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생(降生)의 신비, 그 문(門) 앞에서 질문하게 되는 ‘신체의 익명성’
The Mystery of the Incarnation, ‘Anonymity of corps ’ to be asked in front of the door
[대 림 제 2 주 일 (다 해) 2021. 12. 5. Luc. 3,1-6]
사막에 뜬 붉은 것이 해인가, 달인가?
1.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허수경)
최근에 방영된 드라마 대사 중, 기억에 남는 대사가 하나 있다. 그 장면이 나오는 부분만 찾아서 다시 봤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남주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주인공은 죽으면 안되니까, 사막에서 불쑥 걸어나오면서 생사를 확인하러간 여주에게 한 말이다.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냈습니다'(『태양의 후예』- 송중기 대사)
오늘, 글의 주제인 ‘생각과말과행위’를 어떻게 한결같이 하나로 표출하면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는 얘기가 입체적으로 그려져서, 만약, 낙타와 메뚜기, 벌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들도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또 우리 일생 가운데서도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냈습니다'라고 노트에다 꾹꾹 적어 놓을만한 그런 시간들을 통과했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몇 번이나 적었을까가 그만큼 그가 진한 인생을 살았다는 역설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냈습니다' 참 환한 대사다. 우리가 죽을만큼의 상황을 겪었다면 죽을 만큼의 언어를 총동원해 더 리얼하게 극적으로 그 상황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냈습니다'라는 대사는 죽음의 상황을 이하생략하고 아주 가볍게 결론만 들어올린다. 어쨌든 환하다.
「달이 걸어오는 밤」은 허수경이 암 말기 극도의 고통을 겪으면서 쓴 시다.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라는 저 환한 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하면서 시를 읽어 본다
①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달은 아스피린 같다/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그 전나무 밑에는/암소 한 마리//②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다시 달을 바라보면//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③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④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시인은 어떤 진통제로도 가라앉힐 수 없는 통증을 겪으면서, 문득 달을 바라본다. 달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거 같은 착시 속에서 그 달이 아스피린(진통제)처럼 보인다. 꿀꺽 삼키면 달처럼 속이 환해질 거 같다,
흡월(달을 마시다, 삼키다), 화자는 문득 달을 삼키고 환해진 상태로 암소 한 마리를 낳는다. 암소는 「심우도(尋牛圖)」에 나오는 길들여야 하는 ‘나’이기도 하고, 「헌화가」의 견우노인이 끌고갔던 그 미학의 상징인 ‘암소’이기도 하다.
화자는 크리스마스 전구가 일제히 불을 밝힌 전나무가 있는 바닷가에서 암소와 함께 달을 본다. 그 달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삼키고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저 혼자 ‘붉어져’ 있는 달을 보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 달을 보며 잠 못 이루며 고통을 호소했을까? 화자는 문득 ‘산다는 자체가 고통의 바다’라는 어떤 종교의 화두를 떠올린 것일까?
화자는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라며 모든 고통을 삼킨 달을 다시 ‘꿀꺽 삼킨다,’ 암소도 달과 함께 자기 속으로 들어온다. 온 세상의 고통을 다 삼키자, 마치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고통과 하나가 된다. 고통의 덩어리, 고통의 어머니가 된다. 통증을 삼킨 화자는 통증이 빛과 기쁨이라며 ‘통증’의 순교자가 된다. 통증과 하나가 된 것이다.
「달이 걸어오는 밤」에서 보듯, 누군가의 빛이 되는 ‘환한 것’들은 극한 상황을 ‘꿀꺽 삼키고’ 만들어진다.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라는 명문도 극도의 고통을 ‘꿀꺽 삼킨’ 후에 나온 문장이다.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통을 초인적으로 넘어서는 순간에 온몸으로 쓴 언어에 해당한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언어는 누군가에게 빛이 된다.
