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바오로), 그의 반(半)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정지용)
[사 순 제 3 주 일 (다 해) 2022. 3. 20. Luc. 루카 13,1-9]
1. 정지용의 「그의 반(半)」
정지용의 「그의 반(半)」을 읽어본다.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나의 령혼안의 고흔 불,/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나의 눈보다 갑진이,/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金星,/쪽빛 하늘에 힌꽃을 달은 高山植物,/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나의 나라에서도 멀다./홀로 어여삐 스사로 한가러워 ── 항상 머언이,/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뿐./때없이 가슴에 두손이 염으여지며/구비 구비 돌아나간 시름의 黃昏[황혼]길우 ──/나 ⎯ 바다 이편에 남긴/그의 반˙ 임을 고히 진히고 것노라(원문표기 그대로)
정지용의 「그의 반(半)」은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시인이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백하는 구도의 시에 해당한다.
여기서 ‘그’는 정지용이 믿고 있는 신, 하느님이다. ‘그’를 일컬어 ‘영혼안의 고흔 불, 달, 눈보다 값진 이, 금성, 고산식물’처럼 그분은 나에게서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신다.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에서 화자가 왜 그렇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를 절대적 가치로 경외하는지 그 이유가 나온다. ‘그’가 지닌 ‘사랑’ 때문이다.
그런데, ‘나 ⎯ 바다 이편에 남긴/그의 반˙ 임을 고히 진히고 것노라’에서 나는 사랑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半)’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역설이 도출된다.
그는 사랑이고, 나는 그가 하는 사랑의 그 깊이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이다. 마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쪽 저쪽으로 나눠진 닿은 수 없는 간극을 지닌 사이 같다. 그런데 나는 ‘그의 반’이라는 이 인식 속에서 시인은 그 바다를 건너고 있다. 무슨 힘으로? 그 아득한 거리를 건너는 것을까?
그 질문은 사랑을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의 반(半)’인 것을 알 수 있을까?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삶의 지향점이 ‘사랑’ 인 것을 바라본 이들에게, 사랑은 사랑을 모르는 그 '나(1%)'라는 최소에 '그(99%)'의 절대적인 사랑이 담긴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데서 그 답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2. 주체는 ‘아래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사랑은 사랑을 모르는 나라는 최소에 담긴다는 것을 유기체철학으로 바라보는 화이트 헤드에게서 찾을 수 있다.
화이트 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인간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이다. 태초와 오늘이 연결되어 있다고 바라보는 그에게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을 금기로 삼았던 철학적 전통에서 화이트 헤드 앞에 '실재론자'라는 이름이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 A.N.Whitehead의 유기체철학 내에서의 미적 경험에 대한 연구 | http://blog.daum.net/m-deresa/12389250]
A. N.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년~1947년)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하는 유기체(有機體) 철학을 전개하여, 데카르트 이래의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을 극복하고, 근대 이후의 자연과 인간과의 대립을 융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내적 필연성을 제시하였다.
①주체는 ‘아래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 변동과 시간의 점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주체에 따른 진리의 변동이 아니라 변동의 진리가 주체에 나타나는 조건이다.
②현실적 존재는 이미 다수의 존재로부터 생겨나며 이 통일된 일자는 또 다시 다른 모습의 다수로 형성되어 간다. 그렇다면 현실적 존재는 그에 앞선 선행존재의 합성의 결과이며 그것은 또 후속존재로 이어져 합생되는 것이다.
③과정에는 리듬이 있다. 이것은 창조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의 자연적 단위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의 박동을 산출토록 한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본질로 하고 있는 무한한 우주 가운데 유한한 단위 사실들을 어렴프시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
④현실적인 존재는 끊임없이 소멸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현실태는 소멸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 겍체성을 획득한다.
지난 주, 라이프니츠의 주름은 바로 바로크에서 드러난다는 글에서, 화이트 헤드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바라볼 때, 이 글의 주제인 회개의 궁극적인 지점이 어디일까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를 흩어진 낱개의 '점'으로 볼 것인가? 아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선'으로 볼 것인가?에 그 답이 있다고 하겠다.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http://blog.daum.net/m-deresa/12390529]
들뢰즈와 라이프니츠 논의를 종합해 '실재론자'라 불리는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철학에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끌어낸다.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어둠으로 몽땅 덮혀있는 그 죽음의 순간조차도 위로(빛, 신 혹은 진리로) 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과 신의 필연적이고 내적인 관계를 무의식으로도 알기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 두려워 한다는 것,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 분노한다는 것, 숨어버린다는 것, 절규한다는 것...그 부정의 실존 속에서도 이미 그 반대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과정중의 실재이기에 완전한 빛일 수도 완전한 어둠일 수도 없다는 통찰이다. 그것이 화이트 헤드가 규정하는 인간이다.
