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질문하는 인간 호모 퀘스천즈(Q)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본질과 존재의 변증법’으로

나뭇잎숨결 2022. 8. 2. 10:40

 

 

 

 

질문하는 인간 호모 퀘스천즈(Q)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본질과 존재의 변증법’으로

- The questioning human homo queschons 'the dialectic of master and slave' to 'the dialectic of essence and existence'

 

 

[연 중 제 18 주 일 (다 해) 2022. 7. 31. Luc. 12,13-21]

 

 

 

<글을 올리고, 보충 5개를 추가했습니다>

 

 

1. 누가 계속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박용하)

 

 

 

박용하, 「견자見者」를 읽어본다.

 

누가 자꾸 삶을 뛰어내리는가/누가 자꾸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그렇다면 네 영혼은?/네 손목은? 네 발목은?//누가 자꾸 지구를 뛰어내리는가/누가 자꾸 햇빛과 달빛을 뛰어내리는가/눈물도 심장에서 뛰어내린다//그렇다면 네 슬픔은?/네 진눈깨비는? 네 고통은?//너의 심장은 발바닥에서부터 뛴다/너의 노래는 머리카락에서도 자란다//그렇다면 네 피는?/네 시선은? 네 호흡은?//물에 빠진 사람은 물을 짚고/허공에 빠진 사람은 허공을 짚을 때처럼/빠지는 것을 계속 짚을 때처럼//누가 계속 죽음을 뛰어내리는가/누가 계속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박용하의 「견자見者」에는 동사 “뛰~”에서 파생된 8개의 서술어 ‘뛰어내리는가’, ‘뛰어내린다’ ‘뛰다’기 나온다.

 

박용하의 「견자見者」에 나오는 ‘뛰어내리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왜 시인은 ‘각자(覺者)’라고 하지 않고, ‘견자(見者)’라고 했는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거 같다. ‘각자(覺者)’와 ‘견자(見者)’는 어떤 궁극적인 것을 보았다는 점에서 같은 <보다>라는 어형에서 분화된 어휘다.

 

흔히, ‘각자(覺者)’는 부처를 가리키는 형이상학적 용어로 쓰이곤 한다. 자각·각타(覺他)·각행원만(覺行圓滿)의 세 덕을 갖춘 사람. 곧, 부처를 일컫는다. 무엇이 궁극의 진리일까?라는 질문 속에서 우주와·인생의 진리를 깨달아서 모든 의혹과 번뇌에서 자유로워져 마음의 안정을 찾은 사람. 고해라는 삶의 풍랑 위를 유유히 걸어가는 깨달은 이를 지칭한다.

 

그런데 ‘견자(見者)’는 궁극의 본질을 보았지만, 평화나 안정에 목적이 있지 않다. 즉 108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  견자(見者)의 목적이 아니다. 견자(見者)는 길 위의 뜨거운 삶을 원하지 지상의 편안한 거처를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긴 보았지만, 번뇌 그 자체의 소용돌이가 되려는 이가 ‘견자(見者)’라고 할 수 있다. ‘각자(覺者)’가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라면, ‘견자(見者)’는 소용돌이 그 자체가 된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 맥락에서 랭보는 시인을 ‘견자(見者)’라고 칭했다. 세상이 볼 수 없는 궁극의 본질을 본 사람, 그럼에도 본 것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 영원히 길 위의 사람이 시인이라고 본 것이다. 세상이 볼 수 없는 궁극의 본질을 본다는 것은 상식을 뒤집는 전위의 각성이기에 불가피하게 자기 ‘착란(錯亂)’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시인은 늘 착란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착란(錯亂)’은 감정이나 생각 따위가 뒤엉켜 혼란스러운 상태로, 착란증세를 보이다, 정신 착란을 일으키다 등으로 정신분열을 겪는 카오스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명사(사물)에서 형용사로 넘어간 그 출렁거림의 상태다.

 

 

 

그렇다면, 박용하의 「견자見者」에서 시인은 무엇을 보았는가?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의 갈퀴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내리는가’는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시를 써서 절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시대에 시인은 이 세상에 뛰어내리듯 심장에서 튀어나온 언어를 세상에 뛰어내리게 하는 사람, 가차없이 추락시키는 자라고 본 것이다.

