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알아듣겠다’는 의지와 ‘알아들었다’는 인식의 ‘간극’을 넘어서

나뭇잎숨결 2022. 5. 10. 10:59

 

 

‘알아듣겠다’는 의지와 ‘알아들었다’는 인식의 ‘간극’을 넘어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30)

 

 

 

 

 

[부활 제4주일 (다 해) 2022. 5. 8, 요한 10,27-30]

 

 

 

 

1. 김용택,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그루의 나무 같다. 잔디와 나무가 있는 집들은 멀리 있고, 햇살과 바람과 하얀 낮달이 네 마음속을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한그루의 나무가 세상에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고 또 잊어야 하는지. 비명의 출구를 알고 있는 나뭇가지들은 안심 속에 갇힌 지루한 서정 같지만 몸부림의 속도는 바람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내부의 소리다. 사람들의 내일은 불투명하고, 나무들은 계획적이다. 정면으로 꽃을 피우지. 나무들은 사방이 정면이야, 아빠. 아빠, 세상의 모든 말들이 실은 하나로 집결되는 눈부신 그 행진에 참가할 날이 내게도 올까. 뿌리가 캄캄한 땅속을 헤집고 뻗어가듯이 달이 행로를 찾아 언 강물을 지나가듯이 비상은 새들의 것, 정돈은 나무가 한다. 혼란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마치 반성 직전의 시인 같아.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 머릿속은 평생 복잡할 거래.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면 아빠의 눈빛은 집중적이래. 아빠, 피츠버그에 사는 언니의 삶은 한권의 책이야. 책이 쓰러지며 내는 소리와 나무가 쓰러질 때 내는 소리는 달라. 공간의 크기와 시간이 길이가 다르거든.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높은 첨탑이 있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슬프게 온 마을에 퍼진다니까. 폭풍을 기다리는 고요와 적막을 견디어내지 못한 시간들이 잎으로 돋아나지 못할 거야. 나는 가지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해. 이국의 하늘, 아빠, 여기는 내 생의 어디쯤일까? 눈물이 나오려고 해. 버스가 영화 속 장면처럼 나를 데리러 왔어. 아빠는, 엄마는, 또 한 차례 또 한 계절의 창가에 꽃 피고 잎 피는 것에 놀라며 하루가 가겠네. 문득문득 딸인 나를 생각할지 몰라. 나는 알아. 엄마의 시간, 아빠의 시간, 그리고 나의 시간, 오빠가 걸어다니는 시간들, 나도 실은 그 속에 있어. 피츠버그에서는 버스가 나무의 물관 속을 지나다니는 물 같이 느려. 피츠버그에 며칠 머문 시간들이 또, 그래. 구름처럼 지나가는 책이 되어. 한장을 넘기면 한장은 접히고 다른 이유가, 다른 이야기가 거기 있었지. 책을 책장에 꽂아둔 것 같은 내 하루가 그렇게 정리되었어. 나는 뉴욕으로 갈 거야. 뉴욕은 터득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막 배달된 책더미 같아. 어디에 이르고, 어디에 닿고, 그리고 절망하는 도시야. 끝이면서 처음이고 처음이면서 끝 같아. 외면과 포기보다 불안과 긴장이 좋아. 선택이 싫어. 아빠, 나는 고민할거야. 불을 밝힌 책장 같은 빌딩들, 방황이 사랑이고, 혼돈이 정돈이라는 걸 나도 알아. 도시의 내장은 석유 냄새가 나.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살 거야. 난 어디서든 살 수 있어. 시계초침처럼 떨리는 외로움을 난 보았어. 멀고 먼 하늘의 무심한 얼굴을 보았거든. 비행기 트랩을 오를 거야. 그리고 뉴욕. 인생은 마치 시 같아. 난해한 것들이 정리되고 기껏 정리하고 나면 또 흐트러진다니까. 그렇지만 아빠,어제의 꿈을 잃어버린 나무같이 바람을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은 멈추었다가 갑자기 달리는 저 푸른 초원의 누떼 같아. 그리고 정리가 되어 아빠 시처럼 한그루 나무가 된다니까.아빠는 시골 에서 도시로 오기기까지 반백년이 걸렸지. 난 알아, 아빠가 얼마나 이주를 싫어하는지. 아빠는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감자가 땅을 밀어내고 자기 자리를 차지해가는 그런 긴장과 이완, 그리고 그 크기는 나의 생각이야. 밤 냄새가 무서워 마루를 통통 구르며 뛰어가 아빠 이불속에 시린 발을 밀어넣으면 아빠는 깜짝 놀랐지. 오빠는 오른쪽, 나는 아빠의 왼쪽에 나란히 엎드려 아빠 책을 보았어.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거야.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 쓰러지는 것들도, 일어서는 것들처럼 다 균형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가게 될 거야. 아빠, 삶은 마치 하늘 위에서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바람 같아. 안녕, 피츠버그. 내 생의 한 페이지를 넘겨준 피츠버그, 그리고 그리운 아빠.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은 김용택 시인이 유학 간 딸에게 받은 편지를 읽고, 딸을 화자로 아빠를 청자로 대필한 시이다. 화자와 청자는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래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아빠, 피츠버그에 사는 언니의 삶은 한권의 책이야. 책을 책장에 꽂아둔 것 같은 내 하루가 그렇게 정리되었어.

