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이 놓여 있는 풍경, 그 사이를 흐르는 강(江)
-The landscape where two books lie, the river flowing between them
[연 중 제 33 주 일 (나 해) 2021. 11. 14. Marc.13,24-32]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1. 연애의 정석, 나와 당신, 그리고 강(江)
황인숙의 『강』을 읽어 본다
①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나한테 토로하지 말라//②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라//③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울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④강가에서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의 『강』은 각 연의 마지막 시구가 동일한 형태와 의미를 지닌 채 반복되어 있다.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라/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강가에서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언뜻 까칠한 연인들의 피상적인 관계에 대한 피곤함의 토로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사랑의 담론에만 몰두한 칼린 지브란의 글이나 라이너마리아 릴케의 시편들과 연결하여 읽어본다면 황인숙의 『강』은 연애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애의 정석? 연애 혹은 사랑은 ‘빛’ 혹은 ‘찬란함’에 대한 목격이자 재해석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애증들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즉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기호들을 해석하지 못한다면(나 자신의 삶을 사유할 수 없다면) 나와 당신이 품어내는 두 겹의 기호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유할 수 없는 사랑은 각자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던가를 증명할 뿐 사랑, 고유의 빛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끝내 알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와 당신 사이에 ‘강’이 있다면? 혹은 ‘강’이 없다면? 그 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강은 일종의 관계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읽기의 훈련이다. 그 강은 하늘일 수도, 산일 수도, 상담자일 수도, 친구일 수도, 주어진 소임일수도, 그리고 신일 수도 있다.
사랑에 왜 ‘강’이 필요한가?
사랑하는 이가 내뿜는 그 기호들과 내 인격이 품어내는 두 겹의 기호들을 단 한순간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겹의 기호가 두 사람 사이에서 화합적 결합을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기호는 형상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우연이 나타난다. 그 형상이 가지는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즉각적이지 않고 사후적이다. 시간을 견디는 연인들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객관주의자들이자 실증주의자들이라, 객관과 실증 너머에 있는 사랑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그 우연하고 ‘신비한 축복’을 알아보지 못한다.
황인숙의 등단작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에는 「강」을 해석하는 기호가 등장한다, 그 기호의 이름이 ‘고양이’다. 시인으로 살겠다는 것은 날것의 삶을 살겠다는 당돌하고 도발적인 자세이자 사실 시인으로서는 당연한 선언에 해당한다. 그 날것의 삶에 대한 대유법이 ‘고양이적’인 삶이다.
⑤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굴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나는 툇마루에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가시덤풀 속을 누벼누벼 너른 벌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 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닥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 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⑥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 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고양이적’인 삶은 상투성에 자신을 맡기지 않겠다는, 생생하고, 야생적인 생을 즐기겠다는 주체의 선언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과 거의 동의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강’이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라/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강가에서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영성가들은 모든 사랑은 삼위일체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와 당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제3의 힘이 개입하여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킨고 보았다. 두 사람의 힘만으로 사랑을 완성시키고자 할 때, 그 사랑은 필연적으로 광기나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를 라이너마리아 릴케는 ‘사랑에 빠질수록 홀로가 되라’ 칼린 지브란의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를 만들라’고 조언하기도 하고,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끝까지 둘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플라톤과 하이젠베르크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최소한 삼각형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악이란 두 쌍이 대립이라고 보기도 하며,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도미노현상을 일으켜 조만간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으며, 헤겔은 그동안의 철학사와 역사를 통합해 정반합, 삼각형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나라는 책, 당신이라는 책, 그 책을 읽는 ‘위험한 독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책을 읽는 안내표지이자 지혜서가 바로 ‘강’이라는 기호라고 할 수 있다.
2.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서야 날개를 핀다(헤겔, 『법철학 강요』)
질 들뢰즈는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그 ‘강’의 이름을 『푸르스트와 기호들』, 『감각의 논리』, 『철학』에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예술적 사유’라고 차별화하여 부른다.
철학적 사유는 정신으로서의 정신이, 사유자로서의 사유가 참을 원하고 사랑하고 욕구하기에 자발적인 ‘선’ 의지와 일치한다. 그것은 이미 생각된 결정으로 지성으로 쓰여진 문자 해독이기에 철학적 진리에는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거기서 발견된 진리에는 땀이 묻어 있지 피가 묻어있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사유는 비자발적이고 우연적이고 폭력적 마주침이기에 사유 바깥에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물의 형상이라는 ‘살’을 지닌 상형문자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질 들뢰즈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철학에 대항하는 철학으로 읽어내면서 예술적 사유의 한 모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⑦“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랑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언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 사랑받는 존재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영혼으로서 나타난다.