 

(덧붙여, 시집 한권은 보통 7,000원~10,000원이다. 출판사가 30%~50%, 세금이 10% 나간다. 시집 한 권에는 대략 50편 이상의 시가 실린다. 조지훈의 ‘승무’는 6개월 이상 걸려 완성했다고 술회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100회 이상 탈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인의 가난은 예수나 부처의 가난과 거의 동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히려 가난을 어떤 덕목으로도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수도자의 ‘청빈’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박용하의 「견자見者」에서 ‘뛰어내리는가’는 정신착란 증세의 분열증자의 말(이상의 「오감도」 연재를 독자의 항의로 그만두며)로 알아듣는 세상에서, 왜 자꾸 시를 쓰는가? 왜 자꾸 세상 속으로 언어를 ‘뛰어내리게 하는가’의 비유로 읽을 수 있겠다.

 

박용하 시인은 사람의 ‘눈’은 ‘심장에서 튀어나왔다’고 할 정도로 어떤 사람의 눈빛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원천을 알 수 있다고 쓰기도 한다. 자신의 팔딱거리는 심장에서 튀어나온 눈빛인지? 저 저잣거리의 탐욕에서 이미 썩어버린 눈빛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고 쓸 정도다. 그래서 시인의 눈빛은 세상의 군더더기를 가차없이 베어버리는 ‘숫돌에 간 ‘낫’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이순신이 든 ‘장검’이 아니라 촌부가 든 ‘낫’이다.

 

그러기에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혼'에 끌려 언어의 순교자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기도 한다. ‘세속화된 종교’보다 더 거룩한 종교가 시인의 내 뱉은 한 줄의 시라고 본 것이다.

 

박용하의 「견자見者」를 해석하는 시인의 또 다른 시, 「입」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에서/ 너는 뛰어내린다/ 그처럼 위험하고/ 너는 그처럼 아슬아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생처럼/ 한 번 가버리는 생처럼/ 뒤돌아봐도 그만인 사람처럼/ 너는 절대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아마도 너의 뿌리는/ 너도 대부분 모를 것이고/ 너의 착지도 너의 얼굴은 영영 모를 것이다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인 것이 무엇일까. ‘입’일 것이다. 입 속은 절벽이고, 입 바깥은 낭떠러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서 ‘뛰어내리는 너’는 시일 것이다. “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너의 뿌리”), 그 말이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너의 착지”)를 시인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난해한 숙명 앞에서 속수무책인가“(신형철)

 

그 난해한 숙명은, 그가 세계에 대해 질문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비극이다. 시의 어머니가 언어의 아름다운 비극이기 때문이다.

 

 

 

 

 

 

 

 

 

2.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13-21

 

 

 

어느 시대에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치 시인이 ‘언어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영원이라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루카 12,13-21은 전하고 있다.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라고 전하는 루카 12,13-21에서 ‘탐욕’과 ‘부유함’이 어떻게 20절의 ‘목숨’ 과 ‘생명’ 즉 ‘영원’과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21)

 

Ⓐ와 Ⓑ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개의 질문을 해본다.

 

질문1. 왜 욕망은 탐욕이 되는가?

 

질문2. 탐욕은 왜 생명 혹은 목숨과 대척점에 있는가?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하고 있다. 탐욕은 인간이 지닌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욕망 자체가 우상숭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욕망은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실존을 끌어가는 추동의 힘, 순수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즉, 욕망 그 자체는 순수한 어떤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 궤도를 벗어나 질주할 때, 욕망은 탐욕이 된다. 그때, 탐욕은 물신주의를 낳는다. 물신주의는 재물이 신의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과 목숨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신주의는 죽음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티로, 시돈, 벳싸이다, 카파르나움, 소돔과 고모라, 이런 특정 지역에서 그분의 축복과 경고가 어떤 상황에서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지칭할 때, 그 탐욕은 세 방향에서 거론된다. 즉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인 방면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탐욕을 경계하되, 특히 물질적인 면에서 탐욕을 목숨과 생명의 대척점에서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재물이야말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재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영원과 영원 아닌 것으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탐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탐욕(貪慾)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악의 근원으로 보는 7대 죄악 중 하나로 7대 주선에서 권하는 <자선, 선행, 절제>와 반대 개념으로 쓰인다. 또 분노와 무지와 함께 ‘삼독’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람이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는 무지가 탐욕과 분노의 근원으로 보기로 한다. 사람이 진정으로 알아야 하는 <상생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 삼독으로. 이 삼독은 모두 나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물의 존재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후안)무치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무치와 무지가 나에게 맞으면 욕망은 탐욕으로 치닫고, 나에게 거슬리면 분노로 표출된다고 본 것이다. 탐욕은 <상생의 고리>를 끊는 것으로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의 상태라고 본 것이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명제를 질문으로 바꿔본다------------->“욕망은 어떻게 탐욕이 되는가?”

