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보임’의 파놉티콘에서 시놉티콘 너머 무엇이 있을까?
-What is beyond the synopticon in the panopticon of 'seems to be seen'?
[연 중 제 32 주 일 (나 해) 2021. 11. 7. Marc.12,38-44]
1. ‘본다는 것’은 어떻게 ‘고요함’을 만드는가?
이문재의 「물의 결가부좌」를 읽어본다.
①거기 연못 있느냐./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②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③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 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 뜨고 있느냐.④눈 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 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있느냐.//⑤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연근이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잉어가 부레를 크게 하는 소리, 진흙이 뿌리를 받아들이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⑥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⑦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 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 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 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⑧고개 들어 보라./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이문재의 「물의 결가부좌」는 한 사내가 연꽃을 보는 것에 초점이 놓여있다.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는’ 바로 그 직전에 사내는 뗏목을 타고 연못 한가운데로 나아가 연꽃이 피는 순간을 본다.
그것을 전지적시점의 화자가 바라보고 있다. 이 두 겹의 시선 속에서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 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라는 물음 속에서 사내는 단지 시각으로만 연꽃이 피는 것을 보려던 것이 아니라 연꽃이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보고 싶었던 거고, 사내는 그 순간 연꽃과 하나가 된다.
<연꽃을 본다- 연꽃이 된다>, 이는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제시한 유목적 사유, <~ 되기>에 해당한다.
한 사내의 온전함 몰입 속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 ‘천지인’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자, ‘정중동(靜中動)의 한 가운데 하늘과 연꽃과 사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 사내를 바라보던 화자는 ‘물’이 되어 물의 시선으로 이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사내는 연꽃이 되고 화자는 물이되고 결국엔 화자는 사내가 된다.
여기서 사내가 연꽃이 되는 순간 화자는 물이 되었다는 이 두겹의 <~되기>는 <시선>의 완성에 해당한다,
<정중동>은 <화자-연꽃-사내>의 순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진행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컷 안에 모두 잡힌다. 하늘과 땅(연못), 사내, 연꽃이 동시에 화자의 렌즈인 시선에 포착된다. 이 거대한 스케일 안에서 사내의 몸짓이 아무리 크다한들 그것은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결가부좌를 튼다’에 이르러 물은 어떤 출렁거림조차 모두 포옹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내에서 물로 시선이 바뀐다.
이렇게, 이 시를 읽다보면 고요란 이 거대한 세계의 시선으로 찰라의 출렁거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겁안에 찰라?
그런데, 「물의 결가부좌」의 마지막 행, ‘물이 다시 결가부좌를 트는 것이 보이느냐?’를 읽다보면 다시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마지막 행을 이해하기 위해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이 시를 읽어 봤다. 그 자세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가리키는 부처의 손 모습도 따라해 봤다. 어렵다.
부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앉는 것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택한 것일까? 결가부좌를 하고 앉으면 늘 땅을 디디던 발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된다. 명상하는 이들이 즐겨쓰는 용어로 최하위 차크라가 최상위 정수리 부근의 차크라로 깨달음을 밀어올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듯하다. 예수의 ‘세족례’, 바오로 사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말도 오버랩 된다. 왜 모두 '발'인가?
결국 이 시를 다시 읽어보면, 고요란 이 거대한 세계의 시선으로 찰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에 이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바로 ‘고요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거시적인 시선은 언제나 이 땅을 굳건히 디뎠던 그 ‘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에 이르러. 고요가 '발'로부터 시작된다? 로 시선이 수직낙하한다.
그런 맥락에서, 고요는 이 세계를 블랭크, 빈 공란으로 괄호칠 수 없다는 것, 고요는 불의 시간, 태풍의 시간을 통과한 고단한 '발'들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 땅의 위로가 아닌가?
