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마음의 법칙; 행복의 자기결정권, 그 선택과 유예

나뭇잎숨결 2022. 2. 18. 11:17

 

 

마음의 법칙; 행복의 자기결정권, 그 선택과 유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유치환)

 

 

 

[연 중 제 6 주 일 (다 해)2022. 2. 13. Luc. 6,17.20-26.]    

 

 

 

 

1.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 & 「행복」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1938년)를 읽어본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 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1938년)

 

유치환의 「행복」(1953년)을 읽어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1953)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라는 치열한 자기 탈각의 모색에서 「생명의 서(書)」가 쓰여졌다면, 그 모든 상황에서 내적으로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쓴 시가 「행복」 이다. 치열함에서 무연함에 이르는 길은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라 시인이 삶과 사랑을 바라보는 마음의 길이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치열한 자기와의 대결에서 「생명의 서(書)」가 쓰여지고, 15년이 지난 후 「행복」 에 이르러서야 시인은 자기 마음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사랑' 자체만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시인 유치환(1908~1967)하면 떠오르는 싯구가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것은 단지 시적 수사가 아니라 '마음을 담금질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너’라는 구체적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사랑이 ‘너’를 넘어 사랑 자체로 다가가는 ‘몰아와 무아’를 동시에 겪으면서 시인은 사랑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유치환은 한 여류시인에게 20여 년간 2,000여 통에 달하는 편지를 써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도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서 시작한 그의 편지 쓰기는 사랑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시간 속에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해타를 낳게 된 것이다.

 

유치환이 죽고 난 일 년 뒤에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라는 작품집이 나오고, 시인 유치환을 기리는 시비에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가 단장으로 새겨 지면서 유치환의 사랑론은 그의 시론이 된다. 따라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시인 유치환의 시적 편력이자, 마음의 여로이자, 인생의 정수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시구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흔히 사랑에 빠진 자는 구천을 헤멘다고 말하기도 한다. 구천은 지상과 천상의 중간지점이다. 이승에서 한을 다 풀지 못한 영혼들이 헤메는 공간이 구천이다. 이는 사랑에 빠진 자는 자신이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도, 착지하지도 못한 표류자라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사랑 때문에 걸음을 멈췄을 것이고, 자다가도 사랑 때문에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매일 우체국에 들려 ‘너’에게 편지를 부치고, 차라리 죽으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바위’가 되리라라고 절규했을 것이다. ‘오욕칠정’이라는 사슬에 묶여, 살아서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린 그는, 사랑의 화마속에서 매일 구천을 떠도는 애혼이 되어 대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너’가 누군지 묻고 묻다가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 봉두난발의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 유치환은 대체 나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 '너'는 누구냐?라고 중얼거리면서 거리를 헤메다, 그 ‘너’를 만났다. 그러나 시인은 그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고 한다. 유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라는 말을 듣고 그는 습명([襲名,홀현 밝아진)을 경험하게 된다. 백주대낮에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이해할 것도 같았고, 한 주발의 보시를 구걸해 보리수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부처를 알 것도 같고, 하늘 아래서 일어난 모든 일들-탄생과 살생 모두를 이해할 거 같은 가당찮은 상황 앞에서, 사랑이라는 화마는 '너'의 문제가 아니고 '내 마음이 문제였구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흔히 이런 경우를 ‘마음이 정을 맞았다’라고 표현한다, 그날 이후, '사랑'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마음'은 무엇인가로 질문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너'는 대체 누구냐가 아니고,  '나'는 대체 누구냐를 묻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것이면서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오욕칠정’의 바다, 사막, 우물인 ‘마음’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모래바람만 몰려가다 홀연 신기루가 보이기도 하고, 썩은 고기를 찾아 헤메는 하이에나이기도 하다가 고고하게 굶어죽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기도 한 그 마음, 마음인지 심장인지 자기 내부의 어디선가 튀어나온 사리가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 라는 시구다.

 

 

 

 

 

 

 

 

 

3. 어떤 형이상학적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 나가르주나, 『중론(中論)』)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도 행복을 알 수 있을까? 아니 마음을 안다는 것은 행복은 안다는 것일까?

