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쓴 그들의 창세기
-이 세상에 결정적인 순간을 갖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카르디날 드 레츠 추기경)
[연 중 제 5 주 일 (다 해)2022. 2. 6. Luc. 5,1-11]
1. 위선환, 「새떼를 베끼다」
시를 읽다보면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들이 있다. 위선환의 「새떼를 베끼다」가 그런 시에 해당한다.
읽어본다.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새떼 하나는 날아오르고 새떼 하나는 날아간다고, 거기가 공중이다, 라고 쓴다//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들, 이마들,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맞부딪친 새들끼리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다본다고 쓴다//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 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 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空中이다, 라고 쓴다
위선환의 「새떼를 베끼다」는 날아가고 날아오르는 새떼가 공중에서 맞부딪히면서 여전히 상처받거나 추락하지 않는 비행(飛行)의 비의(秘義)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라고 쓴다>로 반복되고 있다.
수를 셀 수 없는 새떼들이 공중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부딪히면서, 어떻게 서로를 관통할 수 있는지, 이 시는 새들을 통해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 대한 보고서를 우리에게 전한다.
부리, 이마, 가슴뼈, 죽지를 사정없이 맞부닥뜨리면서 그 상처를 ‘관통(貫通)’하는 법!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로 시작하여 ‘부딪힌다고 쓴다- 관통한다고 쓴다-서로로 돌아다본다고 쓴다-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빈 몸들이 뚫렸다고’ 쓴다는 그러므로 空中이다, 라고 쓴다로 모아진다.
"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들, 이마들,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다본다고 쓴다”
부딪혔으면서 서로를 관통할 수 있는, 날아가면서 서로를 돌아다 볼 수 있는 이유는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자기를 가볍게 비워야지만 날 수 있는 그 곳이 “그러므로 空中이다"
새들의 생존법과 공중의 생존법은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불가피하게 충돌하면서 서로를 관통하는 일이라고, 사랑 역시 서로의 생을 맞부닥뜨리면서, 사정없이 심장을 관통하면서, 그럼에도 상처받지 않고, 죽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라고 시인 위선환은 전한다.
그것이 위선환 시인이 어느 날 문득 쳐다본 하늘에서 날아가는 새떼를 본 ‘결정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 세상에 결정적인 순간을 갖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카르디날 드 레츠 추기경)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사진의 철학을 담은 ‘결정적 순간’으로 집약되는 사진부터 보기로 한다.
앙리까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사르트르
앙리까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알베르 카뮈
노년의 앙리까르티에브레송과 라이카M3 카메라와 결정적순간
앙리까르티에브레송, 그는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영혼의 시선』)라는 말을 우리에게 남기기도 했다.
①나에게 카메라는 스케치북이자, 직관과 자생의 도구이며, 시각의 견지에서 묻고 동시에 결정하는 스승이다.
②나에게 사진은 순간과 순간의 영원성을 포착하는 늘 세심한 시선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런 충동이다.
③나는 무엇보다 내면의 침묵을 추구한다. 나는 표정이 아니라 개성을 번역하려고 노력한다.
④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머리와 눈, 그리고 가슴을 같은 조준선에 놓는 것이다
앙리까르티에브레송, 자신의 수법을 "결정적 순간"이라고 불러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사진작가의 영향력은 이른바 사진 이외의 다른 수단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하며 전통적이며, 금욕적인 사진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이다. 그가 사진의 사제로 불리는 이유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맑고, 절도 있고, 따뜻하고, 그러나 짜릿하게 포착하는 시각에 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흔히 관객이 기대하는, 깊은 여운을 남기는 그러나 덧없는 인상에서 비롯되는 볼거리와, 그림과도 같이 균형과 조화로 넘치는 구경거리가 이렇다 할 오차 없이 시적으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긍정적이며 따뜻한 시선인 것이다. 그가 들여다본 인간과 세계는 언제나 찬란하게 존재하는데, 고통에 찌들린 수난의 시기에도 위축되거나 위엄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연민과 애정이야말로 그의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는 요인이다. 사진보다는 데생에 열중하면서 말년을 정리하고 있지만, 난해함보다는 명쾌함을, 괴기성보다는 우아함을, 편향보다는 균형을 추구했던 그의 사진적 시각을 그의 모국에서는 "프랑스적 취미"를 기막히게 함축한 작가로 간주한다. 그는 어떤 점에서 지난 세기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보여주었던 중산층의 삶과 멋에 대한 예찬을 재빠르게 전세계에 보급한 전도사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수출했고,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 열매를 내다 팔았다면,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 시민적 꿈을 전염시켰다.
