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무한화서(無限花序)'라 쓰고, '무한화서(無限火書)'라고 읽는다.

나뭇잎숨결 2022. 8. 17. 10:37

 

소쇄원의 배롱나무

 

 

 

 

'무한(無限)'라 쓰고, '무한화서(無限)'라고 읽는다.

-It is an introduction of infinite flowers, and it is an introduction of infinite fire.

 

[연 중 제 20 주 일(다 해) 2022. 8. 14. Luc. 12, 49-53]

 

 

 

1.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이성복)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을 읽어본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1990)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 에 나오는 백일홍은 배롱나무를 가리킨다.

 

화자는 ①에서 배롱나무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다고 무연하게 배롱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②에서 수많은 사물 가운데 무연하게 바라본 배롱나무가 화자와 연결된다. 배롱나무와 화자를 매개하는 것은 '폭풍 속에 서 있었다'는 공통점이다. 화자 역시 그 해 여름 배롱나무처럼 폭풍 한가운데 있었지만,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고' 그리고 '쓰러지지도 않았다'고 고백한다. ③에서 화자는 배롱나무 꽃이 더 이상 필 수 없는 그 해 여름이 끝나면서, 꽃들이 피처럼 마당을 덮을 때, 나의 절망 역시 ‘장난처럼’ 끝났다고 말한다.

 

「그 여름의 끝」에는 절망에 ‘장난처럼’이라는 비유가 두 번이나 나온다. 절망 앞에 붙은 '장난처럼'이란 낙차때문에 오히려 절망은 두겹으로 극대화된다. 대체 장난같은 ‘절망’이란 무엇일까?

 

이성복 시인의 시론에 해당하는 『무한서(無限序)』(2015) 와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2015)로 읽어보면 「그 여름의 끝」에 왜 ‘절망’에 ‘장난같은’ 이라는 비유가 붙었는지 바라볼 수 있겠다.

 

시론을 읽어본다.

 

시는 알고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가운데 알게 되는 거예요.(...) 막한 바다에서 어부는 어디에다 그물을 쳐야 할지 알아요. 간절함과 안쓰러움,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이 시의 포인트이고 기술이예요.(...)시하고 연애하고 같다고 하지요. 더 깊이 들어가면 저절로 빠져나올 텐데, 나오려고 하니까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무한화서(無限花序)』)

 

 

⑤나에게 시의 의미는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의 의미이다. 그리고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의 방법적·구체적 표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시란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의 구체적·방법적 이행이다.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시의 의미는 삶 앞에서 시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얻어진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배롱나무는 그렇게 꽃을 오래 피워도(많이 피워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초록 일변도인 한여름에 붉은 꽃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족하다. 반면, 석류는 꽃을 많이 피우는 나무가 아니다. 꽃의 수를 셀 수가 있을 정도다. 꽃이 핀 숫자가 곧 석류 열매의 숫자다. 꽃과 열매, 여기서,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 날 마당을 덮은 배롱나무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비에 젖은 석류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나온다. 시의 절망은 바로 무한에 가까운 꽃을 피워도 열매 하나 맺을 수 없는 배롱나무의 절망과 비슷하다는 유추에서 절망 앞에 ‘장난처럼’ 이 붙은 이유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절망을 '장난처럼' 이라고 말하는 그 심사는 어떨까?

 

『무한화서(無限花序)』에서 ‘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킨다.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구심성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를 비유한 말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 곧 시라고 믿는 이성복 시론의 핵심에 해당한다.시론을 읽어보면 왜 시의 절망이 ‘장난같이’ 라고 했는지 어렴프시 가늠할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은 시가 삶과 무관하지 않고 사랑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배롱나무->화자-> 시-> 삶(사랑)

 

시인은 시의 실패는 곧 연애의 실패와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무한서(無限序)』에서 ‘無限書’라고 쓰지 않고 글의 서문처럼 본격적인 논의를 하지 못한 ‘序’라고 한 것에서 이를 바라보게 된다.

