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받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알랭 핑켈크로트)

나뭇잎숨결 2022. 3. 11. 12:22

 

 

사랑받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8, 6)

 

 

 

[사 순 제 1 주 일 (다 해) 2022. 3. 6. Luc. 4,1-13]

 

 

 

 

1. 잘랄루딘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

 

시를 읽어 본다.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잘랄루딘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는 ‘꽃과 술과 촛불’이 있는 이 곳은 인생의 봄이자 사랑이 있는 곳이라고 시작한다.

 

그렇기에,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꽃과 술과 촛불’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당신이 없는 ‘봄’, 당신이 없는 ‘꽃’과 ‘술’과 ‘촛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묻는다. 당신과 내가 있고 없고와 무관하게 ‘꽃과 술과 촛불’로 상징되는 그 ‘봄’은 늘 이곳에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봄의 정원으로 오라」는 세 겹의 꽃잎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먼저, ‘당신’에 초점을 맞춰 읽어보자. 당신은 그 모든 사물들과 하나가 되거나 사물들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당신이 있음으로 '꽃과 술과 촛불'은 더 이상 필요없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냥, 당신만 있으면, 당신이면 족하다. 

 

화자의 입장에서 「봄의 정원으로 오라」를 읽는다면, 사랑에 있어서 현존이란 부재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즉 ‘몰아 (沒我)’에 관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윤리적 당신에서, 미학적 당신으로, 다시 윤리적 당신으로, 그 오롯한 생명인 당신을 바라보기 위해서, 당신을 벗어나지 않으면 당신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역설이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를 ‘꽃과 술과 촛불’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보자. 이 세계는 인간이 해독할 수도 그 한계를 짐작할 수 없는 무한한 것, 신의 정원인 ‘봄’만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당신으로 시작한 사랑이 당신이란 구체적인 테두리를 넘어서는 상태. 그 무한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무한의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

 

 

 

 

 

 

 

 

 

2. 신은 인간 안에서 말을 하는 대신, 인간에게 말을 건다.(알랭 핑겔크로트)

 

 

사랑 앞에 흔히 붙는 ‘몰아 (沒我)’ 혹은 ‘무한(無限)’은 무엇인가?

 

레비나스로부터 시작해 본다.

 

타자가 우리에게 올 때 그는 ‘얼굴’을 가지고 온다, 처음에 그 얼굴은 우리에게 ‘낯선’이라는 이름으로 온다. 그 ‘낯선’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의 본질을 요구하는 얼굴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 얼굴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 상태를, 사랑의 윤리를 상기시킨다. 얼굴은 무언으로 그것을 요구한다. 사랑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때 우리는 윤리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타자의 얼굴, 그 요구가 부당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닌 윤리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나의 윤리가 전체주의에 기반한 것이냐, 휴머니즘에 기반한 것인가? 전자는 실제로 행하지 않은 행위를 비난하거나, 후자는 실제로 행한 행위를 사회-역사적 맥락으로 치환하기도 한다. 인간이 실제로 행했거나 따르지 않은 것에 자신을 연루시키지 않는 것,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는 대신, 자신의 자유의지를 악마에게 넘기게 된다.

 

그때 ‘몰아 (沒我)’ 혹은 ‘무한(無限)’은 무엇인가?가 답해질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은 이중으로 구원적이다. 즉 자기로부터 자아를해방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렇고, 자아의 자기만족과 자만심을 깨우쳐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알랭 필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한 사람과의 만남, 그것은 한 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얼굴이 요구하는 것, 그것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 ‘나’를 벗어나야 한다. 타자로부터 도망치려는 그 나인 자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힘’을 잃어야 한다. '몰아'나 '무한'은 사랑의 '힘'을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 사랑이 불가피하게 '무능력'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임계점이다.

 

 

나는 언제나 자신의 실존 안에 한 발이 잡혀 있다. 다른 모든 것의 바깥에 머물고 있는 나는 스스로에 대해서 내재적이며,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다(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가차없이 가장 최고의 윤리적 상태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나의 실존에 잡혀있는 나는 타자를 불온하게 불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양심을 바라보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봄이 되어 나온 개구리에 돌을 던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옆을 지나가고 있다. 그곳을 지나간 사람만이 오랫동안 그 행위를 멈추지 못하게 한 자신의 행위 때문에 괴로워하게 된다. 악을 행하지 않아서 편안한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아서 괴로운 상태! 그것이 타자가 우리에게 들이민 '얼굴'의 낯섦이다.

