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상처 입은 인간’으로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만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나뭇잎숨결 2022. 4. 24. 22:02

 ‘상처 입은 인간’으로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만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당신이 예수라면, 당신의 상처는 어디 있습니까?(성 마르티노)

 

 

by 심성

 

 

 

 

[부활 제2주일 (다 해) 2022. 4. 24,요한20,19-31]

 

 

 

1. 강은교 「사랑법」 & 자넷 랜드의 「위험들」

 

 

강은교의 「사랑법」을 읽어본다.

 

 

떠나고 싶은 자/떠나게 하고/잠들고 싶은 자/잠들게 하고/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또는 꽃에 대하여/또는 하늘에 대하여/또는 무덤에 대하여//서둘지 말 것/침묵할 것.//그대 살 속의/오래전에 굳은 날개와/흐르지 않는 강물과/누워 있는 구름/결코 잠 깨지 않는 별들//쉽게 꿈꾸지 말고/쉽게 흐르지 말고/쉽게 꽃피우지 말고//그러므로/실 눈으로 볼 것//떠나고 싶은 자/홀로 떠나는 모습을/잠 들고 싶은 자/홀로 잠드는 모습을//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그의 등 뒤에 있다.

 

자넷 랜드의 「위험들」을 읽어본다.

 

웃는 것은 바보처럼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우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휘말리는 위험을,/감정을 표현하는 것은/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자신의 생각과 꿈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것은/순진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사랑하는 것은/그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사는 것은 죽는 위험을./희망을 갖는 것은 절망하는 위험을,/시도하는 것은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그러나 위험은 감수해야만 하는 것.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기에,/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아무것도 하지 않고/아무것도 갖지 못하고아무것도 되지 못하므로,/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있을 것이나 배움을 얻을 수도, 느낄 수도, 변화할 수도,/성장하거나 사랑할 수도 없으므로./확실한 것에만 묶에 있는 사람은/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와 같다./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오직/진정으로 자유롭다.

 

강은교의 「사랑법」은 사랑하는 이에가 떠날 수 있는 자유, 잠들 수 있는 자유, 모든 자유를 허용하고 나머지는 침묵하라고 조언한다. 또 꽃, 하늘, 죽음에 대해서도 침묵하라고 조언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안에 오래전부터 죽어 있던 것들에 대해서도 살리려고 쉽게 시도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보려거든 오직 실눈으로 보라고 조언한다. 사랑하는 이든 자신이든 본질을 보기 위해서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그의 등 뒤에있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행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임을 강은교 시인은 사랑법으로 전한다.

 

자넷 랜드의 「위험들」에서는 우리가 행한 모든 행위는 행하지 않은 모든 원치 않은 결과들을 낳을 수 있으므로, 특히 사랑은 보상받지 못할 위험이기도 하고 죽을 위험이기도 하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기에(...)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오직/진정으로 자유롭다고 역설적으로 살아있으려면 위험을 감수하고 모든 것을 과감히 행하라고 조언한다.

 

강은교의 「사랑법」과 자넷 랜드의 「위험들」은 언뜻 상반된 조언을 우리에게 건네는 듯 보인다.

 

전자의 시는 우리의 행위보다 더 큰 하늘(사랑)이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행위가 본질을 가릴 때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행위하지 않는 위험에 대해서 말한다. 어떤 행위가 본질을 가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행위는 존재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행위하는 자만이 진정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는 우리에게 절대적 진리를 전하려는 장르가 아니다. 따라서 강은교 시인이 전하는 사랑법도 자넷 랜드가 전하는 사랑법도 변증법적으로 통합할 상대적인 진실이지 그 중에 하나만 집어들 절대 진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상처'에 관한 생각들을 읽어 본다

 





가장 배우기 어려운 교훈은 우리에게 상처를 안겨준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다.(조셉 자콥스)

나는 상처입은 사람에게 그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나는 상처입은 사람을 볼 때마다 내가 마치 상처입은 사람인 것처럼 된다.(왈트 휘트만)

다친 손가락을 보이지 말라.모든 것이 그것을 향해 날아오므로.(그라시안)
 
독이란 상처를 통해 스며든다.
상처 없는 손으로 독을 만지면 아무 이상이 없듯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에게 악덕이 있을 수 없다.(부처)

복수를 하려고 생각하는 자는 고의로 자기의 상처를 그대로 둔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상처는 완전히 아물 것이다.(F. 베이컨)

