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빗방울은 소금이 되지 못한다(이향지)

나뭇잎숨결 2022. 8. 31. 13:55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빗방울은 소금이 되지 못한다(이향지)

Raindrops falling straight into the sea do not become salt (the migratory land)

 

[연 중 제 22주 일 (다 해) 2022. 8. 28. Luc. 14,1.7-14]

 

 

 

1. 이향지, 「소금의 행로」

 

 

이향지, 「소금의 행로」를 읽어본다.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빗방울은/소금이 되지 못한다 //고기의 내장을 들락거리지 않는 물은/거름이 되지 못한다 //어제도 나는 산을 노래했다/산은 나를 노래하지 않았다 //먼 것이 먼 것을 가리는 날/혓바닥에 얹히는 소금

 

이향지 시인의 「소금의 행로」는 소금에도, 거름에도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한 톨의 소금은 어떻게 바다와 염전과 저잣거리를 거쳐 내 식탁으로 왔는가? 이는 소금의 행로를 통해 나의 행로는 무엇인가를 묻는, 경험하지 않은 존재에 대해 함부로 사랑이라 이름 붙이지 않겠다는 묵직한 발언이다.

 

나에게 오지 않은 것, 내 것이 아닌 것은 노래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비트켄슈타인 버전에 해당하는 목소리다. 내 삶을 통과한 것만 나에게는 꽃이고, 사랑이고, 소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로 곧장 떨어진 빗방울, 고기의 내장을 들락거리지 않은 물은 소금이 될 수 없고, 거름이 될 수 없다. 먼 것이 먼 것을 가리는 날, 그 바다를 통과해 내 혀에 놓인 한 톨의 소금! 그 소금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산 가운데 내가 노래한 산만이 산이 되는 것이다.

 

깊고 깊은 시다. 내가 산을 노래했기 때문에 산은 산이 되는 것이다.

 

"내 생애를 관통해 지나가는 것만이 내게 의미 있는 어떤 것이 된다. 제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것들도 내 삶에 들어와 부대끼지 않은 것들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바다로 곧장 떨어진 물방울을 소금이라 하지 않고, 무엇인가의 내장을 거치지 않은 물은 거름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내 삶과 만난 것들만이 내 인생에서 하나의 의미가 된다. 먼 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냥 먼 것일 뿐.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위해서는 이제 노래하지 않겠다"(허연)

 

먼 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냥 먼 것일 뿐, 이것은 세계를 먼 것과 가까운 것으로 구획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스며들지 않은 것들에 대해 알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고 따라서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생을 관통해 지나간 것만이 내게 의미가 있다는 이런 뜨거운 고백은 사실 자신에 대한 준엄한 질문을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단상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그런 면에서 자기 '정체성'의 확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본 이들의 통찰은 그래서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있다.

 

 

 

 

 

 

 

파리도서관 내 외부- by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 

 

 

 

 

 

2.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세계를 경험하는 최초의 출발점은 나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고, 또 제기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너는 누구인가? 나아가 세계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한 단초에 해당한다.

 

나에 대한 질문을 생략하고 너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신은 무엇인가를 물을 수는 없다.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를 생략한 그 물음들은 이 땅과 무관한 부유하는 질문, 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이미 답을 내려놓고 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의 착지점이다. 내가 디딘 땅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그 땅을 딛고 하늘과 별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맛보지 않은 혹은 못한 진수성찬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류의 비극이 나는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신이 누구인가를 물었기 때문에 너는 누구인지를 결코 알 수 없었다고 본 일군의 철학자들이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너는 누구인가를 묻게 된다. 네가 누구인지 알게되면, 그 다음 질문은 너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의 시작은 반드시 데카르트와 만나게 된다. 나에 대해, 너에 대해, 세계에 대해, 신에 대해 묻는다는 그 자체가 <나는 사유하는 존재> <나는 사유할 수 있는 존재> 라는 순수자아에 관한 통찰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르네 데카르트로 인해 합리적 이성의 시대로 세계사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과 『성찰』에서 일관되게 사유하는 나만이 나라고 할 수 있다는 명제를 던진다.

