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의 근원, ‘현존’이란 이름의 ‘4월의 크리스마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1-3.11ㄴ-32)
[사 순 제 4 주 일 (다 해) 2022. 3. 27 Luc. 루카15,1-3.11ㄴ-32 ]
1. 심보선, 「나무로 된 고요함」
시를 읽어본다.
나는 나무로 된 고요함 위에 손을 얹는다/그 부드러운 결을 따라/보고 듣고 말한다/그때 기쁨, 영원한 기쁨의 지저귐이/사물들의 원소 속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다/하느님은 여느 때처럼 말없이/황금 심장을 가슴속에 품고 계신다/아, 거기서 떨어지는 황금 부스러기들/그 하나하나로 집을 지을 수 있다면/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지워질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쓸모를 모르겠는 완구(玩具)처럼/하늘의 언저리를 굴러가는 태양 아래/인간은 오래되고 희미한 기쁨의 필적들을/주워 모으는 절박한 수집광/아, 우리가 불안을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그것을 하느님이/조금만 더 도와줄 수 있었더라면/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사라지는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나는 양손을 가슴팍 위로 거두어 모은다/망각이 그 부드러운 결을/한층 더 부드럽게 지워가며/나무로 된 고요함 아래 죽음을 눕힌다/그때 기쁨, 죽음으로부터/우연히 건너온 기쁨 하나를 움켜잡으려/나는 다시금 그 위에 손을 얹는다.
모든 이가 기쁨을 체험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가 무엇을 믿든 안 믿든 말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절대적인 기쁨의 상태를 원하고 그것을 우연히 체험할 때, 예리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은 그 기쁨이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본다. 그렇기에 그 절대적인 기쁨의 상태란 신에게서 온 것이라 이름 할 수 있다,
「나무로 된 고요함」 의 화자는 이 세상의 모든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은 상태의 고요한 나무에 손을 얹는다, 그 고요속에서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절대적인 기쁨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그 나무는 누군가의 수목장으로 쓰인 나무였을 수도, 혹은 누군가가 마지막 남긴 나무로 만든 유품일 수도, 혹은 그의 눈에 우연히 띤 한 그루의 나무일 수도 있다.
화자는 나무를 만지면서 ‘잊혀지고 있는 이름’ ‘지워지고 있는 이름’을 떠올린다. 이 이름들은 우리 마음에서 모두 장례를 치른 이름들이다. 사라질 이름은 망각이기에 그렇다.
화자는 그 이름들이 잊혀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망각의 은총, 고요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보게 된다.
화자는 생의 무게를 전혀 지니지 않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이름 앞에서, 우연히 건너온 그 ‘기쁨’을 만난 것이다. 그 기쁨을 움켜잡으려 다시금 나무의 그 고요 위에 손을 얹는다.
파란만장, 우여곡절, 구구절절, 오욕칠정으로 얽혀진 어떤 폭풍같은 삶도 죽음은 망각이라는 이불로 자비롭게 덮어준다. 생존하는 사람을 잊는 것은 어렵지만, 레테(망각)의 강을 건넌 이들을 잊는 것은 그래서 순식간이다.
그 강을 건넌 이름들은 모두 잠든 것처럼 고요와 하나가 되었다. 그들을 우리 생에서 지우는 망각이라는 송별은 우리에게 백지 한 장 같은 고요를 건네준다. 그 고요야말로 이 소란스런 세상에서 그 어떤 기쁨보다 반가운 얼굴이라고 바라보고 있다는 데서, 시인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통과했는지, 어떤 고독을 통과하면서 이런 고요를 건저올렸는지 바라보게 된다.