여기서 ‘꿀꺽 삼킨다’는 것은 손실과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 ‘생각의 탄생’을 의미한다. 자기 앞에 있는 생을 감당하겠다는 강단에서 언어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것이다. 단지 언어적으로만 가벼워졌다면 그것은 빛을 발산하지 못한 채 말의 유희에 불과했을 터이다.
반면, 한없이 무거워지면서 심연에서 빛을 발하는 말들도 있다.
⑤“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다 지나오고나도, 지나온 길들이 아직도 거기에 그렇게 뻗어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길은 다시 가야할 새로운 길이다.” (김훈 『자전거 기행』)
⑥나는 자연을 해독하거나 자연의 일부로 편입시키지 못한다. 나는 거기에 감당하지 못하고, 늘 바깥쪽을 서성거린다. 자연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미망처럼 느낄 때 나는 내가 무섭다. 나는 그 뒤를 감당할 힘이 없고, 보이는 그곳으로 건너갈 길이나 문을 찾을 수가 없다.(김훈, 「말과 풍경」)
김훈의 언어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에 놓여 있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언어의 무게가 무엇인지 예민하게 분별하고 선택할 능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김훈이 경계하는 언어의 무게는 경험해보지 못한 초월론이나 선험론으로 서둘러 귀환하거나 반복되는 순환오류를 경계한다.
언어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모두 어떤 상황에 직면한 이의 생각의 결을 의미한다. 그 언어의 결은 그가 지닌 사유의 깊이에 의해 만들어진다.
2. 나는 바깥에서 나를 만나지 않고, 내 안에서 타자를 발견한다(질 들뢰즈)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사유능력이 없다면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가볍게 혹은 무겁게 인식할 수 없다. 생각할 수 있는 지각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세계 내에서 대상을 발견하고 또한 타자와 나를 인식하는 인간의 존재방식이 지각 내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떻게 탄생할까? ‘생각’ 하면? 우리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라틴어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적인 원리인 로고스와는 달리 인간의 인식 능력을 뜻한다. 중세 유럽에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스콜라철학의 진리가 붕괴함으로써 인간의 판단 능력은 의지할 곳을 상실하게 된다. 로고스로서의 이성이 절대적 권위로 버티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로고스의 위력이 사라진 곳에서 인간은 어떻게 진리와 참을 판단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이러한 질문 앞에서 일종의 사고 실험을 감행했다.
⑦이처럼 생각하는 내가 어딘가에는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진실을 발견한 바에 따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터무니없는 회의주의적 의심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참이다. 따라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를 철학의 제1원리로 결정할 수 있다.(『방법서설』(1637년))
⑧hoc pronuntiatum: ego sum, ego existo, quoties a me profertur, vel mente concipitur, necessario esse verum.
나다, 내가 있다.라는 명제를 말하거나 생각할 때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 (『제1철학에 관한 성찰』(1641))
⑨우리가 즐길 만한 최소한의 의심까지도 모두 거부하는 동안,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라고 상상하는 동안, 우리는 쉽게 신이나 하늘, 신체까지도 없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손이나 발, 그리고 마침내 몸 자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가정할 때 이러한 것들이 진실일까에 대해 의심하는 동안, 매 순간 그러한 의심을 하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러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지식은 철학에서 주어지는 가장 확실한 제1의 지식이다.(『철학 원리』(1644))
데카르트는 이를테면, 우리의 감각은 때때로 우리를 속이기에, 나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로 하였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사람도 종종 오류에 빠지기 때문에, 또한 잘못된 논리에 빠지는데 이를테면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사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종 오류를 저지르는 자기로서는 여기에 제시된 모든 합리를 거짓이라고 치부할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깨어있을 때 경험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사상을 꿈속에서 겪는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나란, 내가 깨어있을 때 내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 역시도 내가 꿈속에서 보는 환상과 마찬가지로 진리가 아닐 수 있다고 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찰에서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모든 것을 거짓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책의 각주에서 위의 문단에 대해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주어진 철학에서 얻는 제1의 지식이다."라고 거듭 부연하고 있다.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의식은 오직 몸을 통한 '육화된 의식'이라고 바라본 메를로퐁티가 있다
