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전적인 자기 점유와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
-Freiwilligkeit; eine völlige Selbstbesetzung und eine Privatsphäre, die sich selbst schützt
[연 중 제 26주 일 (나 해) 2021. 9. 19. 마르코 7,38-48]
1.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고영) & 침묵(김명인) 2. 내 존재의 의미는 생이 나에게 전달했던 질문에 있다(칼 구스타브 융) 3. 네 손이, 네 발이,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마르코 9,38-48) |
1.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고영) & 침묵(김명인)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이미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단지 살고있는 세계만을 반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어사용자의 윤리적 상태까지 드러낸다고 말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말 할 수 있는 것과 말 할 수 없는 것, 이 둘을 자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면 언어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네, 혹은 아니오가 분명한 직설어법을 사용하는 화자와 언제나 중의법으로 다양한 해석을 낳는 애매모호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화자는 언어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있으며, 언어사용자가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하려는지 이미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설어법에 가까운 고영의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를 읽어본다.
너……라는 말 속에는 슬픔도 따뜻해지는 밥상이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눈곱 낀 그믐달도 살고 너…너라는 벼락을 …라는 말 속에는 밤마다 새 떼를 불러 모으는 창호지문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물구나무 선 채 창밖을 몰래 기웃거리는 나팔꽃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스스로 등 떠밀어 희미해지는 바람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진즉에 버렸어야 아름다웠을 추억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약속 그래서 더욱 외로운 촛불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불멸의 그리움도 살고
너……라는 말 속에는 평생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안고 괴로워하는 상처도 살고
너……라는 벼락을 맞은 뼈만 남은 그림자도 살고
고영의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는 의미가 명료한 시다. 감춘 것이 없다. 가을 아침처럼 투명한 시다. 한글을 깨친 누구에게 주어도 즉물적으로 이해가능한 시다. 화자는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을 마치 ‘벼락’을 맞은 거라고 말한다. 너라는 벼락으로 인해, 그로인해 주어지는 삶의 오욕칠정을 모두 맛보겠다는 것, 오직 너라는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이 없다. 화자에게 선택권이 1도 없다.
반면,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완곡어법의 김명인의 「침묵」을 읽어본다.
①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②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④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⑤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김명인의 시 「침묵」의 화자는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무렵 긴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다. 한 사람이 풍경 안으로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그것을 다만 ‘우연’이며 침묵이라고 말한다. 어둠으로 인해 사라진 길과 창 하나의 넓이만큼의 캄캄함을 보면서 그 풍경이 화자의 내면으로 꺾이는 순간, 지금까지 침묵처럼 고요하던 화자의 내면이 왈칵 뒤집힌다.
그러나 화자는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라고 서둘러 혼란을 수습한다. 개별적인 고유한 상황을 ‘우연’이고 ‘침묵’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그런 일일 뿐으로 귀결된다.
사람만 운명이 아니라 그가 자유의지로 선택한 길(일)도 그 사람의 운명이다. 그가 자유의지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그 길을 선택했을 때의 열정도 뜨거웠을 것이고, 그 길은 걸어갈 때 기쁨도 충만했을 것이고, 마치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데 돌연, 왈칵,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 가 있다. 나에게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이 없었을까?(없을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이 내부에서 쏟아져나올 때가 있다.
거기까지만 독자는 해석할 수 있다. 왜 그런 상태가 야기되었는지, 독자는 더이상 추론할 수 없다. 이 화자는 선택권을 대상에게 양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생의 풍경안으로 들어왔던 사람은 ‘우연’으로 밀려나고 길이 그의 ‘운명’이 된다.
완곡어법의 시는 어떤 선택의 크기, 그 상한선이 이미 정해진 상태다. 보편논리에 편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이미 선택을 정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이나 보편의지는 지성을 중시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방어기제 가운데 하나다. 특별한 상황을 ‘누구나’라는 보편의지로 수습하고자 하는 화자는 ‘들끓는 길의 침묵’ 때문에 ‘남몰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인생에 몇 번은 울면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기는 하겠지만, 결코 그가 선택한 길에서 돌아서지는 않을 것임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의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가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선택한 ‘길’ 이기 때문에, 사랑은 동사의 영역이 아니라 추상명사의 영역에 가깝다. 그것이 그가 언어를 통해 행사하는 윤리이자, 자유의지의 실현이다.
하지만, 직설어법이든 완곡어법이든 선택 당사자에게 모두 정당하고 설득력이 있다. 이는 그가 알고 있는 세계의 초상이고 본인이 바라보는 우연과 운명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2. 내 존재의 의미는 생이 나에게 전달했던 질문에 있다(칼 구스타브 융)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된 결정론적 존재인가? 아님 자유로운 삶을 무한히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인가‘ 라는 주제로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 빈서판)에 쓴 청춘의 문장들 http://blog.daum.net/m-deresa/12389776’]에서 이미 살펴 본 바 있다.
이 글은 위 글의 연장선에서, 우연과 운명은 자유의지의 선택 여부에 달려있으며, 자유의지의 선택여부가 공동선에서 빗나갈 때, 우리는 그것을 ‘죄’ 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상한선이 이미 정해진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먼저, 우리에게 어떤 자유가 주어졌나? 자유와 자유의지는 어떤 관계가 있나?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이자 ·능력이다. 자기 점유 능력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는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인과 관계에서 자유와 자연 법칙의 비중을 얼마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가 자연의 인과법칙에서 벗어난 ‘초월’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자, 그럼에도 인간은 여타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에 속한 유한자란 점에서 이는 다시 초월론을 벗어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이 자유는 선험론인가? 경험론인가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는 무엇인가?