2.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칸트 & 에릭 포퍼)
고요가 기쁨이면서 동시에 고독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우리 역시 일상에서 경험한다.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그러나 그 숭고함은 두려운 방식으로 숭고하다고 전하는 칸트와 에릭포터의 글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 『고찰』,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숭고(τὸὕψος/sublime/Erhabene)’를 나르시즘, 멜랑콜리, 고독과 연결하고 있다. 모든 멜랑콜리한 존재들은 자신의 심연에서 지혜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melancholy’의 핵심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는 그 주체가 나르시시즘에 잠기지 않으면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멜랑콜리는 나르시스트의 특징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르시스트의 고독은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숭고’는 ‘나르시스트-멜랑콜리-고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①멜랑콜리한 우울한 기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모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곳에서 우울의 원인을 발견하고, 다혈질인 사람이 성공의 희망으로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어려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다혈질인 사람이 단지 표면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데 반해서, 감상적 우울질을 가진 사람은 자기 내면의 심연을 침잠한다. 그 심연에는 어떤 힘이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인간 본성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는 멜랑콜리 기질을 가진 사람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멜랑콜리는 고대 의학에 기초를 둔 해부학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단지 영혼에만 어떤 개별자의 기질은 종속시킬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한다. 또한 인간의 신체적인 측면을 신비스럽게도 영혼과 공동 작용 원인으로서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인간을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인 기질은 영혼에만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바라보기에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스럽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저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성’ 즉 ‘나르시즘’에 기반한다. 멜랑콜리는 자기중심적 인간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자신과 매개되지 않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공허한 타자로 남는다. 물론 여기에서 ‘나’란 생각하는 주체, 이성적 주체를 뜻할 수도 있고, 한갓 주관적인 개체를 뜻할 수도 있다. 이 멜랑콜리는 미학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발현시키기도 하고 병리적인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멜랑콜리는 ‘나’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것을 ‘나’로 환원시키고 수렴시키는 나르시스트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②악덕과 도덕적 위반 자체도 종종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의 몇몇 특징들을 이끌어낸다. 이것을 이성으로써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들이 적어도 우리의 감각적인(sinnlich) 감정에서 현상하는 것처럼 그렇다. 강건한 종류의 모든 정념은 ‘심미적-숭고’인데, 예를 들면 분노, 심지어 절망이 그것이다.
칸트는 나르시시즘의 멜랑콜리한 정념을 숭고와 연결짓는 데 그의 주저 『판단력 비판』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멜랑콜리의 핵심에는 고대 의학의 연장선에서 쓸개로 상징되는 분노(절망의 다른 표현)의 정념이 놓여 있으며, 그것은 심미적으로 볼 때, 멜랑콜리의 숭고성을 주조한다고 보았다.
③대담하게 높이 솟아올라 있는 위협적인 절벽, 번개와 우뢰를 몰고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있는 먹구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화산, 폐허를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것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위력과 비교할 때 우리의 저항력은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매혹한다.
자연의 절대적인 세계의 크기는 연약한 인간에게 가공할만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자기를 위협하는 압도적인 대상은 자기보존 본능을 두려움이란 형태로 드러낸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크기와 그런 힘에 압도당한 상태는 두렵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매혹의 강도가 더욱 커진다는 것에서 멜랑콜리는 심연에서 솟구치게 된다.
④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 대상들이 정신력을 일상적인 범용 이상으로 고양시켜 주며 또 우리의 내면에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능력이 있어서 그러한 저항능력이 우리에게 자연의 외관상의 절대적인 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거대한 세계 앞에서 자기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일단 그 스케일에 압도당한다. 그런 자연의 힘은 연약한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상대적인 크기에 유한한 위력’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파악하게 되면서 이를 극복한다. 절대적인 크기의 무한한 힘은 자연에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한과 절대를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은 자연을 넘어서는 초현상계에 접근할 수 있다. 여기서 사유할 수 있는 이성만이 멜랑콜리의 병리적 현상으로 우울에 침잠되지 않고 자신을 들어올리는 숭고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숭고감정의 반전 메카니즘은 광적인 멜랑콜리의 메카니즘과 동일하다. 둘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서 그것을 극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렇듯, 칸트의 해석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자기의식이 과도하게 작동해서 생겨나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성을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그는 자신보다 크고 뛰어나고 강한 타자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동화시키는 자기고양(自己高揚)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고양,․자기상승의 희열이 드높이 치솟는 상태에서 숭고(崇高)를 경험한다.
