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연민(憐憫·憐愍)의 길항(拮抗), 거룩한 이별은 종교보다 강하다

나뭇잎숨결 2022. 7. 12. 15:00

 

 

 

 

연민(憐憫·憐愍)의 길항(拮抗), 거룩한 이별은 종교보다 강하다

 - Antagonism of compassion, holy separation is stronger than religion

 

 

[연 중 제 15 주 일 (다 해) 2022. 7. 10. Luc. 10,25-37]

 

 

 

 

1. 사랑은 크고 말은 작다(이영광 시인)

 

고정희, 「지울 수 없는 얼굴」을 읽어본다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에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고정희의 「지울 수 없는 얼굴」에서 화자는  "이 세상에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의지를 넘어선 어떤 사랑을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대상을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얼굴로 우리에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울 수 없는 당신을 단 하나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영광 시인은,

 

사랑은 크고 말은 작다라고 덧붙인다.

 

고정희의 「지울 수 없는 얼굴」의 당신만 그렇게 규정할 수 없는 높이와 폭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규정해 보려는 우리 자신 역시 ‘나는 누구’라고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를 랭보는 규정할 수 없는 내가 바로 시를 쓰게 만든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내 안에는 다른 사람이 있다. 감각의 착란을 통해 그를 불러낼 수 있다. 시는 바로 그가 쓴 것이다"

 

사랑하는 당신도 규정할 수 없고, 나도 규정할 수 없음에도 인간은 적어도 어떠해야 한다는 규정을 하기도 한다.

 

 

 

 

 

 

 

2.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 10,25-37

 

이 글은 ‘사유’와 ‘오늘’ 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연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위해 지난 글 두개를 참고 했다.

 

[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를 발생시키는가]2021년3월17

[‘오늘’이라는 언제, 그 웜홀 혹은 인테페이스]2020년12월2일

 

착한 사마리아인법이 제정될 정도로 현대사회에 보편적 인간애를 끌어냈던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구조불이행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함) 루카 10,25-37를 읽어본다.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루카10,25-37는 <착한사마리아인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적어도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울 수 있는 존재’라는 규정이다. 이런 규정이 만들어 졌다는 것은 역으로 그런 사람이 적다는 것이기도 하다. 

 

루카 10,25-37을 두 부분으로 나뉘어 바라보기로 한다.

 

Ⓐ율법학자, 강도들, 사제, 레위인-일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사랑

 

Ⓐ와 Ⓑ를 대척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삶의 여정은 Ⓐ와 Ⓑ를 반복하다, Ⓑ로 귀결되는 여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즉 우리 안에는 Ⓐ와 Ⓑ가 확연히 갈라진 그런 삶이 아니라 혼재되어 있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 안에 이 다섯 사람이 모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순간에는 연민하지 않는 나와 어떤 순간에는 연민하는 나, 어느 순간에는 연민하는 나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에는 연민에 빠져 있는 나를 후회하는 나를 목격하기도 한다. 이렇게 어떤 상황을 앞에 두고도 내 안에는 수없이 많은 나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에서 ----------------->Ⓑ로 가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와 Ⓑ를 반복하다, Ⓑ로 귀결되는 여정을 <연민(憐憫·憐愍)의 길항(拮抗)>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자기연민에서 타자에 대한 연민으로, 이렇게 연민이 대상을 바꾸며 움직일 수 있다면, 연민이나 자비는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본성 같은 것이지만, 그것을 생래적인 것으로 인지하지는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연민과 자비는 우리의 노력으로 획득될 수 없는 본성 같은 것인데, 획득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민은 사유인가?

