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길, 무한과 영원을 현존케 하는 모든 것의 상태와 하나인 상태

나뭇잎숨결 2022. 5. 24. 13:33

 

 

 

 

 

길, 무한과 영원을 현존케 하는 모든 것의 상태와 하나인 상태

-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14,23-29/20 ,19-29)

 

[부 활 제 6 주 일(다 해) 2022. 5. 22. Jean.14,23-29.]

 

 

1.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시가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인가? 독자가 시에게 다가가는 것인가?

 

시를 읽어 본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히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년)는 독자에게 다가온 시에 해당한다. 읽자마자 암송하고픈  시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히 내 꿈과 만나는 이여에서 이 시가 독자에게 다가온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 우리 안의 나를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는 나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나를 동시에 아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나를 동시에 사랑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인 너를, 너인 나를 만나기 위해서 수많은 길을 우회하면서, 깊어지는 시간의 얼굴을 보게된다.

 

그리고,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고, 낯익음 속에 있는 낯설음을 ‘그리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독자의 마음의 행로를 콕 집어주는 시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와 문단의 평가는 엇갈린다. 독자가 뽑은 시에 언제나 최고의 상찬을 받는 시임에도 그렇다.

 

한국문학사에서 문단 혹은 독자에게 외면받으면서도 계속 살아남아 누군가의 밤을 지키는 작품들이 늘 있었다. 이상, 김영랑, 이효석, 이광수, 서정주....등등의 작가들이 쓴 작품이 그렇다.

 

1980년대 참여시나 저항시가 아니면 시가 아니라고 하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시인은 이름과 성을 개명하고  “시인은 전쟁이 나도 다락방에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라고 활동을 중단한 후, 미국과 인도 등지에서 명상에 몰입하며, 라즈니스의 주요서적들을 번역하였다.

 

그런 시간을 보내던 시인이, 90년대 발표한 시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년)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시가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인가? 독자가 시에게 다가가는 것인가? 이 질문은 모든 예술은 예술가 자신을 위한 자족적 실체일 수 있는가? 혹은 시는 시대에 복무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것과 같다. 독자인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시간이 답이라는 사실을!

 

시는 대중에게 다가가는 장르가 아니라 대중이 노력하여 시에 다가가야 한다는 문단의 평가와는 달리, 이문재 시인은 류시화 시를 “저 들끓던 80년대를 자기를 지키며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변화 못지않게 ‘견딤’으로 본다” 라는 평을 한 바 있다. 류시화 시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고 상찬한 것이다.

 

시인지 아닌지, 사랑인지 아닌지는 결국 어떤 이론이 아니고 '시간'이 말해준다. 시가 시간이 흐르고도 누군가와 동행한다면 무슨 근거로 이것은 시이고, 저것은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단지 예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2.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요한14,23-29/17,20-26)

 

 

이 글이 묵상할 주제는 <평화>다.

 

J가 주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점에서, 평화는 사랑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 ‘기억’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기억은 과거를 오늘로 소환하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전하는 요한14,23-29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 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평화는 제자들에게 준 이별의 선물이자 부활하신 그분이 제자들에게 건넨 만남의 인사기도 하다. 이별과 만남을 아우르는 선물이 평화라는 점에서 평화는 그분의 현존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삶과 죽음이라는 시간을 건너 제자들에게 도착한 그분의 현존체험에서만 가능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성가들과 일부 물리학자들은 인류 역사의 존재 이유를 이 평화에서 찾고 있다. 전쟁과 폭력과 갈등 상황에도 인류와 만물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평화의 상태가 모든 부정적인 상황을 상쇄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인류가 아직까지 생존하는 이유가 무한한 평화의 에너지가 세상 속에 현존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스텐포드대학의 칼 프리브람과 런던대학의 데이비드 붐 같은 물리학자들은 이를 홀로그램 패러다임 혹은 접힌 질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때는 평화와 같은 의식상태는 신비주의자의 소관이라고만 보았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상태를 연구해 정보를 얻는 일을 최첨단 과학으로 본다. 특히 양자역학과 고에너지 아원자 입자와 관련된 물리학 분야를 꼽을 수 있다. 아원자 입자연구로 밝혀진 사실은 아원자 입자는 보통 의미의 사물이 아니라 에너지의 주파수가 가져오는 결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제 과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주파수의 존재도 상정한다. 실험실에서 수행된 수많은 연구에 의해 우리의 뇌가 주파수 패턴을 정교하게 수학적으로 분석해 지각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런 연구결과로 나온 것이 이른바 홀로그램 패러다임으로 우주 만물은 인간의 마음을 포함한 다른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그 결과 개별적인 마음은 전 우주를 반영할 수 있다.(데이비드 호킨스)

