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사랑을 본다면, 그대는 바로 삼위일체를 뵙는 것이다!"
" vedi l'amore, allora sei la Trinità!”(아우구스티누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2-15)
1. 함민복의 「사과를 먹으며」
시를 읽어 본다.
①사과를 먹는다/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②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③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④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⑤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사과의 씨앗을 먹는다/자양분 흙을 먹는다/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⑥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흙으로 돌아가고 마는/사과를 먹는다/사과가 나를 먹는다
인류에게는 몇 개의 사과가 있나?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묻게했던 아담의 사과, 페스트로 휴교한 학교를 잠시 쉬고 어머니의 장원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 아들의 머리위에 놓인 사과를 맞춰야 했던 빌헬름 텔의 사과(쉴러의 희곡) 그리고, 스마트폰의 세계를 연 애플의 사과가 있다. 하나 더 추가해본다. 함민복 시인의 사과가 있다.
①에서 화자는 일상적인 과일, 사과를 먹고 있다. 그런데 사과를 먹는 행위가 ②에서 사계절을 먹는 행위로, ③에서 사과와 함께한 자연물을 함께 먹는 행위로, ④에서 사과를 먹는 것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먹는 것으로, ⑤에서 사과를 먹는 것은 자연의 원리, 자연의 순환 과정을 먹는 행위로, ⑥에 이르면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므로 실은 사과나무가 나를 먹는 것으로 모아진다.
사과 하나를 먹으면서 사고의 확장을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화자는 발견한다. 특히 흙으로부터 사과가 만들어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명 순환의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사과가 나를 먹는다’는 역설적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사과를 먹는 것은 사과를 존재하게 한 우주를 먹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순환하는 생명의 원리에 참여하는 행위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삼각형>의 순환원리 속에서 하나임을 바라보고 있다. 가히 절창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도 자음(17자)은 발음기관에서 본 딴 것이지만, 모음(11자)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삼각형>의 사유에서 만든다. 28자 가운데 4개가 소실되고, 남은 24개로 우리는 한글이라는 모국어로 무한한 단어를 만들어 내고, 그 무한한 단어로 우리의 생각, 사유 모든 것을 표현할 수도 있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자판은 바로 세종이 만든 자모 24자를 이용한 것으로 스마트폰, 컴퓨터 자판을 만드는 그 발판은 세종이 깔아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 창제정신에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삼각형의 사유가 놓여 있다.
하이젠베르크 가 쓴 『부분과 전체』에서 2차세계대전 당시 핵을 만들라는 독일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연기함으로써 히틀러의 손에 핵무기를 쥐어주지 않았던 <삼각형>의 사유가 등장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양자역학의 문을 열며 세계사의 변곡점에서 과학자의 양심으로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살아낸 인물이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최소의 균형은 바로 플라톤이 쓴 『티마이오스』에서 직관한 <삼각형>에서 찾았다. 좌-우 대칭은 진정한 균형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 세계의 균형은 <삼각형>이라는 최소균형의 법칙으로 시작된다는 것에 주목했고, 이 균형점에서 <부분과 전체>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직관했던 것이다.
이렇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것들의 균형을 최소 <삼각형>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2.“그대가 사랑을 본다면 그대는 바로 삼위일체를 뵙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삼각형은 왜 최소균형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 바라볼 이 글의 주제는 <삼위일체 사랑>이다. 삼위일체는 <어떻게>를 말하는 진리인가? <왜>를 말하는 진리인가?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말할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399집필 시작 ~421집필 완료)을 지나칠 수는 없다. 성인은 진리에 대한 크나큰 애정을 품었던 분이었다.(그런데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이 쓰여진 사회, 문화, 역사, 종교적 , 집필대상등을 감안하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론』는 아리우스파의 공격에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호교론적 관점에서 시작된 집필이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간 제2의 고백록에 해당한다. )
" 언어와 문장이라는 이륜마차를 충동질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사랑"이라고 고백했던 성인은 『삼위일체론』에서,
⑦삼위일체에 관하여 논하는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붓이, 신앙의 출발점을 무시하면서 이성理性에 대한 미숙하고 비뚤어진 사랑에 속는 사람들의 모략중상을 겨냥하여 경계하는 데 있음을 알아둘 것이다.
