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행복한 꿈은, 꿈이라서가 아니라 행복하기에 실현된다(헬렌 슈크만)

나뭇잎숨결 2022. 9. 20. 18:01

 

 

 

 

행복한 꿈은, 꿈이라서가 아니라 행복하기에 실현된다(헬렌 슈크만)

- Happy dreams come true, not because they are dreams, but only because they are happy.

 

 

[연 중 제 25 (다 해) 2022. 9. 18. Luc. 16,1-13 ]

 

 

 

 

1. 한용운, 「꿈이라면」 & 황인숙, 「꿈」

 

 

한용운의 「꿈이라면」을 다시 읽어본다.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출세의 해탈(解脫)도 꿈입니다./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

 

한용운의 「꿈이라면」은 사랑의 속박, 출세의 해탈, 웃음과 눈물, 무심의 광명이 한바탕 꿈이었다면? 사람은 실재하지도 않는 꿈을 쫒아 한평생을 허둥거리며 산 것일까? 라고 술회하는 화자는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일까? 를 묻는 호접지몽(장주지몽)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행에서, 그래, 좋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치자!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한 평생을 걸었던 일체만법이 한바탕 꿈이었다고 치자! 그럴지라도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다'는 고백은, 모든 것이 꿈처럼, 혹은 이슬처럼 사라져도 마지막 남을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랑이 속박인줄만 알았는데, 그 속박이 유일한 해방이었음을 바라보게 되고, 사랑이 속박이며 동시에 해방인 한에서 사랑은 불멸의 꿈일 수 있다는. 그 꿈만이 실재하는 행복한 꿈이라고 할 수 있다는,

 

아마도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라고 쓸 때, 시인 한용운은 무척 행복한 상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이 꾼 꿈 가운데 가장 행복한 꿈이었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황인숙의 「꿈」을 읽어본다.

 

가끔 네 꿈을 꾼다./전에는 꿈이라도/꿈인 줄 모르겠더니/이제는 너를 보면/, 꿈이로구나,/알아챈다.

 

황인숙의 「꿈」은 그 어떤 꿈을 꾸어도 행복하지 않은 꿈이다. 꿈 속에서 아무리 행복할지라도 그것은 꿈이기에, 또 행복하지 않은 꿈이라면 꿈마저 이기에, 그 모두는 사랑하는 이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는 것이기에 그 꿈은 행복한 꿈이 결코 아니다. 그걸 알기에 꿈없는 잠을 원하기도 한다.

 

한용운의 「꿈이라면」 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다. 반면, 황인숙의 「꿈」은 눈을 감아야 꿀 수 있는 꿈이다. 전자는 명사가 된 꿈이라면 후자는 동사의 상태에 머문 꿈이다.

 

그런데, 눈을 뜨든 눈을 감든 꿈을 꾼다는 것은 부재와 현존, 실재와 환상, 억압과 전치가 무엇인가를 바라보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추정케 하는 즉, 내면으로 돌아가는 통로이자 밖에서 서성이게 만드는 어떤 심리기제라고 볼 수도 있다.

 

(젊은이들로부터 받은 질문 가운데 가장 놀랍고 답할 수 없는 것이 “제가 이 담에 무엇을 꿈꾸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이었다. 도무지 무엇을 하고 싶다는 꿈이 없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었다. 꿈도 없이 열심히 살 수 있는 것이 이 시대 욕망의 구조인 것일까?)

 

 

 

 

 

  

 

 

 

 

 

 

 

 

 

 

2.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자크 라캉)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일까? 라고 질문 하는  한, 그 사람은 행복하다.

 

어떤 꿈이 실현됐느냐 혹은 어떤 꿈은 실현되지 않았느냐에 따라 실재와 비실재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기쁨과 행복과 두려움과 증오와 분노는 무의식적인 실재와 비실재로부터 기인된다고 바라본 이들이 있다.

 

프로이트는 꿈과 같은 무의식에서, 라캉은 타자의 욕망에서, 지젝은 물신주의라는 환상에서 비실재의 근원을 바라본 바 있다.

