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천인지애(天人至愛), 앎-모름의 매트릭스(matrix)를 넘어

나뭇잎숨결 2022. 2. 4. 12:28

 

 

 

 

천인지애(天人至愛), -모름의 매트릭스(matrix)를 넘어

- 내 존재의 의미는 삶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칼 구스타브 융)

 

 

 

[연 중 제 4 주 일 (다 해)2022. 1. 30. Luc. 4,21-30 ]    

 

 

 

1. 이상(李箱)의 「꽃나무」 & 복효근의 「따뜻한 외면」그리고 릴케

 

이상(李箱)의 「꽃나무」를 읽어본다.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없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 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 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1933)

 

복효근의 「따뜻한 외면」을 읽어본다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라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2013)

 

이상의 「꽃나무」와 복효근의 「따뜻한 외면」은 대상과의 거리, 간격, 선택적 ‘외면’에 관한 시이다. 대상과의 거리, 간격, 외면, 그 바탕에는 어떤 ‘앎’이 내재되어 있다.

 

이상의 「꽃나무」는 열심히 꽃을 피우는 한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나’가 있다.. 그런데 그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 에 이르러, ‘나’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하는 꽃나무로부터 ‘막’ 달아나야만 하는 사랑법을 전한다.

 

복효근의 「따뜻한 외면」은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천적관계에 있는 나비를 모른 척 외면하는 새의 시선을 제3의 눈이 바라보고 있다. 생태계의 생존질서 때문에 나비를 외면해야 하는 상황을 ‘따뜻한 외면’이라고 본 공생의 사랑법이다.

 

「꽃나무」처럼 상대로부터 기어코 달아나야지만 살 수 있는 생명도 있고, 「따뜻한 외면」처럼 상대를 못 본 척 외면해야지만 생존이 가능한 생명도 있다.

 

이상의 「꽃나무」와 복효근의 「따뜻한 외면」은 거리두기와 외면이 생존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실존의 시에 해당한다. 이 바탕에는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생존인가를 ‘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릴케는 다른 차원에서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고 다른 사랑법을 전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야 하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 완성될 수 있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일과가 되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릴케는 이상과 복효근의 시에서 보여주는 실존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거리두기, 즉 ‘혼자’가 되었을 때에만, 사랑의 완성에 이를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상, 복효근, 릴케는 그들의 개별적인 경험에서 도출한 ‘사랑법’을 말한 셈이다. 달아나는 것도 사랑이고, 외면하는 것도 사랑이고, 혼자 완성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이 사랑법이 전부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문학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어떤 실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지, 진리의 일반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네가 어떻게 읽었는지 말해준다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하이데거)

 

 

‘매트릭스’의 원래 뜻은 ‘자궁, 모체 행렬’이다. 집단무의식이 인간 생각의 매트릭스라는 것은 오래된 시선이다. 문제는 집단무의식이 매트릭스인줄 알면서, 매트릭스를 견고케하는 것을 인간이 양육하고 재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인 앎이냐? 집단 무의식이냐?를 가치측면에서 그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집단의 앎, 집단무의식이 가치와 무관하게 생존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평생 밝혀내려고 했던 심리학자들이 있다.

 

군중심리에 편승하는 것이 최대다수의 최대생존에 최적화된, 원시유목집단의 생존전략으로 바라본 프로이트가 있다면,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이 대립구도(enantiodromia)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인간은 움직인다는 것을 전하는 칼 융이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심리학에서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한 개인이 특정한 조건에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심리학은 설명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 특정한 조건이란 심리적 군중의 성질을 띤 인간무리에 개인이 들어간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군중이란 무엇인가? 군중은 개인의 정신생활에 그토록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어떻게 얻는가? 그리고 군중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심리 변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이론적인 집단심리학의 과제다.

 

정신분석이 증명한 바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 오래 지속되는 친밀한 감정 관계-결혼, 우정,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거의 모두 적대적인 거부 감정의 앙금을 지니고 있지만, 이것은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인지되지 않을 뿐이다. 동료 간에 다툴 때나 부하가 상사에 대해서 불평할 때,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이 좀 더 큰 단위로 모일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두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질 때마다 각 집안은 상대방 집안보다 자기네가 더 낫거나 신분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이웃한 두 도시는 서로 질투하는 경쟁 상대가 된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다른 마을을 경멸하며 깔본다. 바로 인접한 두 종족은 서로 멀리한다.