⑧인간들의 오류 가운데 도저히 묵과하기 어려운 것이 둘 있다. 진리가 드러나기 전에 [무엇을 진리라고] 억측함이 그 하나이고, 진리가 이미 드러난 다음에도 억측하던 허위를 옹호함이 다른 하나이다. 내가 간절히 빌고 바라거니와, 하느님께서 진리를 발견하는 데나 거룩한 성경을 논하는 데 너무 상반되는 이 두 가지 악덕에서 제발 나를 지켜 주시고, “큰 방패 같은 호의와” 당신 자비의 은총으로 나를 덮어 주셨으면 한다. 여하튼 나로서는 성경을 통해서든 창조계를 통해서든 하느님의 실체를 탐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생각이다.
⑨과연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불리지만 성부는 아니고 성자도 아니므로 그분들은 응당 셋이다. 그래서 [동사를] 복수로 언표하여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사벨리우스파가 말하듯이 [동사를 단수로 하여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동사를 복수로 써서] ‘하나입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무엇이 셋이냐고 묻는다면 인간 언어가 크게 부족하여 곤욕을 치른다. ‘세 위’라는 말은 말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어서 한 말이다.
⑩하느님 자신이 크기 자체이시며, 하느님이 크신 것은 [당신 자체인] 그 크기에 의해서다. 또 바로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이 세 존재라고 말하지 않듯이 하느님이 세 위대함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는 존재함과 위대함이 동일하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위대한 세 분이라는 언표를 쓰지 않고 위대한 한 분이라고 언표하며, 위대함에 참여하여 하느님이 위대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위대하신 당신 자신으로 인해서 위대하시다고 하니, 하느님 친히 바로 자신의 위대함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영원하심과 전능하심에 관해서도 같은 말이 성립한다.
⑪형언할 수 없는 사물들에 관해서 무엇인가 말을 하기 위해서, 무슨 방도로도 말할 수 없는 내용을 어떻게든지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해서 우리네 그리스인들은 ‘한 존재, 세 실체’라는 개념을 썼고, 라틴인들은 ‘한 존재 혹은 실체, 세 위격’이라는 개념을 썼다.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말 즉 라틴어로는 ‘존재’나 ‘실체’나 달리 알아듣지 않는 까닭이다. 또 언표하는 내용을 겨우 ‘수수께끼처럼’ 알아듣는 지경에서는, [삼위일체를 두고] 과연 그것이 “세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나올 때 무엇인가 말을 하려면 이렇게라도 언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부께서 성자가 아니시라고 언표되고, 성령은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성부도 아니시고 성자도 아니시라고 언표되는 터에, 참된 신앙은 셋이 있다고 고백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세 무엇이냐?” 혹은 “세 누구냐?”라는 질문이 나올 때는 어떤 종種이나 유類를 가리키는 명칭을 찾아내야 하고 그것으로 이 셋을 내포해야 하는데 그런 명칭이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의 탁월함은 일상 언어의 구사력을 까마득하게 초월하기 때문이다. 무릇 하느님은 언표되는 것보다 생각하는 대로가 더 진실에 가깝고 생각하는 것보다 존재하시는 대로가 더 진실에 가깝다.
⑫그분들에게 공통되는 것이 위격位格이라는 점이므로 ‘세 위격’이라는 언표를 하기로 한다면 […] 왜 ‘세 하느님’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일까? 성부께서 위격이시고 성자께서 위격이시고 성령께서 위격이시고 그래서 삼위三位이심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부께서 하느님이시고 성자께서 하느님이시고 성령께서 하느님이신데 왜 삼신三神이 아니신가? 또 형언할 수 없는 결속에 의해서 이 셋이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시라면 한 위격은 왜 아니라는 말인가? 성부든 성자든 성령이든 각자를 개별적으로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도 하느님을 ‘세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우리가 비록 각자를 위격이라고 부른다고 하지만 ‘세 위격’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아닌가? 성경이 ‘세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그런가? 하지만 성경 어디도 ‘세 위격’이라는 언급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사실 성경은 이 셋을 ‘세 위격’이라고도 ‘한 위격’이라고도 언표하는 일 없으므로 […] 말을 하고 토론을 할 필요에서 ‘세 위격’이라는 언표를 하는 것이고, 성경이 그렇게 언표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이런 표현에]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쓴다.