 

「그 여름의 끝」에서 배롱나무처럼 무한하게 꽃을 피워내지만 삶의 변죽만 울리고, 정작 열매 하나 맺지 못하는, 즉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한 글쓰기처럼, ‘절망’은 그것이 시든, 사랑이든, 삶이든 ‘장난처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절망하지 못한 절망에 관한, 포즈의 문학에 관한, 언어의 한계에 관한, 핍진성을 상실한 삶에 관한, 그리고 소문만 무성한 연애에 관한 자학적 혹은 자조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2.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3

 

그렇다면 삶의 본론은 무엇인가?

 

이 글은

[길, 무한과 영원을 현존케하는 모든 것의 상태와 하나인 상태]

[테텔레스타이라는 이름의 파사드를 지나]

[마음의 법칙: 행복의 자기 결정권, 그 선택과 유예]

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전하는 루카 12,49-53은 부활 후에 그분이 건넨 인사,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24,36)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바라보려 한다.

 

이는 왜 그분은 부활하신 후 <사랑이 너희와 함께!>라고 하지 않으시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것일까?를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평화는 부활의 선물이다. 그 맥락에서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는 의미는 평화를 받을 상태가 아니라면 평화를 알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평화를 주는 분만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받는 인류 역시 그런 부활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주어도 받을 수 없고, 주어도 누릴 수 없는 것이 평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평화는 살아 있는 우리가 천상의 양식을 사는 영원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부활 전과 부활 후에 평화에 대한 표현이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맞서고, 갈라진 상태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그분이 주시는 평화라는 것에서,

 

루카 12,49-53에서 멈춘 부분은 50절이다. 복음을 묵상할 때 멈춘 부분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서의 시작점과 같은 의미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묵상을 하면서 이천년전의 기적을 현재화 시키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랑의 기적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

 

루카 12,49-53은 나는,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내가에서 보듯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각인으로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그분의 사랑이 멈출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인식<----ⒷJ의 정체성---->제자 혹은 인류Ⓒ, Ⓓ

 

Ⓑ에서 ‘이 일이 다 이루어지기까지’의 발원지는 Ⓓ다. 52절과 53절에서 갈라짐, 맞섬, 분열로 비유된 그 상태가 ‘이 일이 다이루어지기까지’와 어떻게 충돌하는 것일까?

 

평화의 비유로 왜 가족을 끌어들이셨을까? 가족은 구체적으로 일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출발에서 이미 분열되었다면 세상에서 어떻게 일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것은 ‘가화만사성’ 혹은 ‘가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근원 그 출발의 출발, 그 근원은 어디인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의 근원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의 조건인 <몸과 마음과 영혼>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에 대한 다른 이들의 직관을 읽어보기로 한다.

 

내적 평화를 찾은 사람은 더 이상 세계로부터 협박당하거나, 통제되거나, 조정되거나, 프로그래밍 되지 않는다.(데이비드 호킨스)

 

장엄함이 아니라 왜소함을 선택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로 판단했을 것이기에 평화를 갖지 못할 것이다.(헬렌 슈크만)

 

먼저 너 자신의 내적 평화에 도달하여라. 그러면 네 곁에 많은 이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사로프의 성 세라핌)

 

하느님은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혼란과 불안속에서가 아니라 평화속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신다(자크 필립)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정신을 동요시키는 모든 생각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평화의 임금이시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데이비드 호킨스, 헬렌 슈크만, 성 세라핌, 자크 핍립, 성 살레시오가 직관한 평화는 그 표현이 다를지라도 평화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평화란 것을 알 수 있다. 평화는 오직 내적평화이며, 그 내적인 평화 속에서만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평화는 내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직관들이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평화가 내적이라면 분열의 이유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인 평화로 내적인 평화를 상쇄시키려는 것이 주객전도의 삶을 살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내적 평화를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분열케 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다. 우리의 조건, <몸과 마음과 영혼>가운데 마음의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동요시키고 불안케 하는 분리의 요인을 제공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번뇌, 갈등, 오욕칠정의 근원지는 모두 마음이다. 그러기에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된 상태가 내적평화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간단명료한 평화의 길이 엄청난 그 무엇을 태워버려야 할 것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 안에서까지 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 지금 우리 시대에 명상, 마음공부, 요가, 마인드컨트롤, 심리치료 등이 성행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돌이 아님을 알았다”(원효)

