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신비이며 자명한 신비인 ‘결정적 인간’의 첫 번째 고백
- 미안하다, 죄가 많음에도 널 사랑한다!
[주 님 세 례 축 일 (다 해) 2022. 1. 9. Luc. 3,15-16.21-22]
1. 달이 뜨고 진다고 너는 말했다(이수정)
이수정의 「달이 뜨고 진다고」를 읽어본다.
달이 뜨고 진다고 너는 말했다.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질 것이다. 네게서 뜬 달이 차고 맑은 호수로 져서 은빛 지느러미의 물고기가 될 것이다. 수면에 어른거리는 달 지느러미들 일제히 물을 차고 올라 잘게 부서질 것이다. 이 지느러미의 분수가 공중에서 반짝일 때 지구 반대쪽에서 손을 놓고 떠난 바다가 내게로 밀려오고 있을 것이다.
이광호 선생의 『사랑의 미래』를 읽어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같은 달은 다른 시간 속에서 바라본다. 그들이 함께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들이 다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사랑의 담론으로 ‘태양’에 대한 것보다 압도적으로 ‘달’이나 ‘별’에 대한 글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부재하는 대상을 소환하는 소재 중 가장 멀리 있으면서 감각으로 확인 가능한 천체,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러면서 두 겹의 부재를 현전케 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랑의 미래』에서 바라본 달처럼,
달의 시간은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적인 시간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달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간은 하나의 생의 주기만 있을 뿐이라는 비극적 상속의 의미가 내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미래』에서는 같은 달을 다른 시간에 바라보는 일이란 ‘아름다운 일이자 곧 가혹한 일’ 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수정의 「달이 뜨고 진다고」에서의 ‘달’은 어떤가?
너와 나는 지구 반대쪽에 존재한다. 너는 달이 뜨고 진다고 자연현상을 전하는 것처럼 말한다. 반면 나는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개의 달이 뜨고 지는 건, 단 하루의 일이겠지만,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지는 건 수천 날의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이 시의 긴장은 이 지점에서 생긴다. 긴 시간들이 순간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시간 속에 있는 달도 그렇게 빠르게 회전한다. 달을 시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아니라 이 달을 생물처럼 ‘활유’시킨다.
너와 나는 동시에 같은 달을 본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어떤 질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저 달을 너도 보겠지, 라는 순간적인 위로를 이수정 시는 살아있는 감각을 총동원해 은빛 다리를 만들어 너와 나의 거리를 단번에 좁힌다.
네가 본 그 달이 호수에 져서 물고기들의 지느러미를 스칠 때, 그 물고기들이 일제히 달빛 속에서 수면위로 튀어오를 때, 그것은 단순히 수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네가 본 그 달빛으로 물든 은빛지느러미가 되어, 빛의 분수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공중에서 일제히 반짝일 때, 손을 놓고 떠난 너는 바다처럼 밀려올 것이다. 은빛다리를 건너서.
너와 나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지만 관념으로 그리워하는 것과 감각을 총동원해 그리워하는 것은 이렇게 다르다. 서로를 그리워해도 그 그리움의 질감에 차이가 있다.
「달이 뜨고 진다고」에서 보여주는 그 사랑이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 이전에 본성이다.’이라는 측면에서,
그런데 이수정의 「달이 뜨고 진다고」에서는 그 본성에 능력을 가미해 자기 안의 빛을 감각적으로 점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수정의 시에서 사랑은 관념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매일 매순간이 너를 향한 크리스마스다. 생의 트리를 만드는 일이다. 너를 생각하면서 일어나고, 잠들고, 밥을 먹고, 걷고, 너를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한다. 김연수의 소설처럼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이것은 매일 카드를 만들고, 매일 우체국에 가 그 카드를 부치고, 크리스마스트리에 버튼을 누르는 일이다. 온 동네를 빛의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정호승의 시의 제목처럼 ‘사랑해서 미안하다’ 혹은 드라마 제목처럼 ‘사랑한다. 미안하다’ 와 비슷한 버전으로 「달이 뜨고 진다고」의 화자는 ‘나 혼자 설레서 미안하다’
2. 인간 자체가 하나의 신비다. 아니 인간은 바로 신비다.(칼 라너)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 이전에 본성이다.’
이 문장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 문장이 가 닿으려는 지점은 오늘 이 글의 주제인 ‘사람이 되시어’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 이전에 본성이다.’