⑬‘인식하고 난 사물은 사랑하게 마련’이고, ‘그렇게 감지된 사물은 배우는 사람들의 향학열을 불살라 그 사물을 향해서 움직여 나가게 만들며, 그런 능력을 획득하는데 모든 수고를 다하여 그것을 희구’하고, ‘실천하므로 획득하기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다시 이해와 기억으로 확장된다. 인지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해)은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아는 무엇이든지 나는 기억한다’.
『삼위일체론』은 15권중 8권에 이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넘친다. 아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을 알지 못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까닭’과 같으며. 그러므로 지성을 통해 뭔가를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며, 아는 것은 인식의 과정을 통한 것이고. 인간이 지닌 ‘지성, 사랑, 인식’을 삼일성’이 있어야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지성, 사랑, 인식'은 언어화 되지 않은 사랑이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학식과 무관한 진실이다. 언어는 사랑에서 나오고, 그 사랑이 피조물을 향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되지만, ‘피조물이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받으려 할 때 욕망이 된다고 본 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주기 위해선 언어가 동원된다. 사랑이 언어적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표현되지 않은 그 사랑을 우리는 언어적으로 알아듣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는 인간의 길’이라 일컫는 삼부작이 있다. 교부가 자기 인생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만나던 길을 묘사한 『고백록』, 인류가 구세사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정리한 『신국론』, 그리고 인간이 자기 내면의 성찰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는 길을 분석한 『삼위일체론』이다. 이 책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사색은 다른 두 작품보다 훨씬 원숙하여 교부의 모든 신학서 가운데 단연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삼위일체론』(성염 역, 분도출판사)은 제1-7권의 전반부, 제8-15권의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성경에 근거한 삼위일체 신앙의 이론적 해설이고, 후반부는 인간 지성을 분석하여 당신 모상으로 그 지성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삼위일체 구조를 추정해 가는 철학적 사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에 관한 책을 따로 쓰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들의 저서를 읽고 싶었지만, 삼위일체에 관한 라틴어 저서가 드물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직접 펜대를 들었다고 전한다. 그리스 교부들의 작품은 많으나 라틴어를 하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만큼 평이하지도 않고,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특히 후반부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철학 일변도의 깊은 성찰과 분석을 담고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인간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상 아우구스티누스가 책을 쓰는 것은 사목적 필요성 때문이거나 논쟁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혹은 지인들의 요청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이 『삼위일체론』 만큼은 예외다. 니케아 공의회(325년) 이후 그리스도교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배척하면서 성자와 성령의 신성神性을 신앙개조로 규정했으나 나머지는 교계와 학계의 논의에 맡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질문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을 펼친다.
“성부는 하느님, 성자는 하느님, 성령은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세 하느님이라고 말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삼위의 대외적 활동이 세 위격의 불가분한 활동이라면 육화는 성자의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성자의 출생generatio과 성령의 발출processio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사유의 답은 간단하다. 질문과 논변은 복잡하나 그 답은 간단하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을 접하는 후대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위일체 교리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을 알면 다 알 수 있는 교리에 해당한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 앞에 <어렵다>는 전제가 붙는 것은 신의 존재양식으로 삼위일체를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대가 사랑을 본다면 그대는 바로 삼위일체를 뵙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에서 삼위일체를 논하는 의도는,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의 영靈이 그리스도인들의 지성과 삶에 일으키는 변화가 오직 한 분 하느님의 활동임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가 생애 마지막에 내린 명령,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시키려는 것이었다.
모든 글을 벼랑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글은 우선 세상으로 난 문을 모두 닫겠다는 의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심연으로 뛰어들겠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심연에서 필사적으로 건져올린 언어를 세계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 사유의 방생이다. 그 용기는 그가 사랑한 만큼의 세계에 대한 언어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삼위일체론』은 인간이 지닌 ‘지성, 사랑, 인식’이라는 삼일성’을 총동원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피로 쓴 글에 해당한다.
