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beyond)의 순간성과 영원성에 관한 단상
-A Single Phase on the Momentality and Eternity of Beyond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21. 10. 24. Matthieu.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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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파블로 네루다)
비욘드(beyond)는 사전적으로 ~을 넘어서 ~를 지나서 ~이상으로~를 뛰어넘는 ~이후에 ~이외는 등의 전치사로 쓰이거나, 저 쪽에, 저 너머, 그 이상으로, 그 이후로 라는 부사로 쓰이거나, 저편, 끝, 내세, 초월, 초경험 등 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와 의미로 쓰이든 비욘드를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자 목마름이다.
비욘드의 체험이 축복인 것은 ‘저 너머를’ 흘깃 슬쩍 바라본 것만으로도 인생 전체를 바꿀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늘 같은 형태로 체험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땅에서 사는 자의 운명, 땅의 목마름에 동참하는 것이다. 마치 비욘드는 목마른 자에게 한 잔의 생수를 주고 이내 그 모습을 감춘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영속적으로 체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억과 망각의 시냅스층을 갖고 있는 사람의 뇌구조 속에서 그 찰라의 불빛, 별빛, 태양 그 강렬함이 사라져 다시 통속적인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욘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비욘드는 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비욘드는 늘 같은 형태로 경험되지 않는 것 뿐이다. 다만 그 모습을 다른 형태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지나치기 때문에 내게서 비욘드가 사라졌다고 느낄 따름이다.
한처음 시가 있었다, 라고 할 정도로 시적 아우라는 비욘드를 경험한 상태에서 나온다. 시는 항상 현상이나 현실 그 '너머'를 보려는 생물이다. 그 점에서 시는 문학의 창세기라 할 정도로 강렬한 끌림을 내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는 한 처음 사랑이 있었다와 동의적 출발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 왔는가』를 읽어본다.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 헷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 날개를 거두고 끛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온 것을...//하얀 국화가 피어 있는 날 그 집의 화사함이 어쩐지 마음에 불안하였다. 그날 밤늦게 조용히 네가 내 마음에 닿아왔다. //나는 불안하였다 아주 상냥하게 네가 왔다 마침 꿈속에서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오고 은은히, 동화에서처럼 밤이 울려퍼졌다//밤은 은은히 빛나는 옷을 입고 한주먹의 꿈을 뿌린다. 꿈은 속속들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나는 취한다// 어린 아이드링 호도와 불빛으로 가득찬 크리스마스를 보듯 나는 본다 네가 밤속을 걸으며 꽃 송이마다 입맞추어 주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 왔는가』는 사랑이라는 비욘드를 경험한 화자의 설레임, 출렁거림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에 갑자기 불이 켜진 것 같은 크리스마스를 경험하는 일이다. 내가 너를 처음 본 날이 바로 나에게는 크리스마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올 때 그것은 엄청난 불안을 동반한다는 사실에 있다. 비욘드의 체험과 불안, 이 상호공존하기 힘든 정서적 충돌은 이 땅에서 저 너머를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신적 체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언명으로 주어진다. 불안은 이 땅의 관성이라 할 수 있다. 이 땅의 관성과 저 너머의 아우라는 분명 하나가 되는데 상처, 푼쿠툼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을 읽어본다.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ㅡ 파블로 네루다,「遊星」
①불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 깊은 밤 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은 수심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 불러 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 //②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 자 별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애 보고 메뚜기라 한다. 기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치면,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벼랑의 붉은 꽃 꺾어 달라던 水路夫人보다 내 아내 못할 것 없지만,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③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
이성복 시인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은 파블로 네루다의 「遊星」에서 촉발된 정서가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 실려 있는 「헌화가(獻花歌)」로 이어지는 상호텍스트성으로 연결되는 시다.
파블로 네루다의 「遊星」에서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라는 질문은 타자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다. <돌-물-금>으로 이어지는 사물이 지니고 있는 아우라의 끌림에 관한 것이다. 비욘드라는 내적 경험은 다른 세계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끌림의 아우라를 동반한다. 「遊星」이 지닌 시적 아우라에 이성복은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으로 답한다.