 

①전치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적 갈등이 있는데 그 대상이 갈등을 표출할 대상이 아닐 때 감정을 다른 대상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이를 강박증이라 부른다.(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②억압은 받아들일 수 없는 소망이나 욕망 욕구 환상을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히스테리증상에서 두르러진다.(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프로이트는 <의식의 담론에는 빈틈이 많다>는 것으로부터 무의식을 추구한다. 의식의 담론은 첫 번째 텍스트가 지워지고 그 위에 두 번째 텍스트 위에 쓰는 원고와 같다고 본 것이다. 꿈은 바로 두 번째 쓴 의식의 담론이지만,무의식이 어떻게 의식과 겹쳐서 드러나는지를 가늠하는 진단키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꿈은 '전치'로 혹은 '억압'으로 나타날지라도 그것은 무의식적 소망의 간접적인 충족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타자나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꾸는 꿈은 현실 속에서 우리의 억압된 혹은 전치된 무의식의 표출로 바라보고 있다. 무의식의 형성물들이 항상 실제로 말하고 있는 바와 다른 의미로 나타나는 이유에 대한 해석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전환을 일으키는 두 가지 주요한 기제가 '전치와 압축'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주의자를 자처하는 라캉은 '전치와 압축'으로 드러나는 무의식적 표출이 사실은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바라본다. '나'라는 고유한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조차 실은 타자의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타자는 오늘 저 밖에서 걸어가는 나 이외의 그 누구들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끌어가는 그 무엇(욕망)까지를 통칭하는 것이다. 

 

③주체의 사라짐은 욕망의 부유속에서 나타난다. 주체가 요구의 기표 속에서 그리고 환상의 고착 속에서 소멸하기 때문이다.(라캉, 『에크리』)

 

④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증상, 꿈 실수, 농담의 구조는 모두 동일하다. 압축과 전치라는 두 가지 동일한 구성법칙이 이것들에 적용한다.(라캉, 『에크리』)

 

라깡은 무의식은 주체의 담론이 아니라 <타자의 담론>이라는 것 때문에 상징 질서는 결핍을 안고 있고, 이런 결핍 주위에서 이 세계를 끌어가는 상징질서가 구조화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결핍을 지닌 큰 타자(국가나 세계, 이데올로기, 욕망의 구조, 상징질서) 역시 완결된 전체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이를 '큰 타자의 욕망'이라 부를 수 있는데, 큰 타자 역시 나름대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부단히 충족을 모색한다. 이 점 때문에 라깡은 다시 "타자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타자윤리학을 말하는 것은 도덕적인 이상주의자의 논리이지 욕망을 갖고 있는 인간 이해. 세계 이해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주체도 없고 대타자도 없는 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에서 욕망의 전치나 억압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라캉은 바라본 것이다.

 

라캉주의자를 자처하는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타자는 현존하지 않는다." 라는 욕망이론을 자본주의의 물신화과정에서 왜 상품이나 화폐, 재물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⑤이런 화폐의 물질적 성격에 따른 신비화는 화폐가 숭고한 대상이고, 이런 화폐의 다른 몸, 비물질적 신체성, '신체 안에 있는 신체'를 믿는 것이다. 교환행위를 하는 동안 개인들의 행위에는 어떤 '오인'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오인이 교환행위를 유효하게 하는 필수조건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⑥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차원이 사회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에 있다고 본다. '개인들은 그들이 행위하면서 착각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위한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라캉 주의를 자처하는 슬라보예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종합해 이데올로기와 욕망마저도 환상을 통해 숭고한 대상으로 숭배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초상으로 진단한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판’과 ‘생산’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대전환'이라고 제언하기도 한다.

 

지젝은 어떻게 자본의 물신성이 물신주의가 되는 지에 대해, 어떤 상품이 시장에서 자본화되기 위해 그 상품을 생산한 상품 형식의 '무의식'은 어떤 구조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상품 분석에 원용된 물신성(物神性:Fetischismus) 은 프로이트가 도착증의 한 형식으로 본 물신주의(Fetischismus)와 연결시킨다.

 

세계, 국가, 사회라는 큰 타자가 환상을 구축하는 방법에는 큰 타자가 지닌 결핍과 은폐에서 물신주의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지젝은 라깡 이론의 근본적 차원이 주체의 분열보다는 큰 타자의 분열, 즉 큰 타자(국가, 세계,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의 근본적인 충족불가능성에 있다고 바라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만약 큰 타자에 이러한 결핍이 없었다면 세계에서 추구하는 욕망들은 완결된 구조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면 꽉 짜인 큰 타자 안에 있는 주체는 소외를 벗어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큰 타자의 결핍이 주체에게 숨 쉴 공간을 주고 전면적인 소외를 피하게 했다고 바라본다. 그 소외의 피신처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물신주의라는 것이다.

