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타자의 담론,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

나뭇잎숨결 2021. 12. 30. 16:21

 

 

 

타자의 담론,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

-Discourses of Others, Dialogism and Monologue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다 해) 2021. 12. 26. Mt. 2,41-52]

 

 

1.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한용운)

 

2021년을 넘기며, 한용운의 「꿈이라면」을 다시 읽어본다.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解脫)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

 

 

①에서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解脫)도 꿈입니다.’

 

사랑의 ‘속박’이라는 말 속에는 사랑의 배타성으로 인한 집착과 기대 외에도 사랑에는 ‘자기 구속성’이 있다는 말로 들린다.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는 사랑, 혹은 상대가 어떠하든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사랑 자체가 지닌 ‘자기구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한바탕 꿈이라면, 실재하지 않는 환상이었다면?

 

이에 머무르지 않고 시인은 이름에 대한 미망, 출세의 해탈도 한바탕 꿈이라고 말한다. (사랑)과 (출세)에 괄호를 치면 결국 ‘속박’과 ‘해탈’은 같은 말이 된다. 누군가에 매여있음과 무엇인가에서 벗어남이 결국 같은 꿈, 환영이라는 것이다.

 

②에서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은 소위 감정을 절제하는 데 초점을 두지 않는 이들, 감정과 정서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제 갈 길을 가게 풀어놓는 이들, 평정심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이들만이 웃음과 눈물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데, 이것이 꿈이라면? 헛것을 보고 웃고, 헛것을 보고 울었다면?

 

‘무심의 광명’은 인간사의 흘러감에 대해 거리두기를 할 수 있어서, 형상과 담론이 만든 어떤 그림자도 없는 초연함, 스스로 성숙의 경지에 이른 듯한, 홀현 모든 것이 밝아진 습명의 상태를 경험한,  모든 정념에서 초연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상태, 그런 그 ‘무심의 광명’도 한바탕 꿈이라고 한다면?

 

③에서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

 

그리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정신적 물질적인 것, 형상과 담론,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 풀잎 끝에 맺혀진 한 방울 이슬처럼 한 순간에 사라질 꿈이라면, 차라리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다고 한다.

 

한용운의 「꿈이라면」에서 ①과 ②은 우리가 그 상태를 받아들이든 못하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다. 동의의 영역이 아니라 이해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꿈이라면」에서 시인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③의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다.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한 꿈일진데,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불멸’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에서 저 너머를 흘깃, 바라본 것 같은 형이상학적 흔연함과 동시에 이 땅의 언어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이해의 곤혹이라는 상반된 정서를 느끼게 된다.

 

이해의 곤혹이란, 누군가를 사랑하느라 혹은 무엇인가 이루려고 질주했던 모든 시간들이 어떻게 꿈일 수 있을까? 또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유한자가 어떻게 또 불멸을 알 수 있을까? 이런 난감함과 마주친다.

 

우리는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세상은 왜 저래야 하는지 적어도 이해는 하고 싶어 한다. 이런 난감 앞에서, 그런데? 혹은 그렇다면?을 독백하는 이들에게 혈을 뚫어주는 김훈식 사랑도 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 부른다.(김훈, 「사랑의 기별」)

 

그런데, 김훈식 사랑도 다시 이해의 난관 앞에 우리를 돌려세운다. 경험하지 못한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이 사랑은 또 무엇인가? 이 사랑도 실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재한다고 필연성을 부여하는 단지 추상명사인가? 마치 봉황새나 용을 보지 못했는데, 실재했던 것처럼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렇다면 그 역시 완곡한 ‘꿈’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꿈이라면 너무나 지독한 꿈이다.

 

설사, 사랑이 꿈일지라도 꿈조차 꾸지 않은 삶을 또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또, 그것이 꿈인 줄 알면서 지독한 꿈을 계속 꾸게 만드는 것은 또 무엇인가? 또,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라고 이 땅의 삶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했는데 저 너머의 시간, ‘불멸’까지 꿈꾸는 이유는 무엇인가?

 

 

 

 

 

 

 

 

 

2. 바흐친의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

 

모든 인간은 꿈을 꾼다. 그 꿈은 희망과는 다른 차원의 꿈이다. 이때 꿈은 생존본능에 해당한다. 인간이 꾸는 꿈 중에서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꿈은 이 세상 순례가 '불멸'이 되길 꿈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석학 미하일 바흐친은 이를 “존재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이며, 나 자신을 '창시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불멸'은 이  땅 너머의 초시간적 개념이다. 그 초시간이  이 땅에서 시작되며, 그 시작의 단초를 '타자성'에서 찾는다. 

