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79억1,721만개의 ‘축복’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사 순 제 2 주 일 (다 해) 2022. 3. 13. Luc. 9,28-36]
1.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실시간 인구측정 사이트인 월드미터에서 2022년 1월1일 전세계인구수는 79억1,721만명이라고 발표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잔인한 수치지만) 인구분포도를 통해 5%는 자신이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모르고, 자신도 불행하고 타인도 불행하게 만들면서 살다 가며. 90%는 '행복했다-불행했다'의 겹주름을 만들면서 살다가고. 나머지 5%만 '삶이 곧 행복'이라는 공식을 적용하며 살다간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것은 삶의 질만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 무엇으로 살려는 지에 따라 '얼굴 형태'까지 바꾼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이 한 번 이상 변하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고3시절 얼굴이 크게 변한다. (대포맨을 제외하고) 젖살이 일단 빠지고, 사각 턱이 계란형으로 깍인다. 왜? 그 때 얼굴이 바뀔까? 나뭇잎을 그냥 나뭇잎으로 보면 얼굴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안분지족하며 단순노동자로 평면적으로 살겠다는 고전주의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뭇잎이 흔들릴 때, 생성과소멸, 우주의 질서, 나비효과 이런 것이 궁금하고 질문이 많아지면서 즉 <형상과 담론>을 연결하여 자신이 규정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하면 얼굴이 확 깎인다. 자기 내부의 욕망이 강할수록 얼굴 형태도 입체적으로 더 많이 바뀐다.
이어령 선생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를 읽어본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나는 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조그만 이파리위에/우주의 숨결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떼/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하는 하나의 나뭇잎/한 잎 한 잎 동떨어져 살고 있는/고독한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한 세월과/무한한 공간이 가로막고 있음을//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싶은 가를/ 왜 사랑하며 왜 싸워야하는가를/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그것은 생존의 의미를 향해 흔드는 푸른 행커치프.../태양과 구름과 소나기와/바람의 증인.../잎이 흔들릴 때, 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의 욕망에 눈을 떴다//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다시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져야 한다 /어둡고 거칠고 색채가/ 죽어버린 흙속으로/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피가 뜨거워도 죽는 이유를 나뭇잎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생명의 아픔과, 생명의 흔들림이/망각의 땅을 향해 묻히는 그 이유를.../그것들은 말한다/ 거부하지 말라//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인력이/나뭇잎을 유혹한다/언어가 아니라 나뭇잎은/이 땅의 리듬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별들의 운행과 파동은/같은 질서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우리들의 마음도 흔들린다/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이어령 선생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에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어떤 현상을 보았는지?
①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②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③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④왜 이처럼 살고 싶은 가를/⑤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⑥나뭇잎은 이 땅의 리듬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⑦우리들의 마음도 흔들린다. 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는 공간에서 존재로, 존재에서 공간으로- 그것을 다시 '마음-공간'을 동시적인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나의 나뭇잎이 곧 우주라는 비약이 성립된다.
하나의 나뭇잎은 이 세계에서 가장 작은 사물이지만, 그 작은 사물을 통해 ‘나비효과’처럼, 이 세계가 어떤 보이지 않는 질서로 연결되어 있고, 같은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나뭇잎조차 이 세계의 인력, 질서, 리듬에 따라 생멸한다는 이치는 마지막 연에서 ‘마음과 공간’이 동시에 ‘흔들린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즉 ‘담론과 형상’이 동시적인 것이자 생명의 질서도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까지 이른 것이다.
이 시를 쓸 때, 이어령 선생은 얼굴이 한번 크게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을 불가지론자이자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공공연하게 발설하신 선생이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를 보면서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리고 있었음을 이 시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2.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세상에 나뭇잎을 그냥 나뭇잎이라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나뭇잎은 곧 우주라고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이 차이를 '주름' '변곡' '모나드' 라는 용어로 바라본 철학자들이 있다.
