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크로스’(cross)와 공간의 ‘아토포스’(atopos)’, 집으로 가는 길
-The Cross of Time, the Atopos of Space, and the Way to the Eternal Home
[연 중 제 21 주 일 (다 해) 2022. 8. 21. Luc. 13,22-30]
1.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허수경)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이라는 시행에서 보듯, 먼 집으로 혼자 돌아간 당신을 호명하며, 술을 마시는 중이다. 당신이 ‘혼자’ 그 먼 집으로 갔듯, 지금 나도 혼자 가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킥킥’이 왜 나오는가? 흔히, ‘킥킥’이란 시어가 비극인줄 알면서 비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사랑을 잃은 사람의 내면 풍경으로 해석되곤 한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에는 ‘당신’이 열 번, ‘킥킥’이 여섯 번, ‘말줄임표’가 여덟 번 나온다. 이 빈번한 반복이 이 시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소재이자, 읽어내야 할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그대는 언제 당신이 되는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을 때, 그대는 당신이 된다. 또 그 당신은 어떻게 ‘이쁜’ 당신이 되는가? 치병과 환우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나에게 ‘금방 울 것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 사람이었기에, 혼자 생의 ‘참혹함’을 감당한 이었기에, 당신은 그냥 2인칭이나 3인칭 재귀대명사가 아닌 ‘이쁜’ 당신이 된다.
그런, 당신이 없는 허허로운 세상을 건너가다, 불러도 대답없는 당신을 부르다, 거기서 ‘킥킥’이 왜 나오는가? 비극의 절정은 웃음이기 때문인가?
‘킥킥’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잇따라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로 부사다. 부사가 당신을 꾸며준다. 여기에 ‘~거리다’, 혹은 ‘~하다’가 붙으면 목적어가 필요없는 자동사가 된다.
이 ‘당신’과 ‘킥킥’ 사이에 ‘말줄임표’가 있다. ‘말줄임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이전이거나 언어이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두 시간을 병치시키거나 연결시키는 것이 이 말줄임표다.
시간으로 치자면, 당신은 부재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킥킥’은 화자의 현재 상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당신(과거)과 킥킥(현재) 사이에 ‘말줄임표’는 미래인가? 말줄임표는 특정 시간을 정할 수 없는 시간의 '크로스'가 일어난 초시간에 해당한다.
말줄임표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참혹’한 시간을 살았던 당신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별사(別辭)이거나, 당신을 부르며 음복(飮福-제사 지낸 후 음식을 나눠먹는)하는 화자의 깊은 심회이거나. 부재하는 당신을 부르며 울다가, 돌연 웃음을 참지 못하는 정서의 낙차, 시간의 크로스(cross)가 발생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은 ‘인간은 결국, 누구나, 예외없이 혼자 먼 집’으로 돌아가는 ‘고독한 단독자’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존재론적 시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눈물과 웃음>이 원래 한 몸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시간의 ‘크로스’(cross)가 어떻게, 왜, 언제 발생하는가? 라는 또 다른 물음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2. 시간의 크로스(cross)란 무엇인가?
시간의 크로스(cross)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시간은 우리의 상황 인식, 의식 혹은 기대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거 같다. 아래 시간에 관한 인용문은 지난 글에서 일부를 재인용했다.
[‘오늘’이라는 ‘언제’, 그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 http://blog.daum.net/m-deresa/12389705]
①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아까운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오. 오늘을 잡으시오(카르페디엠carpe diem) 내일에 대한 믿음은 할 수만 있다면 접으시오.(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카르페디엠carpe diem” 은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의 한 구절로 흔히 '오늘을 즐기라'고 인용된다. 호라티우스는 고대 로마의 서정 시인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시라고 알려져 있다. '오늘을 즐기라'고 흔히 인용되는 경구. 라틴어 카르페(Carpe)는 '즐기다, 잡다, 사용하다'라는 의미이고, 디엠(diem)은 '날'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인은 오늘이 없는, 현재가 없는 과거나 미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니 주어진 생을 기쁘게 만끽하라는 제언을 한다.