 

우리의 인식은 마음의 두 기본 원천에서 발생한다. 하나는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이고, 또 하나는 이런 표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이다(칸트)

 

마음의 지향성이 없다면 객관들과 세계는 우리에게 현존하지 않는다(후설)

 

마음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진다, 또 세계를 감각으로 인식한 마음이 있었기에 사랑이라는 개념도 만들어졌다, 또 마음의 지향성 때문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마음>에 대한 위의 시선들은 마음은 세계보다 크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 그 전제는 어떤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실재 세계보다 큰가, 작은가는 실재세계의 범주를 인간의 시계 영역 혹은 물질적인 우주로 국한할 것인가와 죽음 이후까지를 실재세계로 볼 것인가? 하는 규정은  다른 논의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

 

그분이 이 세계(인류)가 흥하든 망하든 상관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받아야할 세례(십자가의 수난)는 사실 없어도 된다. 그렇다면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짓눌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분의 마음이 이 세계를 품었기에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사랑으로 인류를 품었기에 그분은 그 길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고, 수난이라는 세례를 받게 된다. 인류를 품은 그 마음을 그냥 마음이라하지 않고 우리는 ‘성심’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그분만 그 길을 가시면 될 것을 굳이 제자들에게 그 길을 가라고 하신 것일까? 그냥 사랑을 주셨듯, 평화를 주실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환원론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서 평화와 사랑을 굳이 나눈 이유를 바라보기로 한다.

 

<사랑이 너희와 함께!>가 아니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일까?

 

사랑은 행위에 초점이 놓여있다면, 평화는 어떤 상태에 초점이 놓여 있는 단어다. 사랑이 동사라면 평화는 형용사에 가깝다. 평화는 어떤 존재성에 관한 것이다. <애주애인>은 어떤 존재상태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행위다. <애주애인>이라는 행위가 먼저가 아니고 평화라는 존재상태가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삶의 패턴을 (수없이 반복한) <존재하기->행하가->소유하기>로 바로잡으라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소유하기->행하기>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상태에서 <애주애인>은 사실 소란이고, 아우성이고, 몸부림이고, 세속화이고,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격이고, 하느님이 아니고 ‘하느님주의’라는 신랄한 비판에 직면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타이기 전에 마리아가 되어야할 이유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평화의 안식을 누리소서!>라고 기도하는 그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때 49절의 <불>로 상징되는 성령은, 우리 안에서 행위 이전에 어떤 존재상태로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

 

 

 

 

 

 

 

 

 