『반복과 차이』의 그 미세한 결에 주목했던 질 들뢰즈는 그것을 '바로크의 진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뭇잎을 나뭇잎으로 보는 이들은 이 세계를 사물이 만드는 퇴적층, 사물의 주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바라보겠지만, 나뭇잎에서 존재의 생성과 소멸까지 바라보는 이들은 <형상과 담론>의 더 깊은 주름을 통해 영혼은 무엇인가까지 바라본다. 이들이 바라본 것은 동양에서 말하는 음양의 원리와 비슷한 사유로 이 세계의 질서가 '상극에서 생극으로' 운행되고 있음을 바라본 것이다. 빛과 어둠을 대립이나 상극으로 바라본 이들은 사실 빛을 모른다는 것이다.
물질의 주름은 퇴적층처럼 인간을 사물화로 바라볼 수 있다면, 후자의 주름은 현실과 관념의 깊은(패인) 골을 만들어 그 주름을 펴기가 어렵다고 바라본다. 일그러진 진주는 바로 후자의 주름에서 만들어지는 데(빛과 어둠의 크기, 고통의 크기) 그 진주는 그 함몰의 정도가 깊어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고 바라본 것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술 사조가 바로 '바로크'이며, 그것을 평생 사유한 철학자가 라이프니츠라고 들뢰즈는 바라보고 있다.
⑧바로크의 진주는 단일체이지만, 어떤 불규칙성과 불균질성을 함축하는 단일체이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일그러진 진주인 바로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들뢰즈는 물의 소용돌이 원리에서 만들어지는 변곡을 통해, 주름의 원리를 추정한다. 수직선은 나선 모양으로 되접혀 하늘과 땅 사이에 떠 있는 운동 안에서 변곡을 연기하는데, 이 변곡은 곡률의 중심에서 무한정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며, 그리고 어떤 순간 "높이 비상하거나 우리 위로 떨어질 위험을 지닌다." 하지만 수직적인 나선이 변곡을 억제하거나 연기할 때에는 언제나 수평면으로는 변곡을 예고하고 그것은 불가피한 어떤 형태를 만들게 된다.
예컨데, 물결의 소용돌이는 단독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소용돌이의 나선은 프랙탈의 구성 방식을 좇아가는데, 이 방식에 따라 새로운 소용돌이들이 항상 앞선 소용돌이들 사이로 끼어든다. 소용돌이들이 바로 소용돌이들로부터 자라나며, 윤곽을 지우면서 오직 거품 또는 갈기 모양으로 끝맺음된다. 이런 원리로 변곡 자체가 소용돌이가 되며, 동시에 그 변동은 '요동'으로 빠져들고, 흔히 물이 '요동친다'고 말하게 되는 그 상태에 이른다. 사랑도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다.
들뢰즈는, 변동을 주름으로 만들고, 주름 또는 변동을 무한으로 실어나르는 주름의 원천인 변곡에 주목했다. 들뢰즈는 그 변곡이 쌓인 것을 주름이라 칭하고 변곡을 일으키는 힘을 "거듭제곱"의 역량이라고 불렀다. 역량 자체가 현실태acte이며, 주름의 행위acte가 된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겹주름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에 주목하여,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한 채 주름에서 포함으로 이행한다고 본다. 이 둘 사이에서는 어떤 간극이 생산되는데, 이것이 겹주름을 만든다. 주름잡혀 있는 것, 이것은 주름에 포함된 것이고, 이미 내속해 있는 것이다. 포함이 이루어지는 곳,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곳, 또는 실현된 현실태의 의미에서 포함하는 것은 자리나 장소도 아니며, 시선점도 아니게 된다. 그것은 시선의 점에 머무르는 것이며, 시선의 점을 차지하는 것이며, 그것이 없다면 시선의 점이 하나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영혼, 주체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어떻게 주름을 만드는지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⑨휘어지기 쉽고 탄력적인 하나의 물체는 또한 하나의 주름을 형성하는 결집된 부분을 갖고 그 결과 그 부분들은 부분의 부분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응집력을 줄곳 유지하는 더욱더 작은 주름으로 무한히 분할된다(라이프니츠, 『단자론』)
수학의 미적분의 상용화에 이바지한 라이프니치는 이 세상에 직선으로 던져져 곡선으로 휘게 되는 이유에 대해, 하나 또는 여럿의 매개변수에 의존하는 일군의 '곡선의 관념'을 제시한다. 이 세계가 직선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그것을 "주어진 하나의 곡선에 속하는 하나의 점에서 접하는 하나의 직선을 찾는 대신에, 무한한 곡선들에 속하는 무한한 점들에서 접하는 곡선을 찾는 데 전념한 것이다. 곡선은 접선에 의해 접해지는 것이 아니라, 곡선들에 의해 접하는 것이다. 접선은 직선, 유일한 것, 접하는 것이 아니라, 곡선, 무한한 군, 접해진 것이 된다."라고 그는 본 것이다.
