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2)
-희망과 희망고문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이들을 위무慰撫하며
[연 중 제 29주 일 (나 해) 2021. 10. 17. 마르코 10, 35-45]
1.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문정희) 2. 로고스에서 로고테라피로, 로고테라피에서 로고스로 3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코10,35-45) |
1.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문정희)
문정희의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읽어본다,
①가장 아름다운 것은/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②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새로 건 달력속의 숨 쉬는 처녀들/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③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히 떠오르는 별 같은 것
문정희의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은 한 마디로 ‘착한’ 시이거나 ‘영악한’ 시다.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 사랑스러운 것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착한 사람, 영악한 사람으로 거칠게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롤랑 바르트 식으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취하는 태도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소유하려는 욕망 자체를 제로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비소유의지‘이자 ‘위로없음의 위로’를 선택하겠다는 ‘비’ 의지를 말한다.
반면 ‘영악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소중한, 사랑스러운 이란 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 것들을 가질 수 있음에도 갖지 않음을 선택하는 ‘무’ 의지를 말한다.
이는 갖지 않음이 가졌을 때보다 훨씬 주체와 대상 모두에게 미적, 혹은 윤리적 가치가 유지된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결과다. 존재와 존재의 간격 ‘저만치’에 관조의 대상으로 놓아둠으로써 즉 모두의 영역으로 넘겨버릴 때, ‘자유’라는 헐렁한 ’행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만드신> 분이 누구일까?를 역으로 추정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듯하다. 그때,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혼자 가질 수도 없고, 저절로 솟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누구일까를 알기 위해선 만드신 분을 만나는 수밖에 없다. 상대적인 가치관이 난무하는 세상에 ‘가장’이라는 절대 우위의 세계를 만드신 분을 어디서 만날까?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밖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다.
우리 자신조차도 일생에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우리의 깊은 내면, 심연이다. 그런데 이 심연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에서만 열린다는 특징이 있다. 또 그곳에 갈 수 있는 로드맵이 없다. 그곳은 죽음과 동행하는 곳이기에, 날아서도 뛰어서도 걸어서도 갈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사랑스러운 것에서 ‘가장’은 비교우위가 아니라 절대적인 세계일 것이고, 그 절대적인 세계는 죽음 너머에 있거나, 세상 밖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도 가장 깊은 곳, 누구도 닿지 않았던 곳이므로 그 누구도 그곳에 이르는 과정을 말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내부로 벼랑에서 투신하듯 죽음을 향해 뛰어내리거나 아님 뱀처럼, 벌레처럼 오체투지하며 기어내려가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헌정한 『신곡』에 나오는 지옥과 연옥을 남김없이 맛본 후에 <혼자 가질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세계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이라고, 있음이라고, 사랑이라고, 진리라고, 참나라고 불렀던 그 이름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심연(深淵) 속에서 왜 절대적인 어떤 세계 앞에 ‘가장’ 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을까?.
심연(深淵)은 사랑하지 않는(못하겠는)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 사랑하는 것들도 동시에 끊어내야 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심연(深淵)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무상, 삶의 회의를 느끼게 하는 것들, 즉 사랑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왜?왜?를 묻다가 촉발된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내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 연민과 사랑하는 것들을 잃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밭에 묻힌 진주를 얻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것은, 버려도 좋은 것들을 파는 것이 아니라 떼어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들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꿈을 팔아 사랑하는 것들을 팔아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그런데, 두 세계를 끊어내기 전에는 두 세계가 확연히 나눠졌는데 끊어내고 보면 두 세계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정서적 측면의 동일함이 아니라 가치 측면의 동일함이다. 두 세계 안에 가장 고귀한 진실이 반쪽씩 숨어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것은 돌아가신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그리움’이라는 이름이 같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어머니를 훨씬 좋아했는데 어머니만 그리운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그리운 것을 보면 그렇다.
문정희의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삶의 진실에 어떻게 육박해 가야 하는가에 대한 두 길, 착하거나 영악하거나 결국은 우리가 생에서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애도의 시라고 할 수 있다.
2. 로고스에서 로고테라피로, 로고테라피에서 로고스로
그렇다면, 문정희의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그 심연(深淵)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심연(深淵)에서 건져올린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심연(深淵)은 사전적으로 빠져나오기 어려운 곤욕이나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자, 혹은 마음이나 의식속의 깊은 곳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혹은 뛰어넘을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간격을 일컫기도 한다.
