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겹의 기다림, 대문자 ‘G’와 소문자 ‘g’ 사이의 ‘호모 메모리스’
-Three layers of waiting, the homo-memory between the capital letter 'G' and the lower case 'g'
[대 림 제 1 주 일 (다 해) 2021. 11. 28. Luc.21,25-28.34-36]
1. 기억이 나를 본다(토마스 트란스퇴메르)
토마스 트란스퇴메르의 「기억이 나를 본다」를 읽어본다.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새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퇴메르는 「기억이 나를 본다」에서 내가 무엇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를 본다고 표현한다. 이 주객전도의 표현은 시적 수사가 아니라 의도와 의지를 벗어난 시간과의 마주침에 관한 것이다.
그런 시간을 언제 체험할 수 있을까?
그 시간은 찰라의 시간을 체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시간’이나 ‘기억’의 편린(片鱗)에 해당한다. 편린(片鱗)은 ‘비늘의 한 조각’이란 의미로 극히 작은 부분을 의미한다. 영원 앞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가장 작은 시간 체험을 말한다.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 서 있는 바로 그 찰라의 순간이 시간의 편린(片鱗)에 해당한다.
그 시간은 인과적 맥락에서 벗어난 시간으로 심연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런 시간체험으로 시인을 이를 ‘기억’이라고 부른다.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나눠지는 경계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시간 가운데 가장 작은 시간 체험에 해당한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너무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화자는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내부에서 문득 솟구친 ‘기억’을 본다. 녹음을 확인하지 않고도 녹음을 기억한 것이다. 그 ‘기억’은 ‘눈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이자 ‘기억의 숨소리’를 듣는 현실 너머의 시간이다. 현실너머의 시간을 경험케 하는 것이, 현실의 감각들이란 것이 놀랍다.
이 기억은 과거의 어떤 순간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 가장 청정한 시간, 근원적인 것들을 체험하는 시간, 모든 시간의 ‘현재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쪽과 저 쪽으로 나눠진 두 시간을 공존하게 하는 시간의 중립지대를 경험하는 일이자, ‘이미-지금-여기’ 있는 현재화된 ‘기억’의 얼굴을 ‘마주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초적 시간체험인 ‘기억의 숨소리’를 듣는 것은 시인만의 섬세한 시간체험일까?
2. 기억과 망각의 역사, ‘호모 메모리스’
영원이라는 무 시간속에서 ‘기억의 숨소리’에 해당하는 찰라의 시간은 무엇인가?
이를 <기억과 망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기억과 망각은 무엇인가를 연구한 뇌과학자 올리버 하르트는 “우리는 망각 없이 어떤 기억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밀란 쿤데라는 “망각은 속도에 비례하고, 기억은 속도에 반비례한다”고 망각증후군에 대해 말한다.
인류의 역사나 우리 개인의 역사를 통틀어 <기억과 망각의 역사>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기억이나 망각이 우리의 취사선택이었다는 데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물론 그 취사선택이 어떤 한 순간의 명쾌한 이성이나 지혜가 작동돼서 선택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선택은 우리 일생 전체를 거쳐 서서히 어떤 선택으로 몰아갔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의 역사는 내가 썼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에 대해 다른 사유를 피력했던 하이데거, 베르그송, 들뢰즈, 니체가 있다. 그들이 말하는 어떤 <기억과 망각>의 시간을 우리도 취사선택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이 이 글의 주제에 해당한다.
먼저, 하이데거가 말하는 <기억>을 살펴보기로 한다. 하이데거에게 <기억>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선(先)-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란 기억을 필요로 한다. 감사가 사유된 것과 그것이 사상에, 사유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이 기억이다.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이지만, 이런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해도 아직 우리가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 보증된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기억’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뇌의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이 담당하는 그 ‘기억력’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본질적인 ‘머루름’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행위가 발생한 시간 속의 과거가 아니라 행위 이전의 시간, 시간의 근원이 되는 최초의 기억을 의미한다. 즉 세계-내-존재인 모든 존재의 ‘있음’의 근원에 관한 ‘기억’이다.