 

미하일 바흐친은 ‘무엇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말 자체가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존재 조건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그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운명이 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중력의 법칙, 별의 운행, 생태계의 먹이사슬, 인간의 유전자조차도 후대의 자손들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남겨준다는 것이다. 또한 신조차도 인간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타자가 지닌 타자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 타자성의 증거가 소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종결시키지 않으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미하일 바흐친)

 

미하일 바흐친 연구자인 앨런 스윈지우드는 『문화사회학 이론을 향하여』에서 바흐친의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가 나와 너라는 관계를 넘어, 어떻게 문화를 형성하고, 그 문화가 주기적인 축제문화인 카니발리즘이라는 형태로 재생되는지를 대화주의에서 찾고 있다. 카니발은 기존의 담론을 허물고 새로운 담론을 구축하게 되는가를 대화주의 정점으로 바라본다.

 

바흐친에서 자아-타자 관계는 자아가 고정되고 완성되고 완결된 주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활동의 상태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의 구분은 바흐친의 자아이론에서 중핵을 이룬다. 독백주의는 타자를 완성되고 완결된 것, 즉 의식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반면, 대화주의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열려 있는 미완성된 의식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독백주의가 내부 지향, 자아의 봉쇄, 분리와 고립을 이끈다면 대화주의는 봉쇄를 거부하고 외부를 지향하여 타자들의 의식과 조우하고 반응한다. 이렇듯 대화주의는 타자성(alterity)에 기반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미하일 바흐친)

 

바흐친의 자아개념은 말의 미학과 관련되어 있기에 성찰적이기도 하다. 내적으로 경험된 모든 것은 타자의 말과 마주하기 위해 외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아는 그 자신의 의식과 타자의 의식, 즉 자신의 말과 타자의 말 간의 경계 위에 존재한다.

 

자아가 타자를 성찰하고 타자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해주고 그리하여 타자의 담론이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대화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나 자신을 '창시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미하일 바흐친)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나란, 과연 그것도 나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에 붙인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인간은 타자와 관계, 대화가 필요하다.

 

이 대화주의는 어떤 확산의 에너지를 동반한다. 계승의 원리다. 그것이 인류가 만든 문화다. 자아가 사회생활에서 대화적인 요소와 독백적인 요소 간의 긴장을 수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 그 자체도 두 개의 기본적인 지적 경향 간의 투쟁으로 이론화된다. 이것은 담론의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작동된다.

 

그 하나는 체계관념(철학, 미학, 사회학의 특정 형태들) 내에 사회-문화적 세계를 봉쇄함으로써 그것을 폐쇄하고자 하는 구심력과 연관된 경향으로, 이는 실제적으로 사회-문화적 세계를 메마르게 만드는 과정이다.

 

두번째는 체계와 경계의 관념을 거부함으로써 개방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심력과 연관된 경향이다. 문화를 이론화하는 것은 풍부성, 다양성, 유동성, 변경(border)을 찬양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나는 너를 지향하고 그 곳에서 문화라는 아이를 낳기에 이른다. 문화는 공동체 내의 차이, 상호작용 양식, 그리고 개인들의 노력─정체성을 규정하고 고정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사회 내의 사회적·정치적 메커니즘을 극복하고 뛰어 넘고자 하는 개인들의 시도를 통해 실현된다.

 

"문화를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경들에 기반해서 이루어지는 열려 있는 비완결적인 과정이다. 그러한 차이들은 대화를 통해 그 통일성을 발견한다"(미하일 바흐친)

 

문화의 비완결적인 형태를 완결적인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 어느 시대나 어느 국가나 때때로 축제의 형태를 빌린다. 나에서 너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대화는 카니발리즘을 동반한다.

 

"카니발적 세계관은 어느 누구도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 자신 속에서는 결코 완전함을 발견할 수 없다는 대화적 관념 속에서 표현된다."(미하일 바흐친)

 

카니발은 기존의 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기능을 했다. 우리가 진리라고 맏는 담론들의 가치를 광장에 내어놓았다는 점이다. 카니발은 “모든 위계적 서열, 위세, 규범, 금지의 중지”를 의미하고, “모든 영원하고 완전한 것에 적대적이다.” 

 

카니발 군중 속의 개인은 자신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새로워지는 민중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카니발 속의 민중의 웃음은 “초자연적인 법칙 … 신성한 것 … 죽음에 대한,” 즉 억압적이고 제약적인 모든 것에 대한 집담의식을 표상한다.

 

여기서 인간을 종교에 의탁하지 않고도 불사불멸을 추구하게 된다.

 

카니발적인 것은 사실 절대적인 평등과 자유, 즉 모든 사회적 위계와 사회적 거리의 정지, 다시 말해 유토피아적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힘”이 되는 시대를 표상하는 하나의 유토피아적 관념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카니발화된 힘들의 어느 것도 완전하거나 완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는 안정적인 통합된 세계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끝없는 이동만이 존재한다.