그리하여 접하는 곡선의 "단 하나의 유일한 가변성"으로 변수들을 환원하는 '주름'이 만들어 진다. 대상은 더 이상 본질적인 형상을 통해 정의되지 않고도 순수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만일 대상의 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면, 주체 또한 마찬가지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점이 아니며, 선에서 태어난 선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들뢰즈는 이것을 시선의 점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크 예술, 원근법의 토대가 된다. 이것은 미리 정의된 주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대로 주체는 시선의 점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차라리 시선의 점에 머물러 있다고 본 것이다.
자신의 시선점으로부터 붙잡는 것, 변곡을 포함하는 것은 언제나 영혼이라고 말한다. 변곡은 자신을 포괄하는 영혼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이상이 되거나 또는 잠재성이 된다. 이렇게, 이것은 주름들을 갖는, 주름들로 가득 찬 영혼이 만들어진다. 주름들이 영혼 안에 있으며, 그리고 영혼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주름은 실존하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인 점이나 수학적인 점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점인데, 라이프니츠는 이 형이상학적인 점인 영혼 또는 주체에 "모나드"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접어ㅡ아우르는" 세계가 <영혼>이다. 안으로 <접힘ㅡ밖으로 펼침ㅡ한데 접어 아우름>을 통해 주름의 삼위일체를 형성한다.
모나드는 "어떤 것이 드나들 수 있는 창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구멍도 입구도" 갖지 않는다. 모나드의 본질적인 면은, 이것이 '어두운 바탕'을 갖는다는 것이다. 혼돈에서 어떤 질서가 만들어지듯, 모나드는 모든 것을 이것으로부터 끌어내며, 어떤 것도 밖에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보아야 할 것이 안쪽에 있는 장소들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데, 독방, 제의실, 지하 납골당, 교회, 극장, 열람실 또는 판화실. 이것들은 바로크의 역량과 영광을 끌어내기 위해 권위를 부여한 상징적 장소들이다. 빛은 단지 구멍에 의해서만 스며 들어오고, 이 구멍은 아주 굽어 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지만, 순수 내부의 장식물들을 밝게 비추고 색칠한다.
바로크 건축은, 안에 있는 사람 자신은 볼 수 없는 열린 부분으로 빛이 스치듯 들어오는 소성당과 방들을 설치한다. 그 최초의 작업 중 하나는 창이 없는 비밀스러운 방이 딸린 '스투디올로 데 피렌체 '에 있다. 따라서, 모나드엔 창이 없다. 모나드는 원자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방, 제의실이다. 입구나 창이 없는 방, 여기에서 모든 작용은 내적이다. 외부 없이 순수 내부적인 상태로 닫혀 있는 것, 영혼 또는 정신의 주름 이외의 것이 아닌 자발적인 주름으로 뒤덮여 있으면서, 무중력 상태의 닫힌 내부인 것은 위층이다. 그 결과 바로크 세계는, 두 개의 벡터, 아래로 처박힘과 위로 밀어올림에 따라 조직된다.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 티치아노는 1542년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에서 감상자의 시점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발밑에 두고 있다. 티치아노는 복잡한 요소를 제거하고, 명암 대비와 역동적인 동작을 통해 현장성을 더욱 극대화했다. 우리의 시선은 아브라함의 발밑에서 죽음을 앞둔 이삭의 얼굴을 거쳐 한껏 휘어있는 아브라함의 몸과 날카로운 칼 그리고 이를 제지하는 천사와 그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로 향한다. 죽기 직전의 어린, 순진무구한 이삭의 얼굴을 감상자가 마주하도록 함으로써 극적으로 감정의 공유를 실현한다. 아브라함의 젖힌 몸과 펄럭이는 의복은 격렬한 에너지와 함께 긴박한 현장 분위기를 전달한다. 감상자는 바로 밑에서 직접 보고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느낀다.
