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은 아름답다’는 명제가 건너야 할 ‘무지의 황홀’

나뭇잎숨결 2022. 5. 17. 15:25

 

 

‘사랑은 아름답다’는 명제가 건너야 할 ‘무지의 황홀’

 

-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3, 31-35)

 

 

 

 

아름답고 화산처럼 뜨거운 청춘. 여행중에 사진을 보내준 제자, 허락받고 올림. -by 심성

 

[부 활 제 5 주 일 (다 해) 2022. 5. 15 Jean. 13,31-33.34-35]

 

 

 

1. '안심'을 좋아하세요? 마블링이 있는 '등심'을 좋아하세요?

 

 

 

칼린 지브란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를 읽어본다.

 

서로 사랑하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마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유형진의 「허니 밀크 랜드의 체크무늬 코끼리」를 읽어본다.

 

그녀는 사랑이 깨지는 순간을 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을 그녀는 자주 목도(目睹)한다//사랑이 어떻게 깨지는지/깨진 사랑이 어떻게 가루가 되는지/가루가 된 사랑이 어떻게 녹는지/녹은 사랑이 어떻게 질척해 지는지/그 질척한 사랑이 그리는 마블링을/목도한다//녹아도 녹지 않고/ 깨져도 깨지지 않는/어떤 알갱이들이 만들어주는/그 오묘한 무늬를/체크무늬 코끼리/그녀는 본다//사랑의 마블링을 볼 줄 아는 그녀는/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데/정작 그녀를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이/이 세계의 비극//허나 이 세계의 비극은 이것 말고도/몇 개는 더 있는데/더 큰 비극은 그 비극을 이야기하기에 시간은/산장에 사는 검은 고양이의 털만큼/셀 수 없다는 것이다

 

칼린 지브란의 사랑론은 쿨한 심장을 가진 사람, 깊은 영성에 몰입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높고 깊은 사랑이다. 사랑이 아름답기 위해선, 사랑이 서로에게 상생의 지침이 되기 위해선 칼린 지브란은 두 사람이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고 조언을 한다.

 

이 간격은 물리적인 간격인가? 아님 정신적인 간격인가? 아님 생존방식의 거리인가? 칼린지브란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라고 그 이유를 들려준다. 우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는 ‘큰 생명의 손길’은 ‘신 혹은 사랑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유형진의 「허니 밀크 랜드의 체크무늬 코끼리」는 절대로 쿨한 사랑, 쿨하고 싶은 사랑이 아니다.

 

스테이크 먹을 때 안심과 등심을 선택해 먹는 사람이 있듯, 칼린 지브란은 지방하나 없는 오직 순살, 안심만 먹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유형진의 시, 「허니 밀크 랜드의 체크무늬 코끼리」는 적당한 지방, 마블링이 있는 등심을 먹는 사람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유형진은 사랑은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는 그런 단순명쾌한 유희가 아니라 생의 저편으로 쭉 미끌어지는 마블링 같은 흔적을 남긴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한 사람들은 마치 체크무늬 옷을 입은 코끼리처럼 실존의 면적이 확장된다고 보았다. 사랑의 흔적, 마블링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칼린 지브란의 사랑론과 유형진의 사랑론 가운데 어떤 사랑이 더 아름다운지를 가려낼 수는 없다. 가려낼 필요도 없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론이 모두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이 사유한, 그들이 체험한 그 사랑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 아름답다!

 

 

 

 

2. "믿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습니다."(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우리의 가슴을 차지할 수 있는 큰 생명이 누구인가를, 왜 신을 사랑하면서 사랑의 상처를 감수해야 하는가를 물었던 한 사람,

 

신이 있다는 것을 이성으로 존재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대우고전총서3, 박승찬, 아카넷, 2012)는 “신은 신이다”라는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즉 신을 교회의 성전 안에 박제화 하지 않기 위해서 평생을 ’자기 목소리‘를 낸 한 사람이었다.