 

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방법서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내가 사유하는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유하기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추기 때문이다.(『성찰』)

 

칸트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순수이성비판』(1781),『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을 통해 합리론과 경험론으로만으로는 이 세계를 횡단하는 나를 규명할 수 없다고 순수이성 조차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비판철학의 정점에 이른다. 그 시작이 『순수이성비판』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것에서 사유는 주관없는 익명적 활동이 아니라 주관의 자발적인 사유는 순수이성의 근거이기 때문에, 나는 그냥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나는 표상을 사유한다'. 혹은 '나는 나를 생각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②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나의 표상에 동반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표상들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최소한 나에 대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사유한다-나는 표상들을 사유한다-나는 나를 생각한다(『순수이성비판』)

 

칸트는 사유할 수 있는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은이성이 알 수 있는 것(현상)과 알 수 없는 것(사물 자체)을 구분하기에 이른다. 선험적 영역과 경험적 영역으로 사유의 대상이 나눠진다고 본 것이다. 우리에게 경험 가능한 대상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인식 주관에 나타난 표상일 뿐이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피히테는 칸트의 제자이자 흔히 칸트와 헤겔의 다리를 놓은 주관적 관념론자로 불린다. 그는 『전체 지식론의 기초』에서 자기의식을 <자아와 비아>와의 관계, <기억과 현재>와의 관계로 바라보았다.

 

③자아는 우리의 경험적 의식 상태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 나타날 수도 없는 ,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경험들의 기초에 놓여 있어서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활동을 표현하는 데 있다.(...)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된다. 자아는 비아를 자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한다.(『전체 지식론의 기초』)

 

피히테는 자기의식은 기억에서 온다고 본다.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로 기억될 수 있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의 총합이다. 그게 바로 ‘자아’고 ‘나’라고 본 것이다. 또한 자아는 비아에 위해서만 <나>를 변증법으로 정립한다고 보았다.

 

쉘링은 피히테의 '기억과 현재'의 자아론을, 또 '아와 비아'의 투쟁을, 나눠진 것으로 보지 않고 대립적인 것의 길항관계로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자연에서서 파생한 것으로 자연안에서 주관과 객관은 동일하다는 동일 철학의 문을 열기에 이른다. 나 아닌 것으로만 나를 알아가는 것은 초보적인 자기인식이고, 인간은 진화하면서 그 대립조차 초월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를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바로 '대립'을 '다양성' 혹은  ‘다름’의 원동력으로  본 것이다. 

 

④자아는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내 안에 대립되는 두 항이 있음을 알고 있다. 대립되는 두 힘은 서로 내 안에서 다툴 수밖에 없고, 이 다툼이 무한히 다양한 세계로 전개되는 '원동력'이 된다.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

 

자아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에너지 차원으로 쉘링은 바라보고 있다. 그때 자아는 자기를 어떤 방향으로 밀거나 끌어가는 자기의식이 되며, 그 의식은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는 분열처럼 보이는 자기의식의 출발로 자아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들을 알게 되고,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은 본래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동일성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을 보면서 인간과 역사와의 관계, 지금까지 철학사의 흐름을 총망라해 주체와 대상, 자기의식 혹은 인식에서 비롯된 자아와 주체, 정신과 물질, 선험과 경험을 변증법으로 종합해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적 관념론이라 부르는 살아있는 자아론을 주장한다. 특히 피히테의 변증법과 셸링의 절대정신을 종합해 독일관념론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⑤나는 대상을 나에게 속한 것으로 알고 있다(대상은 나의 관념이다)그러므로 나는 대상 속에서 나에게 관하여 알고 있다(...) 나는 사유하는 자다. 그리고 내가 사유하는 자로서 생동성에 관계함으로써 나에게 있어서 주체성, 생동성 자체가 생성된다. 자아는 그 자체로 살아있으며, 자기의 생동성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리하여 자아는 자기의식이다.(『정신현상학』)

 

우리는 역사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적인 절대정신이 어떻게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는지 이미 알고 있다.[질문하는 인간~]

 

후설은 자아가 없는 인간은 없지만 그것이 현실과 교호하는 과정에서 어떤 자아를 드러내는가를 현상학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바라본다. 그것이 후설이 바라본 '순수자아와 인격적자아'의 갈라짐이다.