이렇게, 바로크 미술에서 작품은 주로 적갈색 등 어두운 바탕을 사용하는데, 그 위에 그들은 가장 넓은 그림자를 위치시키고 그림자를 향해 색조를 엷어지게 하면서 직접 붓질을 해나간다. 그림은 지위를 변화시키고, 사물은 배경에서 솟아오르게 하며, 색들은 어두운 본성을 보여주는 공통의 바탕으로부터 터져 나오고, 형태들은 윤곽에 의해서보다는 겹침에 의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바로크의 원근법에서 명암은 두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계열을 따라 모나드를 채운다. 한쪽 극단에는 어두운 바탕, 다른 극단에는 봉인된 빛으로, 영혼 신체는 두 극단으로 표출된다. 한 쪽은 심층이고 다른 한쪽은 상층으로 빛의 세계이다. 상층에 태양을 두고, 심층에 동굴 속의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둔다. 이 어른거리는 그림자, 방황하는 원인, 움직이는 괴물, 그 생성은 그림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욕망이 표현되는 표면은 신체의 피부이며, 그 모습의 제한성 때문에 무의식은 표출에서 제한을 받는다. 이 제한성은 봉인된 빛에 가깝다.
라이프니츠가 바라본 “빛은 어둠 한가운데 있는 균열을 통해서인 듯 미끄러져 들어온다”. 들뢰즌 그런 맥락에서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바로 바로크적 사유와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본 것이다. 바로크의 대표적 건물인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베드로대성당의 모든 내부는 작은 거울들을 통해 빛을 통해 흰색을 산출하고 휜색은 그림자는 만든다.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 그것은 흰색을 만들고, 그 흰색은 모나드의 밝혀진 구역과 뒤섞이지만, 어두운 바탕, 즉 ‘어두운 것’을 향해 어두워지거나 또는 엷어지는데, 거기서부터 “다소 강하면서 신중하게 다루어진 그늘과 색조를 통해 사물들이 밖으로 나온다.” 원근법을 역전시키거나 “눈 대신 빛들을, 대상 대신 불투명한 것들을, 그리고 투사 대신 그림자를” 놓는 것으로 빛과 그림자는 주름을 만든다. 그림자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닌 인간의 실존과 그렇게 닿아있다.
바로크는 인간의 실존처럼 빛과 색들의 새로운 체계와 분리될 수 없다. 사람들은 우선 빛과 어둠을 1과 0처럼, 가느다란 분수선으로 분리된 세계의 두 층처럼 간주할 수 있다. “행복한 자들”과 “저주받은 자들”. 그럼에도 그 대립은 중요하지 않다. 위층도 아래층과 마찬가지다. 밝은 것에도, 흰 것에서도 “어둡고 거무스름하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이 바로크의 공헌이다. 완전히 흰색도 완전히 검은 색도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형상의 존재와 질료의 무한정자와 같은 대비는 이미 신화에서 제우스의 신들과 거인족들 사이에 관계와 같다고 보았다.. 왜 상층에 훌륭함, 착함, 행복 등의 도덕적 관념을 불어넣었느냐는 것은 전쟁시대에 승자에 대한 찬미와 아부가 겉으로 드러나 있다고 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오만과 무모함이 그 속에 내포적 성질로 들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우리는 “빛이 있으라”고 말했던 신과 그와 더불어 거울-흰색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받아들인 광선들을 더 이상 반사하지 않는 무한히 많은 구멍들에 있는 어둠들, 또는 절대적인 검정을, 즉 궁극적으로 이 모든 구멍들로 만들어져 있는 스폰지같이 무한히 구멍 뚫린 물질을 갖는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은 완전체지만 그것은 “완전성의 정도에서 차이나는 같은 사물일 뿐이다.” 즉 인류는 하나하나 이미 완벽함을 가진 그러나 아직 완벽하지 않는 특이자들이다. 여기서 바로크의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주름에서 '일그러진 진주'가 만들어진다.