 

[‘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이름의 ‘파사드Facade’를 지나]에서 ‘마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이 글은 그 연장선에서,(②~⑧재인용)

 

마음 공부, 마음 닦기, 마음 내려놓기..등등 마음은 무엇일까?

 

장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고정불변하지 않음에 주목하여 <성심>과 <정신> 어디로 쏠리는가에 따라 마음은 천차만별로 표출되는 요동치는 파도로 보았다. 「재유」와 「제물론」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①"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기 쉬워서 누르면 내려가고 일으키면 올라간다. 그 오르고 내림이 마치 옥에 갇히거나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해로운 것이다. 부드러워서 강강한 것을 유약하게 하고, 모난 것을 깎아 내며, 그 뜨겁기는 마치 타는 불과 같고, 그 차가움은 찬 얼음과 같다. 그 빠르기는 순식간에 사해의 밖을 두 번이나 돌 수 있고, 그 거처함은 깊은 못과 같이 고요하다. 그 움직임은 하늘만큼 동떨어진다. 억세고 오만하여 매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뿐이다."(장자, 「재유」 &「제물론」편)

 

장자가 <마음은 요동치다> 는 명제에 주목하여, 마음이 시시각으로 외물에 의해 흔들린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았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역시 문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바라본 이들도 있다. 마음이 어떤 곳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은 상태, ‘집착’에 대해,

 

②바람 때문에 사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를 두고 두 승려가 논쟁을 벌였다. 한 승려는 깃발이 펄럭인다고 하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펄럭인다고 했다. 둘의 논쟁이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자 육조 혜능이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다. 너희들의 마음이 펄럭이고 있을 뿐이다” (무문, 무문관)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외물인 바람과 깃발에 가 있었기 때문이고, 또 무엇을 주체로, 무엇을 대상으로 보고 있는가에 따라 같은 맥락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현상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는 조건이기에,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에 따라 고통의 이름을 적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적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가는 자가 아닌 것도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는 운동도 아니고 가는 자도 아닌 제3의 것이 가는 것인가?(나가르주나, 중론(中論))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고 했을 때, 착각은 부재와 연관되어 있거나 과잉의미부여의 심리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상황에서 기억, 부재, 그리고 고통이라는 치명적인 매커니즘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는 집착은 세상의 실재 즉 불변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고 말한다. 나가르주나가 경계했던 것은 언어에 의한 문법적인 착각 때문에 우리가 형이상학적 사유에 속고 있다는 것이다. 어법상 주어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마치 하나의 실체처럼 인식된다는 것이다

 

‘A는 간다’ 라는 명제는 반복 혹은 중복의 오류로 A는 본질적으로 가는 자이기 때문에 술어에 간다는 말은 동어반복이라고 본 것이다. 불변하는 실체를 자기동일성으로 환원할 때 우리는 거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기대나 희망은 없는 것은 실재화할 때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마음은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마음의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심신비이원론적 관점과 유사하다.

 

칸트는 마음이 이렇듯, 형이상학을 만들어 내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인식은 마음의 두 기본 원천에서 발생한다. 직관과 개념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지반이다(칸트, 순수이성비판)

 

칸트는 우리가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에서 직관이 생기고, 표상을 통해 인식하는 능력에서 개념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표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동적으로 어떤 개념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다른 개념이 만들어질 때까지 인식의 주인으로 우리를 끌어간다고 보고 있다.

 

우리에게 감각인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일에 골몰해서 산책을 한다면 우리는 주변의 사물에서 봄이 왔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봄이다, 라는 특별한 발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항상 대상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라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기억하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만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 ‘없다는 부재의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의식적 효과에 해당한다.(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베르그송은 과거의 기억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자체가 일종의 기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예가 기억상실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이란 과거의 대상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의식마저도 가능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기대 역시 기억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기대는 물론 미래의 사건이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지각된 광경은 순수존재를 갖지 않는다. 내가 보는 그대로 정확하게 지각되는 광경은 개인적인 나의 역사의 한 계기이다(메를로 뽕티, 지각의 현상학)

 

메를로 뽕티는 존재를 인식하는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에서 인식이 재구성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 존재자체는 헤겔의 이론처럼 “우리는 존재 속의 구멍이 아니라 존재의 주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육체가 가진 자연적 능력과 개인적인 나의 역사가 결합된 상태라고 보고 있다.