⑧“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읽는 기호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절반쯤은 대상 속에 싸여 있고 다른 절반은 우리 자신 속에 걸쳐져 있다. 우리는 기호가 의미하는 것을 기호가 지칭하는 존재나 대상과 혼동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마주침들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우리는 그 마주침들이 우리에게 내리는 명령들을 피해버린다”
⑨본질들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 속에 감싸여 있으면서, 우리의 자발적인 노력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유하도록 강요받을 때만 본질들은 사유에 붙잡힌다. 그것은 폭력을 쓰는 사물들, 우연히 맞닥뜨리는 기호들이다.
⑩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그러므로 해석하는 것이고 번역하는 것이다. 본질들은 번역해야할 산물인 동시에 번역 자체이며 기호인 동시에 그 기호가 감싸고 있는 의미이다. 이 상징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마주침의 우연성과 사유의 필연성’이 그것이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어느 날, 홍차와 마들렌을 한 입 먹는 순간 그 맛에서 어린시절 콩브레 마을 전체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의 몸 전체를 휘감는 이 기묘한 느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나이 들어 게르망띠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잘 못 놓인 포석을 밟아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하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던 베니스의 생 마르크 성당에서 밟았던 포석의 느낌과 겹치면서 베니스 전체를 소생시켜 준다. 하인이 준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도서관에서 넘겨보던 옛날 책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마들렌과 홍차, 포석, 숟가락 소리,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은 모두 우연히 마주친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물질적 펼침>이라는 선으로 연결하여 <근원적 충만>이라는 ‘되찾은 시간’으로 모아진다.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을 연결하는 기호들은 늘 우연적이고 사후적이며 사유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사유의 폭력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예술적인 사유 속에서, 우리는 사물이 환기하는 관념(사랑)을 사유할 수 있을 때, 그 기호가 내장하고 있는 본질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그 순간에 즉각적 즉물적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이를 헤겔은 모든 것을 경험한 인류가 훗날 참이라고 말한 것이 진리이며, 맨 나중에 말한자의 유리함이 바로 지혜라는 이름의 진리라고 말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서야 날개를 핀다"(헤겔, 『법철학 강요』)
3.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르코13,24-32)
그렇다면, 마르코13,24-32에 나오는 ‘종말’이라는 기호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종말은 신이 계시를 통해 진리를 나타낸다는 묵시(默示)를 뜻한다. 그 어원은 ‘공개, 계시, 폭로’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Apokalupsis)’로 아포칼립시스는 ‘덮개를 떼다, 덮개를 걷다’라는 뜻으로 가려두었던 것을 공개한다는 뜻이다. 신이 특별한 사람(예언자)을 통해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인류의 운명과 세계의 종말, 신의 목적, 새로운 세상의 도래 등을 계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코13,24-32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마르코13,24-32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라는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문장은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사유를 요구하는 문장, 우연히 나에게 도착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와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 는 의미상 충돌하는 전언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종말의 상태는 알 수 있지만 그날과 그 시간은 모른다는 것에서,
<안다-모른다>의 이중 구조를 좀 더 들여다보면
Ⓐ에서 ‘선택한 이들’ Ⓑ에서 ‘문 가까이’ Ⓒ에서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내 말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법이다. 아버지만 아신다는 Ⓓ는 하느님의 사랑법이다.
Ⓐ,Ⓑ,Ⓒ를 아는 예수님이 Ⓓ를 모른다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법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이 ‘모른다’고 한 유일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모른다’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면서 ‘모른다’고 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모름에 해당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모른다'가 존재한다. 전자는 무지의 모름이다. 진정 알아야 하는 것을 모름이다. 즉 사랑의 모름이다. 후자의 모름은 지의 모름, 앎의 모름이다. 사랑을 아는 모름이다 즉 몰아적 사랑이다. 제자들의 모름이 전자의 모름이라면 예수님의 모름은 후자의 모름이다.