들뢰즈와 라이프니츠 논의를 종합해 실재론자라 불리는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끌어낸다.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 인간은 어둠으로 몽땅 덮혀있는 그 죽음의 순간조차도 위로(빛, 신 혹은 진리로) 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과 신의 필연적인 관계를 무의식으로도 알기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 두려워 한다는 것,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 분노한다는 것, 숨어버린다는 것, 절규한다는 것...그 부정의 실존 속에 이미 그 반대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과정중의 실재이기에 완전한 빛일 수도 완전한 어둠일 수도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⑩주체는 '아래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 변동과 시간의 점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주체에 따른 진리의 변동이 아니라 '변동의 진리'가 주체에 나타나는 조건이다(화이트 헤드,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If, 만약, 신이 '사랑'이라면 인간이 끊었다고, 혹은 끊는다고, 혹은 끊겠다고 그 관계가 끊어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끊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면 이미 끊어진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어둠과 죽음을 뚫고 출애급한 그런 사랑을 했기에 신이 부활하여 인간에게 나타나도 인간은 신을 결코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사순3주 묵상에서 보충)
3.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루카 9,28ㄴ-36
루카 9,28ㄴ-36에서 예수님의 '두 얼굴'을 만난다. 완전한 빛과 완전한 빛이 내재화된 현실의 얼굴이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코9,3)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오17,2)
루카 9,28ㄴ-36에서는
Ⓐ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라고 전하는 루카 9,28ㄴ-36에서는 ‘기도’가 어떻게 ‘애주애인’의 문을 열면서, 동시에 얼굴까지 변모시키는가를 보여주는 <형상과 담론>의 일치라는 거대시나리오의 프레임이 나온다.
루카 9,28ㄴ-36은 3개의 보이는 장면과 2개의 보이지 않는 장면을 연결해 ‘기도’가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지,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 앞에 설사 나타난다해도 왜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는지, 그 변모의 바탕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A(루카)(Ⓐ--------------------->Ⓑ-------------------->Ⓒ)B(인류)
A의 루카복음사가는 마르코와 마태오 전승에 Ⓐ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과Ⓒ의 ‘내가 선택한’을 덧붙여 '강생신학과 십자가신학'을 연결하는 거대드라마를 액자식으로 구성한다.
Ⓑ에서 제자들의 목격담이 나오고
Ⓒ에서 이 모든 일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나’의 ‘계획’과 ‘선택’이었음을 들려주면서
B의 ‘오늘’ 복음을 듣고(읽고) 있는 인류에게 그 축복(기도)의 파장이 전해진다.
이 장엄한 드라마를 끌고가는 주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기도하시는데’ 라는 ‘기도’와 ‘내가 선택한’이 끌고 간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기도와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이 장면은 ‘기도’가 어떤 회오리바람, 토네이도를 만들어 엘리아를 하늘로 들어올리는 것이 가능한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변모나 그분의 수난과 부활이 예수님 한 분만의 사명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사랑이라는데 방점이 찍힌다. 즉 루카 9,28ㄴ-36은 79억1721만개의 축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 예수님에게 기도는 무엇인가?
루카는 공관 복음서 작가들 가운데 기도에 관한 말씀과 이야기를 가장 많이 수록했다. 예수 친히 기도하셨고(3,21/5,16/6,12/9,18.28-29/10,21/11,1/22,32.41-45/23,34.46), 제자들에게 기도를 권하셨다.(6,28/11,1-13/18,1/21,34-36/22,40-46)
예수님의 기도는 아들에게서 아버지를 향해서 올라가는 사랑이자, 예수살렘에서 이루실 일에서 들어나듯 모든 이를 위한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기도는 ‘애주애인’을 완성하는 로드맵에 해당한다.
Ⓐ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 수난에 관한 것이고, 기도 하실 때의 모습은 ⒞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부활의 모습을 보여준다.