 

연민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 ‘사유할 수 없는 악의 평범성’에서 그 원인을 추론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유가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사유가 연민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곧 연민에 가장 최적화된 삶을 살지 못했던 것에서 그를 알 수 있다. 그 예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사단칠정> 논쟁으로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할 때, 조선500년을 당파싸움으로 일관했다. 사유의 극단을 치달은 <사단칠정>논의가 사유의 도그마로 전락한 단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사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태인을 500만명 이상 독가스실에 집어넣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사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간과한 조선성리학자들, 이 상반된 예에서 사유는 연민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유는 사후추정의 반성적 자아를 성찰케는 하지만  행동을 추동하게 돕는데는 시간차가 있기 때문이다. 사유는 시간의 깊이를 전제로 하는데 비해, 연민은 시간을 다투는 즉물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민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연민을 느낀다>라는 주-술 구조에서 ‘느낀다’는 서술어는 이성의 영역, 사유의 영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느낀다’는 것이 오로지 감성의 영역인가? 하면 그렇게 볼 수도 없다. 감성이 뛰어난 예술가들이 연민에 강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민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히려 연민은 심장에서 <튀어나왔다> 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연민은 그 어떤 사유나 이성 혹은 감성이 개입할 틈을 주지 않고 심장에서 돌출되는 즉물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엄마는 그냥 물에 뛰어든다. 엄마는 자신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이 아이보다 먼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119에 전화를 하는 것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연민은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는다.(제2조건)

 

성서로 돌아가 본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 사제와 레위인은 다친 사람을 보았지만, 다른 길을 가는 것을 망설임없이 선택한다. 그들의 생존원칙, 이성이 그것을 그들에게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들이 반대쪽으로 돌아갈 이유가 그들에게는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것은 사마리아인 안에서 그냥 솟구친 어떤 사랑이다.

 

연민이 사유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고 감성도 아니라면 반대쪽으로 돌아간 이들을 우리는 설명하기가 더 쉽다. 오히려 다친 사람에게 다가간 사마리아인을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뜨거운 사랑을 촉발시킨 것일까?

 

연민과 사랑은 그냥 솟구친 것이지 그 어떤 이성이나 감성이 작동되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연민은 어디서 오는가?

 

연민은 은총이다(제1조건)

 

인간이 지닌 조건 너머에서 자비와 연민이 온다면 그것은 <은총>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타자를 먼저 바라보지는 못한다. 은총이 없다면 자기보존본능에 충실한 그런 존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합리화하고 고수하려는 대부분의 원칙들은 바로 자기보존본능을 대변하는 것이다. 자기보존본능에 충실하려면 어떤 원칙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원칙 자체는 중용의 덕을 가르치려하지만  폐쇄적 원칙들은 길에서 본 것들을 내일의 사랑으로 미루게 만든다.

 

연민은 ‘오늘’의 사랑이다.(제3조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루카 복음에만 있는 단독 문형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마리안 앞에 <여행을 하던>이란 관형절을 넣고 있다. 사제나 레위인은 일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다. 연민은 <일과 사랑>의 순환구조에서 시간의  문제에 멈추게 한다. 일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과 연민은 언제나 ‘오늘’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연민은 ‘오늘’을 낳는 연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연민은 시간 있을 때, <언제 밥 한번 먹자>(권혁웅)라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늘 ‘오늘’의 사랑이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너를 낳았노라(시편 2.7/사도13.33/히브리서5.3)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누군가의 모태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착한사마리아인 법이 보편적 인류애라면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명제를 우리 자신에게 던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 언젠가’의 사랑을 하려는 우리에게 ‘오늘’의 사랑을 하는 나를 낳으라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내일이나 그 언제, 내가 좀 한가할 때, 그 언젠가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보다 일을 먼저 보게 만들고 우리의 길을 사랑과 반대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던 세 사람은 오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기의식의 전환이 없으면 오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없다고.