‘기억’이 그런 것이라면 ‘기억’ 속에는 그 무엇인가 본질적인 ‘회상’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을 경험하지 못한 인류가 신의 존재를 이미 안다고 할 수 있으며, 알고 있는데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신론이다.)
그렇다면 사유에서 연유한 ‘감사’는 ‘기억’과 어떤 관계인가? 근원적인 감사는 자신이 감사 입은 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감사 입은 것을 기억해낼 수 없다면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감사한다는 것은 존재자체를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함에는 <기억과 감사>가 거의 한 쌍으로 다닌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기억’은 선험적 시간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선험적인 ‘기억’의 사유에 대해, 경험적인 시간의 ‘기억과 망각’을 말하는 베르그송, 들뢰즈, 니체가 있다.
물질은 현재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생명은 물질처럼 현재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뭉치고 이어져서 서로 속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것이 응축이자 지속이다. 지속하는 것은 기억이 있다. 응축하는 것은 기억이 있으며, 기억이 있는 것은 자유롭다. 자유는 긴장이다. 생명의 긴장과 물질의 이완이 서로 만난다. 생명은 물질이 항상 있는 현재에서 만난다. 생명은 과거를 현재에도 보존하는 기억이며, 그 기억이 현재만을 반복하는 물질의 현재에서 만난다. 물질과 정신이 만나는 곳이 지각이며, 이 심신관계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감성에게 감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물음을 단지 기억과 사유에 대해서만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기억의 단계에서 어떤 초월적인 기억의 아득한 태고를 구성하는 것은 상기안의 유사성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의 순수한 형식 안에 비유사성이다. 이 시간의 형식에 의해 균혈된 나는 마침내 오로지 사유밖에 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도록 강제받기에 이른다(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과 『차이와 반복』은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으로부터 연유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과 질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촉발된 초월적 기억을 ‘기억’에 대한 집착이라고 몰아가는 철학사의 경험론과 그 맥을 같이한다. 니체가 초월적 기억에 안티-테제로 ‘망각’을 사유할 때, 베르그송과 질 들뢰즈는 하이데거와 다른 경험의 시간 안에서의 ‘기억’을 말한다.
니체는 기억은 질병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고통의 화인(火印)이라고 보았을 정도다. 어떤 사람이 일생에서 인두나 다리미로 달구어 찍었다고 할 정도의 고통이 존재했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기억이라고 본 것이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고 그 고통가운데 가장 고통스런 것만이 기억의 저장소에 남는다고 니체는 보았다. 치매에 걸린 환자들이 행복했던 기억이 아니라 고통스런 것들만 반복해서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니체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고 망각을 창조와 생성의 도구로 보았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니체 『도덕의 계보학』)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니체, 『짜라투수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에게 ‘망각’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그렇게 단순한 타성, 기억력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초월적인 형이상학의 ‘망각’을 의미한다. 신을 잊으라는 것이다. 니체는 망각을 일종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기 제어능력이라고 보았다. 이는 선택적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망각이라는 제어능력이 파손된 인간은 자기안의 순진무구한 아이를 상실한 인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건강한 망각능력을 복원하는 것이 니체가 바라본 창조적인 인간이 회복해야할 우선 과제로 본 것이다.
하이데거의 ‘기억’, 베르그송의 ‘기억’, 들뢰즈의 ‘기억’ 니체의 ‘망각’은 어느 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 선택적인 인간 조건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기억과 망각이 놓여있는 지반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땅은 현실의 땅이 아니다. 선험적인 곳, 모든 있음의 원인, 근원적인 시간이다.
반면 베르그송, 들뢰즈, 니체가 서 있는 땅은 이 땅의 현실에서 파생된 실존상황, 역사적인 현실에 해당한다. 이들의 사유를 고려한다면 혹은 고려하지 않을지라도 <기억과 망각>은 어느 정도 선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영혼의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기억과 망각은 제로섬게임을 하지 않기에 그 둘의 관계를 균형있게 조절할 ‘영혼의 경제학’이 필요하다”(이진우 외, 『호모 메모리스』)
우리는 경험적으로 기억과 망각의 역사 속에서 어떤 선택적 시간을 산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 베르그송, 들뢰즈, 니체가 말하는 <기억과 망각>은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하이데거의 근원적 ‘기억’을 선험적 시간이라 한다면, 베르그송, 들뢰즈, 니체가 말하는 ‘기억과 망각’은 경험적 시간이라고 바라볼 수 있겠다.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16세기, 비잔틴 미술관, 아테네, 그리스.