사랑이 사람의 본성일 뿐 능력이 아니라고 본 것은 요한네쓰 로쓰가 『사랑의 세 단계』에서 본 것처럼 ‘에로스-필리아- 아가페’의 과정 가운데 ‘사랑은 사랑에 끌린다’하는 것은 감각 -본능적인 ‘에로스’의 단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랑에 끌리지만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사랑의 완성인 아가페는 본성 뿐 아니라 사랑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다른 차원의 문제에 해당한다.
사람의 본성은 충족원리가 무엇인가를 제시할 뿐, 그것을 성취하게 돕지는 못한다. 사랑의 성취여부는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지와 결부되어 성취된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본성만 갖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할 자유의지라는 도구까지 주어져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모두 사랑의 담론이 존재한다. 사람이 곧 사랑의 담론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78억5천개의 사랑의 담론이 만들어지고 그 담론이 세계 속으로 퍼져나가고 확산된다. 그만큼 사람은 사랑의 담론과 필연적 공생 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도 이 세계는 사랑의 담론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라는 질문이 나온다.
2021년에 [인간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은 무엇인가?]에서 살펴본 주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①“인간은 인간적(동물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 사이의 경계를 결정적으로 초월하고, 인간은 무한히 초월할 수 있기에 인간이고, 따라서 자기 안에 덜 갇혀 있고 덜 제한되어 있을수록 인간이다.”(요셉 랄쓍어, 『그리스도신앙어제와오늘』)
②“예수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인류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의 존재이다. 그는 인간일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미래로 인간을 이끌어 들이는 ‘결정적인 인간’인 것이다”(가브리엘 마르셀, 『존재의 신비』)
③“예수는 전적으로 한 직능을 맡은 자다. 예수는 자신과 자신이 말씀을 하나로 한 나머지 ‘나(인간)’와 ‘말(로고스)’이 불가분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말’이다”(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④“인간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보면 중심을 가진 개인이지만, 즉 한 인물인 동시에 어떤 새롭고 더 높은 종합과의 관계에서 보면 하나의 요소가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은 홀로 있기를 그쳐야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테야르 샤르뎅, 『인간현상』)
⑤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생각하라! 나는 무엇에 희망을 둘 수 있을까? 어디에 신뢰를 둘 수 있을까? 변함이 없는 것, 우리가 닫고 서야할 것은 무엇인가? 답은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입니다. 그분은 막연한 어떤 이가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입니다. 가장 심오한 신비이시며, 모든 실재의 주님이십니다. (밭터 카스퍼 추기경,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생각하라』)
⑥인간 자체가 하나의 신비다. 아니 인간은 바로 신비다. 그 이유는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신비에 자신을 조금이라도 개방했대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사람을 당신의 신비로 만드셨기 때문이다.(칼 라너.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의 신학적 소고』)
①~⑥은 사람에 대한 규정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낼 뿐, 궁극적으로 ‘인간은 한없이 작으나 동시에 한없이 크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즉 ‘인간은 인간적(동물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 사이의 경계를 결정적으로 초월하고’ 속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지닌 인간의 품위의 방향성이다.
인간 홀로 실존을 경험할 때, 인간은 한없이 작은 자신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동물적 현실을 살게 된다. 그때 사람은 세계 속으로 느닷없이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실존주의자들이 파악한 인간에 대한 규정이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파멸과 사멸과 공멸의 위태로운 여정 가운데 어떤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진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동물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 사이의 경계를 초월하려는 갈망을 먼춘 적이 없다. 그렇기에 사랑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각자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점점 더 타자를 위한 사랑, 너를 적극적으로 존재케 하는 그 사랑, ‘아가페’로 돌아가려는 어떤 지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지향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돌아가지 못한 자신과 이 세상을 바라보고 “내 탓이다”라고 가슴을 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탓마져 내 탓이 된다. 세상은 ‘내 탓이다’와 ‘네 탓이다’ 로 양분되어 있는 듯하지만, 그 바탕에는 사랑에 끌리는 그 본성이 내재해 있기에 인간은 ‘신비’에 해당한다.