⒜⒝---------------------->⒞<-------------------⒟,⒠,⒡
⒞는 부활했을 때의 예수님의 모습이고 ⒟,⒠,⒡는 수난에 관한 것이라면, 이는 여드레쯤 전에,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알려준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의 반복에 해당한다.
루카9장18절, 예수님이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여드레전 기도에서는 수난과 부활이 우리가 살고 있는 순차적인 시간으로 사건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여드레 후에 기도의 장면에서는 부활과 수난이 나란히 병치되거나 부활의 모습이 먼저 제시된다.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라는 문장 접속부사는 복음사가의 재량인가? 영감인가? 무의식인가?
영원이라는 시간 개념에 비추어 본다면, 또 영광의 범주를 무엇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부활과 수난은 같은 영광, 인류의 사랑이라고 동시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래서’가 아니고 ‘그리고’로 읽어보기로 한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아들’이라는 의미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루이 에블리 신부는 『어떻게 祈禱할 것인가』에서
“기도는 아들의 마음으로부터 아버지에게로 향해서 올라가는 사랑과 갈망, 존경과 감탄의 끊임없는 속삭임이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아들의 마음으로부터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 감사와 제헌의 행위였다, 그래서 이후에 나오는 ‘내가 선택한 아들’의 의미를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땅에서 하늘이 곧바로 연결될 때 예수님의 얼굴 뿐 아니라 그분이 입고 있는 옷 까지도 바뀌고 잠들어 있던 제자들까지 깨어나 그 기쁨을 나누게 된다. 겹주름의 세계 속에서 겹주름의 겹주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하실 그분의 모습을 마리아막달레나가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2) 사람에게 기도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제자들, 즉 우리(인류에게)에게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애주애인’을 완성케하는 로드맵이라는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자주 영혼이 잠들어 있는가?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우리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기도는 ‘잠에 빠졌다 깨어나’는 것으로, ‘기도의 주름-잠과 깨어남’의 겹주름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도에도 이 기도의 주름이 있다. 그러나 그분의 주름은 애주와 애인이라는 사랑의 주름이다. 그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붓삼아, 일필휘지로 쓴 애주애인이라는 사랑으로 쭉 펼쳐진 형이상학의 세계다. 그러나 제자들과 우리의 기도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라는 두 세계가 나누어지고 교차하고 꿰메거나 봉합해서 만드는 소용돌이이자 겹주름이다.
루카 9.21에서 베드로의 대답이 베드로의 행위를 낳개 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우리는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분명히 베드로는 직관으로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사건이 있기 까지는 그분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바오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에 대한 바오로의 열성이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게 만든다.
여기서 1차적으로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은 보았으나 그들의 대화 내용은-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 듣지(사랑) 못했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추론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본 것(권능)에만 초점이 놓여 있다. 제자들은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나 치유의 기적 등, 에수님이 행한 기적의 표면만 보았다는 것이다. 기적의 원리, 하느님의 사랑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도의 초점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바라보게 된다. 기도는 관상이 아니라 파견이라는 사실이다. 기도는 산위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늘 산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주 산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바라볼 수 있다. ‘산아래-산위’라는 공간의 상징성이 의미하는 바, 이는 우리의 순례에 주어진 주름을 순식간에 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하는 순간 뿐 아니라 우리가 수행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기도가 된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기도의 주름을 쉽게 펴게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 에블리 신부는 『어떻게 祈禱할 것인가』에서
“기도가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또 태어난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하고 싶어한다. 사실 많은 기도를 한다. 기도를 너무 많이 하는 것과 기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 같은 의미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기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기도는 응답이 있고, 어떤 기도는 응답이 유보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 중에 떠올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나 사람들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아들의 마음으로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지 못한 기도였다고 할 수 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그 기도가 형상의 세계인 이 세계를 변화시킬 정도의 그 상태에 이르지 못한 것은 수많은 이유(물리적인 법칙이 적용되는 이 세계의 중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이유를 통합하는 한 가지 이유는 ‘아들의 마음에서 아버지를 향해’ 오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못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3) 하느님에게 기도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느님에게 기도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우리가 기도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부르심을 알아들은 사무엘의 기도, 탈혼 상태를 경험한 데레사 성녀, 기도중에 오상을 입는 프란체스코 성인, 기도중에 귀족의 권위를 내던진 이냐시오 성인 등의 기도를 본다면 그것은 그분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려고 한밤중에 깨어나는 것은 그분의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의 삶의 양식에 길들여진 우리가 하늘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이 에블리 신부는 『어떻게 祈禱할 것인가』에서
“인간을 찾고 있는 분은 하느님이셨고, 인간을 부르면서 그 응답을 얻지 못한 분도 하느님이셨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루카 복음 사가는 내가 사랑한 아들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아들’ 이라는 어휘를 굳이 선택한 의도는 무엇일까?