①에서 화자는 머리맡까지 깊숙이 들어온 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달’의 끌림 때문에 화자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달이 지니고 있는 ‘물결무늬’ 때문이다. 그 물결무늬는 한때 달에 물이 있었다는 것이고,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있었다는 것이기에, 그것이 어떤 연유로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사라진 것들’에 대한 끌림이 불면을 유발한다.
②에서 화자는 아파트 12층에 사는 보통의 평범한 행복을 느끼는 가족들을 끌어들인다.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시인에게 그 일상적인 행복은 시를 쓸 수 없게 만드는 물이사라진 다만 물결무늬를 지닌 달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을 신기루처럼 비출 수는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비출 수는 없다는 물결무늬의 공포. 한때, 우리는 문학사에서 ‘이성복현상’을 목격한 적이 있다. 마치 달의 물결무늬처럼 이성복무늬를 입고 있는 시인의 오늘, 비욘드가 사라지기 전의 저 너머를 시인은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③에서 화자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달 그자체가 아니라 물결무늬에 있었음을 다시 확인한다. 달의 이마에 물결무늬가 있다는 것은 달도 한때는 지구처럼 물이 있고, 물이 있다면 생명체가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생명체가 있었다면 그곳에서도 사랑과 이별의 시가 있었을 것이다.
화자가 잠을 못 이루는 이유를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헌화가(獻花歌)」에서 그 답을 찾는다. 수로부인으로 상징되는 아름다운 대상이 수없이 많지만, 자신은 끌고 갈 염소(자신의 생을 걸만큼의 그 무엇)한 마리도 없다는 현실인식과, 벼랑에 피어있는 철쭉꽃같은 자신을 꺾기 위해 그 벼랑을 기어오를 그 누구도 없다는 것.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 그런 절대 고독속에 던져진 자신을 목격하는, 한때, 시의 제단에 무언가 바칠 거 같았던 뜨거운 연기를 피어올렸던 ‘달의 이마에 물결 무늬’일 따름인 것이다.
암소를 끌고 가던 견우노인이 불렀다는 「헌화가(獻花歌)」를 읽어본다.
紫布岩乎邊希/執音乎手母牛放敎遣/吾肸不喩慚肸伊賜等/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자줏빛 바위 가에/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 실려 있는 헌화가는 성덕왕대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해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 곁에는 높이 천 길이나 되는 돌산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바다에 닿아 있는데, 그 위에 철쭉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그 꽃을 보고 사람들에게 그 꽃을 꺾어 줄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마침, 그 곁을 암소를 끌고 가던 노옹이 수로부인의 말을 듣고, 암소를 놓아두고, 꽃을 꺾고 또 가사(歌詞)를 지어 바쳤다는 「헌화가(獻花歌)」는 미(美)의 절정, 혹은 자신을 모두 바치는 몰아적 사랑으로 시적 아우라의 환유로 쓰인다. 이렇듯, 시인에게 비욘드는 미의 절정에 대한 투신, 몰아적 사랑에 대한 환기다.
파블로 내루다의 「遊星」에서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라는 시행과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에서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은 「헌화가(獻花歌)」의 견우노인처럼 ‘미(美)의 절정, 혹은 몰아적 사랑’을 끌어낼 수 없는, 시적 아우라가 사라진 것에 대한 대한 시인의 절박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는 시인에게 시적 아우라는 시인 자신이 시를 쓰는 존재이유이기도 하고, 시가 존재해야할 당위이기도 하다. 즉 시의 본질에 대한 긍정에 해당한다.
세상에는 여전히 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은 많지만, 끌고가던 암소를 놓아두고 벼랑으로 기어올라 <시>라는 꽃을 꺾어 미의 제단에 바칠 그런 시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엄중한 질문이다.
