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하늘-예루살렘’이라는 공백의 표지에서 ‘머무름과 떠남’의 ‘포향(飽享)’으로

나뭇잎숨결 2022. 5. 31. 18:03

 

 

 

 

 

 

‘하늘-예루살렘’이라는 공백의 표지에서 ‘머무름과 떠남’의 ‘포향(飽享)’으로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거룩하신 주님 승천 대축일(다해), 2022년 5월29일, 루카 24,46-53]

 

 

 

 

 

 

1.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까/갑자기 검붉은 색깔의 어린 장미가 가까이서 눈에 띄는데/,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있었다//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하지 않았다. //,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에서 초점은 '장미'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시인은 '아무도' 그곳에서 장미가 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아무도' 장미가 피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천편일률적인 현실 앞에서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이미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뫼비우스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다는 것은 깨달음이기보다는 탄식에 가깝다. 인간의 의지란 고작 장미의 존재에 대해 필연을 우연처럼 목격하거나, 그것을 믿지 않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상한선이 이미 상식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결정론적 사유가 담겨 있다.

 

작가와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연결해서, 장미를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장미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장미를 오늘이라는 ‘생’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오늘의 기록자다. 그때, 생은 우리에게 써 내려갈 하나의 텍스트다.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 텍스트이기에 읽어 내야하는 문제만 남아 있는 결정론적인 것으로 혹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빈 백지 서판으로 주어진 것으로, 그래서 온 생으로 기록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모든 글은 오늘이라는 생을 기록한 글이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는 「헤르메스의 길」에서,

 

오 아들아,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육신을 거쳐야, 얼마나 많은 악마의 무리를 겪어야, 얼마나 많은 별들의 반복과 주기를 거쳐야, 하나인 존재에게로 가는 것을 서둘게 될까?

 

정현종은 「사랑의 꿈」에서,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사랑은 항상 뒤에 온다//그대는 살아 보았는가./그대의 사랑은/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만일 타인의 기쁨이/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그리고 타인의 슬픔이/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사랑은 항상 생뒤에 온다.//그렇다면?/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헤르메스가 바라본 생은 단 한 번으로는 무엇도 결코 맛볼 수도, 바라볼 수 없으므로 윤회를 반복해야지만 충만이라는 이름의 ‘하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불교적 사유가 담겨있다면,

 

정현종 시인은 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고 영겁의 시간을 살지라도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생은 알 수 없다는 기독교적 사유를 피력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 정현종 시인이 쓴 시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던 길을 멈추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생에서 ‘몰입의 즐거움’을 느꼈을 거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몰입만이 끌어당김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2. 『몰입의 즐거움(Finding Flow)』 & 『몰입의 기술(Beyond Boredom and Anxiety)』

 

몰입의 즐거움을 생의 즐거움이라고 바라본 학자가 있다.

 

시카고대학 심리학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1999년 이후 『몰입의 즐거움(Finding Flow)』, 『몰입(Flow)』, 『몰입의 경영(Good Business)』, 『몰입의 기술(Beyond Boredom and Anxiety)』, 『창의성의 즐거움(Creativity』), 『어른이 된다는 것은(Becoming Adult)』 등의 저서에서 행복하려면 <몰입>할 것을 권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는 순간, 삶이 변화하기에 몰입은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21세기가 요구하는 행복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전문지식과 창의적 사고’를 끌어가는 힘, ‘몰입’의 기술이라고 보았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니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느끼려면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일을 소홀히 다루기 때문이다.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는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물론 몰입하지 않고도 행복을 맛볼 수는 있다. 고단한 몸을 눕혔을 때의 편안함과 따사로운 햇살은 행복을 불러일으킨다. 모두 소중한 감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유형의 행복감은 형편이 안 좋아지면 눈 녹듯 사라지기에 외부 상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몰입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성인이 일상 생활에서 몰입 경험을 언제 하는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여가 시간보다는 근무시간에 그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경험추출법(ESM, Experience Sampling Method) 조사 결과가 처음에는 무척 놀라운 것이었다. 아주 뛰어난 실력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상황에서 집중력과 창조성, 만족감이 높아지는 현상은 집보다는 직장에서 더 자주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 중에서 게임에 가장 가까운 성격을 가진 것이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잘 간과한다. 일에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이 있다. 일은 게임 운동 음악 예술처럼 몰입할 수 있고 보상이 따르는 활동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이런 구조를 지닌 요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일의 역설이다.