2. 시선은 권력이다-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그렇다면, 시선에서 고요만 만들어지나? 현대사회의 모든 권력과 욕망은 시선에서 만들어진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시대의 사랑, 이 시대의 순교, 시선의 윤리학]
http://blog.daum.net/m-deresa/12390052
에서 타자의 상투적이고 세속적인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 시대의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라고 바라본 바 있다.
평생을 미셸 푸코의 저서를 번역하고 연구한 박정자 교수는 『시선은 권력이다』에서 파놉티콘에서 전자시놉티콘을 거치면서 <시선>이 감시체계를 작동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일망감시장치’는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벤담, 『일망 감시시설』)
‘일망감시장치’는 권력을 자동적인 것이며, 또한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이다. 권력의 근원은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신중한 구분 속에, 그리고 내적인 매커니즘을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 개개인들이 포착되는 그러한 장치 속에 존재한다.(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가시성은 권력을 생산한다.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타인에게 바라보여진다는 두려움은 인간의 원초적 공포이다.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권력이 생산된다. 시선은 권력을 생산한다. 더 엄밀히 말하면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권력이 발생된다. 나는 바라볼 수 없는데 누군가 나를 은밀하게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나는 그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다.(박정자, 『시선은 권력이다』)
빛은 권력이다. 1970년대에 뉴욕시 전체가 정전되었을 때 폭력과 약탈이 횡행하는 무정부 상태가 된 적이 있었다. 정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적처럼 권력 전체가 해체된 것이다. 빛이 없어지면 권력도 없어진다는 것, 빛이 곧 권력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준 사례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빛은 사물 혹은 사람을 가시적으로 만들어준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빛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환하게 보인다. 남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은 종속의 상태가 되고 가시성을 확보한 사람은 그를 지배하는 권력을 갖게 된다.
시선의 비대칭성을 가장 잘 구현한 판옵티콘이 이를 증명한다.시선의 비대칭성의 원리를 가장 잘 구현한 것이 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감옥 건물로 구상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다. 판옵티콘은 라틴어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는 뜻인데, 건물 명칭에 걸맞게 중앙의 망루에서 간수 한 사람이 반지 모양의 원형 건물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감시할 수 있다.
감시의 효과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주는 이 항구적 가시성은 보고-보이는 한 쌍의 지각 행위를 해체하여 시선의 비대칭, 불균형, 차이 등을 극대화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일단 이런 장치를 만들어 놓으면 마치 자동 기계와도 같이 누구나 그 자리에 들어가 간단히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보기관의 수장이 누가 되든 감시 기능은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중권 교수는 시선의 감옥이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전이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파놉티콘의 원리는 감시와 경제성을 연결해야 하는 거의 모든 시설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 이 계획에 따라 지어진 공장은 진정한 산업 건물로서 한 사람이 수많은 작업을 감독하는 편리함을 주고, 개폐가 가능한 다양한 공동주택에는 이 원리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한편 파놉티콘식 병원은 청결함이나 환기, 의약품 관리에서 어떤 소홀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는 모두 적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감옥에서 “까다로운 주의사항 몇 개만 없애면” 이 구조를 “다른 시설에 연속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사회 전체를 파놉티콘으로 디자인하자는 제안이나 다름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벤담이 예로 제시한 병원, 병영, 학교, 공장이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주요한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 푸코는 아마도 벤담의 이 책에서 근대적 이성 비판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학교, 병원, 병영, 공장 등 근대의 “거의 모든 시설”이 파놉티콘을 모형으로 한 것이라면, 결국 근대사회의 이상은 곧 감옥이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시놉티콘은 어떤 작동원리를 가지는가?
현대의 판옵티콘 - 전자 감시체제. 그러나 벤담의 판옵티콘은 현대의 전자 감시 체제에 비하면 차라리 목가적인 풍경이다. 판옵티콘에서 사람의 시선이던 것이 현대 감시체제에서는 CCTV의 카메라 렌즈, 하드 디스크의 기억장치, ID 카드의 기록장치 또는 인사과에 비치된 개인의 고과 명세로 대체된다.