 

피츠버그에 있던 시간을 아무도 읽지 않는 책장에 꽂혀있는 한 권의 책 같았다고 말하는 화자는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그루의 나무 같다. 

 

길위에 서 있는 자신을 한 그루의 나무로 바라본다. 그리고 화자가 가야할 도시를 막 배달된 책더미로 인식한다. 

 

나는 뉴욕으로 갈 거야. 뉴욕은 터득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막 배달된 책더미 같아.

 

이렇듯,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에서 '책과 나무'의 비유는 이 장시를 끌어가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책이 쓰러지며 내는 소리와/ 나무가 쓰러질 때 내는 소리는 달라/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길이가 다르거든/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높은 첨탑이 있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슬프게/ 온 마을에 퍼진다니까라는 시구에서

 

책과 나무를 비교하며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길이를 담은 '나무'를 성당의 종소리처럼 울리는 천상의 시로 비유한다. 이는 화자가 청자에게 '나무' 같은 시를 쓰라는 간접화법이기도 하고, 청자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화자이게 혈연에서 멀어진 도시인 뉴욕은 ‘불을 밝힌 책장 같은 빌딩들,/ 방황이 사랑이고, 혼돈이 정돈이라는 걸 나도 알아/ 도시의 내장은 석유냄새가 나/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살 거야’라는 시구에서

 

이제 생의 20페이지를 넘기며 홀로서기를 하려는 딸을 바라보며 50페이지를 넘긴 자신에게 '방황이 사랑이고 혼돈이 정돈'이라고 객관화 시키는 딸의 마음을 아빠는 듣고 있다. 듣는 것은 읽는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 딸의 마음을 들으면서 딸의 삶이라 할 수 있는 20페이지와 자신이 살아온 생 50페이지를 동시에 넘기고 있는 중이다. 두 마음을 듣고 있다는 것은 실은 듣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듣는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듣는 것은 듣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듣는 것이고 읽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 쓰러지는 것들도, 일어서는 것들처럼 다 균형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가게 될 거야. 에서

 

딸이 앞으로 쓰러지고 일어서고 또 쓰러지는 그런 생을 반복할지라도 일어서는 것만큼 쓰러지는 것도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을 딸이 알게된다면 이제 아빠가 더이상 딸을 걱정할 몫은 없어진 것이다.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에서 걱정이라는 사랑의 바톤이 이제 아빠에게서 딸에게로 넘겨졌음 알 수 있다. 이제 딸에게 효도해야 할 거 같은, 딸의 마음을 듣는다는 것은 딸을 읽는 것이고, 그 독해능력은 딸을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할 수 있다.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은 ‘듣는다-읽는다’는 키워드를 통해 서로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알다-듣다’의 인식의 차원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2.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못한다(에릭 프롬)

 

 

 

 

 

 

 

들뢰즈의 '주름'개념을 건축에 도입한 '도미니크 페로' 의 랜디스케이프 건축 사진을 보기로 한다. 

