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에 열일곱번의 만남과 이별을 생각함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사 순 제 6 주 일 (다 해) 2022. 4. 10,루카22, 14-56 ]
1. 김광섭의 「저녁에」 &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김광섭의 「저녁에」를 읽어본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은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은 「저녁에」에서 어떤 인연의 시작은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서로를 유일한 별처럼 바라보는 것과 같다면, 그 인연이 끝나는 것은 빛과 어둠으로 갈라져 더 이상 서로에게서 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만남의 유일성과 이별의 필연성은 누구도 비껴가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고, 멀어지는 것들에 대해 일말의 끈을 놓지 않는다.
김광섭의 「저녁에」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고 이별의 끝이 어디인가를 물었다면,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고통 없는 이별', ‘바람 같은 이별’ 즉 눈물을 거둔 ‘별사’를 소망한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하게//이별이게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는 이별이게//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가장 가벼운 이별을 원하는 화자의 마음이 담긴 시이다. 마치 한두 철 전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화자는 그렇게 아프지 않은 이별이었으면 한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이별이 있을까? 그런 이별을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또 이별이 예정되지 않는 만남이 있을까? 그런 만남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교는 아예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고 윤회사상을 설정할 만큼 모든 고통의 원인이 인연 때문이고 또 그 인연은 인연의 목적을 다 하기 전에는 돌고돌아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대면케 된다는 질긴 인연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도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이별이기를 바라는 불교적 사유가 녹아 있다. 그런 불확실한 약속이라도 해야지만 이별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고통은 허구인가? 실재인가?
이별의 고통이든, 인연의 고통이든 그 어떤 고통이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
일반적으로 고통은 실재적인 것이라고 보는 견해에 반해 고통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고통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비록 고통이 있을지라도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사실 고통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고통의 실재성과 허구성의 바탕은 ‘고통의 본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고통의 본질은 인간의 ‘본성과 인격’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고통의 본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는 종교의 존재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순수한 본성’은 결코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칼 러너와 헬렌 슈크만의 생각을 들어보자.
①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고통이 가능하다는 존재론적인 가정이 된다. 순수한 본성은 자기를 반격해서 돌입하는 이 전체적 실재의 개입을 느낄 수 없다. 순수하게 유한한 인간은 고통을 받을 수 없다. 이는 자유의지의 결정을 선행할 어떤 외적인 운명에 따라야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간의 죄스러운 결정의 결과로서만 인간 속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고난은 외부에서 강요한 숙명으로서 인간이 동의하게 고통에 복종할 때에도 무자비하고 강요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칼 라너)
②어쩌면 세상이 고통을 야기한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원인이 없으므로, 원인을 일으킬 힘이 없다. 세상은 결과이므로, 결과를 낼 수 없다. 세상은 허상으로, 인간이 단지 염원하는 것이다. 인간의 헛된 염원이 세상의 고통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세상을 두려움으로 휘감는 반면, 온유한 용서 안에서 세상은 다시 살아난다. 고통은 거룩한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악의 생각이 형태를 취한 것이다. 고통은 자유로워지지 않으려고 인간이 기꺼이 지불해 온 배상금이다. 고통 속에서 신의 사랑은 아들에게 부인된다. 고통 속에서는 두려움이 사랑을 정복하고, 시간이 영원과 천국을 대신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세상은 참혹하고 쓰라린 곳이 되고, 슬픔이 세상을 지배하며 모든 기쁨을 불행으로 끝내려고 기다리는 무자비한 고통의 공격 앞에 작은 기쁨은 길을 비켜준다.(헬렌 슈크만)
칼라너와 헬렌 슈크만은 인간이 순수한 본성만을 지닐 경우에는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칼라너는 인간은 순수한 본성만을 지닐수 없는 -이 세계와의 충돌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인격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이를 이상적인 설정일 뿐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고통과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것이며, 인격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주어져야지만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헬렌 슈크만은 인간이 인격을 가진 존재인 것을 분명하지만 그 인격이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인격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본성에서 멀어진 인격을 에고라고 보았고, 인간은 자신 안에서 분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고통의 허구성에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시킨다고 보았다. 헬렌 슈크만은 본성과 인격의 완전한 일치를 예수그리스도에게서 그 모형을 찾고 있다. 예수의 인성과 인격은 언제나 동일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과 죽음에서도 즉 육체의 잔인한 훼손 앞에서도 결코 위격(본성)을 잃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본성과 인격이 분리되는 이유에 대해 헬렌 슈크만을 비롯한 모든 영성가들은 인간의 중심점을 육체로 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체는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인격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성과 종교가 어떤 ‘타력’에 의존해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집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미묘하게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모든 영성가들은 종교가 <육체와 본성>을 교묘하게 병렬위치에 놓고 본성이라는 흰 천을 일단 더럽힌 다음에 그것을 세탁해서 희게 만들려고 한다고 보고 있다. 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라는 흰 천은 결코 인간에 의해 더럽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칼러너와 헬렌 슈크만과는 달리 수난과 고통과 죽음은 실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인간이 능히 ‘자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본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철학자 마르쿠스가 있다.