 

 탐욕을 이해하는 것은 욕망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탐욕의 뿌리가 욕망이기 때문이다. 탐욕은 그 뿌리에 <결핍, 요구, 욕구, 욕망>이라는 실존의 '충족이유율-배고픔'이 내재해 있다. 어떤 사람도 한순간에 탐욕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의식의 자립성'과 관련하여 정신과 물질의 충돌,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사회주의 이념인 유물론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내가 욕망하는 것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대리충족의 욕망이론을 낳기에 이른다.

 

주인의 자립성이란 다만 사물을 가공하는 노예에게 떠맡겨버리는 것이다. 주인이 성취한 의식은 자립적인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비자립적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헤겔, 정신현상학, 한길사, 임석진 역, 2005)

 

(보충1)헤겔은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주인과 노예>의 도덕으로 규명하려 했던 사유의 첨탑이었다. 인류 역사는 헤겔 이전과 헤겔 이후로 갈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겔을 철학사에서 선험론과 경험론을 넘어선 관념론자로 분류하지만  헤겔은 그 어떤 철학사조에도 집어넣을 수 없는 그냥, <헤겔철학>이라고 해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너무나 다방면으로 그는 인류역사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도덕을 이해하지 않고는 오늘 글의 주제인 <탐욕>에 대해 <천당 가고 싶으면 탐욕을 내려놓아라>, <자유롭고 싶으면 탐욕에서 벗어나라>는 교조적 동어반복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으로 스며들지 못한 그런 동어반복을 J가 원할까?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도 살 수 없다. 빵과 사랑의 관계를 아는 것이 주체다. 그것이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도덕을 쓰게된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될 <사랑과 빵>의 문제에 대해, 헤겔은 <자아<--->비아>에서 '주체'의 변증법으로 통합하라는 가설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에게서 나라는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 지나? 나라는 주체란 생동하는 실체 즉 현실적 존재여야 한다. 주체는 동일률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타자화하는 가운데 자기와의 매개”를 행해야 한다. 자신을 타자화하는 분열 과정을 거쳐 회복된 동일성 즉 “밖으로 향하면서 곧 다시 자기 자체 내로 반성 · 복귀”한 동일성만이 진정한 주체이자 나의 실체라고 보았다. 이것이 진리라고 본 것이다.  헤겔은 나, 주체, 자아조차도 대립과 통일의 산물이어야 했다.

 

<주인과 노예>의 도덕이 무엇인가? 우리 자신안의 두 자아다.  주인은 노예시장에서 사들인 노예에게 자신의 삶의 모든 물질적인 것을 가공-생산하게끔 주문하고 동물적으로 노예를 길들인다. 그리고 자신은 노예가 노동하는 동안 '자립적인 의식'만 기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노예는 동물적인 노동을 감당하면서 주인을 위해 오직 물질을 생산-가공하는 동물적인 상태로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노예는 주인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주인이 매일 그토록 갈망하는 것이 <자립적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노예는 주인의 그 정신을 흠모하다, 드디어 자립적 의식을 지닌 주체로 각성되기에 이르고, 주인에게 죽음을 무릎쓰고 부당함에 대해 항거하기 시작한다. 노예가 담당했던 물질의 가공-생산하는 일은 주인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노예는 주인이 갖고 있는 자립적 의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주인은 노예가 담당하는 그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여기서 주인은 노예를 버릴 수도 곁에 둘 수도 없는 딜레마에서 서서히 각성된 노예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노예에게 자신의 지분을 나눈다. 노예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 조금씩 양도하게 된다. 자신의 주체적인 의식이라는 것이 노예가 없다면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도 없지만 정신만으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주인은 안 것이다. 정신(주인)과 물질(노예)의 이 변증법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순수이론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영국의 노동자-자본가를 모델로 이 정신적인 <힘의 의지>를 정:노동자(노예)<-->반:자본가(주인)로 끌어들여 합: 사회주의 이론을 만들게되고, 그것을 레닌은 정치적 이념으로 받아서 실천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알렉상드르 코제브, 역사와 현실 변증법, 설현영 역, 한벗, 1981)