 

카니발의 형식은 심오한 역사적 인식과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소통시킨다. 카니발은 개방성과 자기쇄신 능력을 찬양하고, 온갖 형태의 독단과 광신으로부터 개인들을 해방시킨다. 카니발적 세계관은 어느 누구도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 자신 속에서는 결코 완전함을 발견할 수 없다는 대화적 상황 속에서 표현된다.

 

 

 

 

 

 

 

 

 

 

3.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루카 2,41-52)

 

 

타자의 담론이 실현되는 과정, 그 구체적인 맥락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서도 그 원형을 바라볼 수 있다.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고 전하는 루카 2,41-52을 읽어본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 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41-52을 부모의 입장에서 먼저 읽어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입장에서 읽어보기로 한다.

 

(1)먼저 마리아와 요셉의 입장에서 읽어본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그들이 파스카축제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축제관습’이라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한다. 예수는 인류로 하여금 진정한 파스카를 완성시킬 인물이었고, 그 부모는 특별한 성령을 체험한 상태였지만, 아들 예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하룻길을 간 곳을 되돌아와 사흘 뒤에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에서 이들 역시 충분한 대화적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우기 율법교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라고 전한다.

 

소년 예수와 율법교사들과의 대화는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자연스럽게 대화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아, 하늘에 관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위의 대화를 보면,  그 첫 일성이 아들의 정체성을 확인 한 것보다는  아들을 사흘이나 찾아다닌 그 애탐이 초점인 것으로 보아 어떤 대화가 이들 가정에서 진행되었는지 역으로 바라보게 된다.

 

부모의 정서와 예수님정체의 충돌로 보이는 이 대화의 상황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첫째, 사랑의 부족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대화의 맥락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마리아가 쓰는 언어의ㅡ소재와 소년 예수가 쓰는 언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다.

 

마리아가 쓰는 언어는 이 땅의 언어다. 일반적으로 출타의 거처를 밝히지 않은 아들에게 어머니가  표출하는 감정적 언어다. 반면 12살 소년 예수가 쓰는 언어는 하늘이 준 소명에 관한 언어다. 땅의 언어에 익숙해 있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당연히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할 수밖에 없다.

 

둘째, 예수님의 평범성에서 그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신적 개념과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율법교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에서 그것을 추론할 수 있다. 

 

 

(2) 12살 소년 예수의 입장에서 읽어보기로 한다.

 

12살, 지금이라면 초등학교 5학년 내지는 6학년이었을 소년 예수의 행적을 통해서,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자신을 사흘이나 애타게 찾아다닌 부모에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우리는 놀라게 된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우리는 소년 예수의 ‘정의’로운 답변에 두 번 놀라게 된다.

 

내용상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집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뭔가 한 대 얻어맞은 이 느낌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갈등을 빚게 되는 이유는 주고받은 말의 내용이 틀려서라기보다는 대화의 맥락이 서로 빗나간 데서 찾을 수 있다. 너무나 정의로워서 이별하는 커플들이 수없이 많다.)

 

여기서 왜 예수는 서른살까지 나자렛 가정으로 내려가 순종하고 머무르셨을까?를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정의의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이 부르짖은 구약의 하느님이다. 예수님은 정의를 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다.

 

순종의 내용이란 위의 대화 맥락만으로 추정하건데 하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이 땅의 말로 사랑하는 법을 체화했어야 했을 것이다. 만약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를 겸손이라고 부른다면, 대화의 급이 다른 이들과 30년을 살아낸 것이야말로 가난한 구유에서 태어난 것보다 최상급의 겸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즉 ‘모든 일(τα ῥήματα ταυτα, 타 레마타 타우타, ta remata tauta; all these things)을 '심장' 안에 보관하여 생각하였다’ 이 '마음'은 '심장'으로 '사랑'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사유에서(마음-심장 속에 간직하였다) 사랑이 만들어지는 마리아의 위치. 인류를 위한 전구자로써 마리아의 위치를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다.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인류와 예수라는 하늘 사이에 존재한다. 마리아는  땅과 하늘의 중간자의 위치, 땅의 언어를 하늘에 전달하는 번역자이자 통역자이다. 이는 일찌지 예수봉헌의 현장에서 시므온이 예언한대로 수천의 '예리한 칼날에 찔림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수천'은 수량적 의미를 넘어 인류대대로 인류의 딱딱한 심장을 번역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전구자로써 신적인 공경인 흠숭지례를 넘나들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첫째, 요셉(우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마리아,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소서! 라고 응답했던 마리아 역시 주님의 뜻이 인류 각자의 안에서 온전히 이해되는 데에는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을 거라는 것. 둘째,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을 온 영혼으로 이미 받아들이신 상태에서만 삶이라는 생명이라는 이 순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 부모 에게 순종하며 지냈다ㅡ, 라는 것에서 3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언어로 다가가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하늘의 언어로 예수는 땅의 언어로, 하늘과 땅이 자연스럽게 그들 언어 속에 녹아들어가 그 경계가 없어진 지점을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잔치(요한복음2, 3-5)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말하였다.