②시간의식의 분석은 기술적 심리학과 인식론의 매우 오래된 교차점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극히 곤란한 점들을 깊이 깨닫고 이러한 문제에 필사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에드문트 후설)
③마음은 기대. 지각.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후설은 <시간 문제>를 성찰하려면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우회할 수 없다고 술회한다. 에드문트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서 전개된 현상학적 시간론은 객관적 시간(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을 그것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명하고 있다.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후설은 시간과 시간의식의 상관관계를 해명하고 시간에 대한 의식은 그것과 결부되지 않은 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작동하는 근원적인 의식이라고 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기대-지각-기억’, 즉 마음이라는 체에 걸러진 것만을 시간으로 인식한다고 보았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는 관점이다. 그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대로 흘러,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며, 현재인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④우리들을 현실 자체에 직면시켜야 한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그 시간은 나의 조바심,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더 늘일 수도 없고 더 줄일 수도 없는 나에게 속하는 지속의 어떤 부분과 합치하고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모든 행동은 미래를 조금씩 잠식하는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없는 것을 붙잡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의 첫 번째 기능이다. 의식에게 있어서 현재란 없다.(앙리 베르그손)
⑤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다.(레비나스)
⑥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한하고 고독하고 불안으로 가득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의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각자의 방법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이 감사이며 반향이다.(하이데거)
⑦ 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건 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해서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 속에 내재(內在)한다. 현재가 미래에 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현재 속으로 선취(先取) 되어 내재한다. 현재는 자신을 부단히 넘어섬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 속에 지양, 보존하면서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화이트헤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던 베르그송은 우리가 체험된 시간(질적)과 시계의 시간(양적)을 동시에 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인 질적인 시간만 ‘실재적인 지속’ 이므로, 그 시간만 미래적인 의미라고 보았다. 베르그송과 같은 맥락에서 사르트르 역시 인간의 미래란 인간의 자유, 즉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레비나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시간관과는 달리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홀로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이나 베르그손이 바라본 ‘순수한 지속의 의미인 시간이 아닌, 나치의 수용소에서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에게 시간에 대한 기대나 예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보았던 것은 당연하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배반하고 예측불허의 시간 속에 출현하는 존재이므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와 다른 시간관을 통해 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로 자기의식의 시작으로 보았다. 시간 앞에서의 ‘나’의 유아론적 주관주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있음’ 속에 포섭되는 내가 아니라, 각자의 ‘있음’에 주목하고 관여할 때만이 존재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는 특권이 나오므로 비로소 존재자에 떠맡겨진 존재임을 알게 되는 순수시간을 시간이라고 보았다. 자신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반면, 화이트헤드는 시간이란 현실적 존재가 객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바라보았다. 나라는 주체는 어떤 시간을 경험하고 그로써 주체로서의 존립을 끝내고 술어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하나의 우주질서의 과정을 살아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실재로 오늘은 “히틀러는 무엇이다”처럼 주어였지만, 내일은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이다”로 서술어가 된다고 보았다. 물질이라는 우주의 시간은 ‘나’를 지우는 냉혹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시간의 얼굴인 과정과 실재라고 바라본 것이다.
이들과는 다른 논의로 시간은 없다.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오늘’ ‘현재’ 만 있을 뿐이라고 바라보는 영성가들이 있다.
⑧시간이 멈추면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문제란 어느 시점의 지각이 빚어낸 인공물에 불과합니다. 평화의 상태는 공간이며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공간에 의해 존재와 경험을 갖습니다. 이때 시간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으므로 미래를 우려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지난일로 고통받거나 다가올 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데이비드호킨스)
⑨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과 화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깨닫는다.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현존이란 바로 오늘을 사는 지혜, 오늘 이 순간을 맛보는 집중력, 그러니 현재에 머물라, 그때 세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Oneness가 된다(에크하르트 톨레)
⑩두려움은 현재에서 오지 않는다.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에서 온다. 현재는 두려움이 없기에 영원히 확장된다. 현재는 너무나 아름답고 순결하며 죄책감이 없어 오직 행복만이 있다. 현재는 그 어떤 어둠도 기억하지 않고 지금 불멸과 영원과 기쁨을 누리는 상태다.(헬렌 슈크만)
데이비드 호킨스 에크하르트 톨레, 헬렌 슈크만이 바라본 시간은 시간이 사라진 상태, ‘오늘’을 사는 존재론적 시간에 대한 통찰이다. 그들은 물질의 우주에서 영혼의 우주를 통합하고 넘어선 시간을 사는 시간의 영성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바라본 ‘오늘’이라는 시간도 우리가 말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된 의미로써의 ‘오늘’이 아니라 ‘평화’라는 어떤 상태로, 영혼의 현주소를 의미한다. 이때, 시간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평화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J의 언명이 적시하는 바로 무시간의 시간체험과 같은 맥락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위의 10명의 신학자와 철학자, 영성가들이 바라본 시간은 단선적으로 실존적 시간관(후설, 베르그손, 레비나스, 하이데거, 호라티우스 )과 존재론적 시간관(아우구스티누스, 데이비드 호킨스, 에크하르트 톨레, 헬렌슈크만)으로 나뉘어 바라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실존과 존재론은 확연히 구획되는 영역이 아닌 바, 과거-현재-미래 역시 확연하게 분절적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은 시간의 크로스를 경험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물질의 우주와 영혼의 우주를 넘나들며, 시간의 크로스를 유연하게 바라본 이들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 앞에 호명된 자로서 우리가 지닌 의식의 층위에서 어떤 내적 시간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을 문제 삼거나 고찰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의식’의 지향이 어디인가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영원과 불명이라는 초시간은 신을 상정하지 않을지라도 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주인이 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크로스는 어떻게 발생하나?