회사의 ID 카드에 현금 카드 기능이 있으며, 그것이 사원들을 감시하는 족쇄의 역할을 한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는 물론 신문 판매대에서 책이나 잡지를 살 때, 그리고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할 때도 이 카드를 사용하므로, 회사에서는 어떤 사원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신문을 보는지, 어떤 종류의 운동을 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사들은 마음만 먹으면 어느 사원이 자기 자리에 있는지, 화장실에 갔는지, 아니면 다른 사무실에 가 시시덕거리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회사 내에서 항상 몸에 부착하고 다니는 ID 카드가 중앙의 컨트롤 타워에 연결되어 있어 사원의 동선이 그대로 중앙에서 인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대 전자 감시 체제의 기원을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메카니즘을 사르트르의 대타(對他) 이론과 헤겔의 인정투쟁 이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밝혀낼 수 있다.
이를 푸코는 ‘파놉티콘은 권력을 자동적인 것이며, 또한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이다. 권력의 근원은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신중한 구분 속에, 그리고 내적인 매커니즘을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 개개인들이 포착되는 그러한 장치 속에 존재한다.(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즉, 권력은 도처에 있을 뿐 아니라 일방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쌍장적이라고 본 것이다.
3. 말하라 마리아여,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가(Nonne Maria, dicere quid in via)
성서에서도 ‘바라본다’는 것은 중요한 용어이다.
특히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연민과 자비의 시선, <바라봄>에서 시작된다. 어떤 사람의 외관 너머 그 사람의 본질 전체를 ‘꿰뚫어보다’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바라보다(guardare)” “주의하다(guardarci)” “주시하다(guardarla)” 조심하다(guardarsi)’ 등 ‘바라본다’의 다양한 쓰임은 ‘바라본다’의 궁극적 지점이 어디인가를 바라보기 위해 먼저, 시선의 진화, 그 엇갈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성서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 그들의 사회적 위치만을 추측할 수 있는 외적 표지인 형용사나 명사가 이름을 대신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본다’는 것의 궁극에 도달한 이들이 있다. 마르코 12,38-44에도 ‘봄-보임’의 전형을 드러내는 그런 여인이 나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12,38-44은 대부분의 복음해설서들이 봉헌의 진정성이 무엇인가? 돈인가? 삶인가? 라는 주제로 바라본다.
거기서 멈추지 말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대 전제가 붙은 언명에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존재이유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당위명제로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
제2독서에서 J의 단 한 번의 제헌과 연결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의 예언(마르코131-13/마태오24,1-21/루카 21,5-6)은 우리 각자가 하나의 유지 보수 완성시켜야할 온전한 성전임을 바라보는 것이 이 복음의 또 다른 가르침일 것이다,
마르코 12,38-44에는 ⒜군중들, ⒝율법학자들, ⒞부자들, ⒟가난한 과부, ⒠제자들, ⒡예수님 대략 여섯겹의 시선이 있다.
이 여섯겹의 시선은 방향이 모두 다르므로 꽃으로 치자면 한 송이 장미의 여러겹이라고 말하기에 이질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여정은 이 여섯겹의 이질적인 시선의 길항 속에서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구원이 달여 있네”라는 성주간 저녁기도 찬미가로 모아진다고 할 수 있다.
시선은 세상과 타자에게 나를 열어보이는 개시(開示)에 해당한다. 그러나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며, 무엇을 보았는가에 따라 그 욕망의 방향이 결정되기에 그 ‘나’란 온전히 개안된 상태의 ‘나’라고 보기는 어렵다.