그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든 못하든, 받아들이든 아니하든, 인류는 『삼위일체론』을 기점으로 어떤 되돌릴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를 믿는 유일신이냐?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유일신이냐? 하는 확연한 갈라짐이 그것이다.
3.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2-15
그렇다면, 도대체 삼위일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갈라지게 만들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울러 묻게 된다.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독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무신론이 아니며 유신론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 종교인 불교와 구별된다, 또 철학적 실존적 무신론과 사유체계에서도 구별된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유신론이지만 다신론이 아니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와도 구별된다. 또한 유일신을 믿지만 <삼위일체론> 때문에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구별된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은 대외적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을 드러내고 대내적으로 교회의 정체성과 믿는 이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유해무, 『삼위일체론』) 자로미터가 된다.
요한 16,12-15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삼위일체>교리를 믿는 사람 사이에서도 다시 <하느님의 존재양식> 즉 <위격은 셋이면서 한 하느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아님, <왜?>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까로, 갈린다.
우리는 라자로나 라임의 소녀의 소생설화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다른지 과학적으로 그 <어떻게>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는 말할 수 있다. 또 동정마리아의 수태고지를 <어떻게>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는 이해할 수 있다. 수많은 기적사화에서 말씀으로, 혹은 믿음으로, 라는 설명을 덧붙이지만 그것은 엄밀히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밝힌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사가는 떠날 때는 말없이가 아니고 13장~17장에서 걸쳐 긴 고별사를 전한다. 그럼에도 그 고별사에도 다 담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요한 16,12-15에서 반복해서 전한다.
요한 16,12-15에서 멈춘 부분은, 12절이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를 중심으로 삼위일체 사랑은 무엇인가를 바라보려고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2절을 Ⓐ와 Ⓑ로 나누어 바라보는 것은 삼위일체사랑을 <어떻게>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왜>로 바라보고자그 길을 가보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감당할 수 있는)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Q1. 먼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1년으로, 요한복음은 3년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1년이나 3년 동안 생업을 접고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은 수없이, 많이, 그분의 행적을 목격하였을 것이고, 그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매일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다는 것은 제자들이 그분이 전하는 사랑을 이해하기는 역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오늘 우리 역시 그분의 제자들처럼 그분이 하신 말씀을 다 알아 듣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할말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분이 은밀하게 하느님 신비를 감추어 둔 부분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모든 진리를 다 알려주었지만 그 진리를 이해하고 살기에는 그들과 우리가 딛고 있는 마음의 땅, 트랙이 너무 작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Q2.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것을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에서도 다시 강조된다. 무엇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분이 전하고자 하는 그 사랑을 우리 혼자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당시 모세의 율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유다인들의 종교적 카테고리에 인류는 거의 세뇌수준으로, 집단무의식으로 신의 존재양식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마음은 옛사랑의 그림자로 가득차 있었던 제자들(우리들),
그런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죽으면 살리라'고 전하는 <애주애인>의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전하는 J의 사랑이 그들 마음에 들어설 자리가 있었을까? 그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 그분만큼 커져야 한다. 그 큰 사랑은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그럼에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에 멈추면 안된다는 것이 삼위일체 사랑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삼위일체론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이고, 예수님께서 유다인(대사제, 율법학자 바라사이파 사두가이파)들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결정적 첨상에 해당한다. 삼위일체 사랑을 전했기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이 죽은 사건이 바로 삼위일체 사랑이 우리에게 도달한 지난한 역사의 경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삼위일체 사랑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우리 삶에서 이런 지난한 사랑의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냥 사변적 교리나, 인간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신비로 봉인된다. 그럼에도 거기서 멈춰서면 안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사랑을 이해하는 문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사랑은 봉인의 계시가 아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한 그 이유가 바로 그 문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창조주이신 하느님, 구원자이신 예수님, 성화의 협조자이신 성령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의 영속성(영원성)을 여는 열쇠다. 만약, 어떤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 그 영원의 문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강생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신학을 낳았고, 그 십자가 신학은 다시 부활신학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부모님들이 자식을 기르다 ‘감당하기’가 버거우면 사표 쓰는 맘으로 던지는 말이 있다. “더도 덜도 말고 너 쏙 빼 닮은 아들(딸) 나아서 한번 길러봐라!” 이 말은 더 이상 부모가 자녀를 통제할 수 없을 때, 무자식상팔자를 통감할때, 백기를 던지면서 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네 유전자는 내 유전자와 다른 거 같다. 돌연변이다. 네 유전자를 철저히 경험해 봐라, 아마 그런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청출어람(靑出於藍) 하는 자식을 보면서 자식의 유전자가 돌연변이가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라고 유전자 소유권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부모로서 드디어 철이 들어 혼자 치맥하면서 독백한다. 미안하다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브잡스나 워렌 버핏같은 유전자를 남겨주지 못해서.)