 

헤겔의 『정신현상학-헤겔 독해 입문』의 연구자인 A. 코제브는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철학자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노예와 주인의 의식이 전도되는 지렛대인 자립적인 의식이 도출되기도 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예는 주인을 보고 주인의 주체적인 의식을 욕망하면서 닮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주인은 노예를 보면서 노예의 거짓 추앙일지라도 그것을 갈구하는 자신을 보고 그런 존재라는 환상을 갖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둘은 공존의 존재라는 또 다른 합을 도출한다고 보았다. 노예가 없다면 주인도 없고, 주인이 없다면 노예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주인은 처음에 노예를 쉽게 갈아치워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노예의 노동에 의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노예 역시 자립적 의식을 갖게되면서 그동안 자신이 했던 노동을 경멸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다시 주인과 노예의 입장은 뒤집힌다. 여기서 주인과 노예는 엎치락뒷치락 하면서 종속적인 삶을 살게되는 공식이 만들어진다고 본 것이다.

 

코제브는 이를 연인과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내가 연인을 사랑하기 보다는 연인이 나를 더 사랑해주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욕망이론의 초석을 놓는다. A가 먼저 B를 사랑했는데, 어느 순간 B는 A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역삼각형의 변증법을 도출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그의 강의를 듣던 조르쥬 바타유, 메를도 퐁띠, 르네 지라르, 앙드레 브르통, 자크 데리다, 미셜 푸코, 자크 라캉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주인-노예의 해석은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거울단계의 모방욕망>이론을 낳기에 이른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자크 라캉, 에크리, 새물결, 홍준기 역, 2019)

 

라캉은 프로이드와 코제브의 영향을 받으면서 욕망은 항상 요구를 넘어서서 요구 이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욕망이 요구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욕망이 요구와 욕구를 초월하며, 욕망이 충족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탐욕이 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다. 욕망의 열광을 모방한 요구는 욕망의 토대가 되는 존재의 근본적인 결여를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욕망은 늘 요구의 공격을 받는다. 즉 욕망은 요구에 의해서 심리적으로 점령당한다. 요구에 의해서 욕망은 또 다른 것을 욕망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요구도 욕망을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라캉은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욕망이란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즉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거울단계의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놓고 아버지와 경쟁한다. 아들은 자꾸 아버지의 스타일을 흉내 내거나 아버지를 미워한다. 여기서 아버지 살해의 오이디푸스 신화가 등장한다. 그러나 아들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이 완전히 자신의 요구를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대상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그런데, 거울 단계를 지난 아들은 아버지의 욕망이라는 것이 우물안 개구리의 욕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들은 여기서 아버지의 욕망에서  벗어나 세상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욕망을 능가하기에 이른다. 아들은 욕망이 집대성된 물신주의를 낳고 모든 종교에서 삼독으로 규정하는 탐욕의 화신이 된다. 스스로 자신의 신이 되어버린다. 탐욕의 두려움을 쾌락이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욕망은 결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생산적인 것이다(들뢰즈, 앙띠-오이디푸스, 최명관 역, 민음사, 1994)

 

헤겔-코제브-프로이드-라캉으로 이어지는 모방욕망은 들뢰즈에 이르러 욕망을 결여로 볼 수만은 없다는 <생성이론>으로 갈라진다. 욕망을 종교와 윤리, 심리학에서 해방시키려 한다. 실존주의의 근거다.