 

 

집단이 우리에게는 원시 유목집단의 재생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모든 개인의 마음 속에 원시인이 잠재적으로 보존된 것처럼, 그 어떤 인간 무리에서도 원시 유목집단이 다시 생겨날 수 있다. 집단 형성이 사람들을 통상적으로 지배하는 한, 우리는 거기서 원시 유목집단의 존속을 확인한다. 우리는 집단심리가 가장 오래된 인간 심리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집단이 형성되면 이 모든 불관용이 일시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집단 안에서는 사라진다. 집단 형성이 지속되거나 확대되는 한에서는, 개인들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참아내고, 자신을 그와 같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어떤 반감도 품지 않는다. 우리의 이론적인 견해에 따르면, 이런 나르시시즘의 제한은 오직 한 가지 요인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리비도 유대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오직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즉 대상에 대한 사랑뿐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동일시에서 자아가 어떤 때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모방하고, 또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동일시가 부분적이며 지극히 제한된 것이어서 대상으로 삼은 인물의 한 가지 특징만 빌려 온다는 것도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는 개인심리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토대로 집단심리를 설명하면서 집단 심리학의 세 가지 과제인 ‘군중이란 무엇인가? 군중은 개인의 정신생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어떻게 얻는가? 그리고 군중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심리 변화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답한다.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연구는 군중의 일원인 ‘나’와 내가 속한 군중을 이해함으로써 개인과 군중, 사회와 국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아울러 인터넷상의 마녀사냥, 집단 따돌림, 촛불시위, 일본의 군국주의적 행태들 등, 오늘날의 사회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에 여러 가지 유용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프로이트는 개인심리학이 개인을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인간무리에 개인이 들어갔을 때,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노출되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프로이트의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은 르 봉의 『군중심리』, 타르드의 『여론과 군중』,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과 더불어 군중연구 또는 군중(집단)심리학 분야에서 4대 고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4대 고전 중에서 프로이트의 책은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군중보다는 지도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할 정도로 중요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 것이 집단심리가 포기되지 않는 이유라고 본 것이다. 이로 인해 프로이트는 군중심리와 집단(조직)역학에 대한 많은 연구를 자극하였으며, 정신분석의 이론화 작업에서 새로운 방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 저작에서 집단 정체성의 뿌리, 패닉과 광신의 전염, 종교 및 정치 지도자를 향한 개인의 복종이 집단 무의식으로 바탕이라고 보았다. 집단무의식이란 정신의 바이러스로 이 생존전략은 다수의 민중을 기만하는 지도자의 권력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칼 구스타브 융은 『분석심리학논문집』에서

 

 

내 존재의 의미는 삶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나 자신은 세상에 보내진 질문이며, 나는 내 대답을 세상에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대답에 의존하려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를 극복하려 노력하고 그러한 어려움을 겪을 때에 비로소 달성하게되는 초인적 삶의 과업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장 거대한 것과 가장 조그마한 것,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이 있다. 우리는 그 나머지 또한 논의하는 것 없이 이러한 것의 한쪽 편만을 논의할 순 없다. 이런 모순에 언어는 충분하지 않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겠지만, 단어는 전체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극성이 정신의 역동성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은 그 대립물의 전체적인 문제를 종교적, 철학적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를 갖는 심리학적인 논의로 끌어들인다.

 

집단적 무의식은 모든 시간의 우주에 대한 모든 경험의 축적물이며, 또한 말할 것 도 없이 여러 세대 동안 형성되어 온 우주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 이미지가 이 이미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소위 우성인자(dominants)입니다. 이 우성인자들은 지배 세력, 신들입니다. 즉 뇌가 세속적인 과정의 결과로 받은 이미지의 문제에 있어서 평균적인 규칙성으로부터의 법률과 원칙을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표현입니다.

 

융은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대립구도(enantiodromia)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일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융은 인간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이 심리적 사회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결과로 바라보고 있다. 융의 묘비명에는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고 적혀 있다. 그는 신에 대해서 그의 생각을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에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인간의 영혼(정신)이란 각각 대극, 대립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요소들은 대립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는 것으로 육체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의 영혼이라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게 위해 융은 집단무의식, 콤플렉스, 그림자, 페르소나, 아니마와 아니무스 등의 개념을 도입한다. 예컨대 모든 환자가 그 나름의 법칙을 갖고 있다는 통찰을 입증하기 위해, 융 자신이 치료경험이나 그 당시 심리학에서 무관한 신화, 종교, 연금술, 신비주의 등 여러 분야를 끌고 와서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자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비판자들에게 이런 말을 되돌려 줬다.