3. ‘사람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연중 20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평온함에서 오는 안락함이나 거짓 평화가 아니라, 그것들과 싸워서 이긴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평화이기에 우리가, 삶의 ‘열정’을 잃어버린다면, 얻을 수 없는 평화라고 전한다.(원문 위주로 발췌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삶이 평온하기를 바랍니다.(...)그러나 아무런 노력 없이 얻은 평온함이나 안정에는 또 다른 위험이나 함정들이 숨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갈등과 분열을 이겨낸 후에 얻은 평온함과 그런 노력 없이 주어지는 평온함! 이 두 평온함은 분명히 다른 평온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도, 노력 없이 또 수고 없이 얻은 것 중에 의미가 있거나 가치가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노력 없이 얻은 평온함과 그 평온함이 주는 안락함을 떨쳐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위험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아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모르는 것이고,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실제로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 1독서는 기원전 586년에,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하는 바빌론 군이, 이집트에서 출동한 파라오의 군대와 맞서기 위해서(예레미야 37, 5 참조)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을 일시적으로 중지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그렇게 거짓 평화에 안주하려는 백성들과 진정한 평화를 준비시키려고 하는 예레미야! 이 둘 사이의 마찰을 다룬 것이 오늘 제 1 독서의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힘들게 자신의 소명을 다하며 살았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힘든 삶을 이렇게 격하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어머니의 모태가 나의 무덤이었으면!” 너무 힘들어서 자신의 삶을 저주하기도 했던 예언자가 예레미야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갈등과 또 죄와 싸워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제 2 독서인 히브리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죄인들에게서 이렇게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내신 그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치거나 낙담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이렇게 비장한 말을 남깁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거짓 평화에 반대하면서, 또 사도 바오로도 죄와 싸우면서 처절하게, 또 철저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노력 없이 얻은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또 죄와 싸우지 않고 얻은 마음의 평화도 진정한 평화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살아있는 삶이란, 그 갈등과 분열을 이겨내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 그 갈등과 분열이 해결되지 않고 봉합되어 있는 삶, 그렇게 겉으로만 평온한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을 달리 표현해 보면, 사람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2019년 주일 강론 때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고 찾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적이 일어나야 할 삶, 기적이 꼭 필요한 그런 삶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기적이 없는, 정말 눈곱만큼도 기적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렇게 기적이 필요가 없는, 완벽하고 편안한 삶, 그리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지금의 삶보다 더 편안하고, 더 행복한 삶을 바라는 욕심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기적을 바라고, 또 기적을 간절히 청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지도 않고, 청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편안한 삶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도 ‘기적을 바라고 청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흘려들어도 되는 말씀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중에,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나 우리가 흘려들어도 되는 말씀이란 없습니다.

 

⒢전에 강론 때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산 사람이 있다면, 어떠한 죄도 짓지 않고 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행운아라고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기는 힘든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그런 사랑을 느끼기에는 힘든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 없이 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시며 아파하셨던 예수님의 마음,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사랑도 제대로 느낄 수 없고, 예수님의 마음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헤아릴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을 행운아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불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그 불이 우리 안에 태워야 할 것을 태워야 평화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분열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내 안에 여러 가지 형태로, 얽혀있는 사슬들을 끊어내야 얻을 수 있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그 평화는 아무것도 태우지 않고, 아무것도 끊어내지도 않으면서 얻을 수 있는 평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평온함에서 오는 안락함이나 거짓 평화가 아니라, 그것들과 싸워서 이긴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평화, 그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평화는, 우리가, 삶의 열정을 잃어버린다면, 얻을 수 없는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온함에서 오는 그 안락함은, 우리의 삶에서 ‘열정’을 빼앗아 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삶이 안락한 만큼 ‘삶의 열정’은 식어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삶에 대한 열정’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열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랬고, 사도 바오로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보면, ‘열정이 없는 삶이란, 기적을 바라고 찾기만 하는 삶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정이 살아있는 삶이란, 기적을 찾고 바라야 하는 그 상황까지도 받아들이는 삶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적을 바라고 찾지만 말고, 기적을 바라고 찾아야 하는 그 상황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이 늙지 않는 이유는, 그리고 때로 평온해 보이는 이유는, 사막은 이미 죽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갈등과 분열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또 고통까지도 이겨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있으면서 이미 죽은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평화가 기적과 열정과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

 

강론에서 우리 안에서 태워야 할 것을 태우고 끊어내야 할 것을 끊어내야 평화가 실현된다는 주제를 평화와 기적, 평화와 열정과 연결하고 있다.

 

강론에서 말하는 ‘평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람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는 ‘무서운’ ‘서늘한’ ‘짜릿한’ 명제부터 먼저 이해해야 할 듯하다.