⒜의 군중들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자신의 시선을 정립하기 이전의 인류에 해당한다. 무엇을 볼지 모른다는 것은, 시류에 영합하는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단계, 시선의 걸음마에 해당하는 시기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시선의 ‘타블라라사’, 백지 상태란 백조가 오리를 엄마인줄 알고 살게되는 것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의 율법학자들의 시선은 타자의 욕망을 갈구하고 지배하는 이미지의 정치학, 그 원조에 해당한다. ‘시선은 그 자체로 권력’이라고 보았던 박정자 교수나 ‘권력은 도처에 있다’고 말한 푸코의 시선, 리오타르의 이미지 정치학의 근거에 해당한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욕망의 이름이 무엇이며, 두려움의 정체, 전쟁의 이름, 그 모든 소유욕의 근원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군중들에게 율법학자의 삶을 조심하라고 경계를 시킨 이유는 <시선>으로부터 자유와 생명이 시작된다는 함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시선은 그 자체로 자유와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을 망각했을 때, 인간을 노예의 도덕으로 끌어가는 집단무의식의 늪에 빠진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정치학, 리오타르의 형상/담론 이분법에 대한 고찰」)
⒞의 부자들의 부는 곧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등식을 적용하는 1차원적인 물질주의적인 시선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부만 유일하고 절대적인 축복으로 격상시키는 이유는, 시선이 주는 현실주의의 포만감이 여타의 풍요로움을 가리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의 독재, 그 진원지가 물질적 풍요라는 것이다. 이는 축복이 축복을 가로막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뮬질의 풍요는 분명히 축복이다. 문제는 여타의 축복가운데 최상의 축복으로 격상하는 이유에 있을 것이다. 축복의 우열을 논할 수 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은 정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의 유무가 행동화 될 때는 부는 정신의 최상위를 점유한다는 사실이다. 거기서부터 모든 이데올로기가 생산된다고 지젝은 바라본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에서 ‘가난한 과부’라는 고유한 이름대신 사회적 약자의 위치로 지칭되는 한 여인의 담담한 혹은 당당한 시선을 무엇인가?
이 이름도 없는 여인은 ‘말하라 마리아여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가(Nonne Maria dicere quid in via)라고,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타자에게 종속된 삶을 꾸려야 했던 모든 익명의 여인들과 아웃사이더, 그 약자들, 모든 마리아들의 인생여정의 한 단면을 살아낸 초상에 해당한다.
여인이 바친 렙톤 두 닢(콰드란스 한 닢)은 얼마인가?
(고 임언기 신부, 「렙톤 두 닢」 강론 중에서)
예수님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나팔 모양을 한 헌금함이 있었으며, 각각의 용도와 지향이 그 위에 기록되어 있다. 13개의 헌금함 중에 한 개는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이었다. 아마도 빈곤한 과부는 일반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다고 본다. 여기서 '빈곤한'으로 번역한 '페니크란'(penichran; poor)의 원형 '페니크로스'(penichros)는 극도로 가난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당시 '과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이 극히 제한을 받았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으로서 늘 구제의 대상이 된 신분이었다. 그리고 '두 렙톤'으로 번역된 '렙타 뒤오'(lepta dyo; two mites)에서'렙톤'은 유대 화폐의 최소 단위로서 로마 화폐 과드란스의 2분의 1에 해당한다(마르12,42).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던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 규정상 한 렙톤을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두 렙톤은 당시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이었다. 이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빈곤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라본다>로 두 렙톤이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음을 아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선은 애초부터 이 여인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시선인가? 아닐 것이다. 제1독서에 나오는 사렙다 여인과 같이 차라리 죽는게 낫지라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생겼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똑같은 처지의 마리아에게 가난한 과부라는 사회적 잣대를 붙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모든 고통과 사회적 제약 앞에서 늘 고요하고 초연하셨을까? 아니다. 그것은 이미 시므온이 예언한대로 또 성모칠고회가 만들어질 정도로 극도의 고통을 통과한 상태, 이제는 그 어떤 고통마저도 침범하지 못하는 상태로의 상승, 그 불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인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는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에 대해 닐 도날드 윌시는 이런 말을 전한다.