비록 많은 사람들을 웃기더라도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면 나쁜 말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은 훌륭하다고 칭찬 받을 만하다.(세르반테스)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는 혼자서 견디어내도 기쁨은 함께 나누어야 한다.(E. 허버트)

상처는 낫지만 그 흔적은 남는다.(J. 레이)

소인들은 사소한 것 때문에 수많은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을 다 이해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것 때문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프란코이스 로체포우콜드)

여자는 대지와 흡사해서 상처받는 남자들은 모두 거기서 안식을 얻는다.(C.V. 게오르규)

인내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좌우간 어떤 상처가 즉시 완치되는가?(세익스피어)

하느님은 당신의 메달 학위 혹은 졸업장이 아니라 당신의 상처를 보신다.(폴 홀드크레프트)

행복은 육체를 위해서는 고마운 것이지만 정신력을 크게 기르는 것은 마음의 상처이다.(마르셀 프루스트)

흙에 새긴 글씨는 물에 젖으면 없어진다. 우리 내면의 상처도 부드럽게 다스리면 아문다.(도교)




 

 

 

 

 

총으로 자신의 생명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

 

 

 

 

 

 

3.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요한20,19-31

 

 

 

그렇다면 예수님이 전하는 진리를 절대 진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보편과 특수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열린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활을 무엇과 연결해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어쩌면 인류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라는 절대진리로 통합된다. 열려 있는 데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부활은 그렇게 열린 개념이다.

 

부활이 열린 개념이라면 부활을 체험하는 것 역시 무한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부활체험에 우열을 매길 수는 없다. 막달레나가 경험한 부활, 바오로 사도가 경험한 부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경험한 부활, 베드로가 체험한 부활, 오늘 우리가 경험한 부활이 다르듯이 말이다.

 

부활체험은 모두 다르지만 부활을 경험한 모두에게는 그것은 무한히 열려 있는 축복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그것은 '애주애인'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하나다.

 

요한20,19-31은 <상처>를 통해 부활을 체험하는 토마스 사도를 통해 <상처> 역시 부활만큼이나 열린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요한20,19-31을 읽어본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 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전하는 요한20,19-31에 대해 성서해설서들은 일괄적으로 토마스의 불신앙으로 정설화시켜 바라본다. 상당히 닫힌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이 해석이 부활이라는 열린 개념 앞에서 어떤 설득력을 지니는 것일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의문에 부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그것이 정설이며 진리인 것은 아니다. 부활을 설득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열린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는지의 여부일 것이다.

 

예컨대, 생노병사를 정상적으로 겪은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8일 쯤 후에 그를 사랑한 이들이 어떤 현상을 겪게되는가를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토마스를 불신앙의 상징적 인물로 몰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성서해설의 상당 부분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무조건 믿어!>에 바탕을 둔 호교론적 태도, 사유의  대물림, 전체주의적 사고, 상처와 피를 지나쳐버린 바리사이파적 닫힌 사유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이 예수님의 부활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축적된 신앙체험을 갖고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다. 또 몸과 마음과 영혼이 어떻게 다른 존재양식을 갖고 있는지도 인류의 수많은 임사체험, 영적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 번의 수난 예고에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소생과 부활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른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며,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승을, 그것도 십자가의 참혹한 현장에서 잃었다.

 