이와 같이 칸트의 멜랑콜리는 숭고한 멜랑콜리이고 그것의 정체는 이성을 통한 자기고양의 감정이다. 이런 멜랑콜리는 숭고하지만 그러나 고독하다. 왜냐하면 숭고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중심적, 자기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르시스트의 고유한 감정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고찰』에서 “깊은 고독은 숭고하지만 두려운 방식으로 그러하다.” 라고 말한다. 두려우리만치 깊은 고독은 숭고한 대상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다. 도리어 숭고한 멜랑콜리의 핵심부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이 나르시스트의 고독이자 칸트적 멜랑콜리의 본질이다.
칸트와는 다른 시선으로 인간이 세계의 모순과 자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노동자이자 철학자인 에릭 호퍼는 『영혼의 연금술』에서 ‘무아지경(ἔκστασις)’이자 ‘광기(μανία)’를 우리 내부에서 같은 뿌리 ‘열정’으로 보고 있다. 숭고의 경지에 이르거나 혹은 광신, 맹신, 열광, 추종이라 불리는 ‘fanatism 파나티시즘’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떤 획기적인 차이가 아니라 사소한 의식구조의 변환이라고 보고 있다. 어떻게 쟌 다르크는 마녀이자 민중의 영웅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해,
⑤‘한 열정이 다른 열정으로 바뀔 때 동반되는 혼란은, 그 방향이 정반대로 진행되더라도 보통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모든 열정적인 정신 안에는 기본적으로 유사한 구조가 있다. 죄인에서 성자로 변신하는 사람이나, 호색가에서 금욕주의자로 변신하는 사람이나, 둘 다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는다.’(영혼의 연금술 10)
⑥‘자신이 무엇인가에 고통받고 있을 때, 무엇인가를 위해 고통받고 있는 거라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약자의 재능이다. 이들은 달아날 때도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다고 믿고, 열기를 느낄 때도 빛이 보인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기피할 때도 선택받았다고 확신한다.’(영혼의 연금술 49)
에릭 호퍼는 부두노동자이면서 철학자였다. 자신이 관념에 매몰되거나 빵으로만 사는 존재이기를 거부했던 길 위의 철학자였다. 정신만으로도 살고 싶지 않았고 육체만으로도 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인간의 열정은 기본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인간이 되려는 욕망에서 출발한다고 보고 있다. 사회 부적응자의 자기혐오나 자기부정은 자기로부터 도피인 셈이다. 몽테뉴조차 “자기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 특유의 병”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찾아내자마자,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강한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적당한 대의명분과 목적이 주어지면 자신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통째로 바꾸기 위해 강한 에너지를 발휘한다. 명분과 대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열정적인 사람들은 종교운동이건 사회운동이건 민족운동이건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광신적 공산주의에서, 광신적 민족주의자나, 종교적 광신자로 바뀌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파나티시즘Fanaticism; 광신에 빠져들고, 또 맹목적으로 정치이데올로기에 뛰어드는가? 에릭 호퍼는 인간의 자기애, 사회적 약자, 개척자, 인간의 열정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에릭 호퍼는 이를 사유할 수 없는 자의 미망으로 근본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라고 말한다. 인간은 정신적이며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라는 모순된 존재조건에서 이를 바라본다. 자신이 모순적인 존재양태를 갖고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이나 업적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존감이 없는 상태에서 가공의 자기, 지도자, 거룩한 대의, 집단적인 조직과 자기 자신을 일체화시키면서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만을 키우게 된다. 이때의 자존심은 본래 자기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그 안에 두려움, 옹졸함, 과시욕이 있으며, 민감하고 타협할 줄도 모른다. 자존심의 핵심은 바로 자기 거부이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가능성의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
칸트와 에릭 포퍼의 통찰처럼 인간에게는 모순되는 두 개의 존재양식을 지닌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아주 위대해지거나 아주 위태로워 지거나’ 그 모순을 극복하는 열쇠를 칸트는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작동에서, 에릭포퍼는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나'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1-3.11ㄴ-32)