인용문 ①~④는 심연(深淵)이라는 말이 지닌 특징이라면, ⑤~⑧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심연(深淵)을 경험한 이들이 건져올린 삶의 진실들이다.
①흙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물들을 감추고 또한 드러내는 데 아주 적절한 원소이다(가스통 바슐라르, 『대지와 그리고 휴식의 몽상』, 르 코스모폴리트)
②지하세계의 힘은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받기를 용납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자신만을 자랑한다(야스퍼스, 『낮의 규범 그리고 밤을 향한 열정』)
③ 사물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면서도 당신은 그것들의 겉모양을 주시하는 데 만족한다. 당신은 골수를 보고자 하면서도 껍데기에 매달려 있다.(프란츠 본 바더&수시니, 『가설』)
④인간은 다른 사물들의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지상 유일의 피조물로 생각된다(한스 카 로사, 『성숙의 비밀들』)
심연(深淵)은 ①에서처럼 땅의 상태이자 흙의 상태다. 또한 ②에서처럼 지하세계의 상태다. ③과 ④처럼 깊은 내면이나 내부에서 솟구치는 언어이기도 하다.
심연(深淵)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외부의 현실 뿐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의 내밀성을 보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달리말해 인간이나 사물에게는 심연(深淵), 극도의 내밀성이 있으며, 그것을 보려는 의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의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지금 바위에, 그 산에 균열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소나무를 보다가 바위도 산도 보게되는 것과 같다.
심연(深淵)을 보려는 의지는 갈라진 곳, 틈새, 금간 것을 예리하게 간파해 내는 능력인데, 그것을 통해 사물들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보이지 않아야만 하는 것을 들여다보려는 이러한 의지를 근거로 하여 많은 이들이 심연(深淵)에서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바라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심연(深淵)을 지니고 있다. 심연(深淵)자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살다 간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심연(深淵)을 안다는 것은 고통이고, 심연(深淵)을 모른다는 것은 고통을 모르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⑤~⑧은 심연(深淵) 속에서 건져올린 로고테라피(Logotherapy)에 해당하는 명문들이다.
⑤적지 않은 사람들이 포탄이 비오듯 떨어지거나 심한 병고로 또는 다른 무시무시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을 때, 심연(深淵)의 경험, 갑자기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찾아오고, 어떠한 죽음이나 파괴의 힘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체험할 때가 있다. 여행을 할수록 목적지가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 『하라:인간의 중심』)
⑥아우츠비치 수용소에서 전라의 상태로 가스실로 보내기 직전에 나의 내면에서 죽음을 뚫고 이런 소리가 올라왔다. 아직까지 당신들이 빼앗지 못한 그리고 빼앗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 능력과 자유입니다.(빅터 E 프랭클,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이론과 실제』, 분도출판사1980)
⑦손으로 잡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용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가라앉거나 모든 것이 특별한 색깔이나 특징도 의미도 없는 세계로 접어드는 그러한 때에 밑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深淵)을 가진 존재로 경험하는 우리의 실존은 바로 그러한 때에 하느님의 무한성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이다(칼 러너, 『자비의 경험에 대해서』)
⑧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많이 가진 소외된 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그들은 진실성을 요구함으로써 공동체를 흔들어 자극한다. 많은 공동체들이 이상적인 좋은 말씀을 실현할 것을 목표로하여 건립되었다. 그러한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언제나 반복하여 사랑, 진리, 그리고 평화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한다. 그러나 소외된 자들은 이들이 발설하는 많은 좋은 말들 중 상당 부분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저 바닥의 심연(深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뱉은 말들은 언제나 옳은 말이나 그것은 말하는 그 자신에게 조차도 생명을 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장 바니에, 『공동체, 화해의 축제와 장소』)
⑤~⑧은 로고스가 아니라 로고테라피(Logotherapy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로고스와 테라피의 합성어로 삶의 극단을 경험한 이들의 심연(深淵)에서 솟구친 말로 그 자체가 상처의 치유, 어루만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개인이다. 그리고 개인의 존재가 전혀 무의미해질 뻔한 상황에서 ‘의미 부여의 주체’라는 사실을 쥐고 간신이 인간으로 살아본 이들이, 스스로 무의미의 밑바닥에서 기어 나온 사람의 목소리이기에, 로고스는 아니지만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인류의 고귀한 자산에 해당한다.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자살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개인의 정신 심리 상태 등이 이제는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점점 더 삶에 대한 의미가 희박해져가고 있는 요즘, 앞일을 가늠할 수 없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조차도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성의 승리를 일구어낸 한 보통 사람. 나치 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의 죽음의 경험 속에서,