 

청년들의 낭만적인 열정과 활동이 현존하는 질서에 구멍을 내고 세계를 변혁하고 개혁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존재의 구멍이란 새로운 것을 도래시킬 수 있는 인간의 순수의식을 의미한다(헤겔, 미학강의)

 

메를로 뽕티는 ‘존재의 구멍’이라는 헤겔의 견해는 받아들인다. 선천적으로 인간은 그런 순진무구한 존재이나 세계는 인간이 지닌 그 순수의식을 변형시키는 “함몰이나 주름”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진정한 형이상학과 인간이 만든 형이상학이 갈리게 된다. 라이프니쯔와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어떤 방향성을 제시한다. “형이상학적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는 나가르주나의 견해는 ‘어떤 형이상학적 착각은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형이상학이 집착과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어떤' 형이상학이 고통과 집착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름처럼 접혀있다고 라이프니쯔와 들뢰즈는 바라본 것이다. 우리 마음은 주름이라는 것이다.

 

휘어지기 쉽고 탄력적인 하나의 물체는 또한 하나의 주름을 형성하는 결집된 부분들을 갖고, 그 결과 그 부분들은 부분의 부분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응집력을 줄곧 유지하는 더욱더 작은 주름으로 무한히 분할된다.(라이프니치, 단자론)

 

라이프니쯔는 ‘모나드에는 창이없다’는 단자론을 통해 완벽한 형이상학을 추구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라이프니쯔의 형이상학은 그 발판이 형이하학임을 간과한 것이라고 바라본다. 어떤 형이상학도 형이하학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랑도 이 땅의 아픔을 모르고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찌그러진 진주인 바로크에 비유한다. 바로크는 '물질의 겹주름'이며. 바로크는 어떤 한쪽에서 절대적인 본질을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적인 세계와 절대적인 세계는 연관된 어떤 연산 함수, 특질을 지시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행복론』에서 마음에 대해 평생 분석해봤자 마음이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또 마음이 무엇이라고 규정한다한들 그것이 무엇에 쓰일 것이냐?라고 묻는다. 차라리 무엇을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마음을 알 수 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과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반반인 경우 침울한 사람은 불행한 일이 닥치면 화를 내거나 몹시 괴로워하지만, 행복한 일을 맞아도 기뻐하지 않는다. 반면에 명랑한 사람은 불행한 일을 당하고도 화를 내거나 괴로워하지 않지만, 행복한 일을 맞으면 기뻐한다. 침울한 사람은 열 가지 계획 중에서 아홉 가지를 성공하더라도 이 아홉 가지에 대해 기뻐하지 않고 그 한 가지 일을 실패한 것에 화를 낸다.”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 이상의 부는 우리의 행복감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많은 재산을 유지하느라 쓸데없는 걱정을 하므로 우리의 행복감이 방해받는다. 인간을 이루는 것이 인간이 지니는 것보다 우리의 행복에 훨씬 기여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적 교양을 갖추기보다는 부를 얻기 위해 수천 배 더 노력한다.”

 

행복한지 판단하려면 그가 명랑한지 알아보아야 한다. 반면에 그가 명랑하다면 젊든 늙었든, 몸이 반듯하든 굽었든, 가난하든 부자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행복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명랑함이 우리를 찾아오면 언제라도 문을 활짝 열어 줘야 한다. 명랑함이 잘못된 때 찾아오는 법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면에서 만족할 이유가 있는지 먼저 알려고 하면서 명랑함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또한 진지한 숙고와 중대한 걱정이 명랑함으로 인해 방해받을까 봐 우려해서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진지한 숙고와 중대한 걱정으로 무엇을 개선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반면에 명랑함은 직접적인 이득이 된다. 명랑함만이 행복의 진짜 주화鑄貨와 같은 것이다.”