 

나자렛에서 카나까지 30년이 걸림 셈이다. 카나의 대화는 모자간의 혈연의 대화가 아니다. 여인이시여, 라는 호칭 속에서 신과 인간의 대화상태로 넘어간 것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는 맥락 속에는 몰이해나 체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실히 인지한 한 신자의 믿음상태를 반영한다. 기도의 여정을 방불케한다. 이런 카나의 대화가 있기 위해 예수는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사랑법을 익혔을 것이고, 마리아는 아들과의 대화로 자신을 끊임없이 주님이 뜻으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카나의 혼인잔치 이후에 먼길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냐?"(마태 12, 46~50절)를 거쳐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19,26) 에 이르기까지, 12살 소년 예수의 메시지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자세만 바뀌었다. 이것이 담론이 지닌 궁극적 방향성일 것이다. 

 

예수, 마리아 요셉에게 이토록 서로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역지사지의 대화가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필요한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21년 성탄메시지에서 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역설한다.

 

말씀은 우리와 대화할 육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독백을 하고 싶지 않고 대화를 하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 자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사랑과 삶의 영원하고 무한한 친교이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21년 성탄 메시지)

 

보통의 대화적 상황은 화자의 지향점이 전제되어 발화된다. 가장 이상적인 대화상황은 땅의 언어와 하늘의 언어가 분리되어 있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그 대화 상황은 화자가 청자가 같은 지향점이 일관성있게 유지되었을 때의 이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발화상황은 땅이거나 하늘이거나 화자의 상황에서 발화되기 때문에 상대가 그 상황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대화는 갈등을 유발하기 쉽다.

 

‘작은 교회’라 일컬어지는 ‘성가정’의 의미를 강론은 이렇게 전한다.

 

 

성가정은 단순히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으로, 변화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가정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께서, 각자에게 주어진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희생을 요구하셨을 때, 이 두 분은 그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희생은 사랑이 있는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희생은 그저 고통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희생은 그저 고통으로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족을 위한 희생은 그저 고통으로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희생은 사랑이 있는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배우자란, 가족 중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고, 또 자신이 선택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사랑이 있었기에 내린 선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의 선택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 선택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랑이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비혼론이 대세인 이 시대에 가정을 떠바치고 있는 것을 강론에서는 <희생, 사랑, 선택, 믿음>이라는 네 기둥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이 네 기둥이 나 혼자의 선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나의 선택과 너의 선택이 동시에 작동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선택의 한 가운데 그분이 함께 하셔야 그 선택은 다음과 같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그 희생은 '사랑이 있는 희생' 이며,  '자신의 선택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랑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가정은 1차적으로 너와 나라는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선택의 전제는 사랑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침묵이나 독백주의가 아니라 대화주의에 있을 것이다. 대화가 어떤 기적을 낳는가를!

 

하나의 가정이 탄생하고 끝까지 그 가정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이 침묵이나 독백주의가 아니라 대화주의다. 그분이 우리 가정과 함께하신다는 것은 끊임없이 너라는 타자의 담론에 귀를 기울일 자세를 갖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라는 가장 완벽한 조합도 한 가정이 가능하기 위해서 오랜시간, 타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생각과 담론에 귀를 기울여야 했음에서,

 

이 글의 주제인 [타자의 담론,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Discourses of Others, Dialogism and Monologue]

 

한 가정을 지키는 황금률이자, 세상을 지키는 황금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의 시, 바흐친의 사상, 성가정의 귀결점은 결국 ‘대화주의’다.

 

타자는 언제나 담론의 주체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 타자가 발화한 말을 모두 수용할 이유는 없다. 우리 모두 진리의 거푸집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자의 발화내용을 받아들이냐 안 받아들이느냐가 대화와 독백으로 나눠지는 결절점이 아니라, 발화 상황과 그 맥락을 바라보는 것이 대화인가 독백으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78억5천만의 인류는 자기생존이 최우선인 이기적유전자를 가진 존재들이기에 대화에 서툴다. 대화는 노력이지 선천적인 자질이 아니다. 대화는 이 순례의 길을 여는 것이자, 저 너머의 문을 여는 열쇠다. 그때 우리는 '불멸'이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송구영신의 시간에,

 

“(설사 그것이 꿈일지라도)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를 잊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