화이트 헤드에게 (유기체란) 모든 존재하는 실재들은 연장적 연속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빛깔, 소리, 신체적 느낌, 맛, 냄새와 같은 성질들은 관계적인 영원한 객체들이며, 이러한 영원한 객체로 말미암아 동시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실재의 구성요소가 된다.
동시적 독립성의 원리에 의해, 동시적 세계는 수동적인 기능태의 양상 밑에서 우리에게 객체화 된다. 이러한 분할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외적 세계는 유기체적인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연속체는 가분적이기 때문이다. 동시적 세계는 연장적 분할을 위한 연속성을 지닌 것으로 지각되는 것이지, 현실적인 원자적 분할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장적 연속체는, 모든 가능적인 객체화가 그 속에서 자신들의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그런 하나의 관계적인 복합체를 말한다.
또한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 공통부분을 갖게 되는 중복의 관계, 접촉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원초적 관계에서 파생된 다른 여러 관계들과 같은 다양한 관계들의 제휴에 의해 통일체가 된 존재들의 복합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장은 다수의 객체들이 하나의 경험이라는 실재적 통일 속으로 결합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관계들의 일반적 도식에 해당한다. 연장적 연속성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피조물의 사회에서도 생겨나고 있는 특수한 조건들이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실재를 부재로 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기체적인 주체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주체는 '아래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 변동과 시간의 점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주체에 따른 진리의 변동이 아니라 '변동의 진리'가 주체에 나타나는 조건이다”(화이트 헤드,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If, 만약, 신이 '사랑'이라면 인간이 끊었다고, 혹은 끊는다고, 혹은 끊겠다고 그 관계가 끊어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끊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면 이미 끊어진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끊어진 사랑은 환상이지 사랑이 아니었을 거란 얘기다. 그럼에도 어둠과 죽음을 뚫고 출애급한 그런 사랑을 했기에 신이 부활하여 인간에게 나타나도 인간은 신을 결코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영원을 좋아하지만 영원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이자, 그것이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사람들이 동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 13,1-9
그렇다면, 그분의 사랑은 어떻게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가? 회개가 '영원한 사랑'을 여는 문이라고 한다면, 신과 접촉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어떻게 유한자인 우리가 실재인 그분을 자명하게 알아볼 수 있을까? 유한자가 영원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부정명제를 '회개한다면 영원을 알 수 있다'는 긍정 명제로 바꾸어 그 길을 걸어가 보겠다.
루카 13,1-9을 읽어본다.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라고 전하는 루카 13,1-9에서 ‘빌라도의 성전 테러 사건과 실로암 연못 붕괴사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서두에 나온다.
우리는 어떤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 불행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혹은 사회의 문제로 치환해 바라본다. 이 두 사건은 피지배민족의 입장에서 혹은 종교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특히 당시의 지배적인 의식은 모든 불행은 죄의 대가라는 공식이 일반화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즉 현상의 결과들을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의 인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개의 비극적 사건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은 그런 일반적인 통념, 시선에서 훌쩍 벗어난다. 어떤 불행한 결과의 원인이 개인의 죄나 잘못이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확언하신다. 예수님의 초점은 약소민족의 비극적 사건으로도 당시의 율법의 관행이 아닌, 그 모든 것을 넘어선 ‘회개’에 초점이 놓여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보다 더 큰 불행이 Ⓑ회개하지 않는 삶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되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겠다는 선택 자체가 회개의 행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거듭 회개를 인재보다 더 큰 불행으로 간주하고 무화과나무의 비유까지 들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의 수준이 그분이 요구하는 회개의 그 수준에 과연 일치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회개를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 가르침을 주었다. 죄와 연결된 회개와 사랑과 연결된 회개의 방향이 그것이었다. 언뜻 보면 이 두 개의 방향은 같은 듯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분이 요구하는 회개가 죄와 연결된 것인지 사랑과 연결된 것인지? 안병철 신부의 『신약성경 용어사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8)을 참고해 회개의 궁극적인 방향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회개는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서 마음과 행동의 완전한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와 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만 하는지를 강조해 주는 것이다.
⒜와 ⒝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회개란 삶 전체를 하느님을 향해서 돌아섬을 의미한다. 수없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가에 초점이 놓여 있다. '그냥'. 그분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깨끗해져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돌아섰기 때문에 어느 순간 깨끗해 진다고 보아야 한다.