⑩표현과 표현된 것, 기호와 의미 작용의 관계는 원전과 번역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같은 유일한 의미의 관계가 아니다. 신체도 실존도 인간 존재의 원본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각 상대를 전제하고, 신체는 응결된 또는 일반화된 실존이며, 실존은 끊임없는 육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존이 사람들이 다른 것들로 환원시킬 수 있는 또는 이것들 자체가 환원될 수 있는 ('심적 사실들'과 같은) 사실들의 질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사소통의 모호한 환경, 자신의 한계들이 흐려지는 지점, 또는 그야말로 자신의 공통적 씨실이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1945))
⑪그래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 되고 누가 보고 누가 보여지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언제나 ‘살chair’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가시성, 즉자적인 감각성의 그러한 일반성, 나-자신의 타고난 그러한 익명성이다. 우리는 자연인으로서 일종의 키아즈마(chiasma)에 의해 우리가 다른 것들이 되고 우리가 세계가 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사물들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타자에게 놓여진다. 신체를 통과하는 주름들은 안과 밖의 이중성으로 표상된다. (메를로 퐁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몸'은 지각하는 주체이자, 지각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만질 때, 지각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된 지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를 현상학적으로 보면, '의미'가 드러나는 장소인 동시에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가 되는 곳이 바로 '몸'인 셈이다. 따라서 '몸'은 '주체와 대상이 순환적으로 엮이어 있는 곳'이다.보통은 '의식'이 '대상'을 지시하고 있지만, '몸'이 지시하는 의미는 '몸'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지각은 의식과 상관없이 그 지각이 이루어지는 '몸' 자체에서 '지각의 변형(보완)'을 일으킬 수 있다. 즉, '의미'가 생성되고 드러나는 '몸'에서, '지각된 요소'는 '구조(형태)'로 파악된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인간 이해의 대전제이고 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육화된 의식' 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세계야말로 모든 '의미'의 발생기반이고, 그 장소는 몸(신체)이 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철학을 전개해 나갈 때 '의식'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몸(신체)'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된다고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후기로 갈수록 전기철학에서 현상학적 시각이 이분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는 데에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낀다. 현상학은 '주체(의식)-대상'이 '대상'을 지시하고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데 있기 때문에, '지시하는 것'과 '지시당하는 것'의 이분법적 사유틀을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즉,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몸' 개념을 주관과 객관, 감각과 이성의 구분이 없어지는, 이분법이 사라지는 곳이라고 말했지만, 철학적 사유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물질적 몸'과 '현상학적 몸' 사이에는 '지시하고 지시당하는' 현상학적 이분법의 틀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후기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상학' 대신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가져오게 된다.
후기 철학으로 대표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메를로 퐁티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하이데거 존재론은 존재는 세계라는 한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매번 자신의 선택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며 세계를 확장시킨다. 즉 존재는 '세계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다.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는 다시 그 속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여기서 개별과 전체는 구분되지 않으며 개념은 순환을 이루기 때문에, 지시하고 지시당하는 지향적 개념이 사라진다.
