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무게, 자족적 실체에 머물러 있는 ‘코나투스적’ 존재인가?
‘부스러기-남은조각’에 의존해 있는 ‘관계론적’ 존재인가?
- Is it the ‘conatus’ that remains in the weight of being, the self-suffici
Is it the ‘relational’ that depends on the ‘crumb-remaining fragment’?
[연 중 제 26일 (다 해) 2022. 9. 25. Luc. 16,19-31 ]
1.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복효근)
복효근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을 읽어본다.
건기가 닥쳐오자/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복효근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은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로 모아지는, 인-파이터의 시다.
이를, 누군가는 내가 죽어야 네가 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것을, 불멸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도킨스)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행위를, 동양에서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요, 자연무심(自然無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의 사진 꽃무릇에서 보여주듯, 내가 죽어야 네가 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것, 그것이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을 딛고 사는 것. 삶이란 끊임 없이 누군가의 죽음에 빚져야 하는 것. 생명은 그렇게 역설적인 것. 그것이 복효근이 보여주는 자연이고, 자연으로 보여주는 인간세계의 한 단면이다.
파블로 피카소, <기타 치는 눈먼 노인>, 1903년, 시카고현대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소장
2. 막연하게 ‘나는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레비나스)
그렇다면, '내가 죽어야 네가 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비정한 생명의 법칙 속에,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덕분에 이타적 행위를 하는 그 역설적인 '나'는 누구인가? 또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언제 내가 누군지, 나를 확실히 알게 되는가? 윤리적 혹은 미학적으로 타인에 의해 평가되고 규정되는 내가 아니라 순수하게 혹은 막연하게 ‘있음’의 사건으로서 존재하는 '나'를 언제 '나'는 알게 되는가? '나' 홀로 '나'를 알게 될 수 있을까?
나로써 나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반드시 타자를 통해 나를 확인하는 사유의 전통을 인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미학이라 부르기도 하고, 철학이라 부르기도 했던 이들의 관계론을 들어보기로 한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론으로부터 시작한다. 타자는 나에게 미학적 존재인가? 라는 질문을 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이가 롤랑바르트이다.
①근사해(adorable) "그 사람의 전부가 미학적인 영상을 산출한다.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사실에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선택한 나 자신을 찬미한다. / "부재(absence)"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이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바르트는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바르트에게 너와 나는, 미학적 관계에 해당한다. 내 욕망을 욕망 그 자체로 옮기기 위해서는, 어느 섬광 같은 순간에 그 사람을 일종의 무기력한, 박제된 사물로 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의 소중한 관계의 구조이며, 나는 그이 혹은 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바라본다. 철저하게 '나'라는 주체중심적인 관계론이다.
바르트와는 다른 시각, 관계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연구자라고 자처하는 알랭 핑겔크로트, 인간의 현실은 이성이나 지성. 혹은 미학적 사건이 아니라고 본다. 나는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고 타인과의 만남에서, 결코 동일자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얼굴에서, 그 해명할 수 없는 출현에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타인과 독립변수가 아니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불안한 존재로 보고 있다. 즉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족적 실체일 수 없기 때문에, 그 불안을 감수하면서 사랑에 뛰어든다고 본 것이다.
그는 『사랑의 지혜』에서,
②한없는 도주, 타자의 끝없는 도망을 저지할 수 없는 곳에서만 사랑은 존재한다. 사랑의 감정이란 무엇인가? 항상 당신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으로부터 막상 당신은 도망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밖에도 없고, 안에도 없는 얼굴, 가둘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얼굴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알랭 핑겔크로트, 『사랑의 지혜』)
핑켈크로트가 바라보는 타자론은 타자 중심의 일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을 바치는 대상보다 우위에 서는 일이 결코 없다. 타자는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다. 사랑받는 얼굴은 사랑할 때 우리 앞에, 우리가 원하는 곳에 없다. 이 결여야말로 타자성이 주는 ‘경이’로움이다. 또 타자는 거기에 있어도 언제나 이웃인 채로 있고, 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늘 불안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에서 진실로 휴식이 없다.