우리가 종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호는, 오직 예수님의 사랑법 밖에는 없다.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는 것부터 생각해보자. 여기서 걸림돌은 ‘선택한 이들’이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요한묵시록과 연결하여 21세기에도 선민의식을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는 우리만 선택했다라고 논란의 여지가 간혹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논란을 종식시키는 것은 바로 ‘십자가’다. 예수님이 말하는 선택은 십자가와 연결하여 바라본다면, 일부가 아닌 전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인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특정한 민족이나 특정한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여야지만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사랑과 일치한다.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라는 것에서 예수님에게만 선택의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도 선택의 여정 중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가 이 종말의 문을 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인류에게 주어진 선택의 키도 다름 아닌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만 열린다고 할 수 있다. 문 앞에 와 있는 그분의 사랑을 알아보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에서 종말의 상태는 ‘하늘과 땅’이라는 이분법이 사라지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한 처음 말씀이 있었다’는 바로 그 창조의 아침이, 종말의 시간이라는 것과 연결된다. 뫼비우스띠처럼 시작과 끝이 '말씀'으로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말씀'은 철회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희망의 이름이다.
이렇게 종말에 관한 세 개의 코드를 따라가다보면 Ⓓ의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라는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종말에 관한 철저한 <계시와 은폐>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종말 상태의 계시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은 알 수 없다는 은폐속에는 영원이 지닌 무시간적 속성과 아버지와 인류의 사랑을 바라보는 아들의 사랑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 속에는 인류에게 자기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허용할 만큼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이 있었음을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이 있다. 또 세상의 시작과 끝에 관여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신뢰의 사랑도 바라볼 수 있다.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결코 알 수 없다는데서 비롯된 ‘모른다’는 십자가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 앞에선 아들의 겸손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모른다’는 것은 안다는 것보다 더 큰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랑은 사실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모른다>가 정답이라는 데서 이를 재 추론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사랑법 <안다-모른다/계시-은폐>의 그 이해와 바라봄의 키워드가 ‘십자가’라는 사실로 다시 돌아온다.
연중 33주 강론에서는 ‘종말’ 혹은 ‘하느님 나라’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십자가라는 단어>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다름과 같이 전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지막 날은 결코 어둡고 두려운 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현실에 더욱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에 가고 싶은 이유, 또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심만 있다면, 그렇다면 혹시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가는 길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답은 알고 있는데, 그 답이 나오게 된 질문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을 준비하고, 또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려면 우리는 먼저Ⓘ ‘사랑이라는 단어와 십자가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연결된 종말’,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종말에 대한 준비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에 예수님을 다시 만나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사랑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강론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류가 원하지 않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공포가 불시에 들이닥친다는 대재앙의 예고가 아니라 ‘사랑과 연결된 종말’이라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사랑이다. 문제는 그 영원한 사랑을 우리가 삶에서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가가 초점일 것이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종말과 전환’ 사이에 존재하는 인류라는 주제에서 인류가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에방점을 찍으며, 이를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라고 전한다.
“구원은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이어야 하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져야 한다. 이로부터 구원은 돈을 넘겨주듯 인간에게 단순히 외부로부터 내려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을 주체로 요구한다. 이로부터 ‘종말’과 ‘전환’ 사이의 간극이 다시 한 번 이해된다. 인간은 ‘예’나 ‘아니요’로 대답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주체가 되고, 이로부터 하느님의 시간을 받아들인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나라의 생산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주체이고, 아들 때문에 주체이다.” 하느님이 되는 것, 모든 소외와 모든 낯선 것을 없애 주시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 누리는 ‘인간 해방’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선물이다. 순수한 사랑이 그 본질에 따라 선물인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희망’이다“.(베네딕토 16세 교황(요셉 라칭거)『종말론-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글을 정리해 본다.
종말이라는 더할수없이 무거운 주제 앞에
“두 권의 책이 놓여 있는 풍경, 그 사이를 흐르는 강(江)(The landscape where two books lie, the river flowing between them)이라는 다소 문학적이고 서정적인 제목을 붙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 읽혀져야 할 한 권의 책으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무서운 독서는 내가 당신이라는 세계를 읽어야 한다는 것과 당신이 나라는 세계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독서로부터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코13,24-32에서 <문 가까이> 와 있는 J라는 이름으로 온 그 세계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나와 당신이라는 인류, 그 사이에 흐르는 강(江)인 <사랑과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사랑과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말씀’으로 시작된 시작과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남아있을 ‘말씀’이 뫼비우스띠처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그때, '종말'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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