 

그렇다면 욕망은 왜 탐욕이란 악으로 보편종교의 3대 악이자 삼독의 원흉으로 표상되는가? 이는 욕망이 들뢰즈가 간파한 대로 생성의 이론에 머물지 않고,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욕망이 탐욕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이 요구와 욕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탐욕으로 넘어가는 구체적 현장을 소유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을 대체할 물질에 대한 우상숭배, 물신주의라는 끊을 수 없는 고리를 인류는 낳기에 이른다.  존재 자체로 자신의 존재의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재물로 존재의의를 바라보기에 이른 것이다. 물질적 욕망은 쾌락원칙과 동행하여 쾌락이 존재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재물이 많으면 훨씬 쾌락적인 삶을 살 기회도 많다. 본능은 쾌락의 극한을 맛보려 한다. 그뿐 아니라 물신주의와 쾌락주의는 세상 권력에 의해 보호를 받기조차 한다. 자신이 주인의 위치에 있다는 착시현상에 방점을 찍게된다. 자신의 탐욕에 도취된다.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보충2)여기서 묘한 현상이 벌어진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는 J의 언명은, 물신주의에 길들여진 어떤 이들에게 좋은 말씀으로 밑줄이 그어진다는 것이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좋은 말씀으로, 추종과 믿음이 섞이는 순간이다. J를 믿는 것이 아니라 J의 추종자가 된다. 추종은 거룩한 취미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거룩한 취미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 합쳐질 수 없는 두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차라리 <신은 죽었다>라고 물신주의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신은 있다>라는 물신주의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신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왜 물신주의라는 쾌락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꿈꾸게 되는가?에 대해 질문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변곡점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도덕에서 인간이 정신과 물질의 충돌을 어떻게 다루려고 고뇌했는지 소략해 살펴보았다. 또 코제브를 통해 인류 역사가 빵의 시대에서 정신의 시대로 오락가락 하면서 둘의 공존을 모색했으나, 결국 인간은 라캉의 통찰처럼 욕망과 쾌락과 힘에의 의지가 뭉쳐지면서 물신주의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일말의 향수가 문신처럼 남아서 물신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신을 믿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영원하지 않은 삶의 방식으로 영원을 꿈꾸는 아이러니는 인간의 심연, 혼란 그 세 측면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두려움-실존에 대한 두려움과 구약의 백성들처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에 포위당해 있으며, 한편으로 <자기원인>을 그리워하고 있는 존재이며, 다른 한편으로, 욕망은 알아도 <영원은 모른다-예수님의 사랑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의 신에 끌린 것이지 사랑에 끌린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J에게 끌리기는 했는데 J의 사랑을 할 수는 없다. 이 딜레마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헤메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연구자들은 이런 딜레마에서 해방되는 길을, 사물이라는 실존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서 만나는 <존재>만이 우리가 그토록 찾아헤메는 <순수현실태>라고 바라보기도 한다. 많은 성인들의 고백처럼,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는 그 어떤 휴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보게된 바로 그 지점이  <순수현실태>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존의 껍질에 불과한 本質이라는 표피를 뚫고 들어가서 存在의 순수현실태를 찾아내었다”(E.질송, 토마스트 실재론과 양식비판, 서광사, 이재룡 역, 1994)

 

이에 대해 루시 멜러리는(톨스토이, 『인생독본』에서 재인용,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20) 생명의 법칙에서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법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원인은 보이지 않지만 결과는 눈에 보인다. 원인은 무한하지만 결과는 유한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모든 힘의 원인을 믿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쓸모없고 무익한 죽음이 예정된 덧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존재>를, 모든 있음의 원인으로, 원인이 세상에 드러난 결과를 <본질>로 설명하는 이런 이론들의 최종 귀결점은 왜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라는 유한한 것을 추구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동시에 꿈꾸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보충3)여기서 <존재와 본질>의 변증법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형상과 담론>, <정신과 물질>의 변증법과 비슷한 맥락이다. 존재인 "있음"은 비존재인 "있지 않음"이라는 것으로만 이해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아닌 것과의 관계속에서만 나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탐욕'은 '비움' 속에만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에 해당한다. 그래서 J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이르신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경계하라는 것인가? 를 찾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는 길은 우리의 실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하면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들으면 그 길을 갈 수 있다. 또한 들으면 말해야 한다. 말할 상황이든 말할 상황이 아니든, 말해야 한다. 

 

위에 인용문들에 나오는 헤겔, 코제브, 라캉, 들뢰즈, 질송, 루시멜러리는 세계와 인간과 신에 대해 모두 질문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내려준 답을 보고 다 안다고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아니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실존의 숙제-<빵과 정신>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본질적인 그 무엇을 찾으려고 세상과 세상 너머를 뚫고 들어가 찾은 답을 세상에 투척하듯, 혹은 뛰어내리듯 던진 것이다.