 

신은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심장을 차지할 만큼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분이기때문이라는 것을 규명해야만 신을 믿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신을 팔아, 신을 핑계로, 소명을 직업화 하지 말라는 날카로운 일침이라고 할 수 있다.

 

안셀무스는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 서문에서,

 

"믿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습니다." 라는 파격적인 명제로 시작한다. 이 명제는 영성적인 것은 언제나 지적인 것을 동반한다는 선언에 가깝다.

 

신은 사랑이니까 무조건 믿어라, 혹은 신은 신이니까 믿어라, 라는 식의 환원론적 오류가 오히려 신과 인간을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은 우리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무지몽매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신을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박제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자기 목소리의 상실, 법없이 착한이라고 불리는 아이히만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사유없이 저지르는 악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는가를 묻지 않는 ‘집단무의식’에 감염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자기 목소리가 너무나 분명해, 종교안팎의 비판과 논쟁의 중심에 늘 서 있었던 분이다.

 

모든 선들은 선 그 자체인 어떤 것 하나를 통해 선하기 때문에 그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사실이 발견된 것처럼, 필연적으로 어떤 것이 가장 큰 것이라는 결론도 나온다. 큰 것들은 무엇이든지 큰 것 그 자체인 하나의 어떤 것을 통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체처럼 공간적인 큼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같이 크면 클수록 더욱 좋고, 값진 것을 말하고자 한다. - 모놀로기온

 

나의 하느님이신 주님이여, 당신은 진실로 존재하며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정당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정신이 당신보다 더욱 위대한 실재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는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초월하고 창조주를 심판할 것이며, 이와 같은 결론이야말로 가장 불합리하기 때문입니다. - 프로슬로기온

 

그러므로 주님, 당신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큰 어떤 것입니다. 그러한 종류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그것 자체가 아니라면, 당신보다 더 큰 어떤 것이 생각될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 프로슬로기온

 

 

대전제: 신은 그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소전제: 그러나 이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론: 그러므로 신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한다.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결실인 『모놀로기온』은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영원하고 무한한 하느님(신성)의 본질을 사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사유와 명상에 관련된 것들에 대해 수사들과 대화하며 강연했던 것들 글로 옮긴 저작이다. 매우 간결한 형태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방대한 저작에 나오는 핵심 사상들이 요약되어 있다.

 

『프로슬로기온』은 『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는가』와 함께 안셀무스의 2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수세기 동안 끊임없는 논쟁과 반향을 불러일으킨 ‘존재론적 신존재증명’ 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격렬한 반대와 지지를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한 입장 표명은 해당 철학자들의 사상적 경향을 구분하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이 증명의 성격과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활발한 토론이 진행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종교적 가치상실의 시대, 신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천착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안셀무스의 사상은 점점 신에 대한 믿음을 갖기 힘든 시대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신을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하나의 길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서 신의 자리는 점점 작아져간다는 것이다. 종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신앙인이 늘어난다는 것과는 무관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현상을 옛 신은 가버리고 새로운 신은 아직 오지 않은 <이중 결핍의 시대>라고 말한 바 있다. 하이데거는, 신의 부재, 즉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모든 면에서 신의 현존을 우리가 박탈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현대가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인 이유가 무엇인가? 신의 사랑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를 전체로서 그리고 동시에 최고의 존재자로부터 파악하고자 했던 일련의 시도로서, 존재-신-론의 역사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극단적인 존재망각의 시대를 초래 했다고 본 것이다. 박제화된 신을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이성과 신앙의 결합은 영성적인 것은 결코 지적인 것과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 존재망각의 역사를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집어든 결과라고 보았다. 그런 뜨거운 문제의식에서 촉발된 신존재증명에 대한 안셀무스의 고찰은 단순한 중세신학에 대한 문헌학적 회귀와 고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종교적 허무주의와 무관심이 팽배한 이 시대에 신과 신앙의 문제를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고 했던 안셀무스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개발한 학문 방법과 목표를 통해 수세기 동안 중세철학과 신학을 규정함으로써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확연히 갈린 철학과 신학을 아우르려고 했다.