타자윤리학 하면 떠오르는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이를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왜 그에게 철학은 충격이고 망설임이었을까? 레비나스는 철학이든, 사랑이든 타자의 얼굴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자는 미래다,라는 명제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얼굴론>을 통해 ‘존재의 무게’가 무엇인지 평생 추구했던 철학자다.
레바나스의 주 저서, ③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④ 『시간과 타자』(1947), ⑤ 『전체성과 무한』(1961), ⑥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1974), ⑦ 『윤리와 무한』(1982)은,
레비나스는 사람은 어떻게 자족적 실체인 '코나투스'의 상태에 도달하고, 동시에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질문한다. 즉 어떻게 나는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타자를 내 존재의 무게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고민했던 철학자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철학의 극복을 통해 ‘나’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라본다. ‘나’란 막연하게 ‘있다’는 사실이자, 사건이므로 <나>는 나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그의 타자론은 시작된다.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나-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 <유한자의 존재-홀로서기-고독의 물질성-코나투스- 빛의 소환-고통과 죽음-타자의 소환-다원주의-초월>등을 통해 타자윤리학이 지향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다리를 놓고 있다.
③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41)빛은 플라톤 이래 모든 존재의 조건이다(76)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87)있음이 만들어 내는 가벼운 소리 그것이 공포다(97)익명적인 있음 속에서 주체는 스로를 확립한다.(『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이렇게 나의 있음이 공고히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홀로서기이자, 고독의 물질성이다. 내가 나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서양 철학의 전통인 사유가 아니라 경제가 기반이 된 자족적 실체 때문이고, 그것을 <코나투스적 존재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는 <향유적 무아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자와 얽히지 않는 깔끔한 홀로서기의 존재론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하고, 자신의 집을 짓게 된다. 그것이 노동이자 소유를 정초하는 집이기 때문에, 집이 거둬들이고 보관할 수 있는 이동 가능한 것들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레비나스에게 집은 소유물은 아니다. 집이 소유되는 것은, 집이 이미 그 소유자를 환대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집의 본질적 내면성으로, 모든 정주자에 앞서 그 집에 정주하는 정주자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자로, 맞아들이는 자 그 자체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향유적 존재 안에는 환대적 존재가 자리한다고 보았다.
④ 존재의 무게(...)아픔과 괴로움과 고통 속서 우리는 고독의 비극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를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이 결정적 요소는 향유의 무아경으로을 통해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통꽈 죽음은 타자의 현현과 마찬가지로 계산할 수 없는 미래다. 타자는 타자라로써 높음과 비천함에 스스로 처해 있다. (『시간과 타자』,1947)
그런데 인간은 나라는 존재의 무게, 빛만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 홀로 존재하기 위해 자족적 실체의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유한한 자본과의 투쟁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향유적 무아경에서 빛만을 초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명제로 정식화한다. 이로써,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투쟁 속에 살게 되고,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무기력, 무력함, 불가항력의 환경 앞에 자신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향유의 존재론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환대로써의 존재론이 표면화 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된다. 타자와 고통과 죽음은 그 전모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⑤다원론은 타자의 근본적 타자성을 전제한다. 이 타자성은 내가 단순히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떠올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나의 에고이즘으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마주하는 타자성이다. (『전체성과 무한』, 1961)
그런데 타자는 우리는 <하나다>로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는 나와는 다른 얼굴을 지닌 존재, 알 수 없는 신비처럼 마주한다. 더욱이 타자성은 나에게 주인과 하인의 관계, 섬김의 관계를 요구한다. 자신을 돌볼 책임을 요구한다. 타인의 타자성은 그에게 있지, 나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타자성은 스스로를 계시한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나와 타자의 비교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내가 타인의 타자성에 접근하는 것은 내가 그와 함께 유지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해서지, 나와 타자라는 항들을 반성하기 위해 이 관계를 떠남으로써가 아니다.