나를 사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 자신만 객관화하여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거, 그 '있음'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루카 15,1-3.11ㄴ-32를 읽어본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3.11ㄴ-32에서 작은 아들은 세리와 죄인을 큰 아들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비유하며, 모든 유산을 탕진한 채,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의 아들’일 뿐, 형제라는 사실조차 거부하는 큰 아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성서해설서들은 일관된 시선을 유지한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대비하여 받은 은총에 감사하지 못하는 큰 아들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우리가 비판하는 그 큰 아들에게 막혀있던 은총의 '혈'은 무엇인가?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도,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명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그렇게 자명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알 수 있다면 지상의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그런 물음에서 이 글을 다른 시선으로 루카 15,1-3.11ㄴ-32를 바라보려고 한다. 즉 은총의 형태가 다르게 보일 뿐, 두 아들이 받은 은총은 같은 이름이며, 이는 우리가 받은 은총은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같은 '은총의 평등성'을 지닌다는 것과, 그 은총은 우리가 어떤 조건을 채워야만 주어지는 조건부적이고 미래적인 것이 아닌 '은총의 즉시성'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 은총을 바라보고 살기 위해 또한 은총이 필요하다는 '은총의 중층성', 과 모든 근원의 있음을 바라보는 '은총의 근원성' 등, 네 측면에서 글의 방향을 설정해 본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고도 또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자명하게 알 수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31절의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 ⒞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인류가 받을 같은 은총에 해당한다. 아버지의 '현존'을 아는 것, 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이 인류가 받은 '은총의 평등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현존’ 체험이, 곧 복음의 지향 ‘기쁨의 원리’라는 것을 루카 15,1-3.11ㄴ-32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작은아들과 큰 아들은 우리 안의 두 사람,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한 채 사막을 여행하는 사막여행자, 즉 진정한 기쁨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우리 안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한 아들은 기쁨을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해 가출한 아들이라면(원심력) 한 아들은 기쁨은 느끼지 못하지만 아버지 집에서 출항을 미루고 정박한 배처럼 영적 생명력을 소진하고 있는 상태(구심력)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까에 초점을 맞추어 두 개의 질문으로 따라가 보기로 한다.
Q1.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두 모습에 해당하지 않을까?
왜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기쁨을 얻지 못했을까?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3.11ㄴ-32에서 Ⓐ는 구체적인(옷, 반지, 신발, 잔치)물질 세계를 통해 물질세계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였던 아들에게 그 물질을 도구삼아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비유에 해당한다.
Ⓑ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 은총에 도달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명상이나 마음공부 또는 영신수련을 한 영성가들이나 이해함직한 고도의 추상적인 진술로 하느님의 현존, 함께한다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당연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니 좋은 말씀이므로 이유여하, 이해여부를 불문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런데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 말씀이 그렇게 쉽게 이해되고, 삶에서 늘 체험되는가?