마치 달의 이마에 물결무늬처럼, 시가 아니라 시인이라는 이름, 시의 무늬만을 탐하고 있는가를 묻는 자아성찰의 자책으로 시인은 방안 깊숙이 들어와 있는 달을 보고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비욘드에 해당하는 '그 너머'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님 우리가 어떤 수준만큼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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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28,16-20)
「어떤 응시, 천진하게 물끄러미 하염없이」http://blog.daum.net/m-deresa/12389618에서,
바오로 사도의 공간적인 전교 확장성과 소화데레사의 시간의 전교집약성은 결국 같은 전교의 효과이자, 하느님 자비이자, 신비라는 글을 전한 바 있다.
우리는 순례의 여정에서 바오로적인 전교와 소화데레사적인 전교를 동시에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전교는 무한히 밖으로 나가는 것과 무한히 안에 머무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감과 머무름의 반복이 전교라 할 수 있다.
그 떠남과 머무름은 우리 혼자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땅에서 저 하늘을 동시에 살아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전교는 그분과 나의 관계 정립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전교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신비 체험이자, 자비의 체험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그분을 체험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이들한테 그분을 체험해 보라고 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전교는 저 너머의 체험, 그분의 아우라, 그분의 카리스마, 그분의 은총을 우리가 어떻게 체험하고 잘 맞는 옷처럼 입을 수 있는지, 그것을 정립하는 것이 전교의 첫 걸음을 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고 전하는 마태오 28,16-20을 읽어본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16-20은 예수님 육성을 들은 이들이 세 부분의 얼개로 엮어서 살아내는 일에 해당한다.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마태오 28,16-20복음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는 부분이었다. 성서에서 자주 ‘나’에 대한 천명이 수렴되는 그 맥락을 이해해야지만 ‘그러므로~’ 이후에 나오는 전교의 방향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강생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최종결정체인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너에게 말한다’고 하는 그 ‘나’의 정체성 선언의 연장선에 해당한다.
이를 요한 14,6-14에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20, 26-29에서.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필립보와 토마를 통해 그분은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느님’임을 알 수 있다. 땅(유형)과 하늘(무형)에 관한 모든 권한이 하느님의 것이자 또한 그분 것임을 바라볼 수 있다.
나를 세상에 파견하는 분이 누구인지 바라보는 것이 전교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파견하신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
또한 권력이 아니라 권한이라고 한데서 땅과 하늘의 모든 권한이 무엇인지? 재 추론이 가능하다. 권력이 아니라 권한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는 것.
권력(權力)은 ‘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힘’이라면, 권한(權限)은 ‘사람이나 기관이 보유하여 행사할 수 있는 권리나 권력의 범위’를 일컫는다.
그 권한은 권력의 범위를 정한다. 즉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분 권한에 의해 그 힘이 행사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생활 3년동안 그분이 보여주셨던 ‘사랑’이 그 범위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권력 수행의 방향키가 ‘사랑’이라는 점이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그분을 알게 되면 너라고 지칭되는 나를 알 수 있다. 전교는 그분을 알고 나를 아는 과정이다.
Ⓐ의 그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그러므로’ 이후의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전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후는 우리가 삶에서 비욘드를, 그 너머를 체험할 때 비로서 우리는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너머’를 체험하지 않고는 사실 전교는 불가능하다.
지난주 복음에서, 종과 섬기는 사람에서 돌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수 있는 스승의 위치로 우리가 올라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이 스승은 세속의 스승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헬렌 슈크만은 이렇게 전한다.
Ⓕ세상의 사고(思考)방식 안에서는, 가르치고 배우는 역할이 실제로는 뒤바뀌어져 있다. 뒤바뀜(轉倒)이 그 특성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선생과 제자가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어, 선생이 그 자신보다 제자에게 뭔가를 좀 더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가르치는 행위는 단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작은 그 사람의 시간 일부를 배당 받기로 약속한 특별한 활동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기적수업〉에서는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선생과 제자는 동일하다. 또한 〈기적수업〉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깨어있는 하루 내내 매 순간 지속되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잠에 들어서도 그 생각들이 계속되어야 하는 한결같은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스승과 제자는 여전히 종과 섬김과 목숨을 바치는 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왜 나일까? 좀 더 완벽한 사람을 복음의 메신저로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곧 배우는 사람이라는 데서, 우리는 사랑의 완성에 대한 갈망이 전교의 방향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왜 나일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비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것, 이미 되어 있는 내가 아니라 되어질 나를 이미 되어진 나로 바라보는 그분의 시선을 체험하는 것, 그것은 미래와 오늘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 ‘오늘’을 살아내는 것. 나는 나보다 앞서가는 나를 경험하는 것이 전교의 첫걸음에 해당한다.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 우리가 사랑을 할 때만이 그분이 사랑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가 세상에서 배운 그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를 이끌어 주신 분. 나의 생각과 다르게 또 나의 계획과도 다르게 나를 이끌어주신 분,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들의 꿈을 이루어주신 분!”