칼 라너는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의 신학적 소고』)에서 이것을 인간이 지닌 본성인 ‘순응성」(順應性 Potentia obedientiae)’, 과 ‘자신을 내어버림 (Selbstentaußerung)’ 으로써 ‘자기 아닌 다른 것을 자기의 실존으로 만드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바라보고 있다. 순응성은 본성이고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전자는 스스로 취득한 것이지만, 후자는 자유의지로 자신을 내어놓은 J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능력에 해당한다.
3. 하늘이 열렸다(루카 3,15-16.21-22)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자 능력일 수 있다는 것을 주님 세례축일복음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라고 전하는 루카 3,15-16.21-22을 읽어본다.
Ⓐ그때에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라고 전하는 루카 3,15-16.21-22에서 멈춘 부분이다. 특히 ‘하늘이 열리며’ 라는 부분에서 이 글을 풀어가려 한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분은 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면서 공생활에 앞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 이 질문에 답으로 대부분의 성서해설서들과 강론이 공통적으로 답을 넘치도록 제시했다.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대속개념과 공생활 전에 삼위일체의 현현으로 예수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버라본 것이다.
이 글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려 한다.
사람이 무엇이길래? 신이 인간 역사에 그 무엇도 아닌 ‘사람’으로 개입하신 것일까? 그 답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이유는 알고 있지만 목숨을 바쳐 사랑할 만큼의 그 ‘사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사랑 때문에, 죄 때문에 라는 이 표현에서 '사랑과 죄'는 자칫 관념이나 추상으로 멀어질 수 있는 용어들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78억 5천, 각각을 위한 세례이었을 것이라는 데 초점을 놓아보려는 이유는. 그 사랑이 어떻게 추상이나 관념의 영역에 그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 신부님은 강론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의 연결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시기 위해서였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인간의 죄를 이해하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론에서 강생의 신비와 연결하여 (1)‘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2)‘인간의 죄를 이해하기 위해서’ 라는 스펙트럼을 제언했다. 이는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다.(요한1, 14)’와 연결하여 ‘사람이 되시어’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 추상과 관념의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
추상과 관념은 사유의 영역이다. 사유가 먼저냐? 체험이 먼저냐?는 미묘한 문제이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체험을 통해 사유를 도출한다. 예수님은 길 잃은 양들의 그 초보적인 사랑법을 받아들이셨다. 그것이 세례사건에서 초점화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예수님의 사랑법을 죄많은 인류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권력이다. 사랑의 권력화다. 수석사제, 율법학자, 바라사이파는 권력화된 하느님 사랑을 유포한 자들이다.
(1)‘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통의 삶'은 하느님을 '사유'가 아닌 '경험'으로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으로부터 '사랑(사유)'을 도출하는 과정이 삶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경지에 이르면 '사유와 경험'은 동시에 일어난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유와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높은 경지의 각자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많은 인류, 길 잃은 양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들의 '느린' 사랑의 진도에 맞추셨다.
세례를 받은 수많은 이들이 교회를 쉽게 등지는 이유가 무엇일까부터 생각해 보자! 교회를 찾는 이들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머리로 이해하고 싶어서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삶으로 체험하고 싶어 교회를 찾은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체험이 사유를 촉발시킨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교회를 찾으셨습니까?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에 교회를 찾지 않았다해서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예수님을 몰라서, 혹은 예수님이 싫어서 교회를 찾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등지거나 교회를 찾지 않은 이들도 예수님은 좋아한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난무하지만 삶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면, 교회가 세속화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세속화의 불을 당기는 것이 체험없는 사유를 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세례의 추상성, 사랑의 추상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결론을 교회가 도출해주려 한다는 데 있다. 선후맥락의 전도다. 교회는 사랑이라는 체험을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본인이 도출하게 도와주는 곳이다. 추상성은 사람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말도 그 말이 관념과 추상의 범주에 머물 때(경험을 도출시키지 못하는 사유는 박제화된 사유다), 그것은 박제화되기 때문에 사람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두려움은 추상과 관념의 영역에 머문 박제화된 사랑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은 체험되지 않은(못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원리는 ‘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유지되고 변화되고 생성되고 있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피가 도는 체험의 현장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런 생성의 과정 중에 있다. 하물며, 사람에게 더 말해 무엇하랴? 삶은 체험이다.