 

행복은 사상 그 자체에 담겨 있는 것이다. 먼 미래의 더없이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이 사상을 숙고하는 일에 몰두하며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사후 명성의 가치는 그 사상의 공적에 있다. 이러한 공적이 그 자신이 받는 보수인 셈이다. 그런데 명성을 얻게 해주는 작품이 또한 동시대인의 명성도 얻는지 여부는 우연한 상황에 좌우되므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독자적인 판단력이 없고, 특히 대단하고 까다로운 업적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으므로 언제나 남의 권위를 추종하며, 높은 명성은 그것을 얻은 100명 중 99명의 경우 단순히 신의성실에 기인한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에서 삶의 지혜라는 개념을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위한 기술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기술을 가르치는 지침이 행복론이라고 부른다. 행복한 생활에 집착하는 것은 행복한 생활 자체 때문이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만은 아니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행복한 생활이 지속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행복의 조건을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첫째, 인간을 이루는 것,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성, 예지가 포함된다. 둘째,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 즉 재산과 소유물을 의미한다. 셋째,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즉 타인의 견해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명예, 지위, 명성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훈화와 격언”라는 별도의 장에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태도,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그 운명 등에 대해서 설명한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천민자본주의의 도래를 마치 예견한 것처럼 오직 현금주의에 빠진 인간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지한 자가 부유한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무지는 인간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가난과 궁핍에 얽매인다. 그의 경우에는 성과가 지식을 대신하므로 가난한 자는 성과를 내겠다는 생각에 몰두한다. 반면 무지한 부자는 단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만 살아가며, 그런 자는 짐승과 같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매일같이 목격할 수 있다.”

 

세계를 누구보다도 냉철하게 바라보았던 쇼펜하우어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파니샤드』를 읽었으나, 침대의 베개 밑에는 장전한 권총을 두고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그는 자신의 양면적 성격을 널리 퍼트리고 다녔다. 문자화된 자신의 글을 보고 누군가의 우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찍부터 쇼펜하우어 철학을 정확히 이해한 아인슈타인은 그의 책에 영감을 얻어 상대성 이론을 구상했다고 한다. 또한 쇼펜하우어의 정신과 유사한 점이 많은 푸시킨을 계승한 톨스토이의 서재에는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걸려 있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 예찬론자였던 니체는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았았다고 하는 그 ‘누구에게’는 쇼펜하우어 자신이었다. 세상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또한 '나'라는 늪에 빠져 허무주의로 삶을 귀결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쇼펜하우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싶었던 것이다.

 

 

 

 

 

 

 

3.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루카 6,17.20-26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행복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실은 마음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행복은 가언적인가 정언적인가?라는 질문 역시 마음은 어떤 것을 행복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과 닿아 있다. 또한 행복을 느끼는가, 아닌가 어떤 행복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는 신을 믿고 있는가? 세상을 믿고 있는가라는 갈림길에 서 있는 마음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공부, 마음닦기, 마음 길들이기, 등 마음이 인간의 행불행을 좌우한다는 것을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는 다른 용어로 끊임없이 추구했다.

 