 

 

지식애의 요람이라 불리는 파리도서관 내부

 

 

이화여대 캠퍼스, 이른바 ECC(Ewha Campus Complex)

 

 

(아래 이화여대 사진은 도미니크 페로의 국내 파트너 범건축에서 제공한 것임)

 

 

 

 

 

 

 

 

 

 

 

 

 

 

 

 

 

 

 

3.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30)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전하는 요한 10,27-30을 통해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7-30은 ‘예수님과 양들’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로 수렴된다. 양들을 주신 분이 아버지시기에 아들과 아버지의 손에서 양들(인류)을 결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선언 앞에는 예수님과 양들의 관계가 먼저 놓여 있다. 아버지가 그 양들을 아들에게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양들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듯한 이 중심엔 ‘아무도’ 그 양들을 아들의 손에서도, 아버지의 손에서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아들-양들-아버지’가 만드는 사랑의 트라이앵글이 도출된다.

 

그런데, ‘아무도’에게서 양들을 ‘빼앗아 가는 것을 막는 길은 그 양들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에서 <알아듣는다>를 묵상하는 것은 1차적으로는 그분을 믿는 신앙의 차원에 관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세계와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규명하는 존재의 차원이기도 하다.

 

사실, 이 세계의 그 어떤 누구도 무엇인가를 듣지 않을 때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다는 자체가 모두 열정의 어떤 방향, 들음의 시간을 갖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게으름이나 나태, 방황조차도 자신을 향한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 세계 속에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가 우리 생의 절대적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절대 명제가 되기 위해선, 알아듣는 것 못지않게 알아들음의 궁극적인 '방향'이 어디인지 인식해야 한다.

 

알아들고 싶은 방향이 많아서 그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으려 하지만(어느 정도 알아듣기도 했지만) 완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들음의 불확실함을 견디고 극복하는 문제, 즉 <알아듣겠다>는 의지속에서 마주치는 <알아듣지 못함>은 무엇인가까지를 해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듣겠다는 의지와 알아들었다는 인식의 간극’을 넘어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해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에서 Ⓑ버지와 나는 하나다.로의 이행을 바라보기 위해,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연결하여 바라보기로 한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버지와 나는 하나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이것은 축약해서 “알아듣는다- 하나다- 아무도 그들을”을 하나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Q1. 알아듣는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우리가 그분을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교회의 일원이 되면 당연히 그분을 알아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또 저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분의 음성을 도무지 않아듣지 못한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분명히 알아듣지 못하면서, 신을 알아듣는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 자신에게, 나아가 타자에게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인간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 혹은 알아듣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에 속해있지 않는다면, 즉 그분의 차원이 아니라면 사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꿀벌들의 의사소통을 규명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꿀벌들과 의시소통을 하지는 못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과에 속해 있지 않으면 그 집단의 언어로 소통하기 어렵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에서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 속한 사람들인 점이다. 그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그 근원에서 <알아듣는다> 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실은 우리 근원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헤메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싶어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갈망의 크기만큼 들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갈망하는 것이다. 갈망하는 만큼 들을 수 있다. 갈망하는 만큼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갈망이 시공간을 넘게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하늘에 닿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시편 63장에서 다윗의 노래처럼 “내 영혼이 애타게 당신을 찾나이다” 처럼 인간은 그가 인식하든 못하든, 신자든 아니든 모든 생명체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갈망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메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알아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지닌 갈망의 방향이 어디인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알아들음>의 방향은 어디인가?