 

또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결해 주는 중세철학의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위해서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진리들을 심도 있게 고찰함으로써 철학과 종교의, 이성과 신앙을 화해시키려 했다.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이런 노력의 결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분석을 통한 존재론적 신존재증명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격렬한 반대와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대전제: 신은 그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소전제: 그러나 이 이상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론: 그러므로 신은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한다.

 

안셀무스는 어떻게 삼단논법으로 신을 존재증명 할 수 있느냐는 교회의 비판에 직면하여 사유를 경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가우닐로 수사,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와 같은 이는 이런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헤겔 등의 근대 철학자들은 안셀무스의 증명 방식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철학적 신론을 위한 토대로 삼았다. 이 존재론적 신 증명은 그에 대한 입장 표명에 따라 관련 철학자들의 사상적 경향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어느 시대이든 균열된 이성과 신앙과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해야할 화두는 존재한다. 그것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안셀무스의 사상에서 인간 이성만을 절대화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던 근대 이후의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잠재적인 비판과 다른 한편으로 신앙에 대한 강한 확신을 토대로 일체의 직접적인 성서 인용마저 피했던 안셀무스의 자세는 인간 이성의 비판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무조건 수호하려는 호교론적 카테고리에 갇힌 편협한 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준 것이다.

 

<균열된 이성과 신앙 사이의 관계>를 거듭해서 돌이켜 보아야 할 지금, 안셀무스의 신존재증명의 고민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 가능성>을 진지하게 반성해야 하는 이 시대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한다. 그것은 사랑의 근원인 신을 사유하지 않고 어떻게 <사랑은 아름답다>는 명제를 진리로 수락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3.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 31-35 / 요한 15,9-17

 

다시 질문해 본다.

 

사랑은 아름다운가? 또 사랑하는 것은 이름다운 것인가? 어떻게 사랑을 해야지만 우리가 하는 사랑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전하는 요한 13, 31-35을 읽어 본다.

 