 

내 존재의 의미는 삶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나 자신은 세상에 보내진 질문이며, 나는 내 대답을 세상에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대답에 의존하려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를 극복하려 노력하고 그러한 어려움을 겪을 때에 비로소 달성하게되는 초인적 삶의 과업일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4,21-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라고 전하는 루카4,21-30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21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4,21-30에서 회당에 모여 있던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의 ‘앎과 모름’,  그 본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니체)]에서 부재와 현존은 언제나 /모름이라는 이중이 문이 있고. /모름은 동시에 열리며, 이 이중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고 우리의 운명애가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한 바 있다. 이 글을 그 연장선에서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희년의 메시지는 환호하며 받아들였지만, 희년을 선포하는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의 이중적인 사고체계의 바탕은 무엇이며, 그들의 이중성은 어떤 매트릭스에 갇혀있는 자의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Q1 예수님의 고향사람들, 회당에 모여있던 그들은 누구인가?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모든 성서연구자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비판하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 - 편견, 선입견, 아집, 배척의 대명사로 거론되는 그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그들에게 그런 사고체계를 주입시킨 대타자는 누구인가?

 

그들 역시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누구도 제대로 읽어주지 않았던, 어쩌면 그들 자신조차도 몰랐던 그들의 내면이 있지 않았을까? 그 내면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묻어버리고 집단이 전승하는 생각을 그들 자신의 생각이라고 살았던, 그들- 우리는 그들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존재인가?

 

우리도 그들처럼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메신저를 문제 삼은 적은 없었을까? 우리도 그분의 모습으로 온 누군가를 벼랑까지 끌고 간 적은 없었을까? 우리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그분을 언제나 명명백백하게 알아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의 삶을 성찰하다보면 비판의 돌멩이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이중적으로 보이는 그들 내면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그들이 사랑 앞에서 어떤 두려움과 망설임을 갖고 있었는지?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 앞에서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그런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에 연민하게 된다.

 

성서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언급이 365번 이상 거론되는 이유에 그들도 속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을 통해서 사랑 앞에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류,  어떤 매트릭스에 갇혀있는 인류의 초상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갖고 있던 매트릭스의 보호막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거의 집단무의식에 가깝다. 우리도 사랑 앞에서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허상과 닿아있는 이들이다. 두려움은 허상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이나 우리는 아직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지 못한 사랑의 유목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사랑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어떤 두려움을 표출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이들은 비난받아야할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더 많이 이해하고 변호해야할 할 우리 자신의 초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 앞에서 두려워서 도망치고, 유예하는 우리 내면의 풍경과 너무나 닮아 있고, 집단전승된 그 무엇, 집단의식에 감염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에 환호하면서 동시에 그분을 배척했던 나자렛 사람들을 통해 사랑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갖게 되는 내면 풍경은 무엇인가를 예민하게 바라보아야 할 이유다.

 

Q2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먼저, ‘어떠한 예언자도’라는 어절에서, 예수님조차 당위적인 명제로 일반화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햐 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혈연과 지연에 묶여 있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만날 수 있다. 이 집단무의식은 프로이트와 칼 융이 간파한 대로 신앙이라는 코드로 포장된 고도의 주술적인 생존전략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밀의 공리주의적 발상이 집단의 생존에 최적화된 틀로 신앙이라는 외피로 대대손손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이 집단의식의 틀에서 벗어난 순간 그들은 ‘혼자’로 돌아가야 한다. 그 ‘혼자’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던져진 자의 ‘두려움’과 동행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이 틀을 대대손손 계승하게끔 보호하는 장치가 된다. 내면의 잠금장치가 된다. 두려움이 집단무의식이라는 매트릭스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철학사에서 시대를 구분할 때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나누기도 한다. 즉 신앙의 시대와 이성의 시대를 나누기도 하지만, '어느 예언자도 속에'는 이것이 늘 함께 다니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인류의 집단무의식에는 생존에 최적화를 찾으려는 고도의 이성적인 방어체계가 작동되어 지식의 축적, 귀납법적인 일반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앙이라는 외피로 싸고 있는 것이다.