그분의 방식으로 나의 길을 열어 주시는 그분을 통해,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실존적 존재론적으로 경험하는 일, 그것은 '저 너머'의 비욘드를 체험하는 일이다.
Ⓗ"하느님을 그야말로 비욘드(beyond)이시다. 우리 인간의 생각을 훨씬 넘으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계획이나 생각을 우리가 미리 가늠하거나 헤아릴 수가 없다" (정순택 베드로 주교)
예수님은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내 생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분과 나는 <우리> 혹은 <하나> 였음을 통찰하게 된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와 Ⓑ는 이제 그분이 우리와 함께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다는 사실로 모아진다.
우리는 언제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교리적 이해가 아니라 실존적이며 존재론적으로 경험하는가? 경험유무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전교의 최일선에 나설 수 있는가? 이런 질문 속에서,
우리는 일흔두제자를 파견하시며 루카 10, 1-12에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한다.
그것은 세속의 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자, 복음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이미 무엇인가 갖고 있지 않으면 전할 수 없다는 '비움과 채움'에 대한 역설에 해당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것만을 타인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교의 최일선에 나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랑과 희망과 믿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과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라는 향주삼덕의 옷을 이미 입고 있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들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화데레사처럼 살지 않으면 바오로처럼 살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참아주는 것인 사랑, 또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인 희망, 그리고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인 믿음, 이 세가지 덕을 갖추어야 우라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또 그렇게 만난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삶 속에서 네가 이 땅에서 산다면 나는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고 신음하고 부르짖을 정도의 어떤 이들, 무한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복병을 만나게 된다. 나의 자유를 훼방하는 다른 사람들을 견디고 또 견디어 내는 시간을 걷게된다는 것이다. 그 역으로 누군가는 나를 그렇게 견디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견디고 또 견디는 중이다. 완덕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자신, 실패와 무능, 나약한 우리 자신의 심연 속으로 던져서 깊은 구렁 속에서 울부짖는 다윗처럼 우리 자신을 견디고 있다.
그것 뿐인가? 우리는 이 세계의 울부짖음에 대해, 우리의 희망이 응답도 없이 보류되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하느님의 부재를 무신론자처럼 견디고 또 견디고 있다.
이렇듯, 우리도 모르는 채, 이미 향주삼덕의 옷을 입고, 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 10,9-18)라는 전언은
나의 전인격의 투신을, 전 존재의 견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 <발>은 우리 몸,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든,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된 상태가 아니고는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글을 정리해 본다.
향주삼덕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저 하늘을 동시에 살아내는 일이다. 따라서 「비욘드(beyond)의 순간성과 영원성에 관한 단상」이 혈액처럼 내재화되어야 한다. 찰라처럼 격렬하게 우리를 휘어잡았던 저 너머를 체험한 시간이 영원한 생명의 초대임을 살아내는 것,
그런데, 이 땅에서 저 너머, 하느님의 섭리의 순간을 강하게 체험할지라도 그 체험은 우리의 노력여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또한 그 강렬한 체험이 돌연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대부분의 시간속에서 우리가 ' 저 너머'를 바라보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보다 더 지난한 순례의 여정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우리를 이렇게 위로한다. 믿음과 희망, 그 모든 것이 사라져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현존의 부재'를 견디며 걸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상처처럼, 얼룩처럼, 흔적처럼, 느낌처럼 남아 있는 그 '사랑' 때문에.
이성복의 「느낌」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서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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