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2022 Cliburn Competition 제공]
피아노만큼 人文도 중요… 단테의 신곡, 국내 번역본 모두를 외울 만큼 읽었다는 임윤찬군!
[연 중 제 14 주 일 ( 다 해) 2022. 7. 3. Luc. 10,1-12.17-20]
백서白書에서 백서帛書로, 한없이 차갑거나 한없이 뜨겁거나
-in the white document, the writing in silk, it is endlessly cold or it is endlessly hot
[연 중 제 14 주 일 ( 다 해) 2022. 7. 3. Luc. 10,1-12.17-20]
1. 이육사, 「청포도(1939)」
시를 읽어본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흠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의 「청포도(1939)」는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해맑은 시다.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오는 그 손님을 위해 화자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준비하고
두 손을 함뿍, 흠뿍, 담뿍 적셔도 좋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가 이토록 투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투명한 기다림을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은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때 독립운동으로 투옥돼 수인번호가 264번이라 이육사라고 지었다는 그 사람, 그 시인이 쓴 「청포도(1939)」 에는 14번의 옥고끝에 해방 일년전에 옥사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는 그 어떤 고통의 흔적도 없다.
고통을 '넘어' 고통 '너머'를 본, 고통에서 건져올린 피론 쓴 '백서帛書'가 「청포도(1939)」다.
해마다 7월이 되면 이 서늘한 시를 읽을 때마다, 「청포도」야말로 진정한 이육사적인 시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고통을 당하였으되 고통을 소비하지 않은 시인이자, 고통과 거래하지 않은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4연에서 화자가 바라는 손님은 이육사의 전기적 사실과 관련하여 정석처럼 '조국광복'이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고통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영혼의 투명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기다린 것은 조국을 넘어 그의 '맑은 영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끝까지 어떤 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이미 고통도 고통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통을 못 느껴서가 아니라 그가 고통에서 진정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한두번의 옥고를 치를 때는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었겠지만, 열네번의 옥고, 이건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선 것이다.
한 고통이 끝나고 또 한 고통이 오면 , 즉 고통이 숨돌릴 틈을 주고 오면, 그래 이런 것이 고통이겠구나, 하겠지만,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성난 파도처럼 고통이 사방에서 몰아치면,
그럼에도 '무의지의 의지'로 고통을 준 원인 속으로 자꾸 걸어들어간다면, 그것은 이미 고통의 범주를 넘어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해맑음의 절정은 5연과 6연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연민하지 않고, 그가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끝까지 가장 정갈한 '청포도'와 '은쟁반'과 '하이얀 모시수건'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흠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준비해 두렴"
고통을 소비하지 않는, 고통과 거래하지 않는,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이 '해맑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2.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루카 10,1-12.17-20
- 그 많던 사탄, 마귀, 전갈, 뱀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라고 전하는 루카 10,1-12.17-20을 통해 '파견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파견은 바오로 사도가 직관한 대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와 연결하여 파견의 두 측면을 바라볼 수 있다
파견은 십자가신학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십자가 신학을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의 두 측면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두 측면은 '고통과 기쁨'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정이 늘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것은 아니다. 또 파견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삶도 늘 고통으로만 채워져있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Q1. 그럼에도 '파견'하면 왜 '기쁨'보다는 '고통'에 초점이 놓이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서 예루살렘 딸들을 위로한 말씀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들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23, 28)
예루살렘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오직 '고통 자체'만 바라보았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고통 그 너머, '고통의 의미'를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에, 그 누구의 연민의 대상도 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왔는가를 안다는 것이 고통의 의미를 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분은 오히려 고통의 의미를 모른 채,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울라고 위로를 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고통의 소비, 혹은 고통과 거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된다. 고통의 소비란 고통을 의미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고통과 거래하는 것이란(2020년사순3주강론) 고통을 극복하기 보다는 고통앞에서 서둘러 평정심을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인간의 온갖 고통을 다 맛본 토스토예프스키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다.” (도스토예프스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의미없는 고통의 희생양 코스프레를 하게 되는가? 그것을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정욕구'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연민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 세상의 가장 큰 희생양으로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마음, 연민에의 호소는 고통의 소비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인정 욕구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통을 싫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소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고통에 안주하려는 이율배빈적인 태도를 은밀히 즐긴다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집착도 있다는 것이다. 가학증과 피학증이 같이 다닌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나는 불쌍하다'는 '나는 피해자'라는 자기연민의 달콤함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고통도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하나의 달콤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연민의 달콤함은 고통 앞에서 평정심과 함께 고통과 거래하는 대표적인 심리적 방어기재라고 할 수 있다. 고통과 거래하지 않기란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건과 상황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지엽적인 사유에서 고통의 단면만 보게되면 고통과 거래하려는 은밀함에 동의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의 소비는 고통을 부추긴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파견의 주체인 우리가 고통과 기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는 파견의 성패를 죄우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Q2. 그 많던 사탄, 마귀, 전갈, 뱀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인식하는 이 세계는 전쟁과 평화 중, 어떤 종류의 전쟁이든,생존 전쟁 상태라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인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에 그 많던 사탄, 마귀, 전갈, 뱀은 다 어디로 갔을까?
