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specualtion, denken)하는 존재의 아름다움(2)
[연 중 제 31 주 일 (나 해) 2021. 10. 31. Marc. 12, 28-34.]
1.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레미 드 구르몽)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 세 편을 읽어본다.
라이어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①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 했습니다/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들판에 바람을 풀어 주옵소서.//②마지막 열매를 알차게 하시고/이틀만 더 남녘의 빛을 주시어/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에 스미게 하소서//③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못합니다/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살 것이며/잠자지 않고,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나뭇잎이 구를 때면 불안스레이/ 이리저리 가로수 사이를 헤멜 것입니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④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⑤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⑥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에 앉는 까마귀같이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
⑦시몬, 나뭇잎 져 버린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외솔길을 덮고 있다// ⑧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낙엽은 아주 부드러운 빛깔/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낙엽은 너무나도 연약한 포착물들의 대지 위에 흩어져 있다//⑨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황혼이 질 무렵 낙엽들의 모습은 너무나 슬프다/바람이 휘몰아칠 때 낙엽은 정답게 소리친다//⑩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발이 밟을 때,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낙엽은 날개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⑪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벼운 낙엽이 되리라./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⑫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라이어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 이 시들이 가을하면 왜 어김없이 소환되는 것일까?
단적으로 이들 세 시는 실존 너머를 바라본 이들의 초상, 존재론적 집으로의 귀향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날」, 「가을의 기도」, 『낙엽』은 한시처럼 선경후정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가을의 픙경과 그 풍경에서 촉발되는 어떤 정서, 아름다움의 절정과 그 소멸의 운명을 노래하는데, 그 정서는 가을에서 느끼는 찬란함으로부터 시작해, 가을 혹은 낙엽이 인간의 운명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존재론적 인식으로 수렴된다.
즉, 「가을날」, 「가을의 기도」, 『낙엽』, 이 세 시가 가을이면 어김없이 소환되는 이유는 속절없이 가을이 깊어갈 때, 그 풍경의 밖에서 안으로, 문득 실존 너머를 바라보게 되는 존재론적 집으로의 귀향 의지, 심연에서 솟구친 우리 내면의 얼굴과 마주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021년 가을도 이렇게 깊어 가는구나! 라는 독백을 김훈은 어떤 풍경 앞에서 자기 ‘상처의 확인’이라고 짚어준다.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 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김훈, 『풍경과 상처』)
그 상처는 누군가와 주고받은 실존의 상처를 넘어서, 시원(始原)을 바라보려는 ‘근원적 상처의 확인’ 혹은 ‘절대 고독’ 이며, 이는 우리 모두에게 ‘존재론적 집으로의 귀향의지’가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못 합니다” (「가을날」)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에 앉는 까마귀같이” (「가을의 기도」)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벼운 낙엽이 되리라”(『낙엽』)
이는 ‘여기’가 아닌 어떤 곳, 근원적인 집으로 돌아가려는, 절대 고독 앞에 나 자신을 세워보려는, 그리하여 소멸의 운명 앞에 가차없이 한 잎의 낙엽처럼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최초의 수락(受諾)’ 이라고 할 수 있다.
2.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에서 <근원적 상처의 확인> 혹은 <절대 고독> 혹은 <존재론적 집으로의 귀향의지>라고 부르는 것을 철학에서는 <존재의 사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다(emblepein)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유(思惟)’를 발생시키는가?」
http://blog.daum.net/m-deresa/12389813
「사유(思惟), specualtion, denken)하는 존재의 아름다움(1)」
http://blog.daum.net/m-deresa/12389262 <사유의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단상을 전한 바 있다.
인류에게 사유하는 자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상찬과 독일인에게 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문장, 형이상학의 회귀이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사유란 무엇인가』, 『철학에의 기여』는 ‘존재(신)와 인간’이 어떻게 ‘함께’있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 사유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다.
<사유>라는 논제는 ‘사유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사유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수평적 논의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수직적 논의로 비약한다.
이 비약은 사유가 선택적인 논의의 대상이 결코 아님을 함유한다. 즉 사유의 절대 필요성으로 넘어간다.
이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볼 수 있듯,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 인류의 유일한 악의 표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악의 표지를 찾을 수 없는 평범성이 노리고 있는 것은 세속의 논리로 인간에게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자체를 잠식한다는 것이다. 법없이 살고 있는 ‘선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은 태초의 기억, 내가 누구인가가 삭제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태초의 기억을 복원하는데 평생을 바친 이들 가운데, 파르메니데스, 빌헬름 폰 훔볼트, 하이데거가 있다. 이들은 다른 시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유를 매개로 인류에게 <일자一者-모든 것은 하나 Oneness>라는 태초의 기억을 복원하는데 평생을 바친다.