(재인용)에피쿠로스 하면 쾌락주의 혹은 아타락시아(ataraxia)를 떠올린다. 아타락시아는 헬레니즘(hellenisum) 시대의 철학사조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근거하여 쾌락의 획득과 고통의 회피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고 주장으로 인간은 감정적, 정신적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정심의 상태에서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③⒜신을 두려워 마라. ⒝죽음을 염려하지 마라. ⒞좋은 것은 구하기 어렵지 않으며, ⒟끔찍한 일은 견디기 어렵지 않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고통스런 것들의 제거는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쾌락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있는 한, 육체나 마음의 고통이 없으며 양자 모두의 고통도 없다.(에프쿠로스, 『쾌락』)
④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며, 쾌락을 능가하는 육체적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지 않는다. 반면 고질적인 질병은 육체의 쾌락이 고통을 능가하도록 허용한다. (쾌락은)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심사숙고한 결과라네. 모든 선택과 거부 행위의 동기를 분석하고, 정신적 동요의 주된 원인인 신과 죽음에 관한 거짓 관념을 버리는 것이지.” (에피쿠로스,『쾌락』)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불안의 네 가지 주된 원인을 규명하고 그 각각을 반박하는 명쾌한 논거를 제시했다. 훗날 제자들로부터 ‘네 가지 처방'으로 불리게 될 이 논거들은 다음과 같다. ⒜신을 두려워 마라. ⒝죽음을 염려하지 마라. ⒞좋은 것은 구하기 어렵지 않으며, ⒟끔찍한 일은 견디기 어렵지 않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 그중에서도 ‘근심 없음', ’평정’이라 번역할 수 있는 아타락시아Ataraxia를 추구했다. 평생에 걸쳐 정신적 고통과 불안을 극복하고 이 아타락시아, 정신적 평정 상태에 이를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인간들이 ‘딱히 걱정할 이유가 없는 일들을 걱정한다'고 보았고, 그 걱정의 핵심에는 바로 ’신과 죽음‘에 대한 불필요한 두려움이 있다고 통찰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은 우리가 이미 다 가지고 있고,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단순한 즐거움에 기반을 둔 소박한 삶을 옹호했던 그의 라이프 스타일도 최근 에피쿠로스가 새롭게 평가받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아름다운 꽃과 식물로 가득한 작은 정원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허물없는 대화를 소확행을 즐겼다. 그들 정원은 여성과 노예, 외국인도 차별받지 않고 식사와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과도한 소비와 탐식을 반대했고, 계급과 성별에 따라 인간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우정의 가치와 진지한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또한 거짓 정보나 미신, 그릇된 신화에 휘둘리지 않고 세계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 살아갈 때, 불필요한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현대에 인지정서행동치료와 연계되어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심리상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아파테이아(apatheia)’란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학파가 주장한 사유체계로 정념에서 해방된, 또는 초월한 상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주장은 정념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삶을 최고의 윤리적 삶으로 바라본 것이다. 스토아철학 후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마르쿠스의 명상은 이를 대변한다.