이런 시간을 생각해 보자. 세상으로 난 문은 모두 닫혔는데, 하늘로 난 문은 활짝 열려 있는 듯한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세상으로 난 문이 모두 닫혔다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때이자, 자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때다. 결핍이 곧 두려움이 되는 시간이다. 이때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순차적인 시간을 살 때를 의미한다. 횡적인 시간에 속해있다.
그런데 하늘로 향한 시간은 무한히 활짝 열려 있다고 생각할 때는, 선택할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 세상에 대한 욕망이 가라읹은 시간이다. 이때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어렴프시 오늘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무한히 자신에 대해 성찰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고, 세상이 하나라는 것을 관조할 수 있을 때다. 즉, 세상은 세상이 만든 법칙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을 신뢰하게 된다. 자신이 지닌 능력과 범위에서 타자의 선이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도모하게 되는 때다. 그 시간은 종적인 시간이다.
후자의 시간만을 살게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저 하늘로 갔거나, 득도의 경지에 올라 무림도사가 되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이 두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야하는 지상의 순례자란 점에서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의 화자처럼 <당신과 킥킥> 사이에서 시간의 크로스를 경험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 혹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크로스는 거의 동시에 발생한 <눈물과 웃음>을 이해하는 자로미터가 된다. 또한 시간의 크로스는 영원, 혹은 불멸을 이해하는 키워드이자, 시간도 재물처럼 재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직관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3.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루카13,22-30
이글은 다음 글들의 연장선에서 쓴 글이다.
[‘오늘’이라는 ‘언제’, 그 원홀 혹은 인터페이스]
[‘오늘’의 넓이, 실존의 ‘오늘’에서 보편의 ‘오늘’로]
[상호텍스트성, 모든 사물은 백터다]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루카13,22-30에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참석한 사람들과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로 갈라진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참석한 사람들<---Ⓒ 꼴찌로 참석한 사람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이 입어야하는 <예복>으로 혹은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한 마태오복음 사가의 이중비유를(마태오 7, 13-14/22, 1-14) 루카복음 사가는 단일비유로 제시하고 있다.(루카13,22-30) 여기서 루카복음사가는 앞으로 교회의 시대가 경험하게 될 <계시적인 은총론>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나라의 잔칫상의 참석여부가 그동안 살아온 시간에 대한 손익계산서라면 즉 시간 밖에서의 종말론적인 구원론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하느님 자비나 심판에 초점이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안에서 <이미, 지금 여기>에서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은총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안에서든 시간 밖에서든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 은총과의 만남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 사랑을 믿는 이들에게서조차 구원에 대해 관점이 갈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자만으로 보는 시선과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을 믿음의 결여로 보는 시선, 구원의 확신을 신약의 구원이라고 본다면, 구원을 두려워하고 유보하는 것을 구약의 구원이라고 보는 견해...믿는 이들 안에서 구원에 대해 이렇게 갈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구원은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인가? 에 대한 믿음의 바탕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루카13,22-30은 구원에 대한 세 개의 시선이 나온다.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절)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루카13,22-30은 계시적인 은총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도로 이어지는 교회의 시대에 교회가 경험하는 어떤 신과 인간이해를 동시에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의 구원은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 자유의지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의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는 결국 모든 이가 은총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먼저 합류하냐 나중에 합류하냐의 차이일 뿐이다.