 

이를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항상 당신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랑으로부터 당신은 도망가지 못하는 것이다. 혹은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라고. 사랑은 내가 행위의 주도권을 잃은 상태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말을 걸고, 인간은 그에게 답한다. 이 점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업적이 있다”(모리스 블랑쇼, 끝없는 대담)

 

이 전도된 윤리적 상황을 모리스 블랑쇼는 ‘신의 섭리’라는 말로 다르게 표현한다. ‘신의 섭리’를 운운하는 일은 인간과 신을 이중으로 침범하는 일에 해당한다. 인간에 대해서는 그의 자주성을 소멸시킴으로써, 신에 대해서는 유일신의 거룩한 신성- 근원적인 인간과의 ‘거리’를 소멸시키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를 성서의 예를 들어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기 4.9)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카인의 항변 속에는 ‘신이라면 제대로 신의 존재증명을 하십시오’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는 ‘무한’이라는 개념만 신을 설명할 수 있는 용어라고 말한다. 인간과 신이 대화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신의 현존보다, 신의 부재가 더 '신적'이라는 것이다.

 

신의 부재는 더 이상 무한을 향해서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을 향해서 문을 여는 것이다. ‘신의 부재는 신보다 더욱 위대하고 더욱 신적이다”(사르트르, 윤리에 관한 노트)

 

이는 종교사에서 전능한 사랑과 무한한 사랑이 나누어지는 분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전능한 사랑은 아버지의 모든 속성을 지닌 인격적 사랑이라면, 무한한 사랑은 초월자의 영역으로 넘어간 신적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그 경계가 모호해 진다는 것이다.  철학의 신과 종교의 신은 이렇게 어떤 경계에 걸쳐지면서 이별하게 됨으로써 '사랑'마저로 카오스의 상태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이를 신은 인간 안에서 말을 하는 대신, 인간에게 말을 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인간을 신의 지위로 끌어 올린 것이고, 이것은 결정적으로 신이 인간에게 신의 사랑을 증명하게 되는 신의 자기구속성이라는 말로 요약되기도 한다.

 

이때 ‘몰아’와 ‘무한’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지위가 신의 위치까지 이르게 된 성스러움을 의미하며, 이 불사불멸의 사랑의 질서에 인간이 참여하고 속해있다는 것이 사랑(신)에 취한 자들의 종교적 ‘순교’라고 보기도 한다.

 

 

 

 

 

 

 

3.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다.> 루카 4,1-13

 

 

우리가 사랑 앞에서 어떤 내적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은 두 세계의 질서를 모두 공유하고자 할 때이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리라는 이름으로 과감하게 잘라버린다. 엄마와 아이를 연결하고 있던 탯줄을 자르고 저 세상으로 무작정 내보내듯, 흔히 사랑은 ‘하나ONENESS’, ‘일체’라고 할 때, 그 일체가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분리'를 감행함으로써 사랑을 카오스의 상태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하늘이라는 집을 짓기 위해 이 세상의 질서로 지은 집을 허물고, 하늘이라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이 세상의 질서로 지은 성전을 모두 허문 것과 같다.

 

따라서 어떤 경계나 위상에 길들여져 있는, 즉 이 세계의 질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가 가장 수락하기 어려운 것이 ‘불사’ ‘불멸’ ‘영원’ ‘무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사랑’일 것이다. 이 사랑을 바라본다면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고백을 우리는 결코 쉽게 하지 못하게 된다.

 

사순시기는 이 <불사-불멸-무한-영원>이라는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근원적인 사랑의 정수 앞에 ‘죽음’을 묵상한 것을 권한다.

 

사랑 앞에서 죽음을 묵상한다?

 

달리 말해 사순시기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정말 '불사불멸하고 무한하고 영원한 그 사랑'을 할 생각이 있느냐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보여준 그 선택적 사랑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그런 사랑의 초대, 로드맵에 해당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존재이며 불사불멸의 그 사랑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존의 정지가 아니라 쉬지 않고 타자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사랑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하는 루카 4,1-13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6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7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11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다.> 고 전하는 루카 4,1-13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사랑의 차이가 무엇인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악마의 유혹은 영원을 지닐 수 없는 유한, 세계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것은 유한한 세계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과 욕망을 뒤섞지 말라는 말이다. 

 

예컨대, 나는 그분을 모릅니다, 라는 베드로의 부정은 나는 그 ‘무한’한 사랑을 모릅니다. 아니 그 '무한'한 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 앞에 <무한, 불사, 불멸, 영원>이라는 말이 붙을 때, 그 사랑은 어디까지 간 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예수님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충만한 상태였다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역사적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 예수인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인간 역사에 육신을 취해 들어오신 분!