 

Q2. 하나다

 

우리가 애타게 찾아헤메는 것은 형태가 여러갈래로 나타날지라도 여럿일 수는 없다. 갈망의 형태는 다양하게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갈망으로 뭉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다’ 라고 말하는 그 곳, 바로 그 방향을 이해하는 것이 들음이고, 그 방향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사실 그 상태에 우리도 있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버지와 나는 하나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보여준 공생활 3년과 십자가의 수난, 고통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수난과 고통과 죽음만 있고 그분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냥 한 열절한 인간의 신념체계를 숭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신존재증명에 해당할 뿐 아니라 ‘하나다’라는 것이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로드맵에 해당한다.

 

부활, 죽음을 너머서는 그 '사랑', 죽음에 사로집하지 않는 그 ‘사랑’때문에 우리가 애타게 찾아다니는 그 실체 ‘하나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타게 찾아 헤메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 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을 잘 했는지 혹은 못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79억 인류는 늘 영원한 '사랑'을 고파하고 무한한 '사랑'을 찾아헤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하면서도 '불사불멸'의 그 사랑을 목말라하고 배고파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오욕칠정 때문에 배고파 하는 것이 아니라 갈망의 근원인 그 사랑을 배고파 한다고 할 수 있다.

 

갈망의 근원이 갈망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망의 근원을 알아듣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여기서 성서에서 말하는 ‘아무도’나 ‘그들은’ 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일 거 같다. 왜인가? 내가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면 나는 ‘그들에’ 속할 것이지만, 내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아무도’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혹은 그들은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아무도’는 누구이며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분을 들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분처럼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 생명을 들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명으로 빚어진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은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생명은 자신이 생명인줄 알기에 생명 아닌 것에 끌어당김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빼앗기거나 빼앗을 수 없다

 

또 비생명은 존재하지 않기에 비생명 역시도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무도’는 비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동시에 생명이고 생명 아닐 수는 없다. 생명일진데, 비생명은 생명을, 생명의 근원인 그분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갈 수 없다면, 우리가 그분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무도'에 속한다면 우리 자신을 비생명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들어야하는 것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비생명에 위치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가들은 이를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실재일 수 없다”는 명제로 우리가 고통이라고 부르는 거의 전부가 비실재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전한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 역시 비실재가 실재를 살해하려 했지만 그분은 영원한 실재, 생명이기에 그분을 죽음의 상태로 던질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생명의 근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생명에 끌린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다. 생명은 사랑에 끌린다. 생명의 존재 이유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이 없다고 외치면서 신을 찾아 헤메는 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특정종교의 카테고리로 '하느님 사랑'을 독점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선택의 형태가 다르게 보일 뿐이지, 근원적으로 생명을 지닌 존재인 인간은 모두 하느님을 찾아 헤메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가들은 공통적으로 인류가 모두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선택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의 선택이기에 완벽하다고 보고 있다. 모순투성이고 고통투성이인 이 세계의 실상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생명의 과정을 모두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타자의 선택이나 생존방식에 무심해지라고 그들은 충고한다.

 

과정 속에 완벽함이 존재한다는 것, 게다가 삶이란 선택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선택에 간섭하거나 선택을 문제 삼는 건 적절하지 않다. 선택을 비난 하는 건 특히나 더 적절하지 못하다(...)모든 사람은 실현되지 않은 망각의 늪에서 자신을 구해내고 있는 중이다.(닐 도날드 윌시, 신과 나눈 이야기)

 