Ⓐ<-------------------------Ⓒ----------------------->Ⓑ
구원이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의 결과인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 혹은 그 결과인가를 바라보기 위해 Ⓐ에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에서 이 ‘모른다’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성서에서 <안다/모른다>의 대비는 수없이 반복되어 나왔던 문형이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총론은 <애주애인>이다. 그런데 총론이 각자 주어진 실존의 상황으로 나누어질 때, 즉 각론으로 들어가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 안에서 <앎과 모름>의 문제는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각자의 길이 다르듯, <애주애인>이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에 나오는 이들은 무엇을 몰랐을까? 예수님과 항상 대척점에 있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몰랐던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이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몰랐던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삼위일체 사랑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의 그 모름은 전능의 하느님과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것이었다. 바오로가 다마스커스 체험 전에 몰랐던 것은, 네가 박해하는 그 사람들은 바로 나라는 것이었다. 유다가 몰랐던 것은 죄보다 자비가 크다는 것이었다. 부활의 첫 증인 마리아막달레나가 몰랐던 것은 그분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마르타가 몰랐던 것은 활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부자청년이 몰랐던 것은 재물에 대한 재배치였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몰랐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그분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누구를 위해서 울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그분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까지 그분에 대해 완벽하게 알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시 교리적으로만 부활을 이해하는 이상, 그분을 완벽하게 알지 못한 채, 앎만큼 걸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순례 자체가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안다는 것은 곧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너를 모른다’는 표현은 ‘너는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 너는 아직 모른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혹은 '너는 아직 부활이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르는 것이 치명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란 사실 앞에서 안셀무스의 <앎>에 대한 통찰을 받아들이게 된다.
Ⓓ알기 위해서 믿고, 믿기 위해서 안다(안셀무스, 『모놀로기온』)
26절에 보면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이미 그분의 이름을 알고, 그분과 같은 공간에서 친교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네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는 것.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네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
여기서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나는 너를 모른다>는 표현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같은 시간을 살지는 않았다는 의미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좁은문>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좁은문>을 무엇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이해가 판이하게 엇갈린다. 대부분의 성서해설서들은 <파스카잔치>에 참석하는 <좁은문>을 <십자가> 혹은 <회개>로 바라보고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좁은문>을 어떤 제약이 많아서 좁은 문이 아니라, 혹은 너무 경쟁이 치열해서 통과할 수 없는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문을 선택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좁은문>이라는 것을 Ⓑ의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여기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분이 공생활의 벽두에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던 이사야61장에 나오는 가난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루카1, 16-30에 나오는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들로 상징되는 중심부 담론에서 제외된 아웃사이더들이었을 것이다.[참고: 오늘의 넓이, 실존의 오늘에서 보편의 오늘로]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루카4, 21-22)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22절)
그렇다면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에서 이방인 혹은 소외된 혹은 가난한 이들로 일컬어지는 그들은 어떻게 그분이 메시야인줄 알았을까?
여기서 동서남북 사방에서 그분의 잔칫상에 참석하는 문을 발견하는 그들은 단지 <오늘>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들에게 <오늘>을 보여줄 수 있는 그 분이 <하늘>이고, <주님>이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과거,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그로인해 불확실한 미래, 희망이라는 말이 사치인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본의 아니게 간신히 <오늘>만을 지탱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분이 베푸는 ‘오늘’만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에 나오는 그 <오늘> 로 족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만난 <오늘>이 <오늘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에서 '오늘'의 의미에 비한다면 찰라에 해당하는 순간의 ‘오늘’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의 ‘오늘’이 영원의 '오늘'을 여는 열쇠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들 생애에 유일하게 체험한 잔칫상이 영원한 잔칫상이 되는 그 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에서 이들은 '세상으로 난 문은 모두 닫혔는데, 하늘로 난 문은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야곱이 베텔(Bethel)에서 꾼 꿈처럼,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 것이다”(창세기28, 10-22)
여기서 시간의 크로스가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와 <동서남북에서 온 사람들이>이라는 표현은 공간의 토포스에서 아토포스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상적 생존의 공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토포스’라 칭한다. 그 공간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때, ‘아토포스’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주어진 토포스(topos)를 부정하고 불평등하게 배치된 감각의 ‘토포스’를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배치하는 ‘아토포스’(atopos)(진은영)
야곱이 형을 만나러 가는 강가에서 돌을 베고 자던 그곳은 '토포스'다. 그런데 자기가 누운 그 자리가 하늘과 땅이 연결된 공간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공간은 '아토포스'가 된다. 즉 베텔은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되는,우리가 돌아갈 그 집에 해당한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그 <오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오늘>이 바로 영원 혹은 불멸과 연결되는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잔치에 참석한 이들은 구원이 무엇인지, 구원이 은총과 자유의지(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자체)와 어떻게 만나는지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의 크로스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그 상태를 세련되게 표현하지도, 인식하직도 못하겠지만, 온몸으로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끼면서 자신들을 처음으로 사람대접 해 준 분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눈물과 기쁨>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루카13,22-30으로 돌아가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절)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결국 Ⓐ의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은 먼 길을 돌고돌아 <오늘>이라는 그 영원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도 Ⓑ의 사람들처럼 꼴찌지만 Ⓒ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꼴찌일지라도 구원에 모두 합류하게 된다. 하느님은 아버지시고, 예수님은 사랑이시고,성령은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분의 은총이 합쳐져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시간과 하느님 시간과의 만남이 바로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눈물과 기쁨>이라는 시간의 크로스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바로 구원의 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하느님이 주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을 찬미한다는 것!