⑥내 책임에 명해졌지만 내가 놓친, 잘못한 그-자신의 흔적, 그의 죽을 수밖에 없음이 내 책임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이 내 죄인 듯한 그의 흔적?-?이것이 얼굴이다. 얼굴은 직관적 지향의 올곧음에 주어진 이미지의 직접성보다 더 팽팽한 무시원적 직접성이다. 근접성 속에서 절대적인 타자, 즉 “내가 배지도 낳지도 않은” 이방인인 그를 나는 이미 두 팔로 안은 셈이다. ( 『존재와 다르게 본질 저 편으로』, 1974)
여기서 타자의 얼굴이 왜 낯선지? 그것이 무엇인가가 떠오른다. 레비나스의 사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얼굴은 눈 색깔, 코의 형태, 뺨의 불그스레함 따위가 아니라 신의 말이 울려 퍼지는 방식으로의 얼굴이다. 신(무한)의 말로 격상되는 얼굴과의 관계는 초상화와 같은 조형적 형태가 아니라 처음에 타인이 나와 무슨 관계인지를 묻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이고, 절대적으로 약하고, 벌거벗은 것과의 관계이며,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 것과의 관계다. 양심을 건드리는 관계이며, 정의를 요구하는 관계이다.
⑦윤리는 자아를 통한 자아의 주권의 자리 없음에서, 가증스러운 자아의 양태에서 의미하지만 또한 어쩌면 영혼의 정신성 그 자체, 그리고 확실히 존재의 의미 곧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라는 존재의 부름에 대한 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리는 무조건적이고 심지어 논리적으로 분간할 수 없는 동일성의 절정 곧 모든 기준 너머에 있는 자율의 절정에서 나로 불리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적인 동일성의 절정에서 또한 자기가 가증스러운 자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동일성의 애매성을 통해 의미한다.”(『윤리와 무한』, 1982)
그렇기에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윤리란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인간성”이고 “인간이 자기보다 타자에게 우선권을 줄 가능성”이다. 예컨대, 성서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이 유지한 입장, 즉 나는 나이고 그는 그이다, 라는 존재론적 분리에 결핍된 것이 바로 윤리다. 레비나스는 윤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 윤리 또는 윤리적 관계가 레비나스는 지향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지식과 지배와 함께 정립되는 존재 안에서의 정립의 정의(justice) 그 자체인 지향적 의식 대신에 비지향적 의식, 즉 처음부터 타자의 얼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을 경험한다. 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의식이 바로 '내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 속에서 나의 <존재할 권리>를 책임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너를 섬기면서 내가 누군지 알게되는 것!
여기서 무한이란 개념이 나온다. 무한의 관념은 타자와 관련한 동일자의 분리를 전제한다. 그러기에 타자와의 평화가 모든 것에 앞선 나의 일이 된다. 네가 평화롭지 않으면 나는 무조건 평화롭지 않다. 네가 평화로울 때만 너를 떠날 수 있다. 이별을 허락하지 않는 관계, 무관심하지-않음, 말함, 책임, 다가감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자, 종속이 나의 해방이다. 그러기에 내가타자 앞에 출현하는 방식은 '출두'다. 나는 격변화할 수 없는 '소환의 수동성' 속에 그냥 나를 위치시킨다. 이것이 나 자신이다.