비록 예수님을 따랐지만, 율법이 그들의 뇌구조를 거의 유전자처럼 지배하고 있던 종교적 전통에서 그들은 3년 동안 모든 면에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당시로서는 전위적인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고, 3년 동안 그분이 베푼 엄청난 기적을 목격했으나, 정작 당신의 죽음 앞에서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 사건을 경험했다. 즉 전능하면서 동시에 무능한 스승을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연결시킬 수 있는지도 감당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채 하루도 안 된 시간 안에 한 젊은 생명이 얼마나 잔인한 십자가의 폭력 앞에서 어이없게 죽음으로 끝났는지 그들은 보았다. 비록 두려워서 스승 곁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스승의 최후가 어떤 결말로 끝났는지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런 끔찍한 경험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스승의 죽음보다, 그들의 안위가 더 두려운 상황에 몰려 있었다.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정상적인 멘탈 심리상태가 아니다.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에서 예수님 부활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무한히 열린 개념이라는 것을 그들은 비로서 보게 되었을 것이다. 또 인류가 ‘영원’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된 사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실을 목격했어도 그것이 자기 내부에서 내재화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부활의 영광과 영원을 알려주신 분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수난의 대가인 부활의 왕관이 아니라 <상처>를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물론 스승을 다시 만났으니 기뻐했을 것이다. 그들이 기쁨이 무엇인가를 정리하는데도 충격을 정리하는 만큼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상처를 당연히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이가 이런 경우를 당했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우연한 일치가 모두 <상처>와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상처>와 관련되어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Q1. 부활의 영광앞에서 <상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당신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부활은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열린 개념이다. 열린 개념은 시공간으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열린 개념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는 닫힌 상태에 놓여있다. 스승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직도 그들의 안위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실은 그들 자신의 무능과 무력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은 힘에의 의지에 굴복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을 지키지도 못했고, 스승 곁에 있지도 않았다. 않았고, 못했다. 그들은 스승의 전능과 무능의 엄청난 낙차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들 자신의 의지도 믿을 수 없는 이중의 멘탈 붕괴의 상황에 놓여있다. 다시 말해 총체적인 두려움에 내몰려 있는 상태다. 실은 그들 자신의 무능에 상처받은 것이 두려움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상처를 보여주신 것은 제자들의 죄책감의 치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하는 이유의 저변에 단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역학 관계의 패배로 스승의 죽음이 야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의 상처라는 것을 그들이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부활처럼 열려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거듭 평화를 기원하면서,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주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용서는 그들 자신의 무능을 용서하는 것이었다. 상처는 이 세상에 대한 무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무능 때문에 받은 상처를 사랑의 권능으로 치유하면서 모든 상처는 사랑의 상처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인식시켜야 했을 것이다. 유다의 예에서 보듯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상처는 없기 때문이다.

 

Q2. 그렇다면 토마스가 예수님의 <상처>를 끝까지 확인하고 싶었던 이유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토마스는 두려움에 떠는 동료들과 함께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개별자의 인식이 강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한 것처럼 얼버무릴 수 없는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도 추론할 수 있다. 이 역시 미덕이라면 미덕이지 이것이 불신앙의 존재 증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발화관습을 살펴보자. 문장을 쓸 때, 혹은 어떤 발화를 할 때, “나는 이걸 ~~~~확인해야 믿겠다”라는 표현은 ‘서술부의 믿겠다’에 초점이 놓인 것이기 보다는 “나는 이것을 꼭 확인해야 겠어”라는 주어부에 방점이 찍힌 경우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상처를 꼭 확인해야겠다는 것으로 보아 토마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그 어떤 보상으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각인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에수님의 수난은 해피엔딩의 결말을 갖고 있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마스 사도는 그렇게 십자가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수난의 대가가 부활일 수도 없고, 모든 것이 좋아졌어도 그 과정에 있었던 십자가의 수난을 가볍게 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스야말로 예수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분임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유명한 마르티노 성인의 예화를 기억하고 있다. 마귀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을 때, 성인은 무엇이라고 물었던가?

 

“당신이 예수라면, 당신의 상처는 어디 있습니까?”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상처를 통한 영광이다. 가톨릭은 리얼한 십자가상을 제대 중앙에 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부활의 영광만을 구하지 말고, 아직 이 세상은 뜨겁거나 추운 삶을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성당을 7개나 폭격했다.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 지역이 아니다. 교황이 휴전을 제안한 반동의 제스쳐다. 우린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 삶 속에 언제나 마주하고 있는 상처와 고통을 그리스도처럼 통과하자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상처나 고통도 부활만큼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처는 사랑과 연관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주고받은 상처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큰 상처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상처가 그만큼 크게 다가왔다면, 남아있다면 사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가 <열려 있다>는 것은 바오로 사도에게 나타난 예수님에게서도 거듭 확인 할 수 있다.

 

네가 박해하는 그들은 그들만의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 예수다!

 

그런 맥락에서 부활의 영광앞에서 토마스 사도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에게 <상처>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짚어준 사도라고 할 수 있다.