3.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루카 21,25-28.34-36)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해야 할까?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고 전하는 루카 21,25-28.34-36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 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25-28.34-36은 크게 경험적 시간과 선험적 시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선험적 시간에 해당한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우리의 현실은 단적으로 ‘빵 없이 살수도 없지만, 빵만으로 살수 없는’ ‘두 겹의 현실’을 살고 있다. 이렇듯 경험론과 선험론의 두 세계를 살고 있다고 전제할 때, 이는 대림시기뿐 아니라 신앙의 여정에서 언제나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시간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험적 시간과 선험적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즉 구체적 생존방식, 그 선택을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루카 21,25-28.34-36은 ‘그 날로’로 지칭된 묵시문학적 표현은 실존의 현장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들에 대한 은유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경험적 시간과 선험적 시간은 나란히 병치된 대등한 시간일까? 이는, 하느님 나라를 ‘이미 여기’ 와 있는 시간으로 볼 것인가? 아님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시간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 둘의 만남은 들뢰즈가 간파한 대로 폭력적인 시간의 마주침에 해당한다. 경험론자와 선험론자는 한 식탁에서 밥을 먹기가 어렵다. 그들의 소통방식은 통일성으로 수렴이 아니라 차이의 발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다.
그런 맥락에서, 앞에서 살펴본 하이데거, 베르그송, 들뢰즈, 니체의 <기억과 망각>에 대한 사유는 철학사에 국한되는 사유가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낼 것인가를 묻고 있으며, 단적으로 우리는 두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는 중이라고 엄중하게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에 직면한 실존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두 시간의 틈을 벌리고 대척적인 시간으로 바라보라고 종용하는 시선들이 현실보다 더 무서운 현실로 다가온다. 현실 위에서 현실을 조종하는 그 상위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지 못하게 한 쪽 시간에만 손을 들어주는 사유의 폭력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현실인식의 제로섬게임에 해당한다. 초월이든지 경험이든지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과연 이 순례가 그렇게 간단하게 하나만 집어들 수 있는 여정인가?
우리는 이를 ‘세 겹의 기다림’의 상황에서 바라볼 수 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2021년10월24일)] 강론에서 인용한 아델 베스타프로스는 이를 사랑, 희망, 믿음 세 가지. 기다림의 얼굴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참아주는 것은 사랑이요,/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입니다./그리고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믿음입니다”
토마시 할리크는 아델 베스타프로스와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분도출판사, 2016)에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미래의 시간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는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하느님 없는 삶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고는 종교적 추구의 의미,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일과 그 세 얼굴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기 어렵다”
아델 베스타프로스와 토마시 할리크는 경험적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나, 너, 하느님>을 어떻게 기다리고 인내해야 하는지를 ‘믿음, 희망, 사랑’의 세 얼굴이 바로 그 결과라고 전한다.
반면, 닐 도날드 윌시는 『신과 나눈 대화』(아름드리, 1997)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지에 따라 ‘이미-여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다는 선험론적 시간을 전한다.
Ⓖ“깨달음이란 (천국에 가려고)어디도 갈 데가 없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이 ‘지금, 여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천국에 가는 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그 곳에 있음을 아는 것만이 있을 뿐이며, 수고나 애씀이 아니라 받아들임과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닐 도날드 윌시)
모든 영성가들은 닐 도날드 윌시가 전하는 선험론적 시간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궁극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 세상은 이미 <완벽하다>고 바라본다. 그들의 통찰은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살아낸 시간이 바로 그 시간이며, 그런 시간을 살아냈기 때문에 그런 시간을 살지 않는 이들에게 그분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바라본다.