사진은 왜 찍는가. 추억의 재현을 위해서일까? 우리의 개인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에는 주제가 있다. 우리는 주제를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명확히 알아야 하고, 또 우리가 느끼는 바에 대해 정직해야 된다.
사진작가의 눈은 끊임없이 평가를 내린다. 사진작가는 단지 그의 머리를 몇 분의 일 밀리 정도 옮겨 보는 것을 통해 선의 일치를 가져올 수 있다. 또 무릎을 살짝 굽힘으로써 시야를 수정할 수도 있다. 카메라를 대상에 더 가까이, 혹은 더 멀리 둠으로써 그는 어느 세부를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대상이 예속될 수도 있고, 또는 사진작가가 대상의 지배를 받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진작가는 대상에 반응하는 속도로 셔터를 누르는 데 소요되는, 거의 그 만큼의 시간 동안에 한 장의 사진을 구성한다.
사진 구성은 분명 우리의 끊임없는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순간에는 그것은 단지 우리의 직관에서만 생겨나올 수 있다. 그 까닭은 우리로서는 일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려 애쓰는데, 연관되어 있는 모든 상호관계는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분할을 적용해 보자면, 사진작가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콤파스란 자신의 두 눈뿐이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적절한 각도는 두 눈이 구성하는 각도일 뿐이지 어떤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인위적인 각도가 아니다. 수많은 풍경 중에서 사람의 두 눈에 포착된 그것, 그것만이 결정적 순간에 해당한다.

3.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복음 5,1-11/ 빛이 있어라(창세기1:3)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가 그분이 ‘빛’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않고도 그분을 빛이라고 전할 수 있을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라고 전하는 루카 5,1-11에서 ‘버리고-따랐다’를 통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빛’을 체험할 수 있는가를 바라보려 한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빛'을 체험하는 것이자, 우리의 창세기를 다시 쓰는 일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로운 무엇을 추구할 때, 누구나 이전의 삶과 결별의식을 치르게 된다. 따라야 하는 것이 압도적일 때 이전에 결별의식은 사실 타자의 눈에 큰 포기나 무엇을 버린 것으로 보이겠지만 본인에게는 버려야 하는 실체보다 따라야하는 실체가 ‘실재’이기 때문에 ‘버린 것’이 보이지도 않는다. 버려야 하는 것이 따라야하는 것보다 크다면 절대 버릴 수 없다. 버림과 따름은 같은 무게일 수 없다. 버림과 따름이 갈등상황이라 한다면 사실 버려야 하는 것이 본인에게 더 크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루카 5,1-11에서 ‘그들’이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버, 요한-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 그분을 따르게 되는 과정을 보면 버림과 따름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네 복음서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이전의 삶과 결별했다는 것은 모두 공통의 상황에 해당한다.
‘버렸다-따랐다’는 두 동사가 의미하는 바, 그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강력한 힘으로 전해지는 그 ‘빛’의 체험은 무엇일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것은, 특수 사도직을 받은 이들에 국한된 특별한 초대,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일원을 늘리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빛’의 체험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일상의 한가운데서 그 빛을 체험하게 되었는지?
베드로 일행이 어떻게 그 빛을 체험하게 되었는지를 통해 그들인 우리도 우리의 순례가 어떤 기쁨, 어떤 평화, 어떤 사랑, 어떤 기적 속에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지를 명백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빛임을 증명하는 이가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은 우리가 빛임을 증명하는 이들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루카 5,1-11은 베드로가 빛을 체험하는 것을 세 단계로 제시한다. 호칭의 변화 속에서 베드로가 그 빛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따라가 본다.