 

의식과 과학간의 이 같은 관계가 분야 하나를 이루어 급속히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런 관심을 반영해 출간된 책으로는 "홀로그램 패러다임 the holographic paradigm", 전체와 접힌 질서 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the tao of physics, 춤추는 물리 dancing wu-li masters, 유념하는 우주 mindful universe, 정신에너지 과학 psychoenergetic science 등이 있으며, 발표된 글로는 장의식과 현실을 보는 새로운 관점 field consciousness and the new perspective on reality, 접히고 펼쳐지는 우주 "the enfolding-unfolding universe" 홀로그램 모형, 물리학과 신비주의, 영매, 신비주의자, 물리학자 등이 있다.

 

 

 

 

 

 

 

 

 

 

 

"우리의 뇌는 또 다른 차원에서 오는 주파수를 해석함으로써 구체적 현실을 수학적으로 구축하는데, 그 차원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유의미하고, 패턴을 형성하는 최초 현실의 영역이다. 즉 뇌는 일종의 홀로그램으로 홀로그램적 우주를 해석하는 것이다"(데이비드 붐)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지순례를 가는 이유, 성인들에 대한 공경이 신에 대한 공경과 흡사한 이유, 성인의 통공에서 우리가 느끼는 일체감 등에서 우리는 평화가 시간을 넘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묻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평화의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더 이상, 어떤 힘에 협박받거나, 통제되거나, 조정되거나, 프로그래밍 되지 않는 이유를 해명하는 것과 같다.

 

J가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사랑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별의 선물로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만남의 인사로 ‘평화’를 건넨 이유가 무엇인가를 그 무엇보다 더 깊이 성찰하고 바라보아야 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평화는 신의 현현 또는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신이 세상끝날까지 함께하는 현존의 잠재태가 평화라면 그 평화의 실현태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평화와 사랑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평화의 상태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절대적인 은총의 선물인 평화를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데도 받아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그 무엇보다 더 깊이 성찰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의 현존, 현현이 평화의 상태라면 평화는 ‘무한과 영원’과 접촉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에 접속하고, 선적인 시간에 종속적인 인간이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 평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평화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되는지 그분은 다음과 같이 그 방법까지 알려주신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보호자, 곧 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와 ⒝는 우리가 평화의 선물을 받는 그릇을 준비하는 일이라면 ⒞는 그 그릇을 준비할 수 있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은총(평화)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은총(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는 세상이 주는 평화에 ‘프로그래밍’ 되지 말라는 언명이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그분이 선물로 주는 평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일까?

 

세상의 평화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소유의식에 초점이 놓여 있는, ‘힘에의 의지’에 바탕을 둔 외적인 충족이유율이라고 한다면, 그분이 주는 평화는 오로지 존재 이유 하나에 근원을 둔 내적인 충족이유율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인 충족이유율의 그릇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다. 우리가 평등하게 지닌 조건인 <몸과 마음과 영혼>에서 평화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바라볼 수 있다. 마음의 평화, 혹은 영혼의 평화란 말을 해도 몸의 평화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가 곧 영혼의 평화라고 할 수 있는가? 마음의 평화는 영혼의 평화일 수 있지만, 영혼의 평화가 곧 마음의 평화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마음과 영혼은 다른 존재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성가들이 진단하는 것처럼 전쟁과 파괴와 갈등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쇄할 만큼 평화의 에너지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주님의 현존이라고 할 '영혼'이 느끼는 평화는 우리 자신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보편적 존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영혼과 마음은 같은 듯, 다른 존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마니피캇)에서,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에서 마리아는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동시에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마음과 영혼이 동시에 평화를 느낄 때,  평화는 “무한과 영원을 현존케 하는 모든 것의 상태이자 하나인 상태”라는 말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J가 우리에게 준 평화가 바로 마음과 영혼이 동시에 느끼는 그 평화일 것이다. 