 

‘상처’는 삶에서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지만, 동시에 타자에게 눈을 뜨게 하고, 사랑의 새로운 차원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통로에 해당한다.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상처>는 그분을 아는 불가피한 통로라는 것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사랑이기에 하나의 상처이기도 하다. 상처받고 싶지 않으면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프란치스코 성인만큼이나 예수님의 오상을 깊이 묵상하고, 토마스의 상처를 불신앙과는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았던 헨리 나우웬 신부와 토마시 할리크 신부는 <그리스도인과 상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우리가 지닌 상처는 주로 육체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며, 물질적이기보다는 관계적이다. 우리가 가장 깊고 어두우며 고통스러운 상황, 우리 삶의 갈보리와 같은 순간, 하느님께 완전히 버림받아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가련한 임마누엘의 하느님과 손잡을 수 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은 예수의 죽음 앞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척 가장하시는 포즈의 고통이 아니다. 오히려 참으로, 진실로, 전적으로 그 자신을 비우시고 스스로 가련해지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는 그 순간, 그리스도는 우리만큼이나 가련하다. 그는 진정 우리와 함께하는 존재, 곧 여정을 함께 걷는 친구이다. 그분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상처받은 다른 이를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통해 다른 이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고 상처와 상처가 동행하는 것이다..(헨리 나우웬, 『상처 받은 인간, 상처 입은 치유자』)

 

 

‘믿는다는 것’이 항상 시급한 문제들의 짐을 벗어던지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로 믿는다는 것은 의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또한 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의 힘은 ‘신념의 확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불분명함을 견디고 신비의 무게를 버텨 내면서 충실함과 희망을 잃지 않는 능력에 있다. 신앙이 살아 있는 한, 신앙은 늘 상처 입고, 위기에 내던져지고, 가끔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못 자국들’을 볼 수 있는 상처 입은 신앙만이 믿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 십자가의 밤을 지나지 않고 심장이 꿰뚫리지 않는 신앙은 이러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눈이 멀어 본 적 없는 신앙, 어둠을 체험하지 않은 신앙은 보지 못했고 보지 못하는 이들을 결코 도울 수 없다. (토마시 할리크 『상처 입은 신앙- 내 상처를 보고 만져라』)

 

예수는 모든 작은 이와 고통받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상처 입은 인간’으로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만나 ‘상처 입은 치유자’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세 개의 길을 동시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파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며,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지나, 불투명한 하느님의 현존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 세계의 중심부 담론에 아웃사이더가 된 이들, 가난한 자들의 문, 상처 입은 자들의 문을 지나, 그분의 부재를 느끼는 이들에게 우리 자신 역시 의심의 짐을 지고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닌 타자의 윤리학이자 상처의 인간학, 그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이들, 세상과 인간의 온갖 고통은 ‘그리스도의 상처’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살갗이 벗겨진 피투성이 상처, 전쟁이나 기아, 테러로 인한 처참한 광경 앞에서 우리는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상처를 보고 만져야 한다는 내부의 소리를 동시에 듣고 있다. 그 상처들이 바로 예수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함으로써 믿음을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교회가 제공하는 전통적인 환경, 강론, 전례와 교리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없다면, 교회 밖에서 더 넓은 지상의 교회인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그곳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타자윤리학 하면 임마뉘엘 레비나스를 떠올린다. 그러나 진정한 타자윤리학의 단초는 토마스 사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 단초가 누구이든 레비나스와 토마스에 의해서 타자의 상처에 반응하는 것은 인간학의 정초를 세우는 것이다. 타자와 상처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타자와 상처를 포괄하는 개념이자, 상처는 부활만큼이나 열려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 해본다.

 

 ‘상처 입은 인간’으로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만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혹은 아름다운 위험을 무릅쓰는 타자의 윤리학 혹은 상처의 인간학은

 

 

우리에게 <당신의 상처는 어디 있습니까?(성 마르티노)>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사랑하기 어렵다.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기승전결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승전결을 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은 언제나 상처 받을 각오까지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사랑은 상처라는 위험한 경고표지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황금률, <애주애인>은 그런 위험 경고판을 보란 듯이 크게 내건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기에 타자 윤리학은 특정인의 사유체계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받아들이게 되는 상처의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상처를 묵상하는 것은 상처 그 자체에 머물러 있기 위한 것은 아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신 이유, 그리고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서 부활을 확인하고 싶어했던 토마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사랑의 상처는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계시를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체험을 통해 우리가 상처받지 않게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갑옷을 착용하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무감각이 아니라 사랑의 체험이다. 사랑은 오히려 우리가 완전히 상처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처받음은 자기가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은 우리에게 항상 반복하여 상처를 입힌다. 고통은 본질적으로 우리 삶의 일부이다. ... 이제 문제는, 외부에서 우리에게 가하는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 가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힘으로써 고통을 더 심화시킬 것이지, 아니면 삶이 우리에게 안겨 준 상처를 조심스럽게 싸매고 타인의 상처를 치유할 준비를 할 것인지, 이것이 문제이다.(안셀름 그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