1단계 Ⓐ,Ⓑ(스승님)--->2단계Ⓒ,Ⓓ(주님)--->3단계Ⓔ(예수님)
Ⓐ, Ⓑ 단계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빛을 체험하는 도입부에 해당한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과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 일행은 무관한 듯, 무심한 듯, 병치되어 있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필 베드로의 배 위로 오르신다. 배를 뭍에서 조금 나아달라는 부탁을 베드로는 순순히 따르고 있다. 그때까지 베드로는 그분의 말씀에 깊이 주목하지 않은 상태다. 군중에게 말씀을 마친 그분이 먼저 베드로에게 다가간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에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는 우리가 빛을 만나는 곳이 어디인가를 알려준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때. ‘깊은 데’는 일상의 관습이나 피상성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집중하고 있을 때, 그 삶의 현장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거룩한 성전이기도 하다. 우리가 빛을 체험하기 위해 어떤 거룩한 다른 곳을 찾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에서 그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무겁고 목마르고 배고프고 핍진했는지 바라볼 수 있을 때, 내 방식으로 나를 더 이상 풍요롭게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과 예수님의 말씀을 대비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자세가 서서히 주어진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삶의 경험들이 오리혀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베드로는 그럼에도 듣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빛을 체험하게 된다. 수많은 경험과 경험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빛을 체험하는 일이다.
Ⓒ, Ⓓ는 베드로가 빛의 체험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의 실재를 알게 되는지, 또한 그 실재의 인식과정이 타자(안드레아, 야고버, 요한)안에서 어떻게 공유되고 확장되는지 보여준다. Ⓒ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면 Ⓓ는 위로부터의 영성이다. Ⓒ에서 Ⓓ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영적 끌어당김을 체험해야 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분이 우리 삶에 베푸는 기적은 풍요로움 그 자체이다. 베드로는 그 기적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고도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강력한 두려움을 체험한다. 베드로의 두려움은 빛을 체험한 이들이 겪게되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실재 앞에서 영적 경계 앞에서 ‘경외심’의 체험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베드로의 고백을 '겸손'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기도 하는데, 빛(신)의 체험은 인간의 행위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는 그 고백 이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빛'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결정적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것은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을 베드로가 경험한 것이다('마음에 법칙'에 대해선 연중6주 [마음의 법칙;행복의 자기결정권,선택과 유보]의 묵상에서 부연) 인간은 자신의 지난 행위로 자신을 평가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존재자체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는 것은 우리가 가장 배우기 어려운, 아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러나 반드시 배워야할 그분의 사랑법이다. 빛의 세례를 받는 것은 실재의 자기 모습,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이유까지 알게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빛'의 체험이란 자기이해, 자신에 대한 대 긍정, 신의 창조성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베드로에게만 '빛'이 아니라, 저 문장을 묵상하는 모든 이들에게 세세대대 해방의 '빛'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를 증명한다. 여기서 “빛이 있어라”(창세기1:3)와 같은 맥락으로 베드로는 자신의 창세기를 다시 쓰게되는 결정적 순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을 베드로와 그들 일행이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와 Ⓓ 사이에 베드로의 일행이 있다. 베드로의 개별적 체험이 동료들과의 공유의 체험이 되는 과정이다. 이는 마치 마리아가 수태고지 이후에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한 체험이자, 바오로의 다마스커스 체험 이후에 아나니아를 만나 바오로가 누구인지 알게되는 추인과정을 공유하게 되는 맥락과 비슷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 빛의 체험이자, 빛을 체험한 이들이 서로가 같은 빛을 체험했음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우리를 이 세상에 혼자 파견한 것이 아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
베드로와 그들의 빛의 체험을 통해 어둠을 분석하면서 빛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이유를 보게된다. 어둠을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문제삼는 것이다. 많은 영성가들이 죄가 없다고 전하는 이유는 인간의 행위나 허물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을 보는 그분의 사랑(빛) 앞에서 인간의 행위나 허물이란 우주 앞에서 티끌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표현에 해당한다.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우리의 생의 무게가, 즉 우리가 지고가는 십자가로 인해 상처와 고통과 죄도 분명 만나겠지만 상처와 고통과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이유이다.
오 신부님은 2020년 부활3주일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수님을 좌절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표현할 때, 그 ‘좌절을 모르는 현실!’, 그것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하느님에게 온 창조의 원본이며 그 근원이 '사랑'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모든 이들에게 '좌절을 모르는 현실'을 선물로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좌절이나 절망는 신을 부정하거나 모독하는 허장성세나 자기공격이라고 영성가들이 말하는 이유다.