타자에 대해 나는 책임이 있고, 이 타자 앞에 나는 책임으로 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타인은 이렇게 나를 강박하는 이웃이며, 이미 얼굴이며, 비교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유일한 얼굴이자, 다른 얼굴들과 관계하는 얼굴, 정확히는 정의에 대한 염려 속에서 가시적인 얼굴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레비나스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 신-인간 사상은 신의 낮아짐, 곧 “가느다란 침묵의 목소리처럼 자기의 비천함에서 나타나는 진리의 관념, 곧 박해받은 진리의 관념”으로서 “초월의 가능한 유일한 형태”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신은 얼굴과 결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은 동화할 수 없는 타자성, 절대 차이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지나간 흔적이다. 그 흔적은 나의 이웃의 얼굴에서의 신의 근접성이다. 둘째, 신-인간 사상은 창조주의 피조물로의 실체변화로서 동일성의 원리를 훼손하는데 어느 정도 타자들을 위한 대속과 속죄, 인간의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내 안에 시작하는 존재 안에서의 이 절정―‘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는’ 존재의 전복―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 타자론에서 사랑과 정의, 자비는 무엇인가. 얼굴과 유일한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구성인 정의는 사랑에서 나오며, 정의와 자비는 낯설어 보이지만 분리할 수 없고 동시적이다. 정의는 자비가 없다면 변질되고 자비는 정의가 없다면 불가능하게 된다. 사랑과 정의, 자비는 동시에 출몰하는 타자론이다. 레비나스는 구체적으로 경제 정의의 활동이 정신적 존재의 서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신적 존재를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낯선 얼굴의 타자론을 전제로 한 레비나스의 사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찬사와 비난에 모두 열려 있다.
3.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19-31
루카 16,19-31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라고 전하는 루카 16,19-31을 통해,
부자(유산자)와 라자로(무산자)가 단지 유물론적 관점에서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누린 것. 혹은 누리지 못한 것 때문에 선과 악 혹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 것으로 바라볼 것인지?
(만약, 부는 나쁜 것이요, 가난은 좋은 것이라는 단순 대응은, 창조 자체를 뒤집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면 로마교황청을 비롯해 각국의 종교시설, 명동성당을 필두로 한국의 모든 성당, 교회건물, 사찰 등은 유목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루카 복음사가가 다른 공관복음과는 다른,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내세관(위격적 내세관)과도 다른. 상선벌악의 불교적 인과응보론의 내세관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더 깊이 성찰해야 할 것 같다.
즉, 루카 16,19-31은 자비와 연민의 근원이 무엇인지? 타자와의 근본적인 관계론은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선천적인 본성으로 인간은 타자에게 측은지심을 가질 정도로 그렇게 자비로운 존재인가? 자비는 본성의 영역인가? 하는 점이다.
두 개의 질문을 통해 먼저, 부자와 라자로를 개별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은 개별자가 아니라 우리 안의 두 얼굴, 어떤 상태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길을 따라가 본다.
질문1. 이름을 갖지 못한 익명의 부자와 이름을 가진 라자로의 근본적인 실존의 ‘거리’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25절)
질문2. 루카복음 사가의 인과응보의 내세관을 통해 인간의 개별적인 운명까지 좌우하는 타자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26절)
루카 16,19-31은 부자와 라자로는 삶과 죽음으로 나누어지면서 그 상황이 반전된다. 살아서는 타자가 나에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부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 불길로 상징되는 고통에 직면하는 순간, <자비, 경고, 회개>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자비, 경고, 회개>는 사후적 용어가 아니라, 현세적인 관계론에서 나은 은총의 상태로 루카 복음 사가는 바라보고 있다.
루카 16,19-31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삶Ⓐ+Ⓑ---------------->죽음Ⓒ(Ⓓ+Ⓔ+Ⓕ)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19절)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20절)
Ⓐ의 부자는 레비나스가 바라본 대로 향유적, 무아경의 상태에 있는 자족적인 존재다.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에서 향유적 무아경의 상태에 부자가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자는 빛, 밝음, 아름다움 등 자기 통제가 가능한 상태다. 대문 앞에 누워있는 라자로에게 한조각의 부스러기 조차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자기에게 취해 있는 상태다. 인색함의 차원을 넘어서 도취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호화롭게' 라는 것에서 부자는 물질과 연결된 경제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레비나스가 바라본 대로 “경제적인 존재론은 언제나 미학적이고, ‘스스로의 존재 안에 머무르려’는 코나투수적 성격을 지닌다”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의 라자로는 자신의 생명이 타자(부자)에 의해 사활이 걸린 의존적으로 연결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홀로서기를 하지 못한 존재, ‘부스러기’ 혹은 '남은 조각'(Ⓖ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광주리가 되었다. 루카9, 17)에 의존해 있는 상태다. 풍요로움의 상태에 있는 타자에게 의존해 있는 라자로, 누군가 먹고 남은 부스러기나 그들이 남긴 조각에 의존한 생명 - 최소생존의 법칙, 밥의 존재론이다. 더욱이 개들이 그의 상처를 핥았다는 것에서 그는 완벽한 가난,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부자와 라자로는 선망과 혐오, 아름다움과 추함의 양 극단의 존재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라자로가 부자집 대문 앞에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기본적인 생존권 조차 방어할 수 없는 의존적인 상태라는 것을 거듭 확인 할 수 있다.