 

기적의 원리를 단선적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하거나 채울 수 없는 결핍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우는 초월적 사건이라고 할 때,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하느님의 현존으로 통과하는 축복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강론에서, 사람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고 거론한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탱되지 못하는 삶 보다는 하느님 체험이 없어도 기적이 필요없는 둣한 삶을 인간은 그냥 원하게 된다는 신랄한 강조어법에 해당한다. 엄밀하게 바라보면 사실 기적이 필요없어보이는 듯한 삶도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가능하다. ‘기적인 줄도 모르는 기적’이지만, 아무튼 인간은 문제없이 삶이 편안하게 굴러가면 그 삶이 당연한 것이고, 마치 자신의 노력의 대가인줄 알고, 하느님체험 없이도 그런 삶이 천년만년 이어지기를 바란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여기서 열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적이 없으면 지탱되지 못하는 삶이든, 기적이 필요하지 않는 둣한 삶이든, 결국 산다는 것은 열정과 관련이 있다. 하느님 체험없이도 살아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굳이 하느님이 그런 삶을 나쁘다 할 리는 없으실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열정을 잃는 순간, 그 삶은 사막으로 변한다는 것이 문제다.

 

열정은 살아 있음과 관련된 상태 용어이자 에너지의 원천이다. 열정은 무엇을 더 많이 하라는 워크홀릭의 부추김이 아니다. 네로황제의 광기를 열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광기와 열정은 다르다. 열정은 평화를 견인하는 내적인 상태의 외적인 표출이다. 세계를 생명력으로 넘치게 만드는 자장 혹은 아우라 같은 것이다. 

 

멜깁슨이 감독한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2004년)]에서 수난을 열정으로 표기하여 오역논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열정의 기원은 수난 고통에서 연유되었다는 측면에서 만약 멜깁슨의 오역이라면 계시적인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열정은 내가 나일 수 없게 만드는 우리 내면의 죽은 상태인 것들을 용인하지 않는 마음의 뜨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수난과 죽음을 뚫고 가는 삶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다. 끊어야 할 것은 끊고, 태워야 할 것은 태우고, 풀어야 할 것은 풀고, 울어야 할 것은 울고, 겪어야 할 것은 겪고, 기다려야 할 것은 기다리고, 영원해야 할 것은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 열정의 방향성이자 운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열정을 기적을 만드는 씨크릿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세상 최고의 파산자는 열정을 상실한 사람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상실하고도 열정만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시 일어나 살 수 있다(윌리엄 하워드 아놀드) 인간의 영혼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열정, 위대한 열정뿐이다(드니 디드로) 열정은 천재와 같다. 열정에 의해 기적이 생기기 때문이다(로망 롤랑)”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과 강론에서 말하는 살아 있는 삶은 그렇게 다르고 그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열정이 있어야 한다. "열정이 없는 삶이란, 기적을 바라고 찾기만 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열정이 살아있는 삶이란, 기적을 찾고 바라야 하는 그 상황까지도 받아들이는 삶"이고,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갈등과 분열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또 고통까지도 이겨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있으면서 이미 죽은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열정의 궁극의 지향점은 살아 있는 삶을 살면서 그분이 주신 평화를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선운사의 배롱나무

 

 

 

 

글을 마무리 해 본다.

 

 

[무한서(無限序)라고 쓰고, 무한서(無限書)라고 읽는다.

-It is an introduction of infinite flowers, and it is an introduction of infinite fire.]

 

 

이 글의 주제는 ‘꽃’이라고 쓰고 ‘불’이라고 읽자는 제언이다. 열매 맺지 못한 ‘꽃’에 관한 서론만 쓰지 말고, 살아 있는 삶의 본론을 쓰자는 이야기다. 그러면 결론이라는 열매는 그분이 맺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론을 써야 자신이 그동안 했던 말이나, 행위들을 부족하지만, ‘장난처럼’이라고 자조적으로 바라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고, 믿은 것들이 자기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믿음 보상의 법칙'이 바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