 

보통 사람은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삼 분의 일을 혼자서 보낸다.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사람도 문제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은 사람도 문제가 있다. 오지의 벌목공이나 정신과 의사처럼 물리적 정서적으로 고립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살할 확률이 높다.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수사들은 격리된 방에서 평생을 살면서도 이렇다 할 부작용을 보이지 않는다. 잠수함 승무원들은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몇 달을 끄떡없이 지낸다. 몰입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 한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가장 손쉬운 길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혹은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하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실 가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느끼고 살아간다. 그런 입장에 놓이면 아까운 정력을 탕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진해서 원하는 일을 늘려야 한다. 무엇을 원한다는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이 집중력을 높이고 의식을 명료하게 만들며 내면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몰입은 갈망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긍정의 심리학(Positive Psychology)' 분야의 선구적 학자라는 평가와 더불어 심리학과 경영학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심리학자로도 꼽힌다. 수개 국어에 능통해 소설과 시 등의 번역 작업과 함께 단편소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일찍이 창조성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그는 창조적인 사람의 3가지 요건으로 '전문지식과 창의적 사고, 몰입'을 제시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창조적 발견 저변에는 그의 물리지식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창조 또한 '지식'이 기반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하며, 떨어지는 사과로 중력 개념을 이끌어낸 뉴턴처럼 같은 사물을 다르게 보는 '창의적' 사고를 강조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일에 대한 ‘몰입’이 창조를 완성시킨다고 역설한다.

 

그의 이런 확신은 창조가 선천적인 요인보다는 스스로의 의지에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는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자신이 창조적이라고 믿으면 창조성이 발휘되고, 그렇지 않다고 믿으면 창조성은 위축된다. 이와 관련한 그의 연구업적은 많은 저서로 출간되었으며, 학계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주목받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외부 자극들 속에서 살아가며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울고 웃는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우리는 그에 휩쓸리기 쉽다. 저자는 그럴수록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나를 지키는 삶의 열쇠를 몰입에서 찾는다. 좋아하는 마음이 몰입을 만들고, 몰입이 일상에 의미를 가져다준다. 일하며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업무 만족도가 낮을 때 직장인들은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반면 여가를 즐기며 편하게 놀 때는 만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순하지 않은 이유가 존재한다. 일을 하느냐 쉬느냐가 아닌,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행복과 직결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얼마나 몰입해 있느냐’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느껴지거나 하루하루가 똑같다고 느껴지는 사람, 단조로움이나 무기력에 빠진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생에 몰입의 즐거움을 잃었다는 일침이다. 그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나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무언가에 빠져서 몰입하는 시간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때로 행복을 성취로 착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행복, 의미 있는 삶은 외부적인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어떤 경험을 만족스럽게 해내는가에 핵심에 있다. 그러한 생을 즐기기 위해서 몰입이 필요하며, 몰입은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고 본 것이다. 더 나아가, 몰입은 우리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3.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6-53)

 

 

J를 따르던 제자들이 그분의 승천 이후에 크게 기뻐했던 이유는 ‘머무름’에 있었다. 그 '머무름'도 몰입의 즐거움과 그 맥을 같이하지만, 그러나 그 방향은 훨씬 확산적이다.

 

루카 24,46-53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46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 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49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50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51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5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53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전하는 루카 24,46-53에서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라고 전하는 49절을 중심으로 ‘머무름’이 어떻게 승천의 의미를 바라보는 핵심 키워드인가를 바라보려고 한다.

 

⒜힘을 입을 때까지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에서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적 표지일 것이다.

 

 

Q1. 왜 예루살렘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전하고 루카 24,46-53에는 '예루살렘'이 세 번 등장한다.

 