부자는 외적으로 아름다움의 상태에 있다면 라자로는 추함의 상태에 있다. 본성적으로 ‘있다’는 상태에서 바라본다면, 부자는 자신의 밝음에 취해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오직 밝음을 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코나투스적 존재론이다. 또한 인간은 자기안으로 돌아가려는 존재이지, 밖으로 나오려는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직 고독의 물질성에 함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부자로 상징되는 익명적 존재는 자족적 실체에 머무르려는 코나투스적 존재인가? 아님 라자로는 온갖 추함과 가난의 집합, 타자로써만 가능한 생명, 부스러기적 관계론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루카 복음사가가 상선벌악의 내세관을 소환했다고 할 수 있다. 기득권의 내세관으로 꿈속에 있는 기득권을 깨웠다고 할 수 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26절)
따라서,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란, 부와 가난이라는 생존조건을 감싸는 질문으로, 그들의 생존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 생존 조건이 내장하고 있는 유아론인가? 관계론인가? 하는 것에서 인과응보의 내세관을 소환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치기준의 반전을 통해 즉 진정한 풍요로움이 무엇이냐? 가난이 무엇이냐? 하느님의 시간, 때가 무엇이냐? 영원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22절)
그런데, 죽음의 강은 건넌 후 부자와 라자로의 상황은 역전된다. 그 역전의 고리가 바로 <고통과 죽음> 때문이다. <고통과 죽음>만이 우리 집 대문 앞에 누워있는 타자의 낯선 얼굴을 바라보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삶Ⓐ+Ⓑ---------------->죽음Ⓒ(Ⓓ+Ⓔ+Ⓕ)
죽음Ⓒ(Ⓓ+Ⓔ+Ⓕ)의 상태인 부자가 고통과 죽음의 강을 건너면서 아브라함과 라자로를 드디어 ‘보았다’는 것이다.
루카복음 사가는 ‘보았다’에서 ‘들었다’를 거쳐, ‘믿었다’는 상태로 부자를 점진적으로 밀고간다.
여기서 루카 복음 사가가 위격적 내세관을 뒤집고 새로운 내세관을 정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 타자를 내 존재의 근거로 알아 볼 수 있는가? 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고통과 죽음>이라는 극단의 상황을 설정하여, 바리사이파로 상징되는 율법주의의 카테고리를 흔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자로를 ‘보았다’----->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었다’(Ⓓ 자비 Ⓔ 경고 Ⓕ 회개)-->그분을 ‘믿었다’(부활)
부자는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타자인 라자로를 ‘보았다’. 그리고 믿음이란 자비와 경고, 회개, 그리고 죽음을 통한 부활이 무엇인지를 들어야 한다는 것도, '들었다' 그 매개자가 바로 타자인 라자로이다. 바라사이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율법(모세와 예언자)의 근본정신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라자로를 볼 수 없었고, 그분을 결코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는 예언자적 계시까지 복음 사가는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부자와 라자로를 개별 주체로 해서 바라본 관계론의 필연성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관계론은 우연적인 선택 상황이 아니라, 필연적 운명(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자로와 부자는 다시 우리 안의 두 존재 양태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통찰처럼 부유하면서도 한없이 가난한 자이가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린 8,9)
바로오사도의 통찰처럼, 지난주 복음 묵상처럼, 부유함과 가난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는 결절점이 아니다.