그런 맥락에서 ‘하늘이 열렸다’ 라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추상이나 관념을 깬 하늘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구약의 사랑은 관념과 추상성에 머문 사랑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두렵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사람을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사랑은 구체적인 것이다, 라고 선언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강론에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것’과 ‘인간의 죄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 되시어’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그분을 이해하는 신학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학이 세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체험을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끌어내는 과정이다. 체험에서 사유를 도출하는 과정이 삶이다.
그분이 굳이 사람이 되지 않아도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사람이 되지 않아도 인간의 죄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삶과 인간의 죄를 이해하셔야 했다면, 여기서 ‘사람이 되시어’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사람이 되시어’라는 강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는 사랑의 관념이나 추상성을 허문 사건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와 맞물려 이해할 때 사랑은 관념의 영역에서 구체의 영역을 넘어설 때 그 관념은 흔들리지 않는 발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관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토대를 다시 세우는 일에 해당한다. 구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완성하는 것이 그분의 임무였다는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고 이것은 모두 인간이 지닌 감각의 차원이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들기 모양으로 내리고, 하늘의 소리가 들린 것, 오로지 예수님의 정체성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다시 구약의 하느님, 저 하늘에만 계신 박제화된 하느님으로 돌아간다.
그런 맥락에서 세례를 통해 보여준 강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과 죄, 이 낙차를 살고 있는 ‘나’를 이해하지 않고는 ‘나’와 같은 현실을 살고 있는 ‘너’를 이해할 수 없고, 나와 너를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을 배울 때 미적분이 아니고 집합부터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보다 앞서 ‘나’라는 ‘사람’이 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위의 신학자들이 모두 신을 논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규정을 먼저 고민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신학은 인간학에 포함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야 신학은 신학으로의 빛을 발한다.
세례자 요한이 전한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는 부분에서, 인간은 죄 많은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성령과 불'로 주는 그분의 세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숭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의 순례는 이 낙차를 감당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78억5천만 오늘, 인류에게 같은 세례의 은총이 담지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자명하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지만, 우리 각자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 아들’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하늘과 땅을 열어놓은 사랑이기에 후자인 인류는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마음에 든다’고 할 때, 사람의 심장을 가진 이라면 어떤 사랑을 하고 싶어질까? 인간은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초점이 놓일 때, 그 사랑은 피가 돌고 숨을 쉬는 사랑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을 추상과 관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하늘이 열린' 사건으로 바라보는 이유이다.
왜 예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셨는지 한발 다가가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 각자의 현실적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품위'를 생각해 볼 수 있고, 우리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는 '갈망'이라는 길이 열린다.
(2)‘인간의 죄를 이해하기 위해서’
경험(구체)으로 부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사유)가 도출되었을때, 우리 죄를 대신하여, 라는 대속 개념의 의미도 조금 더 구체화된다고 할 수 있다.
강론에서는 자식들의 고통과 불행을 어머니 당신의 죄로 돌리는 한 어머니의 실화를 예로 들어 사랑과 죄의 관계에 대하여,
(a)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b)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습니다."
(a)전반부인,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를 생각해 보자!
이 명제는 사랑의 ‘무류성’을 훌쩍 뛰어넘은 명제다. 신성모독죄라는 죄명으로 돌아가신 그분을 생각해 보면 그분이 왜 요르단 강물로 걸어들어갔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이것을 인간 앞에 머리를 숙인 ‘겸손’으로 바라본다면 자칫 ‘가현설’을 주장하는 흐름으로 보인다. 오장육부를 지닌 인간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죄라고 할 수 있을 때만이 저 명제를 이해할 수 있다. 죄가 많은 곳에 사랑도 많다.라는 것에서, 살아있다는 생명체에게 죄라고 갔다 부치면 죄가 없을 수가 없다. 남들이 아는 죄, 남들이 모르는 죄, 온통 죄투성이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의 이름은 죄라고 할 수 있다.
두 개의 상반된 상황윤리에서 비롯된 '죄'를 생각해 본다.
예컨대, ‘일일일식’ 식단을 짜다보면 하루도 육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 지글러의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라는 유엔식량보고서를 읽어보면, 그 문제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인간의 육식문화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불교의 사유가 아니라도 육식을 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굶주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치고 엄청난 죄다. 본인의 상황은 이것을 죄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일일일식에 꼭 육식을 한다.
