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기다림의 미학,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desiderium naturale in visionnem beatificam)

나뭇잎숨결 2022. 8. 10. 15:00

 

by 송두율, 홍천강에서

 

 

기다림의 미학,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desiderium naturale in visionnem beatificam)

 

 

[연중 제 19 주 일 (다 해) 2022. 8. 7. Luc. 12,32-48]

 

 

 

 

1.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혹은 바람‘은’ 분다, 살아봐야겠다

 

 

오규원의 「순례의 서(序)」 & 「고요」를 읽어본다.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우리들을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그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편애와 죽음을 지나//먼 길의 귀속으로 한 사람씩/ 떨며 들어가는/영원히 집이 없는 사람들//먼 길의 귀속으로 한 사람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는 사람들//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홀로 나부끼는 옷자락은 / 나를 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는 것은/나를 영원히 여기에 떨게 하는 것은//멈추면서 그리고 나아가면서/나는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1973)

 

 

오규원의 「순례의 서(序)」를 시인의 다른 시 「고요」로 읽어보기로 한다. 나를 해석하는 유일한 상징은 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있고/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고요)

 

오규원의 「고요」에 나오는 ‘라일락 나무, 바람, 비비추, 때죽나무, 개미, 장미’는 모두 ‘고요한’ 그냥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일 뿐이다.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각자를 그냥 독립변수로 바라보는 것이다.

 

「고요」와 같은 맥락에서 「순례의 서(序)」를 읽어본다면,

 

‘지복직관’ 이라는 말을 오규원의 「순례의 서(序)」는 ‘지고직관’으로 바꾸어야 한다. ‘고통’으로 상징되는 ‘바람’은 인간의 존재성과 마찬가지로 그냥 하나의 현상으로 존재한다.

 

바람이 분다-살아봐야겠다는 대부분의 시해석에서 인과적 서술로 바라본다. ‘바람이 불지만 난 끝끝내 살아봐야겠다’는 인간의 극복의지에 초점이 놓이는 것이다.

 

그런데, 「고요」로 「순례의 서(序)」를 읽어보면 바람이 분다- 나는 살아겠다, 는 두 현상을 다른 존재양태로, 즉 독립변수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존한다는 것은 각자의 존재양식을 그대로 허용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오규원의 「순례의 서(序)」를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①,②,③ ----> ④ <-----⑤,⑥

 

「순례의 서(序)」는 ④의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로 모아진다.

 

‘바람이 분다’와 ‘바람은 분다’는 다른 현상이다. 이것은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봄이 왔다’와 ‘봄은 왔다’를 다른 현상으로 바라보고 서술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바람이의 ‘이’는 주격조사다. 바람은에서 ‘은’은 보조다. 주격조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객관적 시선이라면, 보조사는 명사에 어떤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고 부수적인 의미를 과잉해석하는 것이 인간의 비극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순례의 서(序)」는 바람이 그냥, 부는 것이고, 사람이라면 그냥 살아야 하는 것일 뿐, 바람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의미로 바뀌지 않는다고 바라볼 수 있다.

 

 

 

 

 

 

 

 

 

2.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12,32-48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2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33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34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라고 전하는 루카12,32-48에는 <행복하여라>가 두 번 나온다.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깨어-기다림>에 초점을 맞춘다. <행복하여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런데 <행복하여라>를 이해하지 않고 <깨어-기다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또 <깨어-기다림>을 이해하지 않고 J가 말하는 <행복하여라>를 이해할 수 있을까?

 

<행복 하여라>는 이미 하늘나라를 경험한 이들의 형이상학적 상태다. <깨어 기다림>은 하늘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이 땅의 상태, 형이하학적 상태다. <행복하여라>가 하늘이라면, <깨어기다림>은 땅이다. 하늘과 땅의 상태를 한 문장으로 묶어 놓은 루카12,32-48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깨어기다림>과 연결되는지?  깨어기다림은 어떻게 <기쁨과 고통> 과 연결되는지? 이런 연쇄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안고 있다. 