 

신이 인간의 육신을 통해서 신 자신을 구현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신을 인간 현실의 궁극적 실재라고 할 때, 그 실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성령에 이끌려

 

사순절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이 유혹사화가 예수님의 자발적인 통과의례나 극기복례의 시간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는 신존재증명의 첫 번째 관문은 성령의 '이끄심'이에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령은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영적체험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고귀한 영적체험을 흔들고 있는 듯한 ‘이끌려’라는 표현은 성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집을 허물고 불사, 불멸, 영원, 무한이라는 사랑의 집을 짓는 것이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나 행위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 '불사불멸의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봉헌만이 '불사불멸의 사랑'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유혹사화에서 ‘광야와 사십일’이 여기서 왜 중요한 포인트일까? 그것은 무한과 영원과 불사와 불멸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 공간이고 시간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랑의 관념이 무너져 내린 바로 그런 공간과 시간이 광야이자, 40일이다. 이 광야와 시간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사랑이 진정 사랑인지 욕망인지? 그 유혹의 이름이 지시하는 것이 어떤 얼굴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욕망과 사랑은 결코 뒤섞을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보는 공간과 시간!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유혹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전에 어떻게 악마와 예수님의 대화적 상황이 가능한 것일까?를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즉 악마가 대체 무엇이가에 그분과 이렇게 중차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성령은 왜 이를 허용하는가?

 

2021년 사순1주 묵상에서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 '영원'을 여는 암호 ]에서,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라는 것이 '악마'라 지칭된  '유혹자'를 외부적인 어둠으로 치환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마음상태'라는 것을 바아보아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올린 바 있다.

 

실존 앞에서 한계 상황에 몰린 우리 자신의 마음이 바로 악마로 지칭하는 그 유혹자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사랑에 어떤 한계를 정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 이 정도 사랑했으면 충분했잖아, 라고 항변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유혹자의 실체라는 것이다.

 

흔히들 그 유혹자의 이름을 세상의 권력자 혹은 가치관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어떤 가치관도 우리 자신이 그것을 수락하지 않으면 그것은 유혹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이 한계 상황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임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악마라 부르는 유혹자의 이름이 한계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상태라는 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윤리적인 의미로 악마 혹은 유혹자의 존재를 치환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한계상황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선택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자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유혹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대답이 신 앞에 서 있는 신의 존재증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존재증명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을 수 있게 한다. 인간의 품위가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라는 이 선택은 ‘나’에 대한 이해와 자기애의 출발점이다. 즉 내가 누구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자기이해, 오욕칠정을 지닌 나를 이해한 가운데서, 오욕칠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욕칠정을 지닌 나를 '사랑(말씀)'이 이끌게 하겠다는 선택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라는 이 선택은 타자 혹은 세계와의 관계, 힘의 실체, 타자가 명명하는 나의 위치와 그 이름의 실상, 그 실존의 상황에서 가장 장엄하고 고귀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음을, 즉 세상이 주는 명예나 권력을 진정한 권위인 하느님의 사랑이 이끌어가게 하겠다는 선택이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이 선택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권능의 하느님인지 사랑의 하느님인지?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능의) 신은 죽었다는 무신론의 세계 속에서 '신은 사랑'이라는 것을 영원히 믿고 살겠다는 선택이다.  

 

⒜의 나. ⒝의 타자 혹은 세계, ⒞의 하느님은 누구나 이 세상의 순례 중에 만나게 될 ‘사랑의 세 대상’, 우리 앞에 도착한 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일원인 신자만의 차원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한계 상황 앞에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를 인용하며 ‘하느님과 말씀’을 선택하셨다. 이것은 어떤 선택인가? 그분이 사랑할 인류를 위해 <불사, 불멸, 영원, 무한>의 사랑이 되겠다는 바로 그 선택을 의미한다. 이 세상이 규정하는 유한한 사랑과 권능의 신, 그 개념을 뒤집는 그 선택을 그분이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그분의 선택을 예찬하는 그 추종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그 사랑을 삶에서 매순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패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모든 선택의 상황에서 <불사, 불멸, 영원, 무한>의 그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요셉 라칭거 추기경의 사랑에 관한 통찰을 통해 그 사랑이 왜 좌절을 겪게 되는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랑은 무한을 갈구하고 붊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을 찾는 외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외침이 성취될 수 없고 사랑이 무한을 갈구하면서도 줄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랑이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 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요셉 라칭거 주기경)