같은 맥락에서 『기적수업-텍스트』에서 나의 실재가 어둠이 아니라 나의 실재가 바로 빛이라는 것을 헬렌 슈크만은 이렇게 전한다.
“나(어둠)를 망각하고, 나(빛)를 기억하라”(헬렌 슈크만)
그분은 빛이다. 그분은 항상 빛의 길을 가신다. 따라서, ‘너의 어둠을 확정하고 그럼에도 너는 빛이다’가 아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 어둠을 관통하라, 어둠을 간과하라, 즉 베드로가 알고 있는 베드로보다 더 큰 베드로를 이미 알고 계신 분, 베드로의 실재를 아시는 분, 그분이 빛이다. 우리의 실재를 알게되는 그 결정적 순간!
많은 영성가들은 이것은 ‘간과(Overlook)’라고 말한다. 새들이 공중에서 부딪히면서도 서로를 관통하며 날아가듯, 어둠을 ‘간과’하라고 말한다. ‘용서는 간과(看過)’라고 말하기도 한다. 빛의 진로를 어떤 어둠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에게 베드로라는 인류는 오직 사랑 그 자체이고 창조 때의 아름다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그 베드로일 뿐이다. 베드로는 이 풍요로운 기적을 동료들과 당연히 나누게 되고 그들도 베드로와 같은 ‘경외심’이라는 기적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들도 그들이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된다. 빛의 체험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된다고 할 수 있다.
Ⓔ는 빛을 체험한 이가 ‘이 세상에서 형제를 받아들이되 다른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말라’(헬렌 슈크만)는 제언은 빛의 확장에 관한 제언이자, 자신이 빛임을 타자를 통해 재인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여기서 ‘모든 것’을 ‘빛’과 대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안 될듯하다. 빛을 선택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동급의 선택항목이 될 수 없다는 맥락에서 ‘버리고’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버리고와 따랐다는 것은 선후맥락이 아니라 따랐기에 버린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지난 시간을 그분이 ‘간과’하시듯, 우리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빛’ 앞에서 ‘간과’하게 된다. 그 맥락에서의 ‘버리고’를 바라보아야 한다. 돌아온 탕자에게 옷과 반지와 신을 신켜주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는 빛을 체험한 이들은 빛 이외는 애써 내려놓고 외면하지 않아도 저절로 빛을 따라가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타자의 시선에서 ‘버리고’가 있을 뿐, 빛을 체험한 이들은 오직 빛을 ‘따라갔다’ 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의 체험이란 베드로가 베드로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베드로가 베드로로 태어날 수 있을 때, 베드로는 그들도 그들로 태어나게 할 수 있었다. 기적은 공유된다. 그것이 사람을 낚는 일일 것이다. 빛만이 사람을 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이제부터 너는 빛이다”라는 표현이자 "이제부터 너는 나의 현현이다" 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님(일반적 호칭)- 주님(보편적호칭)- 예수님(임마누엘을 체험한 이들의 구체적 호칭)’의 호칭 변화는 그들이 빛을 체험하는 과정과 상응한다.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는 그 빛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글을 마무리 해 본다.
[결정적 순간, 겐네사렛 호숫가에 쓴 그들의 창세기]
예수님을 떠올릴 때, 그분은 언제나 33살 청춘이다. 나는 언제나 청춘에만 끌린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버, 요한을 떠올릴 때도 그들은 언제나 청춘이다. 그들은 언제나 과감하게 다시 선택했던 이들이다. 실재의 실재를 선택하는 것이 청춘이다.
우리 일생에는 실재의 실재를 선택하는 그런 결정적 순간들이 있다. 빛의 체험이다. 패러다임이 확 바뀌는 순간이다.
그들은 단지 그들만의 그들은 아니다. 그들이 빛임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이듯. 오늘 우리가 빛임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가 만나는 이들이다. 우리가 빛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매 순간 최고의 실재를 선택하여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빛 속에 산다. 인간의 빛, 자연의 빛, 인식의 빛, 형이상학의 빛...빛을 보려는 우리의 응시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과거의 나다. 오늘의 나만이 이 빛을 온전히 볼 수 있게 한다. 하여, 나를 망각하고, 나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빛의 순례자인 우리가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만난 빛의 체험, '결적정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결정적인 순간을 갖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카르디날 드 레츠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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