 

<행복하여라>를 이해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영성이다. <깨어기다림>을 이해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다. 이 두 영성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서 끊임없이 충돌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루카12,32-48에 나오는 행복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행복의 반복 진술에 해당한다. 그것이 성취되어야할 행복이 아니라 성취된 행복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행복론(마태오5,3-12)과 루카6,20-23에 나오는 <행복론>은 세상 가치관과의 대칭이자 대척적인 관점에서 이미 <성취된 행복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혹은 요구되는 당위적인 행복론이라는 점에서 이상적인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 이상적 상태를 루카12,32-48에서는 <행복하여라>라고 다른 상황을 설정하여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루카12,32-48에서 주어지는 행복 역시, 이미 성취된 행복론이라는 것에서 성서에 나오는 행복과 기쁨의 실체를 해명하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우리가 어떤 의지를 발휘해서, 현실과의 치열한 투쟁에서 얻게 되는 행복이 아니라 깨어서 기다리는 그 자체가 이미 행복이라는 것, 그분의 일을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행복이라면, 그것은 이미 내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행복은 본성처럼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37절)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문장으로 치자면, Ⓐ는 주절에 해당한다면 ----->Ⓑ는 종속절에 해당한다. 주인을 깨어서 기다린 사람은 주인이 하던 일을 자연스럽게 하게된다고 할 수 있다. Ⓑ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기 싫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의 상태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와 Ⓑ에서 말하는 행복은 따로 떨어진 두 개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는 주인을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는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전한다. Ⓐ에서 깨어서 기다리는 것은 주인으로 상징되는 J이며, Ⓑ에서 종들이 하는 일은 J가 할 일을 대신하는 이타적인 사랑이다. Ⓐ와 Ⓑ는 결국 ‘애주애인’의 반복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거듭 ‘애주애인’을 반복 진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본성적으로 주어진 행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베드로의 <이 비유는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라는 질문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32절의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것에서 1차적으로 이 말의 청자는 예루렘으로 향하고 있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작은 양떼’라는 지칭에서 예루살렘으로 다가갈수록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넓게는 44절의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와 48절의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라는 말씀에서 그 청자는 은총의 보고자인 오늘 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쪽 문은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느라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은 못보곤 한다(헬렌 켈레 자서전, 김명신 역, 문예출판사, 2009)

 

일 년 중에 낮 못지않게 밤도 많고, 낮의 길이에 못지않게 밤의 길이도 존재한다. 행복한 사람도 어둠이 없으면 있을 수 없고, 슬픔이라는 균형이 없으면 행복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카를 구스타브 융의 기억 꿈 사상, 조성기 역, 김영사, 2007)

 

그대는 이미 사랑을 가졌기에 사랑을 가지려 애쓸 필요가 없다(헬렌 슈크만) 결국 있는 것은 오직 신으로부터 이미 있음을 받았다.(마에스터 에크하르트, 선집, 이부현 역, 누멘, 2009)

 

인간의 본성은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이다.(...)은총은 본성을 전제하며, 이를 완성한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정의채 역, 바오로딸, 2000)

 

Ⓒ에서 헬렌 켈러는 한 인간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육체적 장애를 갖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녀를 행복의 메신저로 기억하고 있다. <문이 닫혔을 때 신은 창문을 열어 놓는다>는 그 유명한 명제를 그녀는 일관되게 삶으로 살아냈다. 자신에게 육체의 고통이 없었다면 자신은 절대 신을 알 수 없었을 거라는 고백에서 그녀는 육체를 초월한 행복한 삶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의지와 본성이 하나가 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에서 칼 구스타브 융은 행복은 어둠과 슬픔과의 대척점이 아니라 저울의 추처럼, 균형점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슬픔과 고통과 어둠은 우리 삶에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행복, 기쁨, 희망이라는 빛과 공존의 양태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빛’에 대한 강박증이 오히려 ‘빛’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고 본 것이다.

 

Ⓔ에서 (주관적인 견해인데) 『기적수업』의 저자 헬렌 슈크만은 21세기 신비학자라고 할 수 있다. 헬렌 슈크만은 중세의 신비학자 마에스터 에크하르트와 같은 시선으로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결코 불행할 수 없다고 바라보고 있다. 더욱이 인간이 신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은 행복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마에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바치는 유일한 기도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 외에는 드릴게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지복직관이라는 <본성적 행복론>을 인류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려고 부단히, 부단히 노력한 신학자다. 인간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하느님과의 관련성을 인간의 본성은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desiderium naturale in visionnem beatificam”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자신에게 줄 수 없는 어떤 것에로 열리어 있고, 정향(定向)되어 있다는 것이다.

 

헬렌 켈러, 칼 구스타브 융, 헬렌 슈크만, 마에스터 에크하르트, 토마스 아퀴나스의 통찰처럼 이미 그들은 행복은 성취되어야할 그 무엇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직관처럼 우리의 본성 안에 ‘지복직관’이 주어져 있다면, 루카12,32-48에서 <깨어 기다리는> 혹은 <그분의 일을 하는> 그 실체는 시간의 얼굴, ‘오늘’이라고 할 수 있다.