특히 후기철학에서 메를로 퐁티는 '살(chair)의 개념'을 강조한다. '살'은 감각하는 피부 표면과 그 표면 밑에 숨겨진 '살'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메를로퐁티가 사용하는 ‘살'은 지각으로 느껴지는 물질적인 육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지각 이면에 숨겨져서 보이지 않던 존재 의미가 마치 지각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피부 위로 느껴지는 '지각'보다 둔하고 애매하여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몸'의 체험은 살의 존재론으로 바라볼 때, 단순히 지각된 경험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체험'이다. 여기서 '몸의 체험'을 통해 '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체험하지 않은 장소에서 의미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렇게 한계지어진 존재론적 장소를 말하는 것이 '살(chair)'이며, '살'은 지각함과 동시에 그 지각의 내면에 있는 존재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을 체험해주게 하는 요소가 된다. 이 '살'의 세계에서 '주관과 객관', '감각과 이성', ‘타자와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이 구분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살’이고 이때 ‘살’은 주체와 대상으로 나뉠 수 없는 ‘익명적’인 ‘신체’가 된다. 이는 들뢰즈의 ‘주름’처럼 피부(지각) 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로 존재한다고 하여 '두께'라고 말하기도 하고, 여러 의미들이 겹쳐져서 느껴진다고 하여 '주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바깥에서 나를 만나지 않고, 내 안에서 타자를 발견한다(질 들뢰즈)
르네 데카르트가 육체/정신을 이원론적 존재론을 설정할 때, 세계의 주체는 생각하는 ‘나’가 된다. 그러나 육체와 정신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식은 오직 몸을 통한 '육화된 의식'이라고 바라본 메를로퐁티가 있다. 즉, 데카르트가 생각이 순환되는 자신의 '의식'을 진리로 삼았듯이, 메를로 퐁티는 주체와 대상이 순환적으로 지시하며 스스로를 현상하고 있는 '몸'을 진리로 삼은 것이다.
3.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1-6)
성서에는 세 번의 광야체험이 제시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체험, 세례자 요한의 광야체험, 그리고 예수님의 광야체험이다.
이 광야체험은 ‘생각의 진화’ 그 방향성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전하는 루카 3,1-6을 읽어본다./마태오3, 1-12에는 세례자 요한의 광야체험을 읽어본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3,1-6에는 두 개의 시간과 한 개의 공간이 나온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두 개의 다른 시간을 살아낸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의 신앙 여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의 헤로데로 상징되는 역사적 시간과 Ⓒ의 이사야로 상징되는 원형적 하느님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는 그 공간이 ‘광야’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요한에 관한 자료들은 <4복음서>와 〈사도행전〉,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Antiquities of the Jews』가 있다.
흔히 세례자 요한하면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산 예언자’ 엣세네파와 연결된 금욕주의자라고 불린다. 그런데 순례의 여정에서 광야체험은 세례자 요한뿐만 아니라 누구나 하느님의 시간을 만나기 위해 통과하는 제의적 공간에 해당한다.
광야로 상징되는 제의적 공간에서 역사적 시간과 초월적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는 문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주어진 운명적 생존 상황에 해당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고, 예수가 그랬고, 부처가 그랬고, 모든 성인성녀가 그랬고, 대부분의 수도원의 지향점이 그렇고, 인류의 선각자들, 영성가들, 학자들이 각기 다른 형태의 광야체험을 통해 역사적 시간과 초월적 시간을 동시에 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친, <죄, 용서, 회개, 세례>는 광야체험을 통해서 사람이 <신을 알아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립하는 키워드에 해당한다. 그 맥락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이는 종교적 행위에 국한되기 보다는 인간의 <자기 정립>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고백의 기도>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와 연결해 보면 인간의 자기정립의 핵심가치가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금욕주의적 삶은 마테오복음 5장, 8절에 나오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에 나오는 산상설교와 그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시대에 구세주를 기다리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왜 하필이면 세례자 요한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린 것일까? 세례자 요한의 기다림의 자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을 그릇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마음의 그릇은 무엇일까? 일관성 있는 생각이 담기는 선한 그릇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말-행위>는 많은 영성가들이 창조의도구라고 바라본 반면, <고백의 기도>에서는 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떻게 창조 혹은 죄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묵상하는 것이, 회개 혹은 변화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대림시기에 성찰의 과정과 내용은 <생각과 말과 행위>, 그 방향성이 어디인가를 재배치하는 시간이라 할 것이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은 모든 창조의 시작이다.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를 버리고 의심을 버리고 두려움을 거부할 수 있는 곳이 마음이다. 생각을 길들이는 것은 매순간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숭고한 것을 선택하는 지혜라 할 수 있다. 생각은 말과 행위를 낳는 모태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직전 광야체험은 바로 이 마음을 정립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혹자의 목소리는 현실적인 시선인 마음의 소리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인간조건으로 신적 체험에 해당한다. 생각은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영혼의 들을 수도 있는 내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말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각은 말(기도)로 옮겨진다. 우리의 말은 밖으로 표현된 생각이다. 말은 생각보다 더 역동적인 에너지장을 갖고 있다. 믿음에 의해서 생각들이 명확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라는 <나는~>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가를, 기도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가를,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진리를 내장한 책들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생각이 언어화 될 때, 어령을 갖고 있는 말들은 그 자체로 기적을 견인한다.