 

회당에 모여있던 그들은 처음부터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리가 어디서 오는가 앞에서 그들은 흔들린다. 그들은 타자의 경험을 그들 자신의 고유한 경험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유다이즘을 맹신하기에 이르고 그 흔들림은 진리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타자의 경험이 나의 경험으로 재배치되는 순간이다.

 

이는 진리가 무엇인가 보다 진리를 전하는 이가 누구인가?가 그들에게 더 중요했던 이유는 유다이즘의 방어체게가 그들에게 이미 내재화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예언자에 대한, 메시야에 대한 집단전승된 유다이즘의 견고한 어떤 틀 속에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그들에게는 필연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이 카파르나움에서 보여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암시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신적인 권능 앞에서 적어도 그들은 무릎을 꿇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어떠한 예언자도’에서 회당에 모여 있던 그들이 단순히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서는 더 근본적인 인간의 심리학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인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열왕기상17,1-16), 엘리사 시대의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열왕기하15장)의 사건에서 역으로 그 심리의 바탕을 바라볼 수 있다. 사렙다 과부나 나아만의 사건에서 1차적으로 이방인들이 먼저 그분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모두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분을 알아본다는 것은 더 근본적인 것임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전제란, 혈연과 지연 학연을 훨씬 넘어서는 사랑의 논리가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은 [권능=하느님]의 공식에 길들여진 이들이다. 이들이 [사랑=하느님], 즉 [사랑=권능]임을 알기에는 너무나 견고한 유다이즘이라는 매트릭스에 갇혀있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공생활 3년 동안 기적의 원리는 언제나 생의 끝까지 가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서 개별적으로 체험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바오로나 베드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부활 이후에야 그분을 분명히 알게 되고, 순교에 이르는 과정들 역시 그분과의 개별적인 만남의 긴 체험으로 인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에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고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Q3.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모든 공격은 자신에 대한 공격이다"(헬렌 슈크만)

 

알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우리 앞에 당도 했을 때, 기존에 알고 있던 가치관을 모두 바꾸어야 할 때,  편안함과 안위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어떤 세계가 우리 앞에 서 있을 때, 모든 생명체는 그 낯설음을 두려움과 동일시하고, 공격의 형태로 방어를 표출한다.

 

이 방어의 시작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로부터 시작된다. 의심과 비교우위라는 계산기를 두드리게 만든다. 요셉의 아들, 혹은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말은 비교우위의 허장성세로 부터 나온 에고의 속삭임이다. '허장성세는 실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절망은 허장성세다'(헬렌슈크만). 그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에 희년의 선포에 환호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메시야관이 이 환호를 절망으로 바꾼다. 더구나 카파르나움의 기적사화, 사렙다과부와 나아만의 기적사화를 통해 희년을 살기 위해선 그들의 메시야관을 완전히 수정해야 한다는 무언의 요구앞에서. 그들은 요셉의 아들 앞에 무뤂을 꿇는 대신, 그들이 진정 몰랐음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의심은 절망을, 절망은 분노의 형태로 표출하기에 이른다. 그 분노는 지금 공격할 것인가 아님 나중에 공격하기 위해 한걸음 물러설 것인가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인정할 수 없겠지만 그들 자신이 실은 벼랑에 몰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벼랑에 몰린 자만이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려움이 지닌 연쇄고리다.

 

여기서 그들이 예수님을 벼랑끝까지 끌고가 거기에서 그분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실은 그들이 그 언젠가 자신의 생이 벼랑 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서 그분을 알아본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임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들의 생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벼랑 끝에 서본 사람은 혈연지연학연 이런 것들이 삶과 죽음 앞에서 모두 허세 혹은 치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햄릿의 독백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만이 벼랑 끝에 몰린 사람에게는 문제다. 그때 진리가 무엇이고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확연히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고통은 진리의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혹은 눈물은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의 뿌리가 머무는 골수는 상처의 줌심부이다"(로이스부르크, 선집)

 

반드시 고통이나 눈물이 진리를 알게하는 필수불가결한 유일한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거의 예외적으로 극한의 고통 중에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아봤다는 것이다.