 

루카12,32-48로 돌아가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행복하여라>로 표현되는 구원이, 구원을 받을만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행복 역시 어떤 조건을 채웠을 때 사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루카12,32-48에 나오는 ‘행복하여라’는 우리가 기다린 시간의 얼굴, 그분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되는 직관의 시간, 바로 초시간의 ‘오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37)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깨어서 기다린 결과들을 통해서도 이를 바라볼 수 있다. Ⓐ와 Ⓑ의 축복은 시간 밖에서 즉 죽은 이후에 천국의 보상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두 개의 직관을 의미한다. 이것은 선택의 길이 아니라 통합의 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직관처럼 선물로 주어진 인간의 본성은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desiderium naturale in visionnem beatificam”이라는 순수 ‘기쁨’의 상태를 항구하게 맛보지 못하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여기서 <깨어서 기다림>은 <고통과 기쁨>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그 이유를 바라 볼 수 있다. 신앙은 이 시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늘 두 시간을 동시에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 기쁨을 가리거나 기쁨이 고통을 가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날들은 고통의 날들로, 어떤 날들은 기쁨의 날들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부름을 받는 상황에서, 요한 복음 사가는 부활 이후에 <고기 잡는 방법>에 대해 두 개의 삶이 어떻게 통합되는가를 보여준 바 있다. 물이 얕은 곳에서 잡을 수 없는 고기, 왼쪽으로 던져서도 잡을 수 없는 고기, 단순히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전하는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과는 질적으로 다른 표현을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21,5-6)

 

Ⓖ와 Ⓗ는 단순히 고기잡는 방법에 대한 일화, 나아가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소명에 관한 포석을 넘어서,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만나는 <충족원리>라고 할 수 있다. 즉 <못 잡다> 와 <잡다> 사이에 이 <충족원리>가 놓여 있다. 고기를 잡아야 하고 잡고 싶은 데 못잡는다. 잡고 싶은데 무능하다. 이 간절함과 무능함 사이에 <잡다>라는 행위를 추동하는 J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그 때, 그 행위는 소명을 해야하는 이들이 행위 이전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때, 경험하는 <충족원리>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생명의 근본적인 <충족원리>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행위의 결과물이 충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충족되었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이 글은  <행복하여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충족원리>가 정립되지 않으면 <깨어서 기다림> 혹은 <기쁨과 고통>은 삶에서 그 균형추를 맞추기가 자칫 어려워진다.

 

고통과 기쁨을 다른 시간에 경험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이고, 상투적인  패턴이다. 이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통합되어 살아낸다면 그것은 삶의 차원을 하나의 예술로 들어 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은 하나의 미학이다. 이 세상의 최고의 예술가는 신이다. 자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은 인간의 고통을 요구하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신의 아름다움의 절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에서 드러난다. 십자가는 고통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쁨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비장미(고통)와 숭고미(기쁨)가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 삶에서 기쁨이 항구하게 존재하지 못하는 이유는 고통이 사라져야지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기쁨을 대척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실은 우리는 아직 그분이 주고자 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체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근원은 '기쁨'이다.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대 긍정에 우리의 근원이 있다. 그 대 긍정에서 나오는 기쁨이 모든 오욕칠정의 바탕이 된다. 고통이 커도 그 바탕에는 기쁨이 있다. 라이프니츠가 직관한 '흰색은 빛도 만들지만 그림자도 만든다'는 바로 그 흰색의 기쁨이다. 지복직관에서 비롯되는 기쁨은 모든 오욕칠정의 바탕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라질 수 있지만, 기쁨은 사라질 수 없다. 바람은 사라질 수 있지만, 삶은 사라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기쁨'은 인간의 근원적인 '바탕-생각'이기 때문이다.

 

 

 

 

 

 

by 송두율

 

 

 

3. ‘기쁨이 주는 힘인 기다림’과 ‘고통이 주는 힘인 깨어있음’

 

 

연중 19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깨어서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기쁨이 주는 힘인 기다림고통이 주는 힘인 깨어있음을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강론 원문을 중심으로 발췌해 보았다)

 

 