 

따라서, 평화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지칭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어떤 존재성을 지니고 있는지 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한계적이고 제한적이다. 투쟁을 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일시적인 마음의 편안함이다.

 

그러나 그분이 주는 평화는 투쟁을 내려놓아야지만 알 수 있는 상태이자 마음과 영혼이 하나인 상태인, 존재의 평화다. 위에 언급한 물리학자들과 영성가들의 견해를 종합한다면, 내가 그 일치된 평화를 느낀다면 나는 전쟁을 방지하는 수호자 역할을 한다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평화의 상태가 왜 '마음'과 긴밀히 연결되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문제를 필히 짚어야 한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는 평화가 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상태 즉 자신의 ‘마음’을 관리하는 차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평화가 ‘비언어적 상태’라는 말로 대신 할 수 있다. 이것은 행위나 소유하기가 아닌  ‘존재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몰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산란해지는 일’에서 우리가 몰입해야 하는 어떤 ‘마음의 중심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겁을 내는 일’에서 '힘에의 의지'를 마음은 행위이전에 간파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전자가 나 자신을 통제하는 일이라면, 후자는 세계를 통제하는 일에 해당한다. 투쟁이 아니라 통제다. 그 통제는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오귀스탱 길르랑 신부는 『그들은 침묵으로 말한다』에서,

 

우리가 대체로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를 지니지 못한 것, ‘평화를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감성이 폭풍처럼 크게 요동칠 때, 우리는 폭풍 외의 다른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합니다. 폭풍이 우리 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어떤 심각한 죄를 자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평화를 신뢰하는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결국, 평화라는 것이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말하자면 영혼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이 곧 평화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손상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해 기억하고, 인식하고, 신뢰하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평화를 느끼는데 마음은 왜 평화를 느끼지 못하는가? 우리 안의 이 분열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마음은 자유의지에 의해 세상이 주는 평화에 끌리거나 세상의 힘에 프로그래밍 당할 수 있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의 존재양태와 영혼의 존재양태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영혼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는다. 즉 우리 마음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을 끌어가는 것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이 우리 생을 끌어갈 때, 마음과 영혼은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와 ⒝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협조자가 필요하다. 이 평화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상태이기에 선물로 준다고 해서 쉽게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마음과 영혼의 불일치에서 바라보았다. 영혼과 일치하지 않은 마음이라면 주어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분이 주는 평화를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호자, 곧 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무한과 영원에 대해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는 그 협조자가 성령이다. 우리는 사도들이 두 번째 이별, 예수님의 승천을 기점으로 그들이 예수님이 원하는 그 모습으로 변했음을 알고 있다. 미망에 헤메던 제자들이 그렇게 달라졌다는 것은 제자들의 마음과 영혼은 이제 마니피캇을 노래하던 마리아의 상태처럼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과 이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그렇게 그분의 길을 가게 된 이유를 '오늘' 우리와 대응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3. 평화란,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일 때,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화의 상태를 살고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할 수 있나?

 

평화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론에서는 진정한 평화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희망해야 할 것을 찾았을 때, 평화란,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일 때, 얻을 수 있다는 데서 평화는 '희망이자 길'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한 희망할 것을 희망할 수 있는 평화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선, 어떤 '탈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전한다.

 

부활6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그분이 주는 이별의 선물인 평화를 받기 위해선 사랑에 대한 ‘기억’을 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희망인 평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삶으로 태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전한다.