사실, 하느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복음사가는 바라보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는 헤로데와 수석사제들, 율법학자들까지를 포함한 인류 모두들 예외없이 사랑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히틀러는 천국에 있다라고 말하는 어떤 영성가의 책들도 있다. 하느님의 자비의 품을 인간이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 중에 누구를 만나는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기도의 답은 간단하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들으면 된다. '애주애인'의 정석을 그분이 수난과 부활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런 막락에서 기도란 그 '애주애인'의 사랑을 듣는 행위다. 우리의 기도가 유예되는 이유는 우리가 청하는 것이 애주애인에서 빗나가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아이에게 칼을 맡기는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기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거대한 끈이자, 내가 기도하고자 하는 그 마음, 그 의도가 실은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순례의 답을 주시려는 ‘선택’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기도 없는 선택은 없다. 여기서 기도는 전례나 골방에서 드리는 그 기도를 포괄한 하느님과의 의사소통(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 의미가 담겨있음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순2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우리가 순례 중에 경험하는 공간을 예로들어 ‘머물러야 할 장소’와 ‘거쳐 지나가야할 장소’로 나누어, 문제는 우리가 ‘머물고 싶어하는 장소’는 우리가 ‘거쳐지나가야 할 장소’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는 타볼 산에서 영광스럽고 황홀한 체험을 하고 난 뒤에 너무 기쁜 나머지 그곳에 초막을 지어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베드로가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머무실 곳도 아니었습니다...우리는 이 세상에 자신이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생각하며 이 세상에 자신의 집을 지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할 곳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뜻하고(...)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을 멈추고 그곳에 머물라고 보여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야할 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머무를 곳이 어떤 곳인지를 미리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강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머물러야 할 장소’와 ‘거쳐 지나가야할 장소’는 ‘애주애인’이라는 지향점에 따라 대립적이고 영원과 유한으로 나눠지는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기도만을 초점으로 놓고 볼 때, 이 두 공간은 상호보완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두 공간의 성격이 어떻게 유한과 영원으로 갈리는지, ‘머물러야 할 장소’와 ‘거쳐 지나가야할 장소’로 나눠지는지, 그리고 상호보완적 공간으로 통합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가끔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던 그분처럼 우리도 저 산위의 체험으로 산 아래의 삶을 그분의 방향으로 끌고갈 수 있는 힘을 받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79억1721만개의 ‘축복’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하였듯 삶이 곧 행복인 이들이 전세계 인구의 5%밖에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세상은 79억 1,721만개의 이유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방식으로는 결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하느님은 딱 하나의 방법만을 제시한다. 내가 선택한 아들의 말을 들으라, 는 것이다. 그 말이 무엇인가? 내가 선택한 아들처럼 ‘애주애인’ 하라는 것이다. 너무나 자명해서 믿을 수 없는 고요한 답! 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이 세계는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우리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만드는 주름의 세계에 살고 있다. 물질과 정신, 담론과 형상, 세속과 종교가 확연히 나눠진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각자가 처해 있는 실존의 상황이 다르고 그에 맞물린 우리 각자의 기질지성도 사뭇 다르다. 그 겹주름의 상황에서 '애주애인'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얼굴의 모양 옷의 색깔까지 달라질 만큼 뼈를 깎으면서, 죽음의 강을 건너 그분이 알려준 '사랑'이 우리의 모든 상황을 끌어가게 되기를! 그 길이 우리 내부에서 저항없이 유연하게 열리게 되기를! 아들의 마음으로 먼저 기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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