빅터 E 프랭클(『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이론과 실제』, 분도출판사1980)은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하나의 심리치료법으로 제안한다. 로고테라피는 의미치료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과 더불어서 세번째 인류에게 나눠진 심리치료방법이다. 로고테라피는 실존분석에 근거하여, 니체의 권력 의지론을 주장한 아들러와 프로이드의 쾌락의지론에 반대하여 키에르케고르의 의미의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잔인한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기나긴 죄수 생활로 자신의 벌거벗은 몸뚱아리의 실존을 경험하면서 로고테라피(Logotherapy)이론을 발견했다. 그는 부모, 형제, 아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모두 죽고,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모든 가치를 파멸당한 채,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핍박 속에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데 그가 쥐고 있던 것은 한 줌의 '의미'였다. 오늘 죽을지라도 내 생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
그에 따르면, 오늘날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성적 좌절이나 권력의 좌절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의 좌절이나 실존적 좌절이다. 즉 그들은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성적 쾌락이나 아들러가 언급하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의미를 향한 의지의 좌절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준다. 프랑클은 세계적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러한 현상을 ‘실존적 공허’라고 규정한다. 실존적 공허는 삶의 무의미함이나 상실감이나 실패로부터 기인된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선한 의지가 반드시 선한 결과로 돌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도 우리 앞에, 그에 상응하는 현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공허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을 실존적 공허다.
우리는 성서나 전례, 예배에서 누구나 로고스를 만난다. 그러나 누구나 만나는 그 로고스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누에가 뽕잎을 먹고 비단을 만들 듯, 우리가 로고스를 먹고 로고테라피를 뱉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때로 진리값을 요구한다. 그 진리값이 로고테라피(Logotherapy)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과거의 상처나 욕구불만에서 문제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찾지 않고, 왜 산다는 것에 의미가 상실되었나에 그 초점을 맞춘다.
Q1. 이전에는 무엇에 의미를 두고 살았는가?
Q2.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왜 더 이상 의미가 되지 못하는가?
Q3. 그렇다면 새롭게 찾을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세상에서 부서진 이들은 로고스가 아니라 로고테라피에서 일어나 다시 걸어갈 힘을 찾는고 할 수 있다. 남이 부여한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부여한 의미로 인간은 살 수 있다. 뛰어서,날아서, 걸어서,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이들은 로고스에서 힘을 얻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상처를 핥으며 기어가다시피 어떤 시간들을 통과하기도 한다. 로고테라피는 바로 그 심연(深淵)을 통과하는 이들 내부에서 저절로 솟구친 어령이기에 그런 상태에 내몰린 이들을 어루만질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개인이다. 그리고 개인의 존재가 전혀 무의미해질 뻔한 상황에서 ‘의미 부여의 주체’라는 것을 건져올렸기에, 그것이 스스로 무의미의 밑바닥에서 기어 나온 사람의 목소리이기에, 로고스 못지않게 인류의 고귀한 자산이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 할 수 있다.
3.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코10,35-45)
[기다림,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한 완벽주의자의 고독의 물질성을 애도하며]
http://blog.daum.net/m-deresa/12389367
이 부분은 위의 글에서 두 단락을 그대로 가져온다.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블랑쇼는 인간 관계와 글쓰기의 본질을 같은 측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그 단초를 찾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음악의 신으로 나오는 오르페우스는 탁월한 음악의 능력으로 모든 죽음의 상태를 물리치고 명계(죽음, 冥界)로 내려가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돌아오지만.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초조함’을 참지 못해 ‘바깥(뒤)’를 돌아보게되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명계(冥界)로 사라져 간다. 오르페우스의 ‘초조함’으로 그의 오랜 기다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때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얼굴에 닿은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블랑쇼는 우리는 어떤 기다림으로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헤메다, 결국 그 대상을 찾아내지만 대상을 찾은 순간에 거기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읽어낸다.