우리는 부유함과 가난이라는 두 개의 실존, 존재의 무게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부유하셨다면 우리도 부유하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빛과 밝음과 웃음과 우리 스스로에게만 머물 수 있는, 어떤 미학적이고 자족적인 실체들을 지니고 있는, 코나투수의 상태, 무아경에 머물 수 있는 부자의 조건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익명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례의 여정을 하면서 고통과 죽음이라는 강을 수없이 만나고 건너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 나타난 타자의 출현처럼 예상하지 못한, 수시로 만나게 되는 고통과 죽음의 얼굴들, 또 우리 자신 역시 어떤 면에서는 더없이 무능한 존재임을 바라보는-(겸손이 아닌 현실로), 우리 자신 자체가 어떤 –가시(바오로의 가시)를 지니고 있는 '인간적 한계'를 지닌, 마치 철부지 아이와 같은 유아론적 존재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하게 코나투수의 상태에 머물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며, 완전히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살수 없는 라자로같은, 이 두 개의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존재의 무게란, 한없이 부유하면서도 더할나위 없이 가난한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한없이 부유하면서도 한없이 가난한 자이기도 하다는 '사이의 존재' 그것이 만든 '십자가'를 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끊임없이, 열광적으로, 미친듯이 더 오래 살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내일 아침 눈뜨지 말았음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그런 존재의 무게를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여기까지였음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웃으면서 동시에 울고 있는 존재의 역설!
바오로 사도 역시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겠지만,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런 위로를 우리에게 전하기도 한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필립피서, 1, 21-24)
여기서, 이 글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삶은, 사랑은 필연적으로 타인을 향하게 된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랑은 타인의 약함 가운데서, 타인을 향한다. 여기서 약함이란 어떤 속성의 열등한 정도를 나타내지 않으며, 나와 타자에 공통된 규정의 상대적 부족함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그 약함은 타자에게 타자성의 자격을 준다. 그래서, 산다는 것 혹은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이고, 망설이는 것이고,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오버랩 할 수 있는 공간이 무엇인지 바라보게 된다. 부자가 고통과 죽음의 강을 건너 비로서 라자로를 바라보듯. 나의 십자가와 타인의 십자가를 동시에 바라보게 되는 것은 불길속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고통을 통해서이다. 고통은 죄의 대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통의 신비, 고통을 통한 축복이자, 축복의 역설이다. 이 역설에서 깨어남의 축복이 있다.(자신이 부자이면서 동시에 라자로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 몸과 마음의 불균형을 감당하는 일이라, 즉 정신적으로 비천한과 숭고함을 사는 일이라,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 몸이 아플 수도 있다.)
자신이 부자이면서 라자로라는 사실은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과 죽음에서의 깨어남이다. 나 혼자 향유하는 존재에서, 너를 환대하는 존재로의 깨어남, 나와 타인의 차이를 억압하지 않는 깨어남, 이방인을 통한 깨어남, 무국적자를 통한 깨어남, 낯선 얼굴을 통한 깨어남.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의 결과도 아니고, 학습된 보편화도 아닌, 무조건 주어진 은총의 결과로써의 깨어남이기에, 그로인해 타인에 대한 책임, 타인에 대한 대속, 그것이 내가 초래한 무수한 고통에 대한 '자비', '위로', '용서받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사랑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릎을 꿇었느냐? (0) | 2022.10.10 |
---|---|
참새에게 독수리가 어떻게 비상하냐고 묻지 마라(헬렌 슈크만) (0) | 2022.10.05 |
행복한 꿈은, 꿈이라서가 아니라 행복하기에 실현된다(헬렌 슈크만) (0) | 2022.09.20 |
끌어당김의 법칙, 마주침의 우연성과 펼쳐짐의 필연성 (0) | 2022.09.14 |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성 아우구스티노) (0) | 2022.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