⑤항상 뒤따르는 일들은 선행된 일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뿐, 각각 고립된 채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물은 단순한 결과의 법칙보다는 합리적 연속성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듯이, 앞으로 생성될 모든 것 또한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경이롭게 나타나는 것이다. “흙이 썩어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해 공기가 되고, 공기로 인해 불이 타오르듯이, 사물은 순환을 계속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을 항상 명심하라. 시간은 강물과 같아서 모든 피조물들을 끊임없이 흘러가게 한다. 하나의 사물이 나타나는가 하면 이내 곧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뒤이어 또 다른 사물이 생겨날지라도 그 역시 쉬이 스쳐 지나가 버리고 만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⑥죽는다고 해서 우주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 머물면서 변화를 거치고, 많은 분자들로 해체될 뿐이다. 그래서 다시 우주와 당신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요소들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지만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다. 이제 곧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당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도 현재 생존해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만물은 이렇게 변화하고 사라지고 소멸되기 위해 태어나고, 그들의 빈자리를 또 다른 것들이 채워가게 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실제로 당신의 모든 감각이 사라져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 해도, 당신에게 해로울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만약 죽음이 새로운 감각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당신의 생명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스토아학파는 대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지는데, 초기에는 키티온 출신의 제논,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로 계보가 이어진다. 이들의 뒤를 이어 중기에 접어들어 타르소스의 제논, 바빌로니아의 디오게네스, 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 등이 활약했다.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정치인이자 시인인 세네카, 노예철학자 에픽테토스,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으로 이어진다. 초기와 중기 스토아철학과는 달리 후기 스토아철학에서는 윤리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거대한 세계 제국이 된 로마, ‘Pax Romana’를 주창했던 로마는 혼돈스럽고 불확실한 정치사회적 격랑 속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철학적 화두가 된 것이다.
스토아철학은 ‘이성’ 중심의 철학이다. 세계는 이성적이고 불변하는 법칙에 따라 질서 지어져 있다고 보며, 그 세계의 일부인 인간도 이성적인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이다.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이 곧 ‘이성’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인간의 덕, 선, 행복, 자연을 따르는 삶은 이성과 동일하다. 이성에 반하는 삶이 곧 충동과 감정에 따라 통제권을 벗어난 삶이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윤리적 삶의 목표로 아파테이아를 강조하는데, 그 단어는 말 그대로 정념이나 감정, 즉 파토스(Pathos)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상태를 일컫는다. 정념의 동요에서 벗어난 평정한 영혼의 상태, 그것이 바로 아파테이아(Apatheia)이다.
플라톤의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오랜 세월 스토아철학의 정수를 서술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마르쿠스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장을 떠돌면서 남긴 사유의 기록들은 『명상록(Meditation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스토아주의의 도덕철학이고, 노예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지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지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르쿠스 사상의 한 두 측면은 스토아 철학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플라톤주의는 당시 에피쿠로스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단 철학을 다 끌어안아 신플라톤주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주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로마 철학의 여러 흐름 중에서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일체 배격하고 초기의 윤리학적인 전통을 고수한 학파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그를 능가하는 철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황제로서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철학자로서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었던 점에서.스토아학파의 철학의 정수인 ‘아파테이아(apatheia)’는 고통과 교환한 하나의 사유체계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로서의 그는 인류애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철학자보다는 엄격한 법관에 가까웠다. 그의 치세하에서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던 소외 계층인 노예, 과부, 외국인의 인구 비율은 현저하게 줄었지만 이는 인본주의적인 정책이 아니라 열정적인 입법 활동과 엄격한 법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로마의 적에 대한 입장도 단호했다. 파르티아와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 방식은 전임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철저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기독교도들에 대한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치세 동안 처형된 기독교도들의 숫자는 기독교 박해를 상징하는 네로 황제 시대의 희생자를 훨씬 웃돌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으로는 줄곧 인간적인 관용을 추구했으나, 절망적인 생존 위기로 인해 국경을 넘어온 게르만 인, 그의 시대에 수도까지 점령당했던 파르티아 인, 그리고 기독교도들에 대해서는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 그는 게르만 인, 파르티아 인, 기독교도들을 로마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전임자들보다도 더욱 엄격하게 적들을 섬멸했다.
그는 최고의 지성인답게 자신의 이중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와 철학자를 철저하게 분리했다. 어린 시절 미래의 황제로 점지되어 황제의 양자가 되고 가족의 품을 떠나 줄곧 왕궁에서 교육받았던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황제와 철학자의 관계를 자신과 양어머니, 그리고 자신과 친어머니와의 관계에 비유하곤 했다. 이는 스토아철학의 정수인 ‘아파테이아(apatheia)’가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는 그들 자신에게조차 궁극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칼 라너, 헬렌 슈크만, 에피쿠로스, 마르쿠스가 평생 극복하고자 했던 고통과 죽음은 단지 그들만의 신학적, 영성적, 철학적 화두는 아니었다.