물론. <일자一者> 개념은 파르메니데스의 사유의 결정판이다. 그런데 그 사유를 정교화 시키고, 재맥락화, 21C화시키면서 <함께>라는 ‘공속’ 개념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담지(探知, detection)하고 있고, 그 담지의 형식이 훔볼트의 언어관을 뒤집으면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를 낳기에 이른다.
도식하면, ⑦+⑧---------------->⑨
⑦사유란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사유하는 것과 있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으며, 없는 것은 말할 수 없음은 물론 파악할 수도 없다. 이는 없는 것은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파르메니데스, 『자연에 대하여-진리의 길과 언견의 길』)
⑧‘나’를 ‘여기에’로써, ‘너’를 ‘거기에’로써, ‘그’를 ‘저기에’ 로써, 표현하고 있는 언어가 있다. (빌헬름 폰 훔볼트, 『훔볼트 선집-몇몇 언어에 나타나고 있는 장소부사와 대명사의 근사성에 대하여』)
⑨우리의 본질에 붙잡아두는 자는 우리 자신이 붙잡아 두고 있는 자를 몸소 우리 쪽에서 간직하고(be-halten) 있는 동안에만 우리를 붙잡아 두고 있다. 기억이란 사유의 집기 [執記](Versammlung)이다. 기억은 우리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선사받은 선물이다. 선물이기에 감사다. 사유는 기억하는 것이자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더 깊은 사유다.(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⑦에서 파르메나데스로부터 <존재>라는 단어가 철학사에 들어오기 시작한 내력을 보여준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사유 가능한 두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은 ‘있다(esti)’의 길이며(that a thing is, and it is not for not being),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의 길이다(that a thing is not, and that it must needs not be) 파르메니데스는 ‘있다’와 ’있지 않다’의 길을 구분한 뒤 ‘있다’의 길은 ‘있지 않음’이 가능하지 않은 길로 다시 나타내지고, ‘있지 않다’의 길은 반드시 있지 않아야 할 길로 다시 나타내지고 있다.
‘있다’의 길은 설득의 길(keleuthos peithous, fr.2.4) 이라고 나타나 있는데, 설득의 길인 이유는 진리(aleitheia)를 따르기 때문이며, 진리를 따르면 설득된다는 생각이 표명되고 있다. ‘있지 않음 (to me on)’의 길은 알려질 수(배울 수) 없는 길인데 왜냐하면 있지 않은 것은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려질 수 있으려면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이다.
⑧에서 언어학자 훔볼트는 ‘여기에, 거기에, 저기에’라는 시간 부사로 나를 주체화하는 ‘심리적 거리감’을 나타내는 언어가 있다는 데 주목했다. 인간의 분리인식은 부사와 인칭대명사가 결합한 형태로 파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를 <더불어 있음과 자기자신으로 있음으로서의> 존재양태를 드러낸다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이 세계를 확장하면 내가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여기는 너와 그가 존재하는 이 세계의 범주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⑨에서 하이데거는 사유의 모든 길은 언제나 존재와 인간 본질의 완전한 관계 안에서 진행될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사유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하고 인간은 현-존재라는 자신의 극단적인 규정을 완수하고자 존재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근원적으로 존재는 자신의 진리를 위해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본래 존재의 진리에 대한 ‘응답’으로 존재에 내맡겨져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응답이 기억이자 감사이다. 나를 알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존재를 알아야 하며, 존재를 알기 위해선 태초의 기억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훔볼트를 종합하여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에 도달한 하이데거에게는 세 가지의 운명이 있었다. 이는 흔히 하이데거의 가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사제가 되고 싶었으나 사제가 되지 못하게 막았던 육체적 건강, 독일이라는 공간, 히틀러라는 시대를 들 수 있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건강, 독일, 시대라는 가시를 통과하면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가 도출되는 과정은 개인적으로는 그가 돌아갈 곳으로의 귀향의지이자. 철학사적으로는 사유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사유케 하는 것은 바로 존재의 존재함이라는것을 전하기 위해 그는 제도권 밖에서 사유의 '사제'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3.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르코 12,28ㄱㄷ-34)
지난주, 인류와 사랑에 빠진 예수님께서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28,20)는 고백을 하셨다.
인류가 이 고백을 ‘삶’으로 알아듣는 키워드가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진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마르코 12,28ㄱㄷ-34)는 것.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그리고 ‘너 자신처럼’ 사랑할 때에만 그 고백을 들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접해본 사람이 '애주애인'을 못 들어보았을 리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 난청은 그냥 좋은 말이고, 예수님에 관한 말로 끝날때, 우리는 그 말씀을 사어로 혹은 박제화 하는 것이다.