삼위일체 사랑이 어렵다고 말하는 그 <어렵다>는 것도 엄밀하게 바라보면 하나의 유혹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긴 고별사는 맥락은 다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의 유전자는 오직 <삼위일체> 사랑이라는 것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3년으로도 다 이해할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들에게 각인된 신의 유전자(사랑)가 달랐기 때문이다. 구약의 백성들이 그 오랜 시간으로도 결코 배우지 못한 그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누군가 직접 보여주어야 했고, 그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사랑을 안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고 전하는 그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내 말은 어려우니 알려고 하지마,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사랑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라면, 그렇게 긴 고별사를 통해, 그렇게 오래도록 말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삼위일체론>에서 전하는 방대한 내용은 그래서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대가 사랑을 본다면, 그대는 바로 삼위일체를 뵙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며,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며, 진리이자, 생명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도 아들도 또 두 분의 영도 동시에 동등하게 '인간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다는 것!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것!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사랑할 것이라는 것!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에서(2020년, 2021년, 2022년) 오 신부님은 이렇게 전한다.
Ⓓ삼위일체 안에 흐르는 사랑은 세 위격 안에서만 맴돌고 있는 사랑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사랑은 사랑의 일치를 통해서 하늘과 땅을 결합시킨 것처럼(...)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땅과 하늘을 결합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020년 강론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나라’라고 생각했던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나라, 꿈꿔 볼 수 있는 나라’로 받아들일 수 있게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주신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끝날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2021년 강론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간단합니다. 이 교리는, 성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고, 그리고 성령께서는 세상을 聖化시키신다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사람을 포함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22년강론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당신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사람들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 인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惡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惡도 함께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서 인해, 이 세상에 惡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인간에서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에 罪나 惡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惡이 발생하지는 않았겠지만,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전락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배반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거두어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거두어 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회개로 이끄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사람들이 聖化 되기를 바라고 또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실망하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자유의지’를 다시 거두어 가지 않으신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사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망하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실망과 사랑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서 전하는 삼위일체 사랑은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 그리고 부활의 신비가 하나로 모아진 그 사랑이다. 그 사랑은 태초부터 함께 있던 사랑이다. 그 맥락에서, 하느님의 본체 혹은 본성은 같다 혹은 하나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하느님은 인간 역사에 세 위격으로 나타났다는 것. 그런데, 삼위일체 사랑은 세 위격 안에서만 맴도는 사랑이 아니라 <인간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일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종으로 만들지 않고 하느님처럼 사랑을 할 수 있는 품위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선물로 준 <자유의지>에서 알 수 있다. 그 <자유의지>는 하느님을 사랑할 자유와 배반할 수 있는 자유,모두를 허용한 자유다. 배반은 다른 말로 분리다.
그 분리로 인해 인간이 행복했다면 굳이 예수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영원과 불멸보다는 찰라는 추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선물만 준 것이라 아니라 인간이 행복하기를 바라셨기에 생명의 선물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 고유의 품위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불행으로 가는 길로 치닫게 한다. 그분의 창조원리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그 뒤집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인간 역사에 하느님은 다시 개입하기에 이른다. 그 역시도 인간이 원하기 때문에 개입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백성들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끊임없이 메시야를 갈망했고, 하느님은 그 응답으로 또 아들은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강론에서는 그 사랑을 인간의 어떤 행위에도 ‘실망하지 않는 사랑, 기대를 접지 않은 사랑’이라고 전한다. 그 사랑은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는 현실'(2020년부활3주 강론)과 그 맥을 같이한다. 사랑은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분이 전한 사랑을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그 사랑이다. 너를 몇 번까지 참아줄게, 라는 트랙을 달리는 그 사랑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랑이다.