“자신이 누군지 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우리는 이런 말을 기억한다. 가난하였을 때의 그 사람의 상태를 보면, 부자였을 때의 그 사람의 상태를 추정할 수 있다. 가난할 때 비굴하면 부자였을 때 교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가난은 역설적 도구다. 가난은 인간의 모든 치장을 벗겨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상태에서 두 개의 선택지가 생존의 상황앞에 놓인다. 체념과 절망 혹은 자유와 희망이라는 선택지다. 이 여인은 후자를 선택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세상 너머를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자신 앞에 붙는 사회적 약자의 표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타인이 인정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타인의 시선,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또한 생활비 전부를 바칠 정도로 믿음이 굳건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서조차 해방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불의 시간, 폭풍의 시간을 살아낸 그 여인의 눈과 발은 얼마나 고귀한가?
⒠의 제자들은 부자와 가난이라는 대립적인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면서 J를 따라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할 인류의 스승, 하늘의 시선을 이 세계에 계속해서 알려줄 소명을 받은 이들이 갖추어야할 시선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J의 시선을 배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이 세계는 왜 두 개의 대립적인 시선으로 갈라지게되었는지를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풍족한'으로 번역된 '페릿슈온토스'(perisseuontos; abundance;wealth)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hysterematos;penuary; poverty)이다. '페릿슈온토스'(perisseuntos)의 원형 '페릿슈오'(perisseuo)는 '양과 수를 초과하다'(exceed)는 뜻으로 어떤 것이 풍부하여 흘러넘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는 '부족', '모자람'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물질이 부족해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생활비'로 번역된 '비온'(bion)의 원형 '비오스'(bios)는 '삶', '생명' 자체를 가리키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뜻한다.
여기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흘러넘치는 풍요로움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것이 궁핍함으로 불리워질 때, 그것은 누군가의 소유욕과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선의 독재, 시선의 식민지, 시선의 강탈임음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시선은 모든 시선의 시선이 수렴되는 곳이다. 그리고 인류의 시선이 모아지는 곳은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구원이 달려있네”가 담지하고 있는 신적 사랑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표지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신도주간을 맞이하여 신자란 어떤 시선을 가진 사람인가에 대해 깊은 묵상을 제언한다.
<위선을 경계합시다.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은 하느님을 찾습니다http://blog.daum.net/m-deresa/12390156>
“예수님께서는 두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요약하는 것은 바로 이 “바라보다(guardare)”라는 동사입니다. 율법 학자들처럼 이중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주의해야(guardarci)”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 과부를 모델로 삼기 위해 그녀를 “보아야(guardarla)” 합니다. 이 점에 관해 묵상합시다. 곧 ‘위선자들을 조심하고(guardarsi)’ 또 ‘가난한 과부를 보는 것(guardare)’입니다.“(프란치스코교황)
글을 정리해 본다.
렙톤 두 닢(콰드란스 한 닢)을 바치면서 인류가 진정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아가 <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재정립시킨 한 여인을 통해,
Q :‘봄-보임’의 파놉티콘에서 시놉티콘 너머 무엇이 있을까?
-What is beyond the synopticon in the panopticon of 'seems to be seen'?
A:그 답은 『그리스도신앙어제와오늘』에서 라칭거추기경이 바라본 대로 <최소에 담긴 신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피조물과 동일화됨으로써 <최소의 것에 담긴>(contineri a minimo), 즉 최소의 것에 의해 포괄되고 압도됨에 자신이 신임을 입증하는 저 <여유>를 실현하는 하느님을 말해준다”(1974, p,230)
<본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최소에 신이라는 최대가 담긴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자, 이 세상의 유한에 저 세상의 무한이 담긴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자, 찰라에 가까운 이 순례의 여정에 영원이 담긴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표면을 뚫고, 깊은 영혼의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자, 사랑에 사랑이 담긴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은 누추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기도 하고, 때론 여린 꽃잎처럼 그렇게 작고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게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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