'예루살렘'은 ‘하늘’과 대응되는 공간적 표지이다. '예루살렘'을 이해하는 것이 그분이 올라가신 ‘하늘’ 혹은 ‘하늘에 계신’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에 해당한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신과 인간을 나누는 단절이 아니라 하늘과 연결되는 열린 개념이다. 승천은 부활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열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특정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것이 승천의 의미를 바라보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승천’ 사화에서 ‘하늘에 오르시다’는 것이 어떤 지형적인 옮겨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하늘'과 '예루살렘'의 표지를 오늘, 우리의 모국어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 되어야 한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이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승천사화에서 복음 사가가 예루살렘을 특정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바라보는 것이며, 즉 갈릴레아나 베타니아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한 그 예루살렘을 무엇으로 바라볼 것인가를 해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시간을 40일이라고 지정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유일신교인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거룩한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세운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있었던 곳이다. 전례에서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지이자, 천상 예루살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읍이며, 의로운 영혼을 대표하기도 한다. 시편 120-135의 <순례자의 노래>에서 “예루살렘은 나의 행복의 집, 예루살렘은 황금빛 집, 예루살렘은 당신의 축복의 집”라고 노래한다. 또 “거룩한 도성”(이사 52,1)이며, “세상의 중심”(에제 38,12)이라는 것에서 예루살렘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역사가 펼쳐진 중요한 공간적 배경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단지 종말론적인 종교적-신학적 의미 이상의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흔히 루카 복음 사가를 신학자이자 역사가로 보는 이유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구세사의 사건을 세계사의 재편위에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승천사건 자체를 아예 다루지 않은 요한복음과는 달리, 그리고 승천과 부활을 동시적인 사건으로 다루는 마르코와 마태오와 사가와는 달리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시간을 40일이라는 시간을 설정한 것에서 루카복음사가 주지하고자 하는 승천의 의미에 한 발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예루살렘을 예수가 도달한 목적지로서 아울러 사도들이 그곳을 떠나 모든 민족들에게 도달한 시작점으로 묘사한다. 예수에게는 오메가요 제자들에게는 알파가 되는 셈이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는 분부는 이 도시를 그리스도 사건의 목표요, 출발점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 선포의 목적지요 출발지로 여기는 신학적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K. 클리쉬)

 

예루살렘은 예수가 도달한 목적지이자, 사도들이 떠나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시작점이라는 데서 예루살렘은 1차적으로 하늘과 연결된 공간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멈추지 말고 본질적인 표지를 이해하기 위해 ‘머물러 있어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머무름의 의미가 승천의 의미와 예루살렘의 의미를 담지하기 때문이다. 

 

Q2. 왜? 혹은 무엇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라는 이 소명을 어떻게 풀어내야하나? 이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떠난 뒤 이천년이 지난 후에도 아직도 이 '머무름'의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 있는 '머무름'의 문제, 아직 하느님 나라가 요원한듯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충분히 예루살렘이라는 표지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그분이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라는 그 사랑을 입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전하는 도구 자체가 사랑이다. 사랑은 목적과 도구가 같다. 그런데 그것은 전하는 우리가 충분히 그 사랑에서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루살렘이라는 본질적인 표지에 충분히 머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충분히 복음적 삶으로 끌어당길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충분히 머무르지 못하고 ‘떠남’에만 연연한 노마드의 여정이 인류역사라는 비극의 단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J의 사랑-복음 선포는 기계적인 외침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사랑에 충분히 ‘머물러 있어라’에서 이를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유다를 제외인 사도들의 열정과 그들의 마지막 여정까지 다 알고 있다.

 

'머물러 있다'는 '하늘로 오르다'와 마찬가지로 단지 지형적이고 공간적인 이동이나 점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머무름'은 '위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와 연결되어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위에서 오는 그 힘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다. 그 힘이 다음 주에 살펴볼 '성령'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성령'은 또 무엇인가? 성령 칠은과 성령의 열매 모두는 사랑이 포괄하는 그분 나라의 표지다.

 

여기서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 인류는 늘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모르는데, 사랑을 전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당연한 질문 앞에서 사랑을 모른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어휘의 의미나 아가페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구체적으로 얼마나 그분의 사랑을 체험했는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머무름은 무엇보다 사도들에게 그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충분이, 마치 사랑을 입듯이 체험하고 느껴야 한다는 것을 주문한다. 머무름은 구체적 사랑의 포만감을 의미한다.

 

이 머무름에서 충분히 흘러넘치듯, 범람하듯 그분의 나라를 경험했을 때 ‘하늘과 예루살렘’이 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부활과 승천은 하늘과 땅이 같아지는 열린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이 지형적 이동이 아니라 십자가상의 ‘다 이루었다’는 의미를 포괄하고 있는 ‘공백’의 표지임도 2차적으로 읽어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할 여력을 남겨놓고 그분이 재자들에게 사명만 주고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일이나, 사랑을 ‘다 이루었다’라고 할 정도라면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힘은 사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은 분명한데 그 사랑이 그들이 기대하는 그 사랑도 아니고 또 기대에 부응하지도 못하는 그 벅찬 사랑을 그들 삶으로 정리하는 일도 사실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십자가 사랑이라는 공백의 표지를 읽을 수 있을 때, 그 다음 단계인 부활과 승천이라는 사랑의 포향(飽享)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승천사건에서 '하늘- 예루살렘'이라는 공백의 표지를 먼저 읽어내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때 '머무름과 떠남'이라는 표지를 살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다음 주에 바라볼 성령을 받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역사적인 맥락의 세계사적 의미에서 깊은 영성의  단계로 넘어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활동가이기 이전에 영성가가 되라는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활동가는 곧 영성가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는 지상의 교회를 확장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해야할 것은 저 ‘높은 데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이라는 표지에 충분히 머물러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 머무름은 위에서 오는 힘(성령)을 입기 위해서이고, 그 목적은 세상 속으로 떠나기 위해서이다.