 

연민은 자기의식의 대 전환이다(제4조건)

 

자기의식은 오직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만 스스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헤결, 정신현상학)

 

인간의 의식은 어느 순간부터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의식하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런 단계를 ‘자기의식’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이 과정에서 대상은 공존의 동반자가 아니라 대척점에서 나의 우월성을 승인하는 ‘그것’에 불과하다. '그'가 아니라 '그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대상의 주체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므로, 대상은 자동 소멸된다. 나는 계속 내 존재의 우월성을 확인받기 위해 다른 대상을 찾아 실존의 정당성을 확인받으려 한다. 그런 반복 속에서 급기야는 나는 나의 밖으로 밀려난다. 대상이 없다면 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의 자리도 비게 된다. 굳이 율법학자는 자신의 신앙 상태를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데에서 이를 볼 수 있다.

 

나는 나에게 타자다(Je est un autre)(랭보선집)

 

주체의 자리가 비어버린 나, 밖에 서성이는 나는 나에게도 타자이다. 나는 단 하나의 나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거나 또는 단 하나의 존재인 일을 하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은 인간의 결핍을 메울 수 없다. 공허를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은 더 많은 일을 만들어 한다. 워크홀릭에 걸린다. 심장이 사라진 것이다.

 

일은 인간 실존의 한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일과 사랑에서 일에 방점을 찍었던 자신의 원칙을 수정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알콜 중독을 끊는 것과 일 중독을 끊는 것은 거의 같은 결단을 요구한다. 모든 중독은 같은 결단을 요구한다.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재배치하는 것임에도 그렇다.

 

나는 나를 다시 낳아야 한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가 ⒝를 낳고 ⒝가 ⒞를 낳는다. 우리 안의 율법학자가 사제와 레위인을 낳고, 사제와 레위인이 자신이 자신에게 타자임을 알게 된 시점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웃이라는 범위가 축소된 것은 그들이 바로 오늘의 사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이 오로지 주어진 일에 효율성을 극대화 할 수 있게 이웃을 제한하는 깔끔한 그 원칙에서, 내가 나를 낳는다는 것은 옛 나와 결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말해 생존의 두려움과 이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존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 그것이 오늘의 사랑을 할 수 있는 나를 낳는 것이다. 연민은 가던 길을 멈춰야 한다. 수많은 약속과 계획을 보류 혹은 포기해야 한다. 저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라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의 용서를 청했던 연민과 자비! 부활한 후에 그들의 용서를 청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오늘의 사랑인 연민은 생존의 두려움 속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믿어야 할 수 있는 사랑이 타자에 대한 연민이다.(제5조건)

 

그래서 생존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나와 결별하는 것을 “거룩한 이별은 종교보다 강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폐쇄적인 원칙에 얶매인 거짓 종교에서 사랑과 자비와 연민의 종교로 넘어가는 길, 우리 삶 속에서 “거룩한 이별은 종교보다 강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이별들은 '내가 사랑받았고 은총속에 산 것'을 알 때만 가능하다. 

 

 

 

 

 

 

 

 

 

 

3.“눈의 본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자크 데리다)

 

 

 

연중 15주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어떻게 존재의 의미와 이름까지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희망'을 전한다. 

 

사람이 그 원칙에 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사람이 원칙에 매이면서, 열려있어야 할 마음이 닫히기도 하고, ‘봐야 할 다른 면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는 율법 교사의 질문은 조금 엉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질문은, 마치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데, 이웃을 사랑하는 법은 아직 모른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제나 레위인들처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만지면. 그날로 직분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도를 만나서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보고도, 그를 피해서 길 반대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들은 자비심이 없는 냉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켜야 할 규정과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있어서 이웃이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와서 그 이웃 개념은, 같은 그룹의 구성원들만을 뜻하는 것으로 변해갑니다.(...)그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본분을 잘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의 이웃과 자신들의 이웃이 아닌 사람을 잘 구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①~④ 원칙의 폐쇄성이 어떻게 협소한 이웃이라는 종교를 낳을 수 있는가에 초점이 놓여 있다. <애주애인>에서 어느 한 축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어떤 카테고리에 가둘 수 없듯, 이웃이라는 개념도 어떤 한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렇게 협소하고도, 이기주의적인 테두리에 갇혀 있던 이웃 사랑의 개념을 부숴버리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의무를 무한히 확대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 개념에서 보면, ‘이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핵심은, 좁아져 있는 사랑의 의무를 넓혀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이웃 사랑’의 개념을 부숴버리는 혁명적 사랑이라고 보고있다.