3.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22, 14-56)
[주님수난성지주일]은 인류의 오랜 질문-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가? 그 답을 제시한 것이 주님수난성지주일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인류와 신과의 가장 아름다운 이별, 그러나 아름다움만큼 더할나위없이 잔인하고 지독한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남긴 별전을 통해 인류의 오랜 질문-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답은 답이라고 받아들인 이들에게만 자명하게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루카22, 14-56에는 인류와 신의 지독하고 잔인한 이 이별은 밤에서 이튿날 낮 3시까지 있었던 일로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대략 열입곱번의 같거나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이별하면서 매 순간 메시지를 전하고 그 메시지는 하나로 통합되어 구원의 서사가 완성된다.
여기서 <수난과 고통과 죽음>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만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예외없이 자기 몫의 십자가(수난과 고통과 죽음)를 지고 살기에 그 답을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으로 찾고 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의 모든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구원의 서사로 완성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회피하고 싫어하는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어떻게 구원의 서사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는가를 묵상하는 것이 [주님수난성주주일]에 던지는 메가톤급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제는 열곱번의 만남과 이별을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
①사도들- ②베드로- ③ 한 무리의 사람들- ④유다-⑤대사제의 종- ⑥(다시 베드로)- ⑦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⑧백성의 원로들(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⑨빌라도-헤로데-⑩빌라도-⑪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⑫예루살렘의 딸들-⑬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 ⑭죄수 두 사람- ⑮ 군중들과 갈릴레아서부터 그분을 따라온 여인들- ⑯백인대장-⑰요셉
루카22, 14-56에는 대략 열입곱번의 만남과 이별에서 열곱개의 크고 작은 메시지가 던져지는데(인류는 예외없이 이 열일곱번의 어떤 만남의 상황을 경험한다)
이 메시지는 다시 횡적인 메시지와 종적인 메시지의 십자가-크로스를 통해 <아버지의 뜻-사랑>이라는 구원의 주제가 완성된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42절)예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44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작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34절)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46절)
루카22, 14-56은 열입곱번의 만남과 이별을 관통하는 다섯 개의 큰 메시지가 도출된다. 그렇게 도출된 메시지는 십자가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역학관계에서 피동적으로 희생(숙명)된 인간 예수의 비극적 사건을 넘어선다(소명 혹은 사명)는 것에서 구원의 메시지로 통합된다.
Ⓐ(사도들)--------->Ⓑ(인류)<----------ⒸⒹⒺ(하느님)
그런 맥락에서 [주님수난성지주일]의 이 수난사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구원을 완성한 그분을 위해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자체를 모르는 인류를 위해 울어야 한다는 것으로 예루살렘여인들로 상징된 Ⓑ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해 어떤 <수난과 고통과 죽음>은 구원의 완성을 가져오지만 어떤 <수난과 고통과 죽음>은 구원자체에서 멀어져 여전히 죽음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일곱번의 만남과 이별을 싸고 있는 인류와의 횡적인 사건은 종적인 아버지와의 관계속에서 <수난과 고통과 죽음>은 구원의 표지로 완성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구원의 표지가 되기 위해 변모축일에서 얼굴의 형체가 변화듯, 44절에서 보둣,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에서, 몸과마음과영혼이 하나로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때조차 수난과 고통과 죽음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을만큼 강력한 고통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어떻게 구원의 성사적 의미로 정립할 수 있는가? 그 기로에 우리 각자가 서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인간의 보편적인 실존의 조건이라면 모든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자기 구원의 고통과 죽음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칼 라너는 「그리스도적 고행의 철학적 신학적 기초」에서 ‘숙명적인 수난의 의지적 성격과 의지적 고행의 숙명적 성격’을 통해 어떤 고난과고통과죽음은 구원으로 어떤 고난과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는가를 고찰하여 모든 고통이 구원을 담지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전한다.
그것은 고난의 본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은 예외없이 숙명적으로 자기 몫의 십자가 <수난과 고통과 죽음>에 직면해 있는 실존적 존재라는 사실에서 ‘윤리적 고행, 의식적 고행, 신비적 고행’가운데 하나를 선택적으로 경험한다고 보았다. 모든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자기 구원에 이르는 성사적 의미를 갖기 위해선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인격적인 수락 “네”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자발적인 ‘네’는 몸과마음과영혼의 총체인 전인격의 수락을 의미한다.
