의 힘에 기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즉 사물의 질서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거룩한 신처럼 충분히 신성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의 인격에서 사물의 질서를 뛰어넘는 <자기강제>의 자율성이야말로 인간에게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하라>는 당위명제 형식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선의지>는 자유로부터의 법칙 즉 자율적인 인격만이 선택할 수 있는 법칙이므로, 인간과 모든 이성적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의지가 그 자체로 존엄하기에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모두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실천행위를 규정하는 자유로운 선택은, 가장 기초적인 자율적 인격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은 모든 인간은 자율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바로 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율적으로 어떤 행위를 준수함으로써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이 된다.

 

칸트 철학에서 자유의지-선의지-자기강제-자율성-성스러움-존엄성-인격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반납할 정도로 즉 자기강제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우면서 그 자유에서조차 자유로워진 진정한 자유인라고 할 수 있다.

 

 

 

 

 

 

 

 

 

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 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고 전하는 루카 14,25-33의 청자는 누구인가?

 

아마도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본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현실적으로 배고프고 굶주린 이들이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현실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그들에게 있는 것마저 모두 버려야 된다는 것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멈춰서,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다. 마치 선물로 주어졌던 사람들과 우리 자신, 그리고 소유를 다시 회수하는 듯한 미워함과 버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J의 제자가 되는 길이라고 전하는 근본적인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지난주 복음에서 인간의 지위를 <영광스럽게> 하신 그분과의 관계를 다른 맥락에서 재정립하는 언명이라고 이해할 때만이 <미워하다, 짊어지고 뒤를 따르다, 버리다>는 동사가 지향하는 <버림과 취함>이라는 상반된 행위의 지향이 왜 제자가 갖추어야할 필요충분조건인가를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기왕에 주어진 것을 굳이 내려놓아야 하고, 기왕에 주어지지 않은 것을 또 굳이 짊어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을 그분과의 관계를 위해서 무엇을 바치는 봉헌과 제물의 의미뿐 아니라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한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지평이 어디까지인가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루카 14,25-33에서 모든 인연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소유로부터 즉,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는 메시지로 바라보려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누구든지~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세 번이나 반복되는 이 절대명제가 <그리스도의 제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임과 동시에 <왜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가 된 것과 제자가 되지 않은 삶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은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25)에서 저 군중 속에 한 사람으로 우리가 살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의 찬미가 그분께는 도움이 되지 않으나 우리에게는 도움이 되나이다” 라는 전례중의 기도문과 연결하여 생각해본다면,

 

미워하고 버리고, 짊어지고 뒤를 따르는 그 행위는 근본적인 관계론(존재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의 여러 측면 가운데 내가 자유로우니 너희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진정한 자유인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워하고(멀리하고) 버리는 행위는 분명 자유와 연결된 표현이다. 그런데 짊어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행위는 자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으로부터의 자유>와 <~을 위한 자유>로 나뉜다고 했을 때에만 Ⓐ, Ⓑ, Ⓒ에서 말하는 자유의 두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 Ⓑ, Ⓒ는 [1]과 [2]로 도식해 볼 수 있다.

 

 

[1] Ⓐ,Ⓒ (미워하고, 버리고)-->Ⓑ(짊어지고 뒤를 따르고)

[2] Ⓐ(존재하기)------->Ⓑ(행하기)------>Ⓒ소유하기

 

 

[1]의 도식은 인간이 지닌 자유의 두 속성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2]는 인간이 지닌 존재의 원리로부터 도출된 자유인의 초상에 관한 것이다. [1]과 [2]는 모두 자유에 관한 존재론적 관점이다.

 

 

[1]Ⓐ, Ⓒ(미워하고, 버리고)------->Ⓑ(짊어지고 뒤를 따르고)

[2]Ⓐ(존재하기)------->Ⓑ(행하기)------>Ⓒ소유하기

 

 

[1]에서 미워하고 버리는 행위가 짊어지고 뒤를 따르는 행위를 낳게하는 것이라면, 미워하고 버리는 행위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규정하는 존재론적 전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에서 먼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그 존재로부터 행함이 나올 때, 모든 소유로부터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제언에 해당한다.(이 삶의 패턴은 반복적으로 올린 패턴이다)

 

여기서 Ⓑ에서 말하는 짊어져야할 제(각자의)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 관건일 거 같다.

 

자유와 십자가의 관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의 실존을 감당하는 일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란 사랑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 구속은 고통과 수난과 죽음이라는 십자가의 1차적 의미를 넘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랑을 완성하려는 갈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워지면서 동시에 자유에 구속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스스로 바친 자유라는 점에서, <자기강제>라는 정언명제로 제시하고 인간이 <자기강제>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신성하다'고까지 바라보았다.

 

칼 라너, F. 뵈클레, M 뮬러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두 가지 속성에서 자유의지와 자기의지의 봉헌을 동시적인 은총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무엇을 버릴 수 있는 자유(Ⓐ, Ⓒ)와 무엇에 스스로 구속될 수 있는 자유(Ⓑ)를 동시에 지닌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 모든 유한한 인간에게 자기 결정의 법칙이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칼 러너, 영성신학논총)

 

칼러너는 인간에게 자유가 소여된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에게는 본성과 인격이 있기에 본성적으로는 무한히 자유롭지만, 인격적으로 구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선물로 받은 자유의지를 봉헌하는 행위가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인간은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부터의 자유와 완전한 사랑을 위한 자유가 있다.(F. 뵈클레, 기초윤리신학)

 

F. 뵈클레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자기표현을 모방한 것으로, 즉 창조적 모상을 갖고 있는 인간의 완전에 대한 갈망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에 머물지 않고, 인간은 구원의 관점에서 초자연적 모상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구현하는 자유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으로부터의 자유>와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갈망의 표현인 <~을 위한 자유>로 나누어 진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자유는 세계로부터의 간격에서 세계에로의 결단으로 이전하는 역사이며, 이 기본 결단으로부터 구체적 행동으로 이전하는 역사이다(M 뮬러, 철학소사전)

 

M 뮬러는 인간의 자유는 존재자 일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초월적 자유이자, 존재자 일반을 향하는 자발적 자유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자유에 속한다. 자유의 여정이란 분리와 비분리의 여정이라고 보고 있다. 내적인 자유만이 외적인 자유를 구가할 수 있으며, 내적이면서 동시에 외적으로 자유로워져야지만 자유에서조차 자유로워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두 자유는 실존의 터전으로서 세계를 향하는 결단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다고 보고 있다.

 

루카 14,25-33로 돌아가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존재하기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행하기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소유하기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모든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자유가 그 어떤 관계에 의해, 그 어떤 소유에 의해 규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사랑에 붙들린 존재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즉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는 이중의 자유를 산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25)에서 그들에게 제자가 되려면? 하고 조건명제로 제시됐던 Ⓐ, Ⓑ, Ⓒ는 사실 그들 자신도 모르는 진정한 결핍을 짚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미워하고 버림에 초점에 놓여 있지만, 실은 그들이 근본적인 결핍으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수띠누스 성인은 『고백록』에서 모든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성 아우구스티노)

 

모든 현실적인 결핍은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어 채워질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문제의 해결은 현실을 재배치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재배치의 키워드는 그분의 사랑이고,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인간은 자유의지로 자유의지를 봉헌할 정도로 즉 자기강제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우면서 그 자유에서조차 자유로워진 자유인이 바로 그분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Op. 43: Variation XVIII - [HD]

 

Rachmaninov -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 18th Var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