그런데, 이 세상을 순례중인 대부분의 인류는 경험적 시간(아델 베스타프로스 & 토마시 할리크)과 선험적 시간(닐 도날드 윌시)을 동시에 살아내는 숙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시간 중에 하나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을까? 물론 선택해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보편적 다수는 두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야하는 문제 앞에 서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스 킹은 『나는 무엇을 믿는가』(분도출판사, 2021)에서 이런 믿음의 딜레마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한다.
Ⓗ“믿음은 교회가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을 군말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나의 믿음, 나의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 믿음은 인간의 이성, 마음, 손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 인간의 사유, 의향, 감정, 행위를 포괄하는 어떤 것이다”
‘적극적으로 나의 믿음, 나의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고 전하는 한스킹의 제언은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믿음을 요구한다. ‘스스로 답을 찾는다는 것’이 또 무엇인가?
각자가 직면한 실존의 상황이 다르고, 지고가는 십자가가 다르기 때문에 그 답을 도출하는 과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리좀적 사유’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미-지금-여기'라는 그 답은 같다.
길은 다른데, 답은 같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아델 베스타프로스의 제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다른 사람을 참아주는 것은 사랑이요,/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입니다./⒞그리고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믿음입니다”
⒜와 ⒝는 경험적인 시간의 영역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할지라도 명석-판명한 실존의 영역이다. 수긍할 수 있는 영역이다. 문제는 ⒞의 믿음의 영역은 선험적인 영역이다. 그 선험적 영역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은 경험이고 실존적인 시간의 임계점을 넘어야 한다는 데 있다.
모든 영역은 자기 임계점이 있다. 그걸 넘어서야 한다. 닐 도날드 윌시나 영성가들의 통찰은 그 임계점을 넘어선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 있는 어떤 이들에게 분노나 냉소, 체념을 유발하는 시간의 얼굴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경험론과 선험론 두 시간을 상황에 맞게 지혜롭게 안배 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지혜롭게’는 반드시 ‘온화하게’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 49)
위에서 시간의 임계점을 넘는 일을 루카 복음사가가 언급한대로 불의 시간, 하느님적이지 않은 것들을 태워버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시종일관 성당이나 교회만 찾아가서 기도만 하라고 직업자체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아델 베스타프로스와 토마시 할리크가 바라본 대로 너를, 나를, 하느님을 기다리고 견디는 시간을 살면서 동시에 닐 도날드 윌시가 제언한 ‘이미-여기’ 와 있는 시간을 포괄적으로 살아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긴장 다음에 이완’이 아니고 ‘긴장과 이완’을 동시에 살아내는 것이, 시간의 임계점을 넘는 일이다. 다른말로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숭고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울면서, 웃는 것과 비슷하다.)
글을 마무리해 본다.
세 겹의 기다림, 대문자 ‘G’와 소문자 ‘g’ 사이의 ‘호모 메모리스’
우리는 결국에, 피땀을 흘리며 통과하던 경험론적 시간에서 벗어나, 선험론적 시간 앞에 서게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오늘이거나 미래의 그 어느 때이거나.
현실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은 항상 재배치, 재맥락화가 요구되듯 시간도 마찬가지다. 경험적 시간을 선험론 시간이 끌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2021년 대림절 초입에 그래서 제언해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 앞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쓰라린 시간들을 통과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그 시간이 영적으로도 쓰라린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현실은 피땀이 흐르듯 쓰라린데, 영적으로는 쓰라리지 않다는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
세상에 대한 어떤 원망도 분노도 연민도 없는 시간 속에서 너를 기다리고, 나를 기다리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이 세 겹의 기다림이 때론 하느님의 사랑을 대문자로 썼다가 때론 소문자로 썼다가 때론 그 이름조차 지워버리며 오락가락 할지언정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호모 메모리스>란 사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루카 21,25-28.34-36)에서 '힘' 이라고 표현된 그 '사랑'은 우리가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사랑도, 도망친다고 도망칠 곳이 있는 그런 '사랑'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때까지라는 시한부가 정해진 그런 '사랑'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끝 날까지 기다려주는 그 '사랑'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행복한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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