 

질문하는 호모 퀘스천스와 루카 12,13-21은 다음과 같이 도식할 수 있다.

 

Ⓒ,Ⓓ,Ⓔ,Ⓕ-------->Ⓖ+Ⓗ-------->Ⓐ+Ⓑ

 

우리는 이 도식에서 루카 12,13-21에서 왜 탐욕이 생명과 목숨과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즉 탐욕으로는 즉 눈에 보이는 물질의 부유함으로는 결코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없는지를 바라보게 된다. 수단이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재물 혹은 물질의 복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이 탐욕으로 인해 재앙의 도구-상생의 고리를 끊는- 가 된다는 것을 J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왜? 모든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인류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에 대해 모든 세대, 모든 공간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계속 질문하고, 고민하고, 그가 바라본 것을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또 말했다. 어떤 본질을 본 사람들은, 혹은 들은 사람은 말해야 했다. 먼저, 들은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해야 했다. 듣던지, 듣지 않든지 말해야 했다. 말하는 자신이 그 말과 괴리가 있음을 알 때도, 그 쓰라림을 감당하면서라도 말해야 했다. 

 

결국 모든 생명체는 자기 자리로 돌아갈 때, 스티브 잡스처럼 들어야 하는 말을 듣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무엇이 영원히 가져갈 수 있는 것인지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오늘, 그것을 미리 들은 그 누군가는 계속 말해야 한다. 그들은 질문하는 이들이었기에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다>라고 전한다. 그런데 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언어이고, 말로 그것을 전해야 한다. 누군가는 어떤 깨달음 도를 닦기 위해서 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살기도 한다. 그렇기에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 사람들은 그가 들은 것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말해야 한다.

 

예수나 부처는 그들의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들 주변의 제자들도 기록하지 않았다(아니 못했다) 그럼에도 그분들 사후에 그분들의 말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삶 속에서 말씀으로 계속 살아남았다. 예수 사후 50년 이후에 예수어록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그 어록들과 행적을 경험한 누군가에 의해 그 시대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번역과 번역을 거쳐 오늘 우리 앞에 성경이란 이름으로 놓여있다. (바오로사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기에 직접 자신의 행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영원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재물이나 물질이라는 유한한 것에 결코 가려질 수 없다는 하나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보충4)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가 이글의 출발점이다. 모든 탐욕은 그 근저에 욕망이란 이름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쾌락주의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실존의 두려움을 쾌락으로 마취시킨 것이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풍랑이 치는 호수위를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질과 정신이라는 풍랑이 치는 호수를 건너는 것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14,22-36에서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오너라-저를 구해주십시오-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베드로와 J의 대화 맥락에서 우리는 그 답을 본다. 물질과 정신의 풍랑 속에서 그분이 알려준 <사랑>만이 탐욕의 호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탐욕의 호수에 누구든지 빠질 수 있다.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내 욕망의 현주소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보충2)에서 언급하였듯, 물질에도 끌리고 동시에 하느님에게도 끌린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 헤겔이 언급한대로 주체인 나를 알게  되는 길이다. '나'를 모르고 '너'를 사랑할 수는 없다. J는 언제나 <'나'는 '너'에게 말한다>라는 형식으로 기적을 행했다. 제자들에게 자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3.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을 찾으라’

 

 

연중 18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영원히 살고 싶다면, 지금 살아 있을 때,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을 찾으라,”고 전한다. 그 영원한 것을 어떻게 추구하고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전례의 주제와 관련된 단어들은, 허무저 위의 것그리고 탐욕으로 지칭되는 어떤 시간들을 통과하거나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땅의 생존방식에서 하늘의 생존방식으로 생존방식을 변화-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재물이라는 형태로 주어진 이 땅의 생존방식을 진정으로 누리는 것이자 그 재물을 축복하는 길이라고 강론은 전하고 있다. 축복으로 받은 재물을 재앙으로 만들지 말라는 제언이다. 

 

(단어 하나가 문장을 낳고, 문장이 단락을 낳고, 단락이 한편의 글을 낳는데, 강론의 일부를 발췌하는 것이 죄송하다. 하여, 해석보다는 강론 중심으로 발췌해 보았다.)