 

지젝은 예컨대, (1)나는 화폐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대상임을 안다. (2)하지만 화폐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특수한 실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구조화 한다는 것이다. 자기 인식(화폐는 단지 물질일 뿐)을 뒤집어 집단적인 매커니즘(재물은 영원하다)을 구축하는데 동조한다는 것이다.

 

돈을 좋아하는 특정한 일부, 재물욕이 있는 사람들만 재물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가 재물을 추종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는 바뀌어도 재벌은 남듯, 재물을 숭배하지 말라고 말하는 종교조차도 재물의 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칼뱅주의, 예정설, 소명의식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어떻게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는지~)

 

그런 맥락에서 지젝은 환상이 흔히 오해하듯이 단순히 헛된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환상은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이 어떻게, 무엇을 욕망할 지를 가르친다. 그래서 개인적 환상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상도 나름의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에게 완전한 사회를 추구하려면 어떤 욕망의 좌표를 가져야 하고, 무엇을 욕망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를 알려준다고 본 것이다.

 

그것이 물신성이 물신주의가 되는 필연적 구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물신주의가 지닌 무의식이란, 국가가 흔들려도 자본은 살아남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변치 않는 ‘특수한 실체’라고 본 것이다. 만약, 러시아와 우쿠라이나의 전쟁이 종식된다면, 그것은 생명이라는 휴머니즘 때문이  아니라 자국의 주식에 투자한 외국 자본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는 풍문이 공공연한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사람들이 재물을 미친 듯이 추구하는 이유는 자본의 강한 생존성과 자신의 생명성을 무의식적으로 대응시킨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살아서 목격한 자기보존의 불변의 법칙은 자본이자 재물이었다는 것이다.

 

 

 

 

 

 

 

 

 

 

3.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13

 

 

 

이런 세계사적 자본과 재물의 흐름 속에서,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고 전하는 루카 16,1-13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9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전하는 루카 16,1-13의 청자는 제자들이지만, 이어지는 14절과 15절과 연결하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가 청자였다고 할 수 있다.

 

루카 16,1-13에 대한 묵상은 세 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돈이 나쁘기 때문에 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아님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님 재물은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인가? 

 

루카 16,1-13은 섬김에 대한 태도(Ⓐ, Ⓑ, Ⓒ)와 무엇을 섬겨야 하는지(Ⓓ), 섬김의 본질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다.(여기서 섬김의 사전적 의미는 생략한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 Ⓒ는 재물을 얻기 위해서 혹은 재물을 관리하기 위해서 세상의 자녀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영리하고 성실하게 재물을 모고 관리하는지에 대해, 약은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성서해설서들은 일괄적으로 -유한한 위치나 재물을 얻기 위해서도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해 투신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보다 더 철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어적 설의법으로 바라본다. 아마도 이 부분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군 즉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태도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재물을 모으고 관리하는 그 이상의 철저성이 아니라면 우리 믿음 역시 두 주인을 섬기는 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에서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에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섬김이 무엇인가’에 대해 단언명제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예수님 스스로 하느님과 재물을 병렬관계로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하느님과 재물’은 마치 대척점이나 병렬관계가 결코 아님에도 병렬관계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이천년전에 이미 '물신주의'가 공고히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물은 분명 수단인데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루카복음사가는 부자와 빈자, 소유와 포기의 문제에 대해 다른 공관복음보다 반복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6장, 9장, 12장, 14장, 16장, 18장, 19장, 21장)

 

루카 복음사가의 재물관은 크게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재물은 그 자체로 물질이라는 한계효용법칙이 적용되므로 누군가의 물질적 풍요는 누군가의 생명을 담보하고 있다는(장 지글러의 유엔보고서와 같은 맥락)실존적 관점이 그 하나다.

 

또 재물은 유한한 것이므로 영원한 생명에 합류할 수 없다는 영적-존재론적 관점이 다른 하나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 16,1-13은 재물이 섬김의 대상인 신과 어떻게 대척점에 놓이게 되었는가에 대해 실존적, 영적-존재론적 총체적인 성찰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성찰은 Ⓐ, Ⓑ, Ⓒ에서 거론된 약은 청지기 이상의 철저함을 요구하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돈이 나쁘기 때문에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닌 재물관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존재론적 질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조건인 <몸과 마음과 영혼>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재물이나 물질이 우리의 중심이라면, 몸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타자는 나에게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자연히 두 번째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물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순례를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삼중의 존재로 하고 있다. 재물에 대한 물신주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우리 자신의 어떤 분열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의 논리, 물질의 논리, 즉 감각의 논리로 하느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이라는, 물질이라는, 형태적 감각은 대상의 전체적인 국면을 파악하기엔 한계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을 우리의 중심점에서 거둘 때, <우리의 바깥에는 우리가 추구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후, 토마스 사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철저하게 몸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려는 토마스 사도와 육체를 떠나 부활의 상태인 예수님과의 대화는 오늘, 우리의 재물관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 19-31)