⒜사람들은,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다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기다림 이후의 시간이 달라지기도 합니다.(...)그런데 기다림은, 그 기다림의 끝에 맞이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만을 기다림이라고 부릅니다.(...)기다림은, 기쁨과 희망이라는 단어와 떨어져 생각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구원을 준비하는 ‘깨어 기다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우선 기다린다는 것, ‘깨어있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기다리려면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허리에 띠를 맨다.’는 표현은,(...) 일을 하려면 그렇게 허리에 띠를 맬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켜놓는 것, 한밤중에 갑자기 돌아올 주인을 맞이할 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모습이 깨어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종들이 그렇게 준비하는 것은, 두렵거나 불안해서가 아니라, 기쁨에 차서 그렇게 준비한다는 것입니다.(...)그렇게 깨어 기다린다는 것, 그 기다림의 끝에, 맞이할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고, 그 희망을 유지 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쁨과 희망이 없는 기다림은, 기다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림, 희망과 또 기쁨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첫 번째 모습은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자세를, 복음을 통해 살펴보면, 종들이 깨어 기다리면서 특별히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 그날을 위해서 특별히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지금 주어진 나의 삶에 충실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삶에 충실한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인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지금의 나의 삶에 충실한 모습, 첫 번째는 지난주 복음에 나오는 대로, 재물과 같이 부질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삶에 충실한 또 하나의 자세, 지금의 나의 삶 속에 있는 기쁨뿐 아니라, 고통까지도 모두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자신이 피하고 싶은 것은 고개를 돌리면서, 지금을 충실히 산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특별히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깨어 기다린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잘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또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언제나 고통과 인내를 전제로 하고 있나? 봅니다. 하지만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한다면,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을 ‘깨어 기다리는 것’과 연결시켜 보면, 깨어 기다린다는 것, 어쩌면 시간이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2019년 주일 강론 때,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고통은 살아있는 기도입니다.’ 어느 신부님의 글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직은 ‘고통이 살아있는 기도’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말씀도 함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고통이 우리에게 간절한 마음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통이 기도를 살아있게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딸의 치유를 청하는 가나안 여인을 보면, 고통이 기도를 살아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때로 내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줄어들었거나 관심의 폭이 줄어들었을 때, 그 이해와 관심의 폭을 넓혀 주시려고 하시는 하느님의 배려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가 힘들고 어려워야,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런 것을 보면, 고통이 우리를 그렇게 깨어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통이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나 아픔을 보지 못하면서, 우리가 살아있는 삶을 산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 기다리라.’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쁨이 기다릴 수 있게 하는 힘이라면, 고통은 우리를 깨어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통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 기다리려면우리는 기쁨고통을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쉬운 기쁨이 주는 힘과 함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고통이 주는 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기쁨과 희망을 잃어버려서 기다릴 수는 없게 되더라도, 고통이 주는 힘을 통해서 깨어있을 수 있고, 또 살아있을 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깨어있다 보면, 언젠가는 기다릴 수 있게 하는 힘인, 기쁨과 희망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고통을 없애 주시기를 청하기보다는, 고통이 주는 힘을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기쁨이 주는 힘인 기다림고통이 주는 힘인 깨어있음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야,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깨어 기다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강론은 ‘기쁨이 주는 힘인 기다림’과 ‘고통이 주는 힘인 깨어있음’을 연결하여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마치 묵주알을 하나하나 엮듯, ‘기쁨-기다림, 고통-깨어있음’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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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에서 <깨어서-기다림>에 동반되는 ‘기쁨과 고통’ 중에서 특히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해 마지막 단락에서 초점화 시킨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쁨이 주는 힘은 받아들이기 쉽지만, 고통이 주는 힘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도를 넘어서 고통의 존재이유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은 깨어있음과 직결된다고 할 때, 깨어있으면 당연히 기다릴 수 있다. 즉 문장 어순에서 깨어있음이 주절이고, 기다림은 종속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면, 기쁨과 희망을 당연히 바라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을 때, 고통이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고통이 나를 피해 가야할 이유가 있는가? 라고 물었다고 하자! 이것은 고통을 수용한 것이지, 고통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자신 앞에 닥친 고통을 이해하고 수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강론의 마지막 단락에서 멈추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고통을 없애 주시기를 청하기보다는, 고통이 주는 힘을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은 흔히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강론에서는 고통을 극복하기 보다는 '고통이 주는 힘'을 깨달을 수 있기를 제언하고 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고통은 ‘항상’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것들이다. 설사 그 고통이 인과적으로 성립되는 어떤 틀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마치 바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토네이도는 어떻게 만들어지나?를 어린 아이에게 묻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본다.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고통, 수난, 죽음은 당시의 정치-종교적인 역학관계에 의한 어떤 인과적인 틀을 지니고 있었다. 그 틀 속에 그분은 갇혔다고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분은 고통이 예정된 그 틀 속으로 스스로 걸어가셨다는 것에서 갇혔다는 하나의 의미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에 이른다. 정치-종교적인 역학관계가 분명 있었지만(고통), 하느님의 ‘사랑’도 항상 그분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고통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다. 