오르페우스의 비극은 문학이든 인간 관계든 “바깥(dehors)”으로 시선이 옮아갈 때,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추구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건너가게 되는 운명의 갈림길을 지시한다. 이 ‘바깥’은 타자에 의해 진행되는 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추방시겼다는 점에서, 자신의 기다림을 자신이 배신했다는 점에서, 주로 완벽하다고 평가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완벽함이 지닌 위대함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위대함 속에 내재된 위태로움. 완벽함 속에 내재된 차가움에 대한 적시(摘示)가 그것이다. 성서의 <소돔과 고모라>, <백제의 망부석 설화>, <용소와 며느리바위 전설>에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에서 나오는 이런 공통된 화소가 등장한다. 선과 악이 나뉠 때, 삶과 죽음으로 갈릴 때, 사랑과 이별로 운명이 결정되는 마지막 순간에 소위 열심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완벽주의자로 일컬어지던 이들이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에 ‘이별’하거나, ‘바위’로 변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불행을 ‘금기’를 어겨서라고 일괄적으로 해석하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기다림’은 우리에게 어떤 본질적인 자세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J를 향해 질주했던 이들, 희망과 희망고문 사이의 경계선에 서있던 이들을 위무(慰撫불행한 사람이나 수고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어루만지어서 달램)하며. 우리는 어떤 기다림의 자세를 가져야 하나?를 고민하면서,
수난 세 번째 예고인 마르코10,35-45을 읽어본다.
그때에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야고버와 요한, 그리고 제자들이 바라보는 메시야상, 예수님이 예고하는 메시야상 사이에는 큰 낙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낙차는 비난받아야 할 일이 아니고 위로하고 달래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달려갔던 시간들을 보면 그렇다. 그들은 희망과 희망고문 사이에 서 있는 오늘 우리와 비슷하다.
그것은 샤르뎅 신부가 바라본 대로 인류는 예수라는 오메가 포인트로 진화하고 있는 과정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을 고문하지 않는 희망의 메신저라고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메시야상에 희망고문당하면서 우리에게 희망의 민낯을 남겨준 성인들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수직상승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서 있어야할 자리가 오히려 없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육성과 행적을 최측근에서 듣고 본 그들 역시 수없이 많은 회의와 배신 속에서 스스로 만든 희망에 고문당하면서 결국은 예수께서 마실 잔과 받을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 희망의 민낯이다.
여기서 야고버와 요한 그리고 제자들을 대표해서 요한만 바라보기로 하자. 요한은 안드레아와 함께 스승 세례자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간 첫 제자에 해당한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오후 4시였다’ 라고 기술할 정도로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상의 각인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요한은 공생활 3년 동안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12제자 가운데에서도 최측근에 해당하는 3인방 제자에 속한다. 그런 그가 수난예고 세 번째 들으면서 드러낸 반응이 예수님이 영광된 자리에 오르실 때, 오른쪽과 왼쪽에 두 형제를 앉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야말로 희망과 희망고문의 실체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생활 3년 동안 최측근 자리에서 본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었다. 그들이 경험한 전지전능한 분이 수난을 받으신다고 할 때, 그들은 당연히 반전이 있는 고도의 수난정치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수난 다음에 영광은 죽은 다음의 영광이 아니라 살아서의 영광이라고 알았으리라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제자들의 몰이해를 의문에 붙일 것이 아니라 왜, 그분은 메시야의 완성을 ‘종, 섬김, 목숨을 바침’이라는 극단의 바닥을 선택 하셔야 했는가를 묵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분이 겸손해서?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십자가를 박제화 하는 해석이다.
마르코10,35-45)에서 멈춘 부분이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코10,35-45)
Ⓐ에서 <내가>, <나>는 대화상황에서 1인칭은 생략 가능한 주어다. 그러나 성서에서 <나>가 생략되지 않을 때, 그 <나>는 모든 근거의 근거를 의미한다. <나>를 알고 있나? 혹은 <나>를 믿고 있나?에 가까운 주문이다.
우리는 그분이 누군지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도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야고버 요한, 그리고 제자들을 보면 3년 동안 그들 앞에 있었던 그 분, <나>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희망고문이 생긴다. 희망고문은 모름에서 생긴다. 당연히 우리도 모를 확률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입교하는 신자수보다 냉담하는 신자수가 많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내 앞에 있는 그분, <나>를 모른다는 것에서 희망과 희망고문은 갈린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랄 때 실망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그 사람이 주어야 한다고 원할 때이다. 진짜 갖고 있다면 줄 수밖에 없다. 주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으면 사랑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본 문정희 시처럼 '사랑'은 저절로 솟구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서로에게 사랑을 못 주는 거다. 사랑을 절제하느라 못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그릇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퍼 올릴 사랑이 바닥난 것이다. 사랑이 담겨야할 마음의 항아리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예컨대, 정말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은 가난한 이들에게 흔쾌히 돈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가짜로 돈을 소유한 사람은 있어도 그것을 나누지 못한다. 그런 사람을 인색한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가 그 돈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3년이나 동고동락한 분을 모를 수 있을까?