 

사람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재물이나, 또는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좋아하고 또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들이 많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영원한 것이나 영원히 지속되는 것들은 그리 많지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것이나 영원히 지속되는 것’들이 많지 않다는 그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코헬렛(전도서)의 저자는 오늘 제 1 독서에서 모든 것이 허무로다.”하고 말합니다.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저 위의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오늘 전례의 주제와 관련된 단어들은, 허무저 위의 것그리고 탐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은 우리가 수없이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단어들이고, 이 단어들을 접하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기는 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의 질문 속에서, 깊은 고민 속에서 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재물을 얻기 위해서 고민했고, 힘썼기 때문에 쉽게 놓치 못하기도 한다. 그것이 모방욕망이라는 것을 한번도 고민해 보지 않아서 진정한 욕망으로 착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의 전례의 주제를, 달리 표현해보면 영원한 것들을 추구하고,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실상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을 찾고, 또 자신이 가진 것들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재물을 모을 줄도 알고, 재물을 모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모은 그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재물을 모을 때, 어떻게 써야 할지를 미리 생각하고, 모으는 사람은 더더욱 없어 보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가장 친한 첫 번째 친구는 그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면서도, 그의 무덤까지만 같이 가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친구는 그가 죽는 순간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인도되는 순간까지도 함께 하였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친구는 돈이고, 두 번째 친구는 가족입니다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사실, 첫 번째 친구로 묘사되었던 돈은, 죽음의 순간에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로 묘사되는 가족도, 무덤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선행만이 하느님께 인도되는 순간까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각자 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이 무엇이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저 위에 있는 것,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잡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서)

그 글의 일부를 발췌해보면(...)나는 비즈니스의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나는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병들어 누워서 과거를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습니다. 정말 자부심을 가졌던 사회적 안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서 희미해지고, 의미가 없어져 간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깨달았습니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에는 부와 무관한 다른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다주는 환상이 아니라,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를 선사하셨습니다. 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입니다. 그 기억이야말로 당신을 따라다니고, 당신과 함께하고, 또 당신에게 삶을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유함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침대는 무슨 침대이겠습니까? 그것은 병들어 누워 있는 침대입니다.

 

 

죽음이 그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었는지, 아니면 그가 깨달음을 얻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깨달음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는, 그의 삶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깨달음을 갖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만도, 그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끝까지 자신이 가진 것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들을 모으는 데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저세상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을, 모으는 데에만 시간을 써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또 저세상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시간을 낭비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살펴봐도, 지금 내가 모으고 있고, 또 모으려고 하는 것들 중에서, 우리가 저세상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재산이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음은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문제는 재물을 모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그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고, 모으는 사람은 별로 많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강론 서두에 저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우리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탐욕은 자신이 가진 재물들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을 찾으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것을 찾아야 할 우리가, 그 부자처럼 가진 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다가 언젠가 하느님 앞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빈손으로 서게 되지는 말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크고 작은 많은 것을 주셨고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모으며 살았는데, 막상 하느님 앞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 그만큼 허무한 삶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충5-1) 강론의 주제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서 강론의 주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을 찾는 곳'이 바로 이 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 영원히 지속될 것은 '사랑'이다. 답은 이미 나와 있고 대부분 그 답을알고 있다. 그 답을 이 땅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을 드물다. 그러나 빵 때문에 자살하는 이는 많다. 그만큼 빵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 땅의 생존양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강론에서 예로 든 스티브 잡스! 동시대인 우리는 그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애플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린 사람인지, 그리고 스티브잡스의 등장이 어떻게 4차혁명의 문을 열었는지 알기에 그의 마지막 말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의 유언처럼 영원히 가져갈 것은 분명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공중에 붕 뜬 그런 '사랑'이 아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하는 헤결이 평생 고뇌했던 <빵과 정신>을 오락가락하며 일군 그 사랑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사랑이다. 잡스가 죽음을 앞두고 누워있는 병원 침대가 가장 비싼 침대라고 한 비유는 물질을 폄하한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질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다. 빵과 사랑의 균형점을 잡으라는 것이  스티브잡스의 마지막 말일 것이다. 이 균형점은 5:5의 균형이 아니다. <나-너-J>가 이루는 그 삼각형의 균형이다. 무엇이 무엇을 이끌어가는 것인가를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살다 오세요!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강론의 주제인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을 찾으라"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원하기 위해선,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선, 이미 살아있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탐욕의 반대편에 있는  <자선, 선행, 나눔, 절제>가 물질을 바탕으로 한 생물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강론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살아서’ 분별할 것을 제언한다. 강론의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된  <빈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가 죽어서 ‘빈손’으로 그분께 간다고 해서 하느님께 손해될 일은 전혀 없다. 미사 중 우리의 찬미가 그분께는 도움이 되지 않으나  이런 기도문이 나온다.(그분은 이미 찬미를 완성했으므로) 그런데 그 찬미가를 바치는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영원한 것을 모르고 이 찰라의 생을 끝내는 것은 우리 삶의 탕진이기 때문이다. 축복으로 받은 재물을 재앙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이 움직이면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재물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죽음이고 재앙이다. 재물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타자를 위해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받은 축복을 열배, 백배, 천배로 살아있게 하는 일일 것이다. 