 

영성가들은 이렇게 제언한다. 타인에게 신의 사랑을 전하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신의 사랑에서 포만감을 느껴라,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은 존재임을 알라고 제언한다.

 

하느님은 그대가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수많은 창조물들을 동원한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었으니 하느님은 당신을 그대에게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듯이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그대에게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창조된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그대의 관계들은 이 우주와 맺는 관계들이다. 하느님께 속한 이 우주는 그대가 지각하는 분리된 몸들을 모아놓는 하찮은 총합을 능가한다. 신은 그리스도를 주셨고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셨다.”(헬렌 슈크만)

 

그런 맥락에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인류에게 전해진 총체적인 사랑(하느님-예수-성령), 그 구체적인 현존을 충분히, 충분히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이 하늘이 될 때까지’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2022년 예수님 승천을 묵상하면서 그 주제를 ‘하늘-예루살렘’이라는 공백의 표지, ‘머무름과 떠남’의 ‘포향(飽享)’이라고 집약해 본 이유다.

 

무엇보다 승천은 사랑의 포만감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다’는 사랑속에 들어간 사건이자, 사도들이 그 사랑에 그들 역시 포함되어 있음을 포향하는 시간이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숨처럼 불어넣어지는 그분의 사랑을 그들이 옷처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머물러라를 묵상하다 보면, (기독교 초기에 밀교라고 이단시했던 ‘영지주의’까지 이해하게 되는 전례주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들 생애에 삼위일체사랑을 다 체험하기는 역부족이라고 여겼던 이들이 불교처럼 전생을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복음사가는 사도들의  머무름의 기쁨을 ‘크게 기뻐하며’라고 전한다.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시간을 40일이라고 바라본 루가 복음사가는 그렇게 그분의 사랑에 대해, 사도로 대표되는 인간이해에 깊은 성찰과 직관, 계시를 받은 듯하다. 그분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를,

 

2020년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제자들에게 준 사명은 "하늘나라는 마음이 가벼워야 갈 수 있는 나라로(...)하늘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말씀이며(...) 예수님께서 곁에 머물며 힘이 되어주겠다는 말씀으로, 하늘은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초대하신 곳"으로 부단히 '하늘'이 무엇인가를 묵상할 것을 권한다.

 

Ⓗ오 신부님은 2021년 강론에서는 예수님 승천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는 데도 예수님을 느끼지 못했던 삶과 앞으로 예수님 없이도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 이 두 가지 삶이 모두 다 자신들을 힘들게 했고 힘들게 할 것이지만(...)자신들의 부족함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올 수 있었던 그 공간이었다는 것에서 용기를 얻어(...)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승천의 진정한 의미라고 전한다.

 

 

강론에서 제언하는 ‘하늘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명도,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도’ 예루살렘이라는 표지인 ‘머무름’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머무름은 떠남을 위해서 필히 거쳐야할 은총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은총의 과정은 관념으로 거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가 체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만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제자들도 그들 생에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해선, 우리 역시 이 순례가 끝날때,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해선 각자의 '예루살렘'에서 충분히 '머물러' 저 위에서 오는 힘을 입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포향[飽享]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실컷 누림.

 

 

 

 

 

 

 

 

나 어젯밤에 잘 때 한 꿈을 꾸었네
그 옛날 예루살렘
성의 곁에 섰더니
허다한 아이들이 그 묘한 소리로
주를 찬미 소리 참 청아하도다
천군 천사가 함께
화답함과 같이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그 꿈이 다시 변하여
이 세상 고요코
호산나 찬미 소리 들리지 않는다
햇빛은 아주 어둡고
그 광경 참담해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의 일이라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의 일이라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그 꿈이 다시 변하여
이 세상 다 가고
그 땅을 내가 보니
그 유리 바다와
그 후에 환한 영광이
다 창에 비치니
그 성에 들어가는 자
참 영광이로다
밤이나 낮이 없으니
그 영광 뿐이라
그 영광 예루살렘 성
영원한 곳이라
이 영광 예루살렘 성
참 빛난 곳일세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호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