반면, 31전에 하느님 품으로 가신 한 외국인 사제의 이야기다.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미국의 재벌집 아들이었다. 60년대 한국에 오셔서, 시골본당에서 한국의 채식문화를 따라하다, 간을 크게 손상시켰다. 사랑을 합시다ㅡ 라고 강론을 하고, 미국은 육식문화니 부디 양해해 달라고 사제관에서 당신 혼자 스테이크를 구을 수는 없었으리라. 그분은 육식문화인 자신의 식습관을 포기하고 몸을 망가트릴 수 밖에 없었다.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 인당수에 뛰어든 것과 비슷하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를 어긴 대역 죄인이다. 그런데 이것이 죄인가?
한 사람은 육식을 하는 것이 죄이고, 한 사람은 육식을 안하는 것이 죄라면 무엇이 죄인가? 죄는 상황윤리와 연결되어 있을 경우가 많다. 너의 입장만을 생각하지 않고 나의 입장도 고수하며 살아야하는, 아니 살아내야 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존재 자체가 꾸리는 삶에서 죄 아닌 것이 없다. 불교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업보 중에 가장 큰 업보, 죄 중에 가장 큰 죄라는 것이 이해가 간다.
그런 맥락에서 죄 없는 분이 인간이 되어 인간과 같이 세례를 받아서 겸손한 것이 아니라, 굳이 사람이 되시어 (저 하늘에서 내려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오장육부를 지니고 인간 실존을 낱낱이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걸어들어간 그 요르단 강물로 그분이 공생활의 시작 앞에서 죄의 중심부로 걸어들어가셨을 때, 하필 그 때, 하늘이 열렸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원하는 사랑을 하는 것이 그분의 정체성이다.
그분은 '죄'가 하느님의 사랑을 막는 최대장벽임을 아셨기에, '죄가 많은 곳에 사랑도 많다'는 것을 앞당겨 보여주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세례 사건은 죄의 개념을 사랑으로 바꾸신 초석을 놓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생각해 보자. 막달레나 성녀는 죄많은 곳에 그분이 함께 한다는 표징적 인물이다. 죄많은 인류의 상징인 막달레나 성녀에게 부활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주셨다는 것, 이것이 그분의 사랑법이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습니다."
(b)이제, 후반부를 생각해 보자.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습니다.’
어떤 인연도 맺지 않고 무인도에 산다면 고백할 죄가 없을까?
신자들이 피정 가서 점심시간에 소화제로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지옥에 젤 뜨거운 곳에 전용석이 있으니 함부로 앉으면 안된다고. 모든 절의 주지스님, 모든 교회의 목사, 모든 사제, 주교, 추기경, 교황...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교수, 선생, 지식인...모든 부모...재벌총수....웃다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연이 많으면 죄가 많을 수밖에 없다. 상대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알지만 다 채워주지 못한다. 그러니 늘 죄인이다. 자식이 많으면 부모는 죄투성이다. 자식자랑 하지 말라, 혹은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이런, 죄투성이 사람이 되시어,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을 살아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을 신학과 철학의 성채에서 즉 추상과 관념의 영역에 있던 ‘사랑’을 이 세상의 저잣거리로 끌어낸 것이 주님 세례 축일에 ‘하늘이 열렸다’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법이었으니까 말이다.
글을 정리해 본다
[절대적 신비이며 자명한 신비인 ‘결정적 인간’의 첫 번째 고백]
- 미안하다, 죄가 많음에도 널 사랑한다!
칼라너가 바라본 대로 그분은 절대적 신비이며, 결정적 신비이다. 인간 역시 그 사랑의 탯줄과 연결된 신비 그 자체이다.
또한 가브리엘 마르셀이 바라본 대로 ‘결정적 인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들인 바로 그 ‘사람’이다.
본성으로 사랑이고 능력으로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실존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과도의 여정 중에 있다. 그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온전히 살아내지도 못한다. 지향만, 갈망만 무성하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고백은 - 미안하다, 죄가 많음에도 널 사랑한다!는 고백일 수밖에 없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넓이 , 실존의 '오늘'에서 보편의 '오늘'로 (0) | 2022.01.26 |
---|---|
향연(饗宴),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 (0) | 2022.01.19 |
상호텍스트성, 모든 사물은 ‘벡터(vectors)’이다(화이트헤드) (0) | 2022.01.05 |
타자의 담론,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 (0) | 2021.12.30 |
마리아 공경의 신학적 위치에 관한 소고(小考) (0) | 2021.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