실망하지 않는 사랑, 좌절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의 무한을 알 때만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절망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실망과 좌절과 절망을 모르는 사랑은 그렇다면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희밍하라는 다른 말로 사랑하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을 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사랑은 사랑이 지닌 '무한한 희망'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 희망은 하늘의 사랑이 우리의 어떤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철회되지 않으며, 이 땅, 우리를 영원히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볼 때,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것을 우리의 언어로 내재화 할 수 있다. ‘세상 끝날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
그런 맥락에서,
“삼위일체 안에 흐르는 사랑은 세 위격 안에서만 맴돌고 있는 사랑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사랑- 사랑의 일치를 통해서 하늘과 땅을 결합시킨 것처럼(...)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땅과 하늘을 결합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정리해 본다.
[삼위일체대축일]만 되면 매번 비슷한 글들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비슷한 글들은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다>는 것이다. 교리치고 어렵지 않은 교리가 있는가? 여름은 더위를, 겨울은 추위를 전제로 하듯, 교리는 어려움을 전제로 한다.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종교에서 말하는 그 사랑을 하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면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도 어렵고, 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어렵다.
혹자는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물을 것이다. <어렵다>는 말도 하나의 주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강생에서 부활까지 삼위일체가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강생에서 부활까지에 대해 예찬일변도였다가 갑자기 삼위일체 사랑 앞에서 <어렵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어렵지 않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사화는 어렵지 않나? 부활의 신비는 어렵지 않나? 성체성혈의 신비는 어렵지 않나? 어렵다고 말하자면, 예수님 자체가 어려움이다.
기억해 보자!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모의고사 볼 때, 혹은 대학 때 시험볼 때, 누군가 한 사람이 ‘어렵다!찍자!’ 라고 말하면 그럴 의사가 전혀 없던 학생들도 갑자기 문제가 어려운 거 같고, 도저히 풀 수 없을 거 같아 70%는 문제 풀기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에서 <어떻게>를 문제 삼지 않으면 삼위일체 교리는 간단하다. 그런데 신의 존재양식인 <어떻게>를 이해시키려 하면 어려워진다. 어려워서 문제 삼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기 때문에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삼위일체 사랑을 논하는 그 바탕은 언어로 기록된 신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쓰여지지 않았던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와 같은 수천억개가 넘게 존재하는 이 우주의 주인인 신의 존재양식이 어떠한가를 재구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 예수님을 통해 체험한 하느님, 그리고 성령을 통해 체험한 하느님을 통해, 일관되게 관류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다는 데 일조를 한 성인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고, 삼위일체 사랑은 쉬운 교리라는 데 일조를 한 분도 그분인 거 같다. 성인의 질문과 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Q;“성부는 하느님, 성자는 하느님, 성령은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세 하느님이라고 말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삼위의 대외적 활동이 세 위격의 불가분한 활동이라면 육화는 성자의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성자의 출생generatio과 성령의 발출processio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아우구스티누스)
A; “그대가 사랑을 본다면, 그대는 바로 삼위일체를 뵙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던졌던 질문은 참 어렵다, 그러나 그 답은 간단 명료하다. 질문은 어려운데 그 답이 간단한 이유가 무엇인가? 성인이 글을 시작할 때, 그 대상이 아리우스파들을 논박하거나 설득하는 일이었겠지만, 20년 이상 글이 전개되고 묵상이 심화되면서 삼위일체 사랑은 아리우스파를 설득하는 차원이 아님을 직관했을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타자에게 <어떻게>를 말하다가, 성인 자신에게 지혜에 대한 이 뜨거운 사랑은 왜 나를 사로잡았나, 그 <왜>를 바라본 영성서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라는 '신의 존재양식'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왜>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답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찾은 것이다. 즉 삼위일체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답을 다른 데서 찾은 것이 아니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답도, 사랑에 대한 답도, 교리에 대한 답도 예수님, 그분이 답이다. 그래서 그분은 “내가 말하였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순간 신이 되어야 한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누누히 강조한 이유일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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