 

탈무드의 예화와 애플 창업주 스티브잡스의 유언과, 코헬렛 저자가 전하는 ‘허무’,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라고 권하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는 것이 왜 사랑하는 그분의 간절한 바람인가를 강론은 전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 한다.

 

야곱의 기도를 생각해 본다.

 

야곱은 형의 축복을 가로챈 후, 결국 물질적인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다시 형을 만나야 하는 상황, 삶과 죽음의 기로(두려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기32,27)

 

아름다운 기도다. 야곱의 기도를 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 누군가의 축복을 가로챈 윤리적 용서를 청하지 않고, 용서 보다 더 큰 삶이라는 축복을 청했기 때문이다. 재물이 생명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천사에게 환도뼈를 걷어차이면서 ‘생명’ 이라는 축복을 청했기 때문에 야곱의 기도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스티브잡스처럼 임종 직전에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살아서’ 깨달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지금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분명히 살아있지만 진짜 살아있는 것인지? 혹시 이미 죽어있는 것은 아닌지? 왜 한 번도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까?

 

우리는 자유인이다. 분명 자유인이다. 그런데 재물이라는 축복을 혹시 재앙으로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왜 질문하지 못할까? 왜 재물 앞에서는 이성과 감성이 실종되는 것일까? 혹시 누군가는 내가 축적한 그 재물의 만분의 1 때문에 강물로 뛰어들지는 않는지? 왜 보이지 않을까?

 

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의 질주 혹은 쾌락의 질주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왜? ‘영원한 것’을 갈망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을 찾으라,’는 명제 앞에서 왜 우리는 전율하고, 부끄러워하고, 감사하면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에, 진복구단을 추가해 본다.

 

“본질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을 것이다.”

 

(보충5-2)영원한 생명은 죽은 후에 보상으로 주어지는 천국이 아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살아있는 삶이 영원한 생명이다. 살아 있기 위해선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 내가 누구일 수 있는지?> 나라는 '주체'를 나는 알아야 한다. 세상이 나를 몰라도 나는 나를 알고 살다 가야한다. 헤겔이 말한 주체의 변증법 <주인(자아)-노예(비아)- 주체>를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상투적인 삶을 살라고 종용하는 이 세계에 질문해야 한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왜 이렇게 살면 안되냐고? 산다는 것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J가 십자가 수난으로 죽어가면서 왜 삶을 구걸하지 않았을까?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모르고 '너'를 사랑할 수는 없다. J는 언제나 <'나'는 '너'에게 말한다>라는 형식으로 기적을 행했다. 제자들에게 자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질문한다는 것은 자신을 벼랑 끝에 세우는 일이다. 아니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살아서 미리 죽음을 맛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본질적인 답은 온몸으로 찾는 것이기에 그렇다. 남들이 알려준 답은 그것이 정답일지라도 내 삶으로 스며들지 못한 답이다. 인간은 앵무새가 아니다. 신은 우리를 앵무새로 만들지 않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 명제도 자신이 스스로 묻고, 정말 그런지 체험해야 한다. 그때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만나게 된다.

 

 

그래서 글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질문하는 인간 호모 퀘스쳔즈,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본질과 존재의 변증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