루카복음 사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와 Ⓑ에는 파견의 두 측면이 크로스되어 있다. 파견이 십자가의 고통에만 초점이 놓여있다면 Ⓐ의 문장 속에서 '너희의 평화가 어떤 사람위에 머무를 정도'의 평화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 위에 내가 지닌 평화가 내릴 정도의 그 평화를 갖고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도 이미 고통을 넘어선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주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파견이란 평화의 상태에서 평화를 전한다는 점에서, 파견을 십자가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출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더우기 파견은 어떤 공간적 의미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파견은 공간의 확장 이전에 우리가 지닌 상태의 확산이기 때문이다. 많은 영성가들과 물리학자들은 이 세상의 파멸을 막는 기재가 '평화'로운 에너지를 지닌 '익명의 사람들'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에서 “이제는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언명에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릴때, 비로소 우리가 누리는 그 평화가 어떤 사람들 위에 머무를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 권한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에 그 무엇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 평화는 그만큼 강력한 에너지다. 그러기에 평화는 예수님의 부활 선물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자신이 평화의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가 누구 위에 평화를 머무르게 할 수 있겠는가? 평화는 말이 아니다. 평화는 어떤 사람의 신적인 존재상태, 비언어적 혜택이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가 평화의 전달이 아니라 평화의 상태가 평화를 나누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파견에 앞서 과연 나는 평화로운 상태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내 안에 사탄, 마귀, 전갈, 이리, 뱀, 어둠 같은 상태를 다 태웠는가? 를 엄중히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해서, 평화는 부활의 선물이기에 그 모든 것을 무화시킬 수 있는 '권한'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라는 표현에서 우리 자신 안에서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이 세계의 또 다른 '힘'(성서에서 말하는 전갈, 뱀, 사탄, 마귀 등등)을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겨낸다'는 것은 '태워서 없애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온것이 아니라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53)에서, 우리 안에 태워야 할 것을 태워야 “평화가 너희와 함께!”(24,36) 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상태에서,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라는 파견의 목적에 저절로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루카 복음 사가는 세 번의 평화를 우리에게 전한다. 이 세상에 프로그래밍 당하지 않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힘)이 선물로, 은총으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함께 전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삶은 투쟁이지만, 죽음은 투쟁이 아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평화와 반대되는 것들을 스스로 태워야 하겠지만, 죽음은 타력에 의해 평화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이 태워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평화는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불멸의 상태까지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성서로 돌아와,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고무되어 전하는 그 부분-“주님,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에 대해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1차적으로 '생명의 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삶의 한 단면이 아니라 고통과 기쁨 모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는 평화의 상태인 우리 영혼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분은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에 앞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분의 권한이 지닌 기쁨을 먼저 맛보게 하셨다고 할 수 있다. 파견의 한 단면을 미리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파견의 다른 면, 고통까지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준 권한의 의미를 알았다면 그분의 수난과 고통의 의미, 우리가 통과하는 이 세계의 고통의 의미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파견은 '삶', '열정', '평화' 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견은 자비다. 파견된 우리가 완벽하게 평화를 누리지 못한채 세상에 평화를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파견은 존재하는 유일한 책, 충만과 결핍의 자서전을 쓰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실존의 상황에서 어떻게 그분이 준 권한이자 선물인 '평화를 사느냐' 하는 명제는 파견의 중핵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로운 존재상태가 곧 파견이기 때문이다.
3. 파견이란, ‘공간적으로 예수님과 떨어져 있을 때,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연중 14주일 강론에서 오신부님은 ‘파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72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께서는 72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시기보다는, 그들이 겪을 어려움을 더 걱정하시는 듯합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염려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복음은 무엇에 의지해서는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해 보면, 그중에 한 분이 사도 바오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경험하면서, 제자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정작 복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었고, 또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쳤지만, 정작 회개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강론은 이런 질문을 풀어간다. 제자들을 당신 곁에 두지 않으시고, 왜 복음 선포라는 그 힘든 일을 그들에게 맡기셨을까? 제자들에게 그 힘든 길을 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른 스승들의 제자들처럼, 그저 자신의 스승을 모시며, 그 스승과 함께 살아가도 되는 것이 아닌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가 2019년 연중 제 14 주일 강론에서, 제가 읽은 책 중에 이런 글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항구에 머무는 배는 안전합니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안샐름 그륀 신부)
⒠신앙인들도 성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터전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파견이란, ‘공간적으로 예수님과 떨어져 있을 때,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강론에서 초점, 예수님은 일두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이리' 가운데 보내는 거 같다고 그들을 걱정을 하신다. 동시에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강한 트레이닝을 시키신다. 여기서, 파견이 지닌 두 측면을 바라볼 수 있다.
첫번째 측면은, 파견의 완성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이나 우리가 겪어야 하는 혼란과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이자, 예수님은 우리가 한순간에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견의 다른 측면은,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완벽하지 못한 우리를 왜 선택하신 것일까? 를 알게 되는 과정이다. 제자들이 선택받은 이유, 부르심을 받은 이유, 평화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상태로 평화를 전하는 충만과 결핍을 동시에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정작 복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사람들은,자신들이었고,또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쳤지만, 정작 회개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 으로 우리는,'성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터전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데서 그를 바라볼 수 있다.
파견의 두 가지 측면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부재의 현존'을 어떻게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가는가로 모아진다. ‘공간적으로 예수님과 떨어져 있을 때,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강론과 복음은 삶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살아 있는 삶을 살라!"는 제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
[백서白書에서 백서帛書로, 한없이 차갑거나 한없이 뜨겁거나
-in the white document, the writing in silk, it is endlessly cold or it is endlessly hot]
백서白書는 정부가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문제에 대하여 그 현상을 분석하고 장래의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발표하는 보고서라면,
백서帛書('黃嗣永帛書'처럼)는 비단 위에 쓴 글로 실존의 엄중함앞에서, 우리 각자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쓴 '혈서'에 해당한다.
우리 삶은 어떤 보고서(백서白書)처럼,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다. 생명이라는 비단위에 구체적인 피로 쓴 삶의 '백서帛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삶이라는 백서帛書는 한없이 차갑거나(고통) 한없이 뜨겁거나(고통) 고통과 기쁨의 이름이 무엇이든, '넘고' '너머'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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