⒞회개란 하느님께서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지고의 선물인 회개 없이는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 ⒠에서는 삶을 하느님의 방향으로 돌아서는 그 자체가 이미 지고의 선물인데. 하느님은 우리 삶의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회개의 궁극적 지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 안에는 당신 자신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문제가 연계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내용 안에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것이 마치 동전의 두 양면처럼 내포되어 있다. 즉 인간은 회개함으로써 죄에서 돌아서게 되고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해 우리의 삶을 돌릴 수 있는 것은 달리 말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돌아서다-향하게 되다’ 의 인과의 고리, 그 선후맥락이 회개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회개가 사랑인가? 죄인가?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회개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 교회는 세상을 훈계하려 들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사도들은 회개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 역시 사실상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참된 회개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새로이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회개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서 회개는 단순히 마음을 바꾸는 것 또는 과거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회한의 감정을 갖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돌아선다는 것은 예수님이 알려준 사랑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회개는 구원을 완성하려는 우리의 시선, 의지임을 알 수 있다.
제1독서에서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탈출기3,1-8ㄱㄷ.13-15)와 제2독서에서 <모세와 함께한 백성의 광야 생활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코린토 1서 10,1-6.10-12)에서 바오로 사도는 왜 출애급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준비해주신 그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다수가 광야에서 바오로식 표현으로 널브러져 죽었는지에 대해 회개의 궁극적인 방향을 알려준다.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일단 '출애급'을 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광야에서 헤메는 이유는 가나안 땅이라는 하느님이 준비하신 미래의 시간,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회개>의 방향을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순3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회개는 '죄와 벌'로 연결하는 미완성의 의지가 아니라 '사랑과 희망'으로 연결되는 완성에의 의지라는 점을 반복해서 제언한다.(알아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내용 맥락 재배치 했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되는지 궁금하지만 그 미래를 우리가 결정할 수도 없고 미리 알 수도 없다...(우리가 알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상태가 아니라 삶의 상태다.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상태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회개를 죄와 벌로 국한시켜 연결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그것은 (상선벌악에 입각한 율법주의 내지는 도덕적 우월의식 내지는 현상과 결과를 잘못된 원인에서 소급하는 인과론의 오류일 뿐) 이기적인 행위와 발상일 뿐이다. 회개는 죄와 벌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보여주실 사랑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분 안에서 맺는 회개의 열매는 무엇인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만히 사는 것,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으로 살고자 선택할 때, 회개의 완성은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삶으로 이어진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은 과거라는 시간 속에 씨앗처럼 내재해 있는 미래를 바라보는 것으로, 출애급 속에 이미 가나안땅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 이때 희망은 하느님이 마련해주시는 그 미래를 향해 기다릴 수 있는 힘, 걸어갈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하느님이 마련해 주시는 미래의 시간을 희망할 수도 없고, 기다릴 수 없고, 더구나 걸어갈 수도 없다. 그런 맥락에서 회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기다림이자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강론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죄와 벌로 회개를 국한시키는 것이 왜 이기적인 행위인가? 하는 점이다. 그 때의 회개는 나를 유일한 ‘점’으로 인식하는 행위로 나하나만 도덕적으로 문제없으면 된다는 우월의식 내지는 생존의식이 바탕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죄를 가볍게 보거나 죄를 지나치라는 얘기가 아니다. 죄를 회개의 궁극적인 방향으로 국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회개의 근본이 <애주애인>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바라본 대로 인간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 상통한다.
그때 우리는 회개의 완성이란 죄까지 무화시킬 수 있는 사랑으로 연결할 수 있고, 그것이 하느님이 마련해주시는 그 '미래까지 걸어가는 기다림, 희망' 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미래란 과거현재미래의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바라보는 그 시간성을 의미한다. 무시간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회개를 단지 '죄와 벌'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회개의 완성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볼 수 있는 은혱의 시간을 의미한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바오로), 그의 반(半)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정지용)]
회개의 스펙트럼이 단지 윤리적이고 개인적인 죄의 차원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구원의 빅피쳐인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문득 나타나는 환한 길이 있다. 인간이 만든 길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든 길이다.
그 길은 ‘있는 나’께서 ‘나(모세)'를 통해 '너희에게(인류에게)'보낸 메시지의 내용으로, 그 희망으로 광야 너머를 희망하라는 언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통찰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서 4,17~8) 걸어갔던 바로 그 길이다. 회개는 그런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걸어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즉,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걸어간다는 것은 시간의 경계가 지워진 '영원'을 살게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걸어갈 수 있는 그 힘은 회개의 궁극적인 방향인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그 길은 우리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영원히 '있는 나', 모든 실재의 근원인 그분과 그분이 만든 이 세계와 동행하는 길이기에 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정지용의 시구처럼 사랑을 모르는 내가 사랑 자체인 “그의 반(半)임을 고이 지니고”(정지용) 걷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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