 

예수님의 고통에서 위르겐 몰트만이 바라본 대로 ‘사랑은 무죄한 고통이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듣는 시간, 모든 날들이 좋았다고 쓴다-위르겐 몰트만의 ‘고통의 무죄성’])

 

그런데, 우리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처럼,  ‘사랑의 무죄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에 고통 앞에서 우리는 두 겹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 앞에서 용서하지 않는 하느님, 자비롭지 않은 하느님, 인과응보 혹은 상선벌악으로 환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도 ‘있음’이고, 사랑도 ‘있음’이다. 그런데 고통은 실존의 ‘있음’이고, 사랑은 존재의 ‘있음’이다. 고통과 사랑은 같은 등급의 ‘있음’이 아니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칼라너의 이를 인간이 본성만 지니고 있다면 고통을 못 느꼈을 것이지만, 인격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 주는 자이자 고통당하는 자로 무차별적으로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고 바라보고 있다. ‘사람이 하나의 신비’인 것처럼 ‘고통도 하나의 신비’라고 바라본 것이다.([별이 빛나는 밤에 열일곱번의 만남과 이별을 생각함]-칼 라너의 ‘고통의 인격성’)

 

이를 종합하면, 고통이 나의 탓으로, 혹은 타자의 탓으로, 혹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건, 고통은 인간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영성가들이 고통의 비실재성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고통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의 힘은 그렇기에 우리를 자초시키거나 우리를 강하게 단련시킬 수도 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당하는 자만 고통 받는 타자 곁으로 다가가게 된다'고 보는 타자 윤리학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우리가 기쁠 때 다른 사람의 기쁨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는다. 기쁨은 자족적인 실체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고통은 자족적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고통은 살아있는 기도입니다.’라고 말 할 수 없고, ‘고통은 우리의 기도를 살아있게 만듭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은 우리를 적어도 ‘살아있게 한다.’ ‘깨어있게 한다’ 는 것이 고통이 주는 힘일 것이다. 깨어있어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깨어서-기다림>을 완성하는 것은 고통과 기쁨의 두 축이지만, 그 두 축의 균형추를 잡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강론의 마지막 단락에서 고통을 강조한 이유는 고통의 극복에 있지 않고 ‘살아있는 삶’을 사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살아 있는 삶을 살 때, 기쁨, 희망이 우리의 원래의 본성이라는 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by 송두율

 

 

 

글을 마무리 해본다.

 

[기다림의 미학,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desiderium naturale in visionnem beatificam)”]

 

‘기다림’은 분명 기쁨과 희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깨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과 기쁨이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본성에 주어진 ‘지복직관에’의 자연적 열망(desiderium naturale in visionnem beatificam)”을 알아보는 것은 분명 기쁨이다. 그런데 그 ‘기쁨’은 ‘고통’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기쁨은 주어졌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미학’은 진선미 가운데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 연구하는 학문분야로 알려져 있다. 미학은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보통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 네 분야로 그 아름다움을 추정한다. ‘기다림’을 하나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에는 기쁨과 고통이라는 화해불가능한 세계, 숭고미와 비장미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쁨과 고통의 결합, 숭고미와 비장미의 결합은 ‘오늘’이라는 시간의 얼굴이다.

 

숭고미와 비장미가 결부되어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괴테의 『파우스트』가 거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는 파우스트가 모든 것을 다 잃은 고통의 절정에서 들은 하늘의 소리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는 것이 모든 의지를 다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모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의지조차 없는 상황에서 "너 참 아름답구나!"를 들은 것이다. 완벽한 무(없음)의 상태에서 들은 소리다. 죽어야 한다면 몸부리쳐도 죽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죽는다.  몸부림까지 멈춘 상태에서 들은 것이다.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는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통해 비장미와 숭고미가 결합되는 순간이자, 괴테라는 작가의 미학이 완성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때문에 괴테라는 한 개인의 창작물이기 이전에 신의 목소리, 그 대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 그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지독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이들에게서 나오는 유머(이렇게 죽으면 때깔도 곱다 할 것이다), 천진난만함, 명랑함, 단아함, 정갈함. 고요함, 온유함, 친절함, 따뜻함, 열절함, 숭고함. 변함없음, 한결같음...등등 어떤 고통도 그들의 본성을 훼손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본성 그 <바탕생각>이 <기쁨 혹은 행복>이라는 것을 수긍하게 된다. 고통이나 죽음이 결코 건드릴 수 없는 품위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깨어-기다림>은 엄청난 의지를 동원해서, 고통을 극복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그 <바탕 생각>이 <기쁨 혹은 행복>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발터 카스퍼)를 바라보는 그 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