 

그래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웃은, 누가 이웃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복음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때로 멀리 있는 사랑의 계명을 우리 곁으로 끌어다 놓는 것이, 바로 이웃이 되어 주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강론은 이웃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과 이웃이 되어준다는 것의 간극을 없애는 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올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자로미터라고 전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회개를 제외한다면, 복음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것은,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사랑과 연민'이 없다면, 복음은 기쁜 소식으로 들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담스러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Jacques Derrida(1930-2004)눈의 본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말은 인간만이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비유에 연결시켜 본다면, 사제와 레위인의 눈은 그저 보는 눈이었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눈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타자의 고통을 보고 울게 되는가? 타자를 사랑하는 그 만큼 그의 고통이 보인다. 그가 말하지 않은 고통, 그가 보여주지 않은 고통, 그가 보여줄 수 없는 고통, 어쩌면 그 자신조차 모르는 고통까지 보인다.

 

그 당시에 사마리아인은 무시 받는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남을 돕는, 자비심 많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사마리아 사람의 의미가 변하고, 그 뜻이 변한 것처럼, 예수님의 의해서 우리의 존재의 의미도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발췌한 강론 ①~⑨는 ⑩으로 모아진다.

 

①원칙의 방향성, ②이웃의 확장성, ③원칙의 폐쇄성 ④이웃의 축소성, ⑤이웃의 혁명성, ⑥이웃의 새로운 정의 ⑦계명의 인접성, ⑧복음이 진정성, ⑨눈과 눈물의 본질, ⑩존재의 의미를 연결하여,

 

 강론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우리에게 어떻게 희망과 연결되는가를 전한다. 

 

첫째,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아파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또 그 눈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복음으로 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연민은 희망을 끌어오는 견인에 해당한다. 

 

둘째, 강론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지닌 전파력에 대해 “우리가 전에 어떤 모습이었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이름도, 그렇게 의미가 변화되어 불리게 되기를 기도하면서”로 모이진다. '사마리아인'이라는  혐오의 이름이 인간의 가치를 고귀하게 들어올린 '착한 이름'으로 존재의 의미가 전이되었음에 주목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소설로 말하자면 허구적 사건이다. 그럼에도 그분의 연민을 통해서 허구적 사건은 21세기에 착한 사마리아인법을 낳기에 이른다. 인간은 인간의 본질에 연민이라는 타자를 향한 눈물을 집어넣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사랑 자체를 반대하지 않듯, 연민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우리 자신의 폐쇄적이고 기계적인 원칙들을 허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오늘’의 사랑을 낳고, 키우는 눈물의 인류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성모발현은 있는데 예수님 (환시가 아니라) 발현은 없을까? 물론 예수님의 발현은 재림이 되겠지만, 우리 자신이 그분의 현현의 대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니체가 간파한 대로 '동물(이기적사랑)과 초인(이타적사랑)사이의 밧줄'을 타고 있다.

 

[연민(憐憫·憐愍)의 길항(拮抗), 거룩한 이별은 종교보다 강하다]

 

우리는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인의 순례를 완성하지 못한다. 자기연민에서 타자에로의 연민으로 끊임없는 길항과정을 거쳐, 가장 힘든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그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사물을 확인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기 위해서 바라볼 때, 그러기 위해선 오늘의 사랑을 보류하는 우리 자신의 폐쇄적인 원칙들과 부단히 이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누군가 ‘이별도 거룩한 이별이 있다’ 고 말한다. 그 거룩한 이별은 타자와의 이별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폐쇄적인 원칙과 이별하는 것도 거룩한 이별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별들은 우리 본능을 거스리는 것이므로  '내가 사랑받았고 은총속에 산 것'을 알 때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