야고보와 요한이 청한 왼쪽과 오른쪽은 예수님이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리를 예수님이 정할 수 없다고 한다. 영광스럽게 되었을 때, 십자가상에 우도와 좌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야고버와 요한과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되었을 때>를 놓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영광>이라는 것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영광>의 상식을 뒤집는다. 여기서 희망과 희망고문이 갈린다. 그분의 <영광>은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부터다. 부활부터가 아니다.
Ⓑ에서 <너희에게>는 누구인가? 야고버와 요한 그리고 제자들 만인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인류다. 혹은 배고파 굶어 죽어가면서도 왜 배고픈지 모르 채, 엉뚱한 곳에서 그 배고픔을 채우려 스스로를 희망고문하면서 죽어갈 인류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말하는 그런 관계를 갖고 있는 인류라고 할 수 있다. 그 인류는 스스로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다.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어서 그분을 부른 이들이자 그분을 부를 수조차 없는 이들이다.
“신앙의 핵심적 표현은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이다.(요셉 라칭거,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우리는 그분과의 상봉에서 <너>의 현존 그 인격을 체험해야 할 인류이다. 그때 희망과 희망고문의 차이를 알게되고, 스스로에게 가한 희망고문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에서 <무엇을>의 핵심은 언제나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에 의해 달라진다.
그분은 애매모호한 태도로 말하지 않는다. 희망의 민낯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종이 된다.
Ⓑ섬기러 왔다.
Ⓒ목숨을 바치러 왔다.
우리가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 목숨을 바친다는 것, 그것이 <영광에 동참>하는 것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아가, 이해한다면 종이되고 섬기고 죽는 그 행위가 가능할까?
이 부분을 타인을 위한 아가페, 희생을 말한다고 성서해설서들은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게 우리 삶에서는 늘 붕 떠 있는, 그냥 좋은 말에 불과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일까? 이 부분을 다르게 읽어보기로 한다.
내가 나와의 관계에서 출발해 타자와의 관계로 나아가 보기로 한다. 이것은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과정이자 너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코스에 해당한다.
이는 로고스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심연에서 건져올린 실존의 언어, 로고테라피를 놓치지 말자는 말이다. 로코테라피를 통해서 로고스로 넘어가자는 것이다.
즉, 요한복음 1장을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고도로 진화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아직은 지하세계에서 신음하는 땅이자, 진화하는 상태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모든 출발선은 언제나 나다. 나를 건너뛰면서 너를 사랑하지는 못한다.
Q1.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몸을 이해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내 몸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다.
Q2. 모든 이를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변화무쌍한, 땅의 것을 아귀처럼 추구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음은 생각과 말과 행위를 낳는 에너지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Q3.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혼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영혼이 우리 몸에 깃드는 일이 쉬운 일일까? 고도의 진화된 존재인 영혼이 변화무쌍한 마음과 몸을 감당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 죽음에 대한 보고서들은 잠자는 순간에 영혼은 우리를 떠나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가벼움이자 자유고, 평화이자 기쁨이며, 무함함이자 고통 없음이고, 완벽한 지혜이자, 완벽한 사랑이다"(닐 도날드 윌시)
다시 성서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종은 주인을 선택할 권한이 없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봉헌하는 행위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인 내가 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라는 거시적인 희망이 좌초되는 이유는 그 출발점이 공중에 붕 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선의 출발선이자 최종 착지선은 나다.
그런데, 내가 나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종이 주인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즉 내가 내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계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즉 나의 심연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종>이 무엇인지 어렴프시 분명하게 알게 된다.
종이 되고, 섬겨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는 그 대상은 특정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 세세대대 모든 인류다. 그런데 그렇게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시선으로 출발하면 우리는 영원히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섬긴다는 것, 목숨을 바친다는 것을 성서적으로만 끄덕이며 바라볼 뿐이다(위로부터의 영성).