 

 

 

Q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오늘, 우리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의 현존을 부재로 만드는 것은 그분이 아니라 물론 우리 자신이다. 신앙과 사랑의 여정은 이 앎/모름의 여정이고 이 앎/모름의 여정이 현존과 부재를 낳는다고 할 수 있다.

 

“부재와 현존(Abwesenheit und Präsenz) 앞에는 언제나 ‘앎/모름’이라는 이중의 문이 있고, 앎/모름을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자신의 운명애(Amor fati)가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앎/모름은 한 쪽 문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두 문이 동시에 다 열린다는데 우리의 혼란이 있다. 우리는 이 혼란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서둘러 답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우리는 신을 안다>는 방어 명제다.

 

이를 요한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 26)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요한21, 17)

 

그렇다면, 우리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그 분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이를 많은 영성가들은 <우리는 신을 모릅니다>를 고백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알기 위해서 모른다>는 이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백은 삶이 하는 고백이지 언어가 하는 고백이 아니다.

 

예컨대, 많은 연인들이 사랑하는 상대를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별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요한 복음 사가는 베드로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이런 고백을 들려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앎/모름의 매트릭스가 깨지는 순간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의 배신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을 통해, 앎/모름의 매트릭스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을 다 알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를 다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다 알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갈망, 원의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 신부님은 강론에서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그분을 알지 못했던 이유를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정보 즉, 지엽적인 앎을 절대적인 앎으로 맹신한 것에서 찾고 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그분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그분이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과부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바라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보면,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고 배워서 알고 있다가 나중에는, 하느님은 이런 분이셔야 한다고 단정하고, 고집을 피우는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든 적은 없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잘 안다는 그 생각 때문에,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은 적은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합니다. 그것은 제대로 알고 있을 때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본다고 하더라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도 많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강론에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닙니다.”라고 전한다.

 

같은 맥락에서 신을 알기 위해서 신을 지워야 한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선집)라는 것에서,

 

앎-모름이 동시에 문을 여는 이 상황에서,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를 지나가는 그분을 알아보는 통로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분이 보여줄 '사랑'이다. 사랑이 앎/모름의 통로다.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배우기까지 우리는 앎/모름, 그 혼란의 여정을 감당해야 한다.

 

실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아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른다.

 

다만, 앎이 생명을 낳을 수도 있고 죽음을 낳는 맹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앎을 종결하고자 할 때가 문제인 듯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것이 어떤 앎이라 할지라도 완벽에 도달한 앎이 아니라 과정중의 앎, 희미한 앎일 뿐이다.

 

그러기에 알려는 의지 자체가 진정한 앎을 방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알려는 의지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역설적인 숙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글을 마무리 해본다.

 

  절망도 습관이고 희망도 습관이다. 

 

[천인지애(天人至愛), 앎-모름의 매트릭스(matrix)를 넘어]

- 내 존재의 의미는 삶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칼 구스타브 융)

 

천인지애(天人至愛)는 ‘하늘과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는’이란 뜻이다. 우리는 그렇게 귀하고 귀한 존재로 이 세상에 소풍 왔다. 그런데 우리 각자가 처한 생존의 상황에서 우리 자신이 귀하고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이는 모든 관계의 망각을 의미한다. 나와 그분과의 관계, 나와 타자와의 관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 때 모든 관계는 그만큼 존중되고 존경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망각 앞에는 우리가 알든 못하든, 인정하든 안하든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그 어떤 매트릭스가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매트릭스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일 수도 있고, 집단의식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디서 연유하든 그것을 방어하는 방어기제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방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나야 하는 예수님이나 우리 각자의 만남 역시 언제나 이 ‘두려움’ 을 통과해야 한다. 이 ‘두려움’이 우리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그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 두려움 넘머, 너머,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절망이 습관이라면 희망도 습관일 것이다.  경험에 비추어 세 가지 제언을 해 본다.

 

제언1. 각자 그분의 음성을 듣는 통로가 다르겠지만, 자기 심장에서 걸러지고 단말마처럼 튀어나온 말을 들으라!

 

제언2. 바닥을 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망진창인 문제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늘 그분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야훼이레(Yahweh-jireh)’를 믿으라는 것이다.

 

제언3. 심장의 말도 안 들리고 ‘야훼이레’마저 믿어지지도 않는다면, 자신이 죽기 직전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지금 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