 

부활2주 복음에서 매 해 묵상하는 토마스 사도의 부활체험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분리로는 부활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사랑을 제한적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몸은 마음이 부여한 특성인 보편적인 소통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반면, 마음은 한계가 없고 마음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마음은 어떤 에너지의 무한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은 무한히 그 한계를 정하지 않고 확장될 수도 있고, 반대로 마음은 우리 자신을 몸으로 축소시킬 수도 있다. 자유의지의 실현은 바로 우리 마음이 수행한다. 

 

마음이 몸을 초월해 영혼으로 무한히 확장될 때, 우리는 자신 너머로 이동되는 무한한 자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때 내가 누군지, 이 세계는 무엇인지. 완벽하게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이때, 두려움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순교자들의 평온함) 두려움은 실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분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만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때, 몸을 초월한 그 무언가와 우리가 하나가 되었음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유언, <나는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그 현존체험, 완벽하게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영적 체험은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체험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분열이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당연하고도 자명하게 <하나>라고  바라보게 된다. 타자와 무엇을 좀 나눴다고 생색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타자는 내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다음주 '부자와 라자로의 죽음에서 타자성'을 논하면서 보충하기로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과 재물은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빵 없어도 살수 없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대전환을 하라는 것이다.  어떤 은총중에 우리가 살고 있는가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첫번째 유혹 체험이 바로 우리 실존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재물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슬라보예 지젝이 바라본 대로 현실의 결핍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게 해준다. 또 대타자인 국가가 사라져도 재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기도 한다. 지구 종말까지 남아 있을 것이 재물이기에 그렇다. 종교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여기서, 세상의 재물관과 예수님의 재물관의 낙차인 '목적전치현상'이 나타난다.

 

재물은 여타의 축복처럼 하늘이 준 축복임에 분명하다. 단연코 재물 그 자체가 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재물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장애처럼 진술되는 이유는 1차적으로 재물이 타자와의 분리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나라는 재물 뿐 아니라 그 어떤 형체를 가진 것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3-21)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마태오19, 23-30)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재물 앞에서 신포도의 원리를 적용하면 안된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재물이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은 좋은 것이다. 장미꽃 만큼 좋은 것이다. 

 

그럼에도, 재물은 우리 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은 삶의 목적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돈을 얻으려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치열하다보면 그것이 전부가 되고, 그것을 내려놓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재물을 섬기게 된다. 목적전치현상이 나타난다.)

 

재물이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는 사실을 바라볼 때, Ⓕ와 Ⓖ는 부나 부자에 대한 단죄나 심판이 아니라 은총과 축복에의 초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부는 여타의 축복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준 축복에 해당한다. 그러기에, 부자에게, 받은 축복을 확장하라는, 축복을 재앙으로 만들지 말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o oblige)’ 정신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축복을 확장하는데 행복하게 동참하라는 것이다.

 

재물은 그 자체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적 신분을 격상시겼다. 따라서 부와 큰 재물을 소유한 이들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공공선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구상의 반 이상이 꿂주리거나 죽어가는 현실을 나하고는 상관없는 그들의 타고난 운명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의무는 생명이 준 정언명령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다음주 부자와 라자로의 죽음에서 묵상 연결)

 

그런 맥락에서 루카 16,1-13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꿈궈야 하는 꿈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헬렌 슈크만은 행복한 꿈이라고 전한다.

 

행복한 꿈은, 꿈이라서가 아니라 행복하기에 실현된다(헬렌 슈크만)

 

그 꿈은 행복하므로 사랑의 꿈임에 틀림없다. 행복한 꿈이 전하는 메시지는,  수태고지 앞에서 마리아의 네!,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소서!>일 것이다. 내 뜻대로 살아서 일시적으로 충족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다시 배고픈 허기였고, 목마른 갈증이었고, 끝모를 심연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영원한 충족을 갈망하라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하늘의 뜻인지, 세상의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늘의 뜻은 수단과 목적의 일치로부터 온다는 데서 그를 알 수 있다.

 

사랑은, 사랑이 목적이고, 또한 그 수단 역시 사랑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Ennio Morricone - The Mission Main Theme (Morricone Conducts Morric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