⒞행위란 무엇인가? 모든 창조는 행위에서 완료, 완성된다. 행위 혹은 행동은 움직이는 생각과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한결같이’ 일관성있게 선을 지향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창조라고 부른다. 그런데 생각과 말이 따로 놀거나, 혹은 생각과 말과 행위가 분리되어 제각기 표출될 때 우리는 그것을 분리(죄)라고 부른다. 죄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분리 혹은 분열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정립하는 과정이 왜 광야체험에서 가능한가?
⒟. 우리에게 ‘광야’란 무엇인가?
교회력으로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는 신앙의 여정에서 두 번의 광야체험을 우리에게 권유한다.
김훈식으로 ‘제 운명의 자리로 돌아가’ 자기의 뼈마디를 헤아려 보는 시간이 광야체험이다. 어떻게 감히 인간이 신을 안다고 신의 뜻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어떤 길을 가야지만, 어떤 문을 열어야지만 신의 시간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가?
광야는 성경에서 영적 체험의 공간에 해당한다. 광야는 1차적으로 ‘나’를 정립하는 시간, 모든 장식이 제거된 ‘나’를 체험하는 시간이다.
자기 실존의 상황을 ‘순수하게’ 체험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 철학의 핵심 명제인 ‘인간은 신 앞에 서 있는 단독자’임을 바라보는 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광야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 우리의 열정, 우리의 방황이 무엇인지, 우리의 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 그 현주소를 과감없이 바라볼 수 있다.
대림2주 강론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정치권력을 지닌 헤로데처럼)부질없는 욕심에 둘러 쌓여있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처럼)그릇된 열정에 빠져있든, 그리고 (군중들처럼)방황하고 있든, 그 모든 모습은,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회개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태양을 창조하신 분께서 당신의 몸을 덥히시기 위해, 소와 양의 열을 필요로 하신 신비를 깨달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들판을 꽃으로 장식하신 분께서 벌거벗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그 신비를, Ⓗ또 영원한 말씀을 지니신 분께서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그 신비를 깨달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림 시기에 우리에게도 회개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서이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그 강생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강론은 우리에게 강생의 신비에 관한 세 번의 질문을 던진다. 나의 역설을 이해하고 있는가? 너라는 타자의 역설을 이해하고 있는가? 신의 역설을 이해하고 있는가?
역설(모순형용)은 양립할 수 없는 두 항이 모두 진실임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컨대, 찬란한 슬픔의 봄, 소리없는 아우성, 님은 갔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등의 역설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는 보여지는 나와 보여질 수 없는 나가 있듯, 타자 역시 보여지는 부분과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을 가진 역설의 존재다. 생각 혹은 의식은 보여질 수 없다. 그러나 말과 행위는 보여 질 수 있다. 영혼은 볼 수 없지만 몸은 볼 수 있다. 보여지는 것은 보여질 수 없는 것으로부터 파생한다. 나와 타자의 역설은 나와 타자가 통과하는 시대의 역설과 다시 섞여서 불완전의 완벽함이라는 복합적인 역설이 만들어 진다.