모든 것은 희망과 희망고문 사이 그 경계선에 있는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아래로부터 영성) 인류 가운데 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분이 나의 종이 되고, 나를 섬기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고, 나는 나의 심연에서 어떤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그분이 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나에게는 주인 노릇을 하는 이가 있고 종노릇을 하는 이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몸과 마음과 영혼, 이 셋 중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가? 마음이 주인이고 몸과 영혼은 종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누군가 이런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 나를 위해 이런 행위를 한 것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나? 내가 어떤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안셀름 그린& 마인라드 두프너의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출판사, 1999)에서 이에 대해
“이제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나의 작용 범위를 벗어나 떠나가 버렸을 때, 이제 내가 나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직면했을 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나 자신을 되어가는 대로 놔두는 것, 나를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 나의 빈손을 열어 하느님을 붙잡는 것뿐이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나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하나의 보상이 결코 아니고 나 자신의 무능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모든 의지가 나를 선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되는 시간, 타인을 위해 모든 선한 의지가 수포로 돌아간 시간, 오직 자신의 빈손만 남아 있는 시간, 자신의 깊은 심연을 보게되는 시간, 시편 저자 다윗의 탄식처럼,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시편130,1-8절)"
모든 이의 종이 되고, 모든 이를 섬기고, 많은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그 대상이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상황에 이르러, 결국 내가 나의 종이 되고 내가 나를 섬기고 내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그 상황에 이르지 않고는 세 번째 수난예고는 전례 시기에 맞춰 있는 좋은 독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박제된 성경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인류라는 추상적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나라는 구체적 대상을 먼저 바라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아브라함, 모세, 야곱, 다윗,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바오로,그들이 가장 약해졌을 때, 그들이 그들의 지옥을 만났을 때, 홀연히 그들은 하느님을, 예수님을 진리를, 사랑을 만났다.
우리는 날아서, 뛰어서, 걸어서가 아니라 배로 기어서, 낮은 포복으로 나아갈때, 진정한 희망을 만나는 것이다. 로고스의 초월이 아니라 로고테라피의 포월이다.
그래서 그분은 종이 되고, 섬기고,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을 우리 보다 ‘앞에 서서’ 먼저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메시야의 완성이 종과 섬김과 죽음을 선태할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여기서 <모든>이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 말을 알아들은 이들을 제외한, <많은> 은 누구인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많은>이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은 <모든>이에 속했음을 말이다. 이것 밖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수난 세 번째 예고에서, 종, 섬김, 목숨을 바침은 이것은 우리에게 좀 더 봉사를 많이하라든가, 태도를 공손하게하라는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떤 시간 앞에 서야 하는가에 대한 전언이라고 할 수 있다. 밖을 보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보라는 것이다. 희망고문 하지 말고 희망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심연, 자신의 고성소로 내려가는 것은 은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고성소를 봐야지만 타인의 심연, 고성소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 아닌 것은 모두 버릴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자, 드디어는 하느님마저 망각할 수 있는가?에 이르러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해할 듯하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8, 20)
생명마저 망각한 생명이 되기 위해, 줄곳 하느님 부재에 시달리던, 마더데레사의 여정처럼, 마지막까지 자기 심연의 무를 보게되는 순간에,
마에스터 에크하르트가 이런 위로를 던진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자기 내면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신은 항상 우리 안에 있다. 우리가 집에 있을 경우가 적을 뿐이다. 자기 자신이 집에서 낯선 사람이라면 그것이 가장 불쌍한 것이다.”
다시 복음으로 넘어가 보자.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엄밀히 이 순례의 여정에 우리가 감당할 몫은 Ⓐ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봉헌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분을 따라 인류의 사표가 되어야 할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들을 Ⓐ,Ⓑ,Ⓒ를 모두 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 그 거시적 십자가는 바로 나를 짊어져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희망을 희망하지 않고 환상으로 희망 고문했던 우리가 만들었던 하느님을 용서해 드리자!
그때 헛된 희망으로 나를 희망 고문했던 미망의 시간들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과 희망고문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이들을 위무慰撫하며, 글을 마무리 해 본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코10,35-45)
J의 질문에 대한 답은 심연에서 간신히, 기어가면서 드리는 기도다.
야곱은 두려움 속에서 이런 기도를 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기32,27)
다윗은 자기 죄에 절망하면서 이런 기도를 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시편130,1-8절)
이냐시오 성인은 선택의 기로에서 이런 기도를 했다
“주여 제가 지닌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제 의지 소유한 그 모든 것을”
이 글을 쓴 사람은 이런 기도를 드린다.
“주님! 제 눈물과 빈손을 당신께 봉헌합니다!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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