Ⓕ순수하게 유한한 인간은 고통을 받을 수가 없다. 인격이 있는 곳에서만 고통은 있을 수 있다. 인격은 세상에 개방되어 있고 고난에 개방되어 있다. 고난은 본성으로서의 인간 속에 있는 죽음의 필연성을 나타내고, 고행은 인격으로서의 인간 속에 있는 죽음의 자유를 나타낸다.
Ⓖ죽음의 행위는 인간 사람의 마지작 사건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인간의 모든 삶에 근본적으로 침투되는 하나의 ‘상황’으로 생각해야 한다. 세계라는 지평의 테두리 안에서 무위하게 소모될 인간의 궤도, 본성을 통해 생활궤도를 송두리째 버리라고 인간에게 요구하신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사명과 숙명의 초월성이 탄생한다. 인간 존재의 중심점을 이 세상 밖에 두셨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도된 소명과 숙명을 통하여 우리 각자의 생활안에서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며, 소명과 숙명이라는 두 가지를 통해 인간이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네’라는 답으로써 고행을 실천하고 이 죽음의 방법을 통해 신앙으로 인정하기 위해 하느님은 각자에게 ‘고난’을 정해 주신다”
칼 라너는 <수난과 고통과 죽음>의 본질을 인간은 ‘본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있기에 고통과 죽음의 불가피함을 숙명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인간이 순수한 본성만을 지녔다면 고통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고난고통죽음 앞에서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육체가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가 지닌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은 곧 존재를 의미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과 결정적인 특성과 영원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통과 죽음은 표면적으로 육체적 죽음에 국한된 듯 보인다는 데 있다. 그러나 모든 육체적 죽음 역시 인격적 죽음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육체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사실로만 볼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예컨대, 모든 살인은 인격살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격의 자유처분이라는 초월의 가능성이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를 초월했다는 것은 인격의 초월이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경험하는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순전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국한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신앙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예컨대, 500만명 이상 학살된 아유츠비츠 수용실에서 유태인을 독살되기 직전 옷을 모두 벗겨 알몸으로 가스실로 들어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육체를 살해하기 전에 인격살인을 먼저 감행했다는 것이다. 입관예절을 할 때 값비싼 수의를 입힌다. 하루 후에 화장을 할 것인데도 말이다. 이 세상의 순례를 마친 한 인격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온갖 인격살인을 먼저 당한다. 그들은 인격살인을 감행한 후에 남은 인격마저도 탈취하기 위해 알몸으로 십자가형을 집행한 것이다.
육체를 그들이 훼손했을지 모르지만 그분의 영혼을 죽일 수 없었다는 것이 우리 희망의 현주소다. 여기서 육체를 초월하는 것은 실은 인격을 초월했다는 의미가 도출된다는 점이다.
육체가 철저히 훼손되는 상황에서도 그분은 인류를 위로하고, 구원을 약속하고, 용서를 청하고, 아버지에게 당신의 영혼을 맡기는 위격을 잃지 않았다. 육체를 허물어도 결코 허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그로인해 그분의 현존은 이 세계의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상칠언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이 세계의 어떤 죽음의 상태에도 사로잡히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신존재증명의 예표다. 그분은 죽음의 순간에서도 애주애인의 끈을 결코 놓치 않았다는 것에서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과 죽음이 인류에게 절대적인 희망의 표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수난과 고난과 죽음)를 ‘네’라고 수락할 수 있는 것은 전인격의 자발적인 선택이고,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중심점이 육체와 물질 너머에 있다는 것을 그분과 함께 신앙한다는 선언에 해당한다.
또한 그 결단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기에 그분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현존체험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바로 그분의 현존을 우리가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자력이 아니라 타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분의 현존을 감탄이 아닌 놀라움으로 살아야 한다고 전한다.
“예수께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며, 그분께 도전을 받게 해야 합니다. 감탄에서 놀라움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놀라움’이 무엇인가?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왔듯,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져 있는 십자가(수난, 고통, 죽음)를 기꺼이 질 때, 우리는 삶을 하나의 성사로 들어높이는 것이며, 그분을 현존케하는 것이자, 우리와 인연을 맺은 수많은 이들과 통공의 기적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수난과고통과죽음은 죽음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지만 어떤 고난과 고통과 죽음은 구원의 문을 연다는 것이 [주님수난성지주일]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존체험, 기적체험, 은총체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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