 

왜?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 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랑은 그 자체가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하는 외침임에도. 불사와 불멸, 무한과 영원을 갈구하는 사랑을 성취하기 어려운 이유는 사랑의 ‘주체’인 내가 '지워져야(죽어야)' 그 사랑이 성취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내가 그대로 남아 있고서는 <불사불멸>한 그 사랑은 성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예수님의 선택으로 돌아가 본다.  그분은 사랑을 위해서 그 언젠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삶은 사랑에 귀속시켰다는 점이다.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불사불멸의 신이 사랑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역사적으로 죽음을 당한 것이지만, 실은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유혹사화의 대화적 상황과 그 선택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8,6) 라고 하는 '사랑과 죽음'의 관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유혹사화에서 예수님이 선택한 '불사불멸'할 그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랑을 살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우리 역시, 영원, 불사불멸 영원의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지워져야) 한다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워지거나 사라지고 싶지 않다. 본능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주 오래오래 잘 살고 싶어 한다. 내가 누구인지 만인에게 각인시키며...사랑을 알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을 안다면, 내가 죽는 것이 그렇게 억울하지 않다. 오히려 사는 것이 더 힘들기조차 하다. 이렇게 사는 것이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때, 유혹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속삭이는가? 그 유혹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욕망이 유혹자다. 우리는 불멸의 사랑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유한한 욕망에 묶여 있고 싶어한다. 욕망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 유혹자는 누구인가? 우리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이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 어떤 마음상태다.  우리 자신, 마음에게 포박당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욕망과 예수님이 알려준 그 사랑은 늘 충돌하게 된다. 예수님이 알려준 그 사랑은 우리가 선물로 받은 '자유의지'까지를 과감하게 포기한 그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순1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이 한계를 정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랑에는 희생을 감수하고 사랑하는 사랑이 있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것(...) 실망과 지독한 절망마저도 꺾을 수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사랑에는 죽음마저도 어찌 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알고 시작한 사랑이었으며(...)그리고 그 희생을 온 마음으로 또 온몸으로 떠안고 갈 준비가 된 사랑이었으며(...)그리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 배신감 때문에 겪게 될 고통과 실망과 절망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사랑, (...)그래서 죽음마저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악마가 마지막에서 또다시 유혹에 실패한 것은 악마는 미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사랑의 힘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악마는 지금까지 그런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순시기에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은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강론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인류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이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 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는 이 세상의 사랑법을 뒤집은 사랑임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욕망을 욕망하지 말고 사랑을 욕망하라는 제언이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그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사랑하고 싶지만, 늘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제언이다. '예수님의 그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은 또한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분의 도움으로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욕망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가 분리되기 전에는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론으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이론으로 알아서 믿게되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그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 그것을 믿기 위해서 믿음의 은총이 또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체험'에서 믿음이 생긴다. 우리가 사순시기뿐 아니라 우리 생의 모든 날들에 '하느님의 저 불사불멸할 사랑'을 체험하겠다는 갈망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사랑받는 생명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보편적 관계) 이 세상을 떠난다. 그 변화의 시점은 순차적인 순서가 아니다. 사랑받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왔음을 알 때(체험), 사랑하는 사람(보편적 사랑)으로 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사랑은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사랑받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알랭 핑켈크로트)-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8,6)]

 

우리가 사랑 받았음을 알 때, 사랑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에 서툴거나 사랑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실은 사랑 자체가 싫어서가 아니라 사랑받았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선상에서 세상의 모든 죄는 모르고 진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은 누구의 죄도 묻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가장 순수한 앎의 상태로 인한 자발적인 선택에 해당한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예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네가 알고 있느냐'로 들어야 한다. 그 사랑을 안다면 너는 내 양들을 잘 돌볼 것이라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생명은 죽어야 부활의 상태에 놓이게되지만 사랑은 이 순환 고리를 예수님을 통해서 뒤집는다. 살아야 죽을 수 있다는 사랑의 묘약이다. 억지로 죽으려 하니까 죽었다깨나도 죽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사랑 받았음을 알아야 사랑 할 수 있다. 사랑을 알면 죽을 수 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죽는 게 억울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것은 딱 하나다. 예수님이 선택한 그 사랑을 알게해달라고! 그때, 불사불멸의 이름을 얻은 아름다운 사랑은 스스로의 존재증명을 하기 위해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살게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