Ⓐ방에서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시대는 사랑에 대한 담론으로 넘친다. <에로스-필리아-아가페>, 사랑의 세 단계에 대한 어원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는지를 몰라도. 적어도 자신이 어떤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는지는 대략 알고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랑과 무관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대부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예수님이 하신 그 사랑을 좋아하지만 그 사랑을 전하는 그 자신조차도 잘 하지 못한다는 것도 대략 알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 사랑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랑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잘 하고 싶어도 잘 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를 당위 명제로 제시할 때, 자칫 상투적인 호교론적 사어가 되거나 진리값을 지불하지 않은 공소한 언어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기에 왜 그 사랑을 예찬은 할 수 있을지언정 때론 그 사랑이 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다가오는지? 혹은 왜 그 사랑을 하려고 해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인지? 그것이 성찰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이 듣자마자 이해할 수도, 그렇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분은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유언처럼 제자들에게 남겨 준 이유가 무엇인가를 묵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와 베드로를 행위 이전에 아셨다면 나머지 제자들도 수난 현장에서 어떤 행태를 취할지 모르셨을 리가 없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하는 '사랑의 무능'을 당연히 잘 아셨을 거라는 사실과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들기도 한다. 3년 동안 어떤 분이 일관성있게 전지전능함을 보여주셨는데, 막상 수난현장에서 자신에게는 무능의 극치를 보여줄 때, 과연 누가 그 엄청난 낙차를 이해할 수 있을까? 또 머리로 이해했다손치더라도 가슴으로 그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우리가 부활대축일 때 부르는 글로리아 그 영광송을 수난현장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노래하고, 믿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세 번의 수난예고를 귀로는 들었겠지만 들었다고 수난과 영광을 자명하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 속에서 제자들이 들어도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너무나 자명하게 교리적, 성서적, 신학적으로 너무 많이 들어서(혹은 알아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거의 같은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멈춰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다고 생각하는 데 실은 모르고 있다'는 그 지점에서,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거 같은, 착시상황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앎은 어떤 앎이고,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다 아는 거 같은데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열절케 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심장을 오롯이 차지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앎은 ‘무지의 황홀’은 아닌지, 안다는 무지에 취해있는 역설은 아닐까를 묻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2008년 그 무렵, 니체의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블로그에 소개하면서 이별에 대해 쿨하게 접수하라고 젊은 친구들에게 충고한 글을 올린 바 있다. 2008년에 쓴 단상이다. 그 글을 쓸 때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그전에 갑자가 너무나 많이 서둘러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예측할 수 없는 이별들을 내가 수용하는 길이란 생노병사의 자연순리로 받아들여야만 했었다. 그래서 내가 이별 앞에서 아주 쿨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별을 무서워한다.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란 시를 읽으면서도 그냥 가슴이 미어지듯 아프고 왈칵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원래 전생이 곡비라 울기도 잘 하는 편이지만 좀 그렇다. 그래서 비로소 알았다. 이별을 두려워하고, 이별에 쿨한 사람이 결코 아니란 사실을.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부동심)로 슬픔을 방어했다는 것을, 이별에 생노병사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게 되면 현실의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음을. 그래서 2008년에는 모든 이별시에 대해 쿨한 해석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못하겠다. 요즘, 산다는 것은 철벽을 치는 것이 아니라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 같다. 그래서 알았다. 이별 후에 사랑의 마블링을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지의 황홀"에 대해 부연을 해야할 듯하다. 백과서전적 지식을 추구하는 이들은 지식추구에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었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도 철저한 율법준수에 큰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보다 하느님에 대해 잘 아는 거 같은 이들도 없었지만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섰다는 것, 그 맥락에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은 것이 진리를 다 알고 실천하는 것과 비례할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에 우리 자신이 멈춰서야 한다는 것이다. 다 알면서 실은 다 알지 못하는 것, 이를 '무지의 황홀'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성찰해 보면 진리를 위한 지식탐구인지, 즐거움이나 쾌락을 위한 지식탐구인지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는 최대치라고 생각하지, 더 알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더 알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자유케하고, 열절케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주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요한 13, 31-35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못하거나(유다), 할 수 없어서(열한제자) 하지 못하는 그 바닥에는 지독한 ‘무지의 황홀’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십자가상에서 그분이 아버지께 드린 용서의 기도는 그분을 못 박은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각별한 사랑을 받고도 그분을 배신했거나, 그분에게서 도망쳤던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오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지만 진짜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는 우리'에 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영광------------------------------> Ⓑ사랑

 

그렇다면, Ⓐ에서 Ⓑ로 우리 안에서 어떤 장애도 없이 수렴되기 위해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무지의 황홀’을 건너야 한다는 문제 앞에 서 있음을 알게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취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을 살지는 못한다. 다만 언어적으로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왜 예수님의 사랑에 끌렸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고 '신은 신이고, 사랑은 사랑'이라고 동어반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랑을 추구하면서 그분이 말하는 그 사랑에는 결코 닿지 못하게 되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거 같은 데 정작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황홀', 그것을 넘어서야지만 '사랑은 아름답다'는 진리의 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울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부활5주 오 신부님은 강론에서 ‘사랑은 아름답고 또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수고로운 일이기도 하고 때론 고통스런 일', '피하고 싶은 사랑'이기도 하다는 전제하에 ‘사랑이 아름답기 위해선 거쳐야 하는 과정을 피하려고 해선은 안 된다’는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는 머리로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예수님의 사랑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은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사랑은 보상받지 못한 사랑이고 대우받지 못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기 떄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하기가 쉽지 않고, 또 따라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겪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새 계명의 의미를 지금은 깨달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로)제자들은 사랑할 힘을 다 잃어버렸고, 사랑을 꿈꿀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사랑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고(...)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능력도 함께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오늘 이 새 계명은 거쳐야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아야 제자들은 다시 사랑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강론에서는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첫 번째 제자들이 그 거쳐야 하는 과정이란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결정적 순간에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친 자신들을 '용서'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전한다. 사랑의 시작이 용서라는 것!