이 세 개의 역설이 교차하는 ‘키아즈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또 나와 타자와 시대의 역설을 이해하지 않고도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 가공할 역설, ‘강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십자가 사건은 끔찍하지만, 어떤 가공할만한 힘의 논리로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강생의 신비는 그 어떤 단서도 없는 사건이다. 힘의 논리를 배제한 채, 하늘에서 한 아기가 땅으로 아찔하게 뛰어내린 사건이다.
Ⓕ에서 태양과 소와 양, Ⓖ에서 들판의 꽃들과 벌거벗음, Ⓗ에서 영원한 말씀과 말하지 못함은 일상의 눈으로 본다면 극단의 대조, 간극, 낙차를 지닌 화해불가능한 세계로 인식된다.
그러나 역설의 신비를 통찰할 수 있는 이들에게 그 간극과 낙차는 동일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가난가운데 풍요로움이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자, 침묵가운데 말을 알아듣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질세계를 통해 물질세계 너머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메를로 퐁티(존재론)를 통해 하이데거와 데카르트의 철학(선험론)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회개는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열로 인해 미망(인간의 행위)을 헤메던 길에서 그분을 향해 돌아서는 것(신적 행위)을 의미한다면 ‘일상의 시선’에서 ‘초월적 시선’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대림 시기에 우리에게도 회개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서이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그 강생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다듬어 보자!
‘강생(降生)의 신비’는 당연히, 자명하게 이해되는 진리인가?
‘강생(降生)의 신비’는 선험적인 진리에 해당한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때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당위적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 또한 체험해보지 않은 영역의 명제를 더 이상의 시도를 제한하거나 포기하고, 누군가가 이미 내놓은 진리로 빠르게 환원할 수도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모두 신의 뜻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떻게 인간의 상황은 이해할 수 없는데 신의 뜻인 것은 알 수 있나?)
이해할 수 없는 시건들이 모두 신의 뜻으로 환원된다면, 우리에게 왜 ‘자유의지’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가?
‘강생의 신비’는 ‘십자가 신학’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
우리는 ‘사람이 되시어’에서 그분과 우리의 동일한 생존조건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보편적인 생존 조건을 알고 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다. 또 이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매순간 <생각과 말과 행위>를 창조한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경험으로 선-조건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와 동일한 생존조건하에서 최상의 <신적 행위>을 선택하였다는 것을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은 역사내적 조건에서 역사외적 조건을 매순간 선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생의 신비를 깨닫는 어떤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강생의 신비만으로 강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강생의 신비를 역으로 깨닫듯,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질 때만이 <이미, 지금> 현존하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대칭구조가 마련된다.
그 십자가란 나의 <몸과마음과영혼>이 타자의 <몸과마음과영혼>의 행로와 섞이고 엉키는 메를로 퐁티가 바라본 ‘살의 키아즈마(chiasma-교차배합)’를 통해 ‘익명의 그리스도’가 되는 행로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너를 통해 우리와 신의 관계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 현존(말씀)이 인간을 통해(사람이 되시어) 현현된다는 이 역설을 바라보지 않고는 ‘강생의 신비’를 이해할 길이 없다.
그때, 그분이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있는 것이나 그분이 솔로몬의 황금 궁전을 거닐고 있는 것이나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그분의 ‘강생의 신비’를 ‘가난한’ 구유라는 감상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엄중한 생존 조건에서 바라보려 할 것이다.
글을 정리해 본다.
[강생(降生)의 신비, 그 문(門) 앞에서 질문하게 되는 ‘신체의 익명성’
The Mystery of the Incarnation, ‘Anonymity of corps ’ to be asked in front of the door]
강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신학공부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 조건, 얽히고설킨 '신체의 익명성'을 통해 신의 현존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위해 형이상학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관념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지닌 생존 조건인 광야, <몸과 마음과 영혼>을 더 깊이 묵상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대사처럼 "그 어려운 걸 우리가(제가) 해냈습니다"라고 격려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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