 

⑥모든 의식 작용 행위는 자아의 행위이며, 모든 행위는 자아로부터 생기고 자아는 행위 안에서 현실적으로 살아간다. 자아는 자극과 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극을 발생시키는 중심이며, 행위의 중심이다. 순수의식은 자아로서 다양한 의식활동을 수행한다.(『이념들』)

 

후설은 '순수자아와 인격적 자아'를 구분하여, '순수자아'는 다른 말로 '본질적 자아'로 자아의 원본적인 자기파악, 자기지각, 자기기억, 자기상상의 잠재태로 보았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자아는 정신과 몸이라는 실현태에 의해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그런데 이 자아의 능동성으로 인해 자아는 '몸'을 통해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를 세계와의 관계에서 획득한 '인격적 자아'라고 바라본 것이다.

 

사르트르는 앙가주망(사회참여)라는 실천의지는 한 인간의 자아가 지닌 바깥의 힘, 부단히 초월하려는 초월적 힘에 주목하기에 이른다. 특히 후설의 순수자아에 대해 그 순수자아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성찰과 비판을 통해,

 

⑦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 자아의 본질적인 기능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이다. (『자아의 초월성』)

 

사르트르는 자아는 의식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아는 의식 안의 거주자가 아니다. 자아는 의식 바깥에, 세계에 존재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의 문을 연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아를 문제삼다보면 우리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존재, 이성을 가진 존재를 만나게 되고,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없는 선험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마주하게 되면서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 정신과 세계, 주관과 객관을 나눔)—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변증법의 3단계 –자아와 비아를 통한 모든 것을 자아속으로)- 셜링의 객관적 관념론(자연전체에서 주관적인 정신세계로, 정신과 물질, 주체와 대상, 주관과 객관이 원래부터 동일하다는 동일철학)-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피히테의 변증법과 셸링의 절대정신의 변증법)-후설의 현상학적 순수자아론을 거쳐 사르트르의 실존적 자아론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왜 그렇게 <나>라는 자아를 문제 삼았는가? 자신이 왜 이 세계를 건너가야 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밖으로 내어 쫓긴 자인지, 보시니 좋은 신의 창조물인지, 아니면 원소로 환원되는 사물에 불과한지?  그렇기에 <나>에 대해 질문하고  알려고 하는 것은 지식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와 실존의 문제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성찰하는 과정에서 알게된 것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사유의 근간은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부정되면서 누군가에 계승되었다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었다. <나>라는 보편자아와 개별자아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것 역시 나의 자아도 누군가의 자아의 반복이거나 그것을 극복한 차이일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사유하고, 성찰하고 그것을 언어화 하고 발설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빵만으로 사는 존재이거나, 무지한 주인이거나 각성된 노예의 상태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에 대한 어떤 논의도 타당하지 않은 논의는 없고, 그러나 어떤 논의도 완성된 논의는 없다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누구인가>는 결국 완성을 향해가는 도정에서 <자아와 비아>의 변증법적 통합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7-14

 

 

타자와 공존하는 세계속에서 끊임없이 <나>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잔치자리에서마저 자리의 위치를  가르거나, 타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레벨업을 하고자 하는 인간을 보며, J가 바라보는 사람의 지위는 과연 무엇인가?

 

 

루카 14,1.7-14을 읽어본다.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전하는 루카 14,1.7-14에서 7-14절은 루카복음만 전하는 특수사료에 해당한다.

 

루카 14,1.7-14에서 멈춘 부분은 10절이었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절)

 

루카복음에만 있는 이 사료는 대부분 겸손에 초점을 맞춰 바라본다. 이 글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인간의 지위가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영광스럽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영광>이라는 어휘는 주로 하느님을 칭하는 용어인데, <영광스럽게>를 인간에게도 사용한다는 점에서 복음 사가는 인간의 지위를 무한까지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절에 나오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광>과 루카 2장 14절에 나오는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에서 목자들이 천사들에게 전해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리고 미사전례중 대영광송에서 노래하는 삼위일체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럽게>와는 어떤 관계인가?

 

영광!(영광에 관한 사전적 정의는 생략한다)

 

하느님은 <영광> 그 자체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원래의 그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신 거라면, 인간에게 주어지는 그 <영광스럽게> 역시 인간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럽게>되는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 ‘낮은 자리’로 상징되는 그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라는 것이다.(십자가의 길은 다음주 연중23주 묵상주제로 넘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절)

 

10절에서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세 부분이다. 