이렇듯 온 힘을 다하여 ‘애주애인'하며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 생에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마르코 12,28ㄱㄷ-34을 읽어본다.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코 12,28ㄱㄷ-34에서 멈춘 부분은 두 부분이었다.
Q1.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Q2.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는 부분은 풍경으로 말하자면 전경이 아니고 배경에 해당한다. 이 배경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유가 시작되는 부분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Q1.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율법학자의 이 질문은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율법주의로는 하느님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유의 시작을 의미한다. 사유의 시작은 진리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은 율법학자의 질문은 도대체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제게 알려주십시오’라는 절박함에서 우러나온 질문에 가깝다.
이 절박함은 ‘~하라’는 계명 248조, ‘~하지 말라’는 계명 365조, 총 613조의 율법을 지키고도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서지 않은 자가 길에서 길을 묻게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길에서 길을 물었다는 것은, 모든 길이 사라진 것 같은 상황에 내몰린 사람이 길 자체이신 그분에게 대체 길은 어딘가를 묻는 것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진리 자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왜 우리 세대는 하느님의 육성이나 현현(顯現 'Epiphany')이 은폐되어 있다고 보는가? 라는 질문에서
[겨자씨 비유의 '은폐'와 '계시', '신앙'과 '믿음'의 갈림길 http://blog.daum.net/m-deresa/12389920]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比喩』 (분도출판사, 1974)에서 이런 답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예수님의 비유는 현대 사회에서 그 실례를 찾아보기 힘든 예수님 자신의 특수한 대화의 형식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래 형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비유에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예레미야스(J. Jermias)가 통찰한 예수님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그분의 육성을 ‘은폐’적 성격이 아니라 ‘계시’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계시는 우리가 그분을 사유했을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신 앞에 우리를 열어보일때 우리는 그분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사유의 시작이 곧 진리에 나 자신을 개방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주애인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는 율법학자의 깨달음 앞에 이런 말이 주어진다.
Q2.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분의 대답으로 어떤 통찰에 이른 율법학자에게 ‘너는 지금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다’라고 확인해주지 않고 ‘멀리 있지 않다’ 라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인가. 여기서 사유의 완성은 단지 교리적, 성서적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진리는 진리값을 요구한다, 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며, 바꾸어 사랑은 사랑을 해야지만 알 수 있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그리고 ‘너 자신처럼’ 사랑했을 때만이 <애주애인>이라는 이중 계명은 비로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온 삶으로 말씀을 육화시켰을 때만이 우리의 사랑, 사유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그리고 ‘너 자신처럼’,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태초의 기억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마음의 변화 없이 마음이 한결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면서만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 학자에게 하신 말씀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모습대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행복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의 모습은 그랬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면서만 살아가도록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을 때의 나의 모습도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모습대로’ 사는 것이란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면서만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태초의 기억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태초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창조되었는지, 사람의 궁극적인 창조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많은 사랑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 변화,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기적’ 일 것이다. 마음이 변화되는 기적 말이다.
그렇다면 그 기적의 원리란, 기적이 필요치 않은 이들에게 남발되었던 것도 아니고, 같은 상황에 처해있던 모든 이들에게 일괄적으로 주어진 것. 즉 재난지원금 같은 것도 아니었음에서, 기적은 개별적이고, 전인격이 동원되었을 때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이기에,
우리 내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단발마처럼 솟구쳐야 한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제게 알려주십시오”
기적의 원리란 절박함이 불러일으킨 ‘원의’ 혹은 ‘원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늘과 땅의 만남이다.
그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사유의 시작일 것이다. 대부분의 세상사는 시작이 있은 후에 완성이 있다. 그러나 존재의 사유는 사유의 시작 속에 이미 완성이 있다. 이는 절박함의 강도에 따라 시작은 곧 완성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가을에 <낙엽을 밟으면서> 가을이 속절없이 가버리는 것에 애닯아 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는 필연적인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이 세상에 왜 왔는가를 '기억'하는 일이다. 기억할 때만이 주어진 삶에 대해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우리 삶 안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그리고 ‘너 자신처럼’ ‘애주애인’하기를 원하는지? 사랑의 ‘기적’을 원하는지? 그분이 보여준 그 사랑을 원하는지? 사랑을 지식 차원, 이해의 수준까지만 원하는지? 아님 삶으로도 진정 원하는지?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권의 책이 놓여 있는 풍경, 그 사이를 흐르는 강(江) (0) | 2021.11.20 |
---|---|
‘봄-보임’의 파놉티콘에서 시놉티콘 너머 무엇이 있을까? (0) | 2021.11.13 |
비욘드(beyond)의 순간성과 영원성에 관한 단상 (0) | 2021.10.30 |
기다림,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2) (0) | 2021.10.23 |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키케로&셰익스피어) (0) | 2021.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