신앙의 여정에서 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체험한다는 것이다. 체험하지도 않고 이해불문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추종자들이나 하는 일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그런 무뇌아적인 추종이 필요하신 분인가? 우리가 추종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떠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조종하기 위해 믿음의 여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받은 선물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신앙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를 아는 것이 우리가 영원히 지닐 기쁨이라면, 그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를 바라보는 그분의 마음은 어떨까? 주었는데도 바라보지 못한다? 주었는데도 굶어죽어가고 있다? 주었는데도 밖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 큰 아들의 항변은 작은 아들에 대한 비난의 표출에 머무르지 않고 '나는 당신과 함께 있어도 기쁨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는 '당신은 있지만 당신은 동시에 없습니다'는 ‘부재의 선언’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신앙의 여정은 Ⓐ에서 Ⓑ로 전이되는 영성의 단계를 밟는다고 할 수 있다. Ⓑ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실 Ⓐ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삶을 재배치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작은아들과 큰 아들은 분리된 존재로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가 베풀어준 잔치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이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기쁨의 본질에 다가간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쾌락과 기쁨의 차이를 알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그 기쁨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아가페를 먼저 배우지는 않는다. 아가페의 기쁨을 알기 위해선 에로스와 필리아의 과정을 몸으로 정신으로 겪어낸다. 이것이 작은 아들이 온 몸(물질)으로 겪어내면서 알게되는 쾌락의 소비를 통한 깨달음, 아버지께 돌아가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큰 아들이 직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큰아들의 철저한 율법주의는 인류의 집단무의식-환지통에 가깝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유배와 노마드의 상황에서 그들이 간신히 지니고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하느님의 사랑은 밖으로 밀려나고 율법이 그들의 중심에 서게 된다. '율법-루틴'이 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지닌 수난의 역사에서 하느님을 붙들고 있으려는 벼랑에 떨어지는 사람이 마지막 움켜쥐고 있던 나뭇가지, '환지통'에 가깝다.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이 '환지통'은 진행중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를 향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Q2. 하느님은 오직 예수님과 소통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가? 다르게 말해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부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두 아들이 영적인 기쁨의 상태에 이르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들들과 함께 머무를 때, 미처 대처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고독'이 무엇인가를 만날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할 조건을 다 주었는데 그 인간들이 불행할 때, 모든 것을 준 분의 심정은, 그래 난 분명히 너희에게 다 줬다, 여기까지다, 그렇게 끝날 수 있나?
그분이 준 사랑은 그 뜻을 이루지 않고는 그분에게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에서 '은총의 중층성'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카 15,1-3.11ㄴ-32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완벽하게 아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와 완벽한 의사소통에 장애가 없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는 단언명제로 당신의 정체성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루카 15,1-3.11ㄴ-32에서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시 질문해 보자. 왜 아버지는 두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서 어떤 기쁨도 맛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근본적인 원인을 지나치고 계신가? 작은 아들은 그렇다치고 큰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늘 함께 있으면서 어떤 기쁨도 없었던 이유를 아버지는 진정 모르셨을까?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은 신의 사랑을 그 혼자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여기서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 신비'가 왜 필요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야만 되는지, 그 '삼위일체 사랑의 필연성'까지 바라보아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 맥락에서 작은 아들과 큰 아들, 특히 큰 아들은 비판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변호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에서 보여주는 완전한 기쁨과 Ⓑ에서 보여주는 완전한 기쁨은 작은 아들이나 큰 아들의 개인적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는 절대적인 은총상태를 의미한다. 은총을 살기 위해 또 은총이 필요하다는 은총의 중층성을 바라보게 된다. 작은 아들은 '용서' 받음의 축복이 어느 지점까지 이를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며, 큰 아들은 '함께'의 의미를 너무나 작은 바닷가의 모래알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 모두에게 아버지의 현존이 주는 기쁨을 오롯이 바라보기위해서는 '매개자, 구원자, 중재자'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큰 아들에게 준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이 축복의 전언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쉽게 그 상태를 체험하게 되는 은총 상태가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은총을 살기 위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성령의 은총이 필요한 이유다.
따라서, 큰 아들은 자신이 받은 은총 외에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야하는 은총의 작은 부분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이며, 그 혼자 힘으로 은총의 무한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현존에서 은총의 광대무변한 무한한 지평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었다면, 그 계절이 어느 때이든 그 날은 바로 성탄을 체험하는 날이라는 말이 그래서 성립된다.