루카 6,17.20-26에 나오는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던 시기의 표현방식으로 루카 6,20-21에 나오는 3개의 행복선언만 ‘신론’에 해당하고 6, 22-26절에 나오는 산문적 행복론과 불행론은 신론을 경험한 이들의 덧붙인 ‘기독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수는 결코 제자들에게 불행론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성서연구자들의 견해다.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와 비교하여 평지설교에 해당하는 루카 6,17.20-26에서 보여주는 행복론과 불행론은 대칭구조의 강조어법을 통해 행복에 대한 두 갈래 길을 제시한다. 이는 무조건적인 행복인가? 어떤 조건부적인 것이 충족되었을 때의 만족감을 행복이라고 바라볼 것인가와 연결해서 인류 역사의 진행 과정속에서 펼쳐진 행복론의 두 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행복에도 다양성이 적용되어 두 갈래, 세 갈래 천 갈래의 길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이 질문은 사유는 리좀적이지만 행복도 리좀적인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지연시킬 수 있는가? 당신의 자녀들이 완전히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한 것이 그분의 뜻인가? 아님 사후에 주어지는 천국이라는 보상인가? 이는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나 행복은 시간 안에서인가? 시간 밖에서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루카 6,17.20-26에서 ‘신론’에 해당하는 행복론을 먼저 따라가 보기로 한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간단명료하다.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상황은 너무나 처참하여 죽기 일보직전인 사람에게 행복하고 싶으면 행복하여라,라고 전한 것과 비슷하다. 모세가 당신은 누구라고 전할까요? 라는 물음에 ‘나는 나다’ 라고 응답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이라고 대상화된 이들은 1차적으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는 ‘제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요구된 행복은 무조건적인 행복론, 즉 절대적인 행복론에 해당한다. 현실적으로 실존적으로 결핍된 그 무엇이 채워져야지만 비로소 행복한 상대적인 행복론이 아니라는데 초점이 놓여 있다. 그렇다면 이 행복은 시간 안에서의 행복을 의미한다. 죽어서 천국이라는 보상으로 주어지는 시간 밖에서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한 행복이란 시간 안에서의 행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행한 상태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행복하여라, 라고 할 수 있는 이 행복론의 실체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이는 인간에 대한 장엄한 선언에 해당한다. 그래서 간단명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지난주 묵상 주제였던 루카복음 5장8-10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 동시에 경험한 빛의 체험과 같은 맥락의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육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담화와 기적 사화에서 이 간단명료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분의 빛을 체험하는 것은 어둠(죄)을 분석한 이후에 빛을 체험할 수 없다는 빛의 포괄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있는’ 그 상태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그 결핍의 원인과 결과 모두에서 무조건 자유로워지라(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언명에 해당한다.

 

네가 나를 안다면, 너는 너를 알 수 있고, 네가 너를 안다면 너는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언명에 해당한다. 이는 지난주 강론에서 인용한 '예수님은 절망을 모르는 현실'과 같은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마음은 선택과 유보, 즉 자유의지의 실현태임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우리의 행복 뿐 아니라 성령의 9가지 열매 모두들 우리가 선택하고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해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그분만큼 장엄한 존재라는 점이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왜소한 존재로 전락시킬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을 위대하고 장엄한 존재로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실재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선언에 해당한다. 그때 가난함, 굶주림, 울고 있음은 우리의 장엄한 실재에 한 터럭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기도 한다.

 

메시지와 메신저는 하나이다”(헬렌 슈크만)

 

네가 내 말을 전하면서 '사랑'이라는 메시지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 6,20-21에 나오는 행복론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담은 예수님이 규정하는 인간론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루카 복음사가가 덧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기독론(22절-26절)의 행복론과 불행론이 왜 대칭구조를 이루면서 삽입되었는지 따라가 보기로 한다.

 

이는 인류의 행복을 저해하는 즉 생존의 위기, 인권의 위기를 조장한 이들에게 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에 해당한다.

 

예컨대, 장 지글러의 유엔보고에서 『인간의 길을 가다』, 『유럽의 난민 이야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 『탐욕의 시대』, 『빼앗긴 대지의 꿈』,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유엔을 말하다』 등에서 드러난 인류 역사의 어둠의 실체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불행의 대상으로 지목된,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웃는 사람들이라 지칭된 이들이 느끼는 그 포만감의 실체는 소유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즉 유물론적인 실체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적으로 치명적인 생존 위기에 몰린 이들은 신론에서 말하는 행복의 상황으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고 있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소유의 구조를 점유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 세계의 유한한 자원과 물질구조를 독점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있는 간접살인을 행하고 있다는 경고 메시지이다.