 

모든 용서는 자기 용서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이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가 단절 되는 것은 실은 그분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 무엇에 실망하고 있는지 그 얼굴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후회하며,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사랑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고(...)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능력도 함께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때,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하면서 받은 각별하고 특별한 사랑을 기억할 수 있고, 그때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사랑의 힘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제언이다.

 

Ⓒ용서-------------------------------> Ⓓ기억

 

 용서의 강을 건너야,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받았던 기억의 강을 건널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선후의 과정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시적인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자신에 대한 용서든, 타인에 대한 용서든, 용서는 신적 행위에 해당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타자의 인격이 반영된 그의 생존방식과 나의 생존 방식과 충돌하기 때문에 용서할 상황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용서는 타자가 그 용서를 받아주는가와도 사실 상관이 없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 달라진 제자들의 삶은 자신들의 사랑의 무능을 용서하면서, 동료들의 사랑의 무능을 용서할 수 있었고, 그들의 기대와 충돌한 그분의 아가페까지 용서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그분의 아가페까지 용서한다?

 

복음과 강론을 연결하면 아가페까지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다. 그분의 영광은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거친 영광이다.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누가 보아도 사랑의 무능이다. 제자들이 그 사랑에서 도망친 것에 결코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었던 타볼산의 변모에 환호했던 그들이, 얼마 후 사랑의 무능으로 표현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아름답다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그들이 자력으로 강생의 신학과 십자가신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난 강론을 연결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존재 사이] 2021년 사순5주 강론 중에 '하느님의 무능으로 표현된 사랑'에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전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수난의 과정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전능한 사랑이 아니었다.

 

제자들이 전능한 하느님은 있어도 전능한 사랑은 없다는 것을 배우는 일은, 그런 맥락에서 전능과 무능의 역설인 '아가페'를 용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전능한 사랑은 없습니다.

 

복음과 강론을 도식하면,

 

Ⓐ영광------------------------------> Ⓑ사랑

Ⓒ용서------------------------------> Ⓓ기억

 

수난의 과정을 거친 영광이 그분이 보여주신 부활의 사랑이고, 자신을 용서하는 것부터 시작한 사랑이, 그분과의 각별한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이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물론 자신들의 사랑의 무능이 그분의 사랑의 무능과 일대일 대응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말하는 영광이 어떤 과정을 거친 영광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들의 사랑의 무능과 동료들의 사랑의 무능을 탓하지 않고 용서 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무능으로 표현된 사랑'에 대해서,  사랑은 무능하지 않다. '유능하다-무능하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무능과 유능, 그 어떤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분이 보여준 아가페는 이 세상 그 어떤 영역과도 비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모든 근원을 아우르는 원리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지 말고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은 그래서 언뜻 맞는 말인 거 같지만 상당히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자, 하느님의 창조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모순을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라(...)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 9-17)

 

사랑은 아름답고, 사랑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이 어떤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끌어당겨야 한다. 그분이 보여준 그 사랑, 아가페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대상이 아닌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죽어서 천국이 보장된다는 것으로 세상을 유인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보상은 사랑이고, 사랑의 대우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살아서, 바로 오늘이 천국임을 하느님의 아가페를 말하는 이들은 살아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용서와 기억>의 과정을 거쳐, 사랑의 무능이 실은 사랑의 권능이라는 것을, 무능으로 표현된 사랑이  '몰아적 사랑'이라는 것을, 즉, 역설적인 사랑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무능으로 표현된'  '몰아적 사랑'에 머무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되찾았을 수 있고, 사랑은 아름답고, 사랑하는 일은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준 J,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순례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