 

(a)그때에- 그때는 언제인가?

 

(b)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이들은 나에게 누구인가?

 

⒞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어떤 상태인가?

 

세 개의 질문은 결론적으로 인간은 잔치자리에서 겨우 위아래를 다툴 정도의 그렇게 작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타자를 통해 레벨업 할 정도로 하찮은 품위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살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삶이라는 시험지를 받고 100점을 받을 시험지임에도 <나>라는 인간의 지위에 50점의 답을 쓰고는 그것을 '두려움이나 무지'라고 말하지 않고, '겸손'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자주 쓰는 용어 가운데 '겸손'이 있다. 그런데 이 '겸손'이란 단어는 '겸양'이란 의미로 사회화되어 예의의 범주로 사용되곤 한다. 종교적으로 '겸손'은 하느님의 '뜻'과 직결된 의미다.  성모님의 수태고지에서 '네!'가 바로 겸손이다.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숨을 수 있는 도피처가 두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겸손과 자비다. 겸손은 행하지 않음에 대한 도피처라면, 자비는 행함과 행하지 않음에 대한 이중 도피처라고 할 수 있다. 겸손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은 윤리적 도피처하면, 자비는 자기 성찰을 거친 후의 종교적 도피처라고 할 수 있다. 사랑(현재)을 선택하는 것보다 그리움(과거)을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 해당한다.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광>은 어떻게 <행복>과 연결될 수 있을까?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절)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14절)

 

 

Ⓐ의 영광스럽게될 것이다. Ⓑ의 행복할 것이다, 라고 미래시제로 제시된 것을 시간밖에서의 종말론적인 위치전도(1-11절)와, 종말론적인 보상론(12-14절)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자유의지의 실현태로 볼 것인가에 관한 것에서 <영광>과 <행복>의 관계를 바라볼 수 있다.

 

왜 <영광>과 <행복>이 미래시제로 주어졌는가는? 이는 시간을 사용하는 두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으로 시간을 바라보는가? 마음으로 시간을 바라보는가? 더 구체적으로 위의 철학자들이 바라본 자아의 논의에서 자주 사용된 어휘로 자아로 시간을 바라보는가? 비아로 시간을 바라보는가? 영성가들의 견해로 참나로 시간을 바라보는가 에고로 시간을 바라보는가? 문학적으로 본질적 자아로 시간을 바라보는가 현실적 자아로 시간을 바라보는가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나는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위치전도와 보상론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타자는 누구인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핵심적 표현은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이다. 믿음은 인간 예수와의 상봉이고 이 상봉 안에서 세계의 뜻이 인격임을 체험한다(라칭거 추기경)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차선을 선택하는 것은 악이다.(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모든 삶에는 단 하나의 목적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너희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충만한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다.(닐 도날드 윌시)

 

Ⓓ는 믿음의 문제에서 나는 예수와 상봉했는가를 Ⓔ는 최선과 차선을 선택하는 자유의지에 대해 Ⓕ에서 삶에는 단 하나의 목적만이 있다는 것에서, 시간 안과 밖이라는 카테고리를 무화시킨다. 이미 여기서 영원히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영광>과 <행복>이 연결되는 고리라고 할 수 있다.

 

 

루카 14,1.7-14으로 돌아가서,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10절)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14절)

 

Ⓐ에서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의 너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너는 내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각인시키기 위해 교환적 도구나, 도구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그것이 아니라 그가 되는 순간이다.(마틴 부버의 『너와 나』)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바로 영광이고, 네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영광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 복음 사가는 <영광과 행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지평을 하느님만큼, 예수님만큼 무한히 확장하고 너는 아버지의 아들처럼, 예수님의 사랑처럼, 성령의 친구처럼 그  영광의 경지까지 오를 너 자신을 먼저 경험하고, 인간이 누릴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맛보라는 초대라고 바라볼 수 있다.

 

루카 14,1.7-14는 소금의 행로처럼 빗방울도 소금이 되는데, 너는 빗방울보다 얼마나 더 영광스런 존재인지, 행복한 존재인지를 각인시키는 위로와 격려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