하이데거는 우리가 자신을 '아무도'로 비실재화 하는 현대를 극단적인 ‘존재망각의 시대’로 보고, 그 극복을 평생 사유의 주제로 삼았다. 인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망각의 늪에서 원초적인 기억을 되찾는 중이라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어떻게 인간이 신을 사유할 수 있는지에서 그 단초를 찾고 있다. ‘사유하는 인간’ 혹은 ‘사유할 수 있는 인간’에서 신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는 인간이 망각했던 것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존재는 스스로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현-존재하는 자신의 극단적인 규정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에 속해있다(...)사유의 모든 길은 언제나 이미 있는 존재와 인간 본질의 완전한 관계 안에서 진행될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사유가 아니다“(마르틴 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알아듣는다>는 사실 앞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화하는 ‘아무도’는 모든 종교가 ‘죄’와 '고통'의 근원으로 보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를 진정한 ‘환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이 글이 문제제기를 했던 처음 부분으로 돌아가 본다.

 

Q4. 그렇다면 자신의 실재가 무엇인가를 바라본 ‘그들에’ 관한 것이다. ‘알아듣겠다는 의지와 알아들었다는 인식의 간극’을 무엇으로 넘어야 하는가이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반추해보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던 시간과 세상의 소리를 들으려 했던 시간으로 확연히 나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두 시간이 중첩되어 있거나 겹쳐져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첩되거나 겹쳐있는 시간이 점점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이제는 그분의 목소리를 정말 제대로 들으려고 함에도, 충돌하게 되는 '의지와 인식'의 간극에 관한 것이다. 들으려고 하는데 듣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알아들었다>라고 할 수 있는 그분의 음성은 그분의 황금률 <애주애인>일 것이다. 그런데 <알아들겠다>는 의지와 <알아들었다>는 인식의 간극을 경험하는 것은 <생각과말과행위>의 개별적 경험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차고넘쳐서 할 수 없이 밸브를 좀 열어야 겠어서 "사랑해요!" 라고 말로 표현할 때, 터무니없는 상황과 맥락속에서 발설되는 자신의 말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보다 크거나 작거나, 마음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 불쑥 나올 때도 있다. 또 그것이 행위로 표출될 때는 말과 또 다른 방향으로 행위가 튀어서 엉뚱한 결과들이 벌어진다. 애초에 우리 마음속에 있던 그 순수했고 열절했던 사랑을 말과 행위로 훼손시킨 경우다. 사랑을 추구함에도 사랑의 무능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된다는 것이다.

 

마치 그런 상황처럼, ‘알아듣겠다-알아들었다’의 이 간극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들을 알고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그분이 이미 나를 알고 있다는 것!.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산천초목이 알고 있다는 것! 내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려 애쓰는 그 이상으로, 그분이 나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분을 알려고 하는 갈망 너머에 그분이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알고 있다는 것! 내 사랑의 무능까지 알고 있다는 것! 이런 은총의 경험이 의지와 인식의 간극을 넘어서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주 베드로의 형이상학적 망설임에서도 살펴보았듯 생명이 있는 한, 사랑은 씨앗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것이 싹이 나고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무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우리 자신의 사랑의 미숙함, 사랑의 무능함을 참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21년 대림1주 강론에서 들었던(『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토마시 할리크, 분도출판사) 위로를 기억해 본다. 

 

"다른 사람을 참아주는 것은 사랑이요,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믿음입니다."(아델베스타프로스)

 

이를 영성가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우리의 행위가 완벽해서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애주애인을 염두하고 사랑을 하려는 의도 자체가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 나와 누군가의 사랑은 나와 누군가와 그분이 함께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양들과 아버지의 관계처럼 사랑은 언제나 이 트라이앵글 삼각형 속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사전에서 이별이란 단어 하나를 지우게 된다.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해도 혹은 만나지 않아도 우리가 생명이라면(우리가 사랑이라면) 이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설사 죽음으로 갈라져도 하느님의 자비안에서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할지언정 이 세계에 실재하는 생명 그 무엇과도 이별할 수 없다는 것이 생명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실재가 비실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에만 '내가 사랑 받았고 은총속에 살았음'을 알아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그분의 음성을 들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버지와 나는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