제1독서 여호수아기 5,9ㄱㄴ.10-12에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그리고 제2독서 코린토 2서 5,17-21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에서 은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것에도' 속박되거나 구속되거나 묶여있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땅'이 가나안이라고 한다면, 그런 상태로의 이전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라고 전한다. 그분과 ‘화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화해란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기 위해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모든 속박과 구속이라는 ‘수치’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그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제1독서를 보면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자 못한 이유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다시 추론할 수 있다. <탈출기 17, 1-7/ 민수기20, 12-13/시편 95, 7-9>처럼 그분의 현존을 믿지 않은 상태란, 그분의 뜻을 듣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고, 모세와 아론은 완벽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사막을 헤메는 이들에게 중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기 20, 12-13)
“아, 오늘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처럼!(시편95, 7-9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은 그분의 ‘현존’을 믿는 상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한계없는 무한대'의 은총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겠다. 모세와 아론은 중개자의 위치를 망각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다고 자만한 데서 '은총의 근원성'을 또한 바라볼 수 있다.
미사 중 성찬례 바로 직전 감사송에서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라고 모든 ‘거룩함의 샘'이신 아버지를 세 번이나 부른다. 그 의미는 신학적으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모든 해석의 바탕은 우리와 동행하는 그분의 뜻, 현존을 체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광야 40년, 뒷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지칭된 그들이 도달해야할 바로 그 곳, 거룩한 땅, 모든 '있음'의 근원을 바라보는 지점이다.
거룩한 순간은 모든 생각을 다스리는 유일한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주려는 이(성령)와 받으려는 나의 용의가 같아야 주어진다(헬렌 슈크만, 『기적수업텍스트』15장)
은총은 하나의 사건이자 유일한 사건이다. 시간으로부터, 절망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상황으로부터, 세계로부터, 그분의 현존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누리는 자유의 사건이다.(기스펠트 그레사케, 『은총-선사된 자유』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나눌 수 있는, 그분과 함께함- 현존은 모든 이가 궁극에 도달할 은총의 상태이다. 이 은총은 일찍 온 사람도 늦게 온 사람도 똑같이 받는 바로 바로 그 은총의 평등성이다. 그때 ‘우리 자신이 그 누구의 포로도 아니고, 그 무엇의 포로도 아님’을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베푼 잔치로 비유된 기쁨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큰 아들에게 베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에 이르기 위해 ‘모든 생각을 다스리는 유일한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현존은 그분이 존재한다는 존재인정의 인식적 차원이나 언어적 표현이 아니라 <나의 모든 생각, 계획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이 내 마음에 담기게 하는 것>으로 나의 '있음'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각(왜소함)이 아니라 그분의 뜻(장엄함)이 나의 생을 끌어가게 하겠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또한 그 은총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은총의 ‘즉시성’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은총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총 받았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믿음의 공통체가 필요한 이유다.
루카 15,1-3.11ㄴ-32에 나오는 두 아들은 그분의 현존이 무엇인가를 너무나 느리게 알게 되는 인류의 어떤 환지통이자 욕망의 그물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은총의 ‘즉시성’을 지나쳐 오랜 광야의 순례를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회개의 궁극적 의미가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2, 13)는 명제로 제시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마음에 그분의 뜻이 온전히 담겼을 때,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은총의 무한함을 바라볼 수 있고,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 존재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는, '있음'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에게 또 예수님과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있음'의 근원, ‘현존’이란 이름의 ‘4월의 크리스마스’]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의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면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생존해 있는 어느 눈 오는 저녁, 성탄절이 가까워 오는 그 무렵, 친구들에게 보낼 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루카 15,1-3.11ㄴ-32은 바로 그런 원초적인 행복의 상태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 원초적 행복이 담지하고 있는 '있음'의 근원은 무엇인가? '나의 '있음'과 그분의 '뜻'과의 끊을 수 없는 필연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분의 '뜻'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축제를 가져온다는 사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 은총의 상태는 너무 커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져도,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다 받지 못하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받지 못하면 제한하는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은총을 제한하는, 은총을 미래의 선물로 바라보는 오해가 그분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현존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고,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류의 상징인 두 아들에게 Ⓐ와 Ⓑ의 은총이 맡겨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고독- '탕진의 자유'까지 묻지 않은 ‘현존’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근거, '있음'의 근원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그 계절이 언제이든, 우리 마음 안에서 성탄을 체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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