 

살아가면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헤어질 때, 내게 선물을 남기고 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다.(...)시간이 흐르면서, 그분들이 남기신 선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걱정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음을 앞두시고도, 그렇게 제자들을 걱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①은 우리가 받은 개별적이고 구체적 사랑의 체험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②는 제자들이 경험한 사랑의 기억들이다. 그런데 이런 기억들을 하기 위해선 우리 마음이 정리되는 시간, 여백, 정화되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정화의 과정은 대부분 절망과 자포자기 혹은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웠던 그 며칠은,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을 연습하고, 또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 힘들었던 며칠이라는 시간이 꼭 필요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 며칠이라는 시간이 겪었기에, 자신들이 진정으로 바라고, 또 희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제자들이 지금까지 살아 온 시간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희망으로 착각하며 살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는 그러한 실패와 좌절의 그 며칠이 꼭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간적인 성공의 허무함을 깨달은 후에야,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고 희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는, 집착하는 나의 지금의 세계를 놓아 보내야만 합니다. 집착하고 있는 나의 지금의 세계를 놓아 보내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③~⑥ 은 우리 마음이 정화되는 탈각의 시간을  ‘며칠’이라고 보고 있다. 그 며칠은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까지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예수님만 겪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동시에 겪어낸다. 그 시간은 우리 마음이 정화되는 시간에 해당한다. 영성가들은 이 시간을 자아를 ‘내려놓는’ 시간, 혹은  ‘자유의지’를 봉헌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제자들이,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겪었기에,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선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이별을 하시면서, 선물로 남겨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선물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희망과 깊은 연관이 있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희망으로 포장된 욕심을 내려놓은 다음, 그다음에 다시 찾게 된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발견해야만 얻을 수 있는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평화를 얻을 수도 없지만, 희망 없이 평화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포기한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잠시 소용돌이가 멈춰진 상태일 뿐입니다. 잠시 소용돌이가 멈춰진 조용한 절망의 시간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희망해야 할 것을 찾았을 때, 그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일 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한 평화를 선물로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선물을 깨닫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이, 시간의 흐름과 생각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그 평화가, 자신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첫 번째 이별을 경험할 때와는 달리, 예수님의 승천이라는 두 번째 이별을 겪고서, 절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남겨주신 선물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⑦~⑫ 까지는 평화를 느낀다는 것이 단지 '감성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이자 실존의 차원'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다.

 

평화는, 희망과 깊은 연관이 있음에 주목하여,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희망으로 포장된 욕심을 내려놓은 다음, 그다음에 다시 찾게 된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발견해야만 얻을 수 있는 평화’ 라고 전한다.

 

진정한 평화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희망해야 할 것을 찾았을 때, 그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자. 평화란,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일 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걸어가야할 '길'을 모른다면 우리가 느끼는 편안한 상태란  '소용돌이가 잠시 멈춘 절망의 고요함'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9년 부활 제 6주일 강론에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Gabriel Marcel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는 죽지 않고, 내 안에 늘 살아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도 때로 삶이 벽에 부딪쳤을 때, “네가 어떤 모습이든지, 너는 죽지 않고, 내 안에 늘 살아있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사랑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이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여러분은 늘 내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이별에서 오는 선물은, 사랑에 대한 기억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⑬, ⑭에서 평화의 체험,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체험하는 그 통로는 ‘기억’이다. 그분을 체험하는 것은 너는 죽지 않고, 내 안에 늘 살아 있어.”, “네가 어떤 모습이든지, 너는 죽지 않고, 내 안에 늘 살아있어.”, “여러분이 어떤 모습이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여러분은 늘 내 안에 살아 있습니다.” 라는 그분의 육성을 듣는 것과 같다.

 

그분의 '육성을 듣는 것'과 '자기 암시와 체면현상'이 다른 것은 육성을 듣는다는 것은 그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의 여부로 알 수 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가 느끼는 평화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육성을 듣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그 육성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돌발 변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그때 걸어간다는 것은  곧 희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진정한 평화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희망해야 할 것을 찾았을 때, 그때 얻을 수 있고, 평화란,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일 때, 얻을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곧 평화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손상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얼마나 ‘기억’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희망의 '길'을 갈 수가 있다.

 

그분의 육성을 다시 들어보기로 한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14,23-29/20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