연중 21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을 찬미하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일 거라는 것을 전재하며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가면 좋을까를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각자 가는 길은 달라도, 같은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도착해야 할 그 목적지는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길을 걸어가겠지만,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최종 목적지는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그런데, 구원을 받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구원이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는 않겠지요?’라는 의미로 질문한 것인지, 아니면 구원받을 자신이 없는 사람이 ‘혹시 저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는 뜻으로 질문한 것인지, 그 이유나 배경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유다인들은, 유다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장차 하늘나라에 들어갈 보장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랍비 메이르 (Meir)는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신명기 6, 4절의 첫머리에 나오는 유다이즘의 신앙 고백문 ‘세마 이스라엘 (Shema Israel)’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기도를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장차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의 자녀로 간주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좁은 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구원은 함부로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누구도 이미 구원을 보장받은 사람도 없고, 또 누구도 구원에서 미리 배제된 사람도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하시며, 이어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그 좁은 문을 발견하기가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은, 찾기 힘든 문이어서 좁은 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으려고 하지 않아서 좁은 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한 사람들은, 결코 그 좁은 문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또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기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해서 구원을 포기한 사람은, 그 좁은 문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좁은 문은, 경쟁률이 높다는 의미에서 좁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고 작아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에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좁은 문은, 때로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묵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경쟁을 통해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경쟁에 관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경쟁할 때는 아무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하지만 내가, 나 자신과 경쟁하려고 할 때는 모든 사람이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볼 다른 하나는 기쁨과 고통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 성모님의 경우에, 성모님의 가장 큰 고통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가장 큰 기쁨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성모님에게는 기쁨과 고통이 모두 예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고통을 이겨내면, 그 고통은 세상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은 때로 은총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더 큰 세계를 향해 눈을 뜰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면, 고통은 은총을 체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강론 때,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 말씀을 여러 번 인용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보면,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우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하느님의 자비가 만나야 우리는 구원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다가스카르語로 자비는 “주님의 마음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면서, ‘주님의 마음이 나에게 옮겨오기’를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의 마지막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에 이른 사람의 모습은, 인생은 때로 힘들고 또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인생은 참 아름다웠다.’는 고백을 하면서, 눈을 감는 그 모습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런 고백하면서, 눈을 감는 사람의 모습이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을 찬미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을 찬미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묵상하면서 이번 한 주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다른 길을 걷고, 다른 삶을 살더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삶은 참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삶을 찬미하는 모습’으로 생을 마칠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강론에서 “우리들은 각자의 길을 걸어가겠지만,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최종 목적지는 하늘나라”라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통찰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에서 보듯, 우리의 자유의지에 그분의 은총이 만난 결과가 바로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순례 중에 할 수 있는 것, <좁은문, 기도, 경쟁, 슬픔과 고통, 자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통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하느님께서 주신 삶은 참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면서, 그렇게 삶을 찬미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순례가 마감되었으면 좋겠다는 제언을 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오늘을 어떻게 보내는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론은 우리에게 그것을 묵상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을 찬미하는 사람”은 무엇일까?
이는, 기쁨으로 사랑을 들어 높여라, 라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현재를 살아라, 오늘을 살아라, 오늘에 충실하라, 이 순간을 살아라, 니체의 제언처럼 <노래하라, 더 이상 말하지 말라>(『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라고 할 수 있디.
즉, 눈물속에 있는 웃음을 보아라. 고통속에 있는 은총을 보아라, 지상의 삶을 천상적 삶으로 들어 올려라, 구원을 받으려고 애쓰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처럼 감사하고, 살아라, 아직 지상의 나그네지만, 천상에 든 사람처럼 살아라, 즉 삶을 사랑하는 차원을 넘어, 슬픔과 고통이 기쁨과 한 몸이라는 것을 바라보라! 그러니 눈물을 흘리되 고개를 들어 저 하늘을 바라 보라! 이미 천상의 집에 도착한 사람처럼 노래하라! 무덤에서 그분을 찾지말고 부활의 삶을 살아라! 라는 거시적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3년 동안 강론을 묵상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Intermezzo from Cavalleria Rusticana - Pietro Mascagni - The Evergreen Symphony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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