 

이는 성적인 문란의 도시 티로와 시돈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던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나움에 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던 그 맥락과 연결하여 바라 볼 필요가 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물질에 대한 독점은 누군가의 생존과 연결되어 두 가지의 치명적인 가해의 요인이 된다. 첫째는 누군가의 생존을 박탈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 세계를 이분법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집단무의식을 전염시킨다는 점이다. 후자가 전자를 낳는 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올린 글 가운데 부의 재배치에 대해, 물질은 여러 축복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럼에도 물질적은 부에 인간의 포만감이 집중되어 물질과 정신을 이분하여 바라보는 그 저변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인류 역사가 소유의 역사라는 점이 그를 뒷받침한다. 소유의 역사는 늘 정착과 유목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의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 소유의 역사는 곧 두려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의 원천은 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생존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물질을 공존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궁극의 목표(우상숭배)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렇듯, 루카 6,17.20-26에서 ‘행복하여라’ ‘불행하여라’는 대립적 전언은 결국 ‘마음의 법칙’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하여라’가 ‘존재하기’라면 ‘불행하여라’는 ‘소유하기’와 연결되어 있는 삶의 패턴이라 할 수 있다. 이 존재하기와 소유하기의 패턴을 만드는 것이 ‘마음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불로그에 반복해서 올린 포스팅 가운데 영성가들이 공통으로 제언하는 삶의 패턴이 있었다.

 

존재하기(Being)--->행하기(Doing)--->소유하기(Having)

 

예수님이 권하는 ‘행복론’의 본질은 ‘존재하기’라면, 루카복음사가가 덧붙인 ‘불행론’은 ‘소유하기’라고 할 수 있다. 존재하기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행복이기에 영원하다면, 소유하기는 몸의 눈으로 보는 행복이기에 유한하다. 전자는 모든 이들을 공존의 퍼즐로 연결할 수 있지만, 후자는 분리에 바탕을 둔 소유욕의 포만감을 추구한다. 전자는 신이 준 일치를 행복이라고 바라본다면 후자는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분리를 쾌락으로 추구한다.

 

마음은 존재하기, 행하기, 소유하기를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본거지다. 마음은 창조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모든 창조의 근간에는 이 마음의 에너지가 작동되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할 때의 자기 몸의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왜 사람은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없을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이 나중에 그의 연구의 바탕이 되고 과학의 역사를 종합해 E=mc2을 만들기에 이른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그 혜택을 지금 누리고 있는 중이다.

 

루카 6,17.20-26의 행복론과 불행론은 모두 마음의 법칙이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들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마음의 법칙을 사용하라. 그런 맥락에서 행복은 지난주 ‘사람 낚는 어부’와 연결하여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는 것과 자신을 사람 낚는 어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마음의 법칙이 작용된 결과이듯, 그분이 행복하여라! 라는 전언 속에는 행복할 수 있는 선택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알려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바로 맑은 마음이다.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한 맑은 마음이다.”(에크하르트 똘레, 침묵과 고요) 그러니 행복하라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 해 본다.

 

[마음의 법칙; 행복의 자기결정권, 그 선택과 유예]

 

우리 각자의 삶을 성찰해 보면 상황이 나에게 유리해서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상황이 나에게 불리함에도 깊은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모두 내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은 현실을 훌쩍 넘을 수 있게 그렇게 장엄할 수도 있고, 한없이 우리 자신을 왜소한 존재로 밀고갈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 세상에 우리가 한 생명으로 올 때 행복의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왔음을 알고 사용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결정권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 혹은 마음에 대해 알기 전에 세상이 주입한 생존 법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외물에 휩쓸리고 외부로 뛰쳐나가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은 미래의 그 어떤 조건부적인 충족이유율로 남겨둔다.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기쁨을 유예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왜소(기죽어)하다고 폄하하거나 절망(허장성세)에 빠져 있다면 결코 행복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부모는 자녀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 외에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아이들을 기를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아이들이 행복해 하지 않거나 기죽어 있을 때였다.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은 예외일까? 아니다. 아버지라 불러놓고 고아처럼 살지 말자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감사이자 봉헌이다.

 

간단명료하게 행복론을 전하는 '그분의 육성'을 '몸과마음과영혼'을 다하여 다시 들어보자. 그리고 행복하자!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