칼 융은 자서전, 『기억, 꿈, 사상』에서
①나는 나를 선택할 만큼 자유롭다. 내 존재의 의미는 생이 나에게 전달했던 질문에 있다. 혹은 거꾸로, 나 자신은 세상에 보내진 질문이며, 나는 세상의 대답에 의존되지 않기 위해 나의 대답과 소통해야 한다.”
프리드리히 W.J. 셀링,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
②자유란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에 대한 실재적이고 생동적인 개념이다. 악은 언제 끝나며 끝낼 방법은 무엇인가? 창조는 도대체 궁극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왜 처음부터 한결같이 완전한 것만 있으면 안되는가?
요한 G.피히테는 『학자의 본질에 관한 열 차례의 강의』에서
③ 모든 의식의 근저에 놓여 있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의식의 실행이다. 의식은 궁극적으로 자기활동적이고, 그런 뜻에서 의식은 자유이고 실천이다. 나는 자기 자신을 정립하며 자기 자신에 위한 단적인 존재에 위해 자기 존재를 정립한다. 절대적 주관인 나는 행위하는 자이며 동시에 행위의 산물이고 실제활동하는 자이며 동시에 실제활동을 통해 생산된 것이다.
G. W. F.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④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다. 정신은 자유이고 자기정립적이며 자기할동적인 것이고 그런 뜻에서 주체적이다. 본래 무엇에 관하여 상관적이지 않은 절대자이다. 그러나 정신이 자연과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낼 때 전변하고 상대적이다. 정신은 실재에서 ‘상대적인 절대자’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⑤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다. 나의자유는 미래를 그 아래로부터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결코 도래할 나의 대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자유에 부담을 느낄 때, 또는 변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항상 (운명)결정론으로 대피할 준비를 갖춘다.
임마누엘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⑥ 자유는 예지적 원인이다. 자유는 지연의 필연적 인과계열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시간 공간상의 존재자의 술어가 아닌 이념이며 이런 뜻에서 그것도 초월적 이념이다. 그러나 초월적 이념으로서의 자유는 아직 있지 않은, 있어야 할 것을 지향하는 의지, 곧 실천이상의 행위에서 이상을 제시한다. 이 이상은 행위가 준거해야할 본이 된다.
막스 뮐러는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⑦인간의 자유는 세계로부터의 간격에서 세계로의 결단으로 이전하는 역사이며, 이 기본 결단으로부터 구체적 행동으로 이전하는 역사이다.
이들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자유는 본질적으로 선험적이다. 그런데, 자유는 불가피하게 실천적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는 순간 그것은 경험론이자 의무론이 된다. 자유가 의무라고? 각 개인이 절대적 의지를 실현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공동의지가 만들어지고, 공동의지는 보편적 자유를 만든다. 보편적 자유는 불가피하게 절대적 자유를 제한하므로 '자유에는 항상 피가 묻어 있게' 된다. 보편의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행동은 윤리적으로 단죄받거나, 규율되고 재단받고, 충돌하게 된다. 이것을 종교적으로는 '죄'라고 규정하고, 사회 역사적으로는 공동선을 어긴 '이탈'로 규정한다.
그런 맥락에서, 막스 뮐러가 『오늘날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바라본 대로 자유는 세계로부터의 간격(절대자유)에서 세계에로 결단으로 이전되는(보편적자유)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은, 자신과 타자의 인격과 존엄에 관한 것이므로, 그 인격의 운동장은 “내 존재의 의미는 생이 나에게 전달했던 질문에 있다”(칼 구스타브 융)의 의해 (자유의) 크기가 달라진다.
3. 네 손이, 네 발이,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마르코 9,38-48)
그렇다면 왜 우리는 생이 우리에게 전달했던 ‘자유의지’를 지난 인간이란 규정에도 불구하고 자유보다는 '죄'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라고 전하는 마르코 9,38-43.45.47-48를 읽어본다.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마르코 9,38-43.45.47-48은 Ⓐ에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진리의 확장에 대한 개방성과 유연함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에서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라고 죄를 통제할 수 있는 ‘전적인 자기점유능력’을 기르라는 강력한 권고가 뒤따른다.
성서학자 죤 핍립스는 『말씀의 올바른 해석』에서 성서에서 ‘죄에 해당하는 단어가 구약에서 12개, 신약에서 약 20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전한다. 신약에 나오는 단어들에는,
하르마타노(harmatano)표적을 빗나감./파랖토마(paraptoma) 옆으로 떨어짐./포네리아(poneria)도덕적 부패./카코스(kakos) 잘못된 욕망./아노모스(anomos)율법을 모욕함./아테스모스(athesmos)사람들이 만든 규제를 고의로 어김./아세베이아(asebeia) 거룩함에 대해 존경이나 경외심이 없는 경건치 않음./아페이테이아(apeitheia)완고함./파라코에(parakoe) 불순종, 말을 듣지 않음./파레코마이(parerchomai) 부주의, 무시./파라바이노(parabaino)반칙, 선을 밟고 넘다./아디키아(adikia) 공동선을 어김, 불의, 불법./파라노미아(paranomia)법이나 관습을 어김/플라나오(planao) 다른 사람을 잘못으로 이끔.이단./아스토테오(astocheo) 성적으로 빗 나감/헤테마(hettema)경제적으로 인색함, 등이 있다.
마르코복음 사가는 죄를 일괄해 ‘걸려넘어지다(skandalizo)’는 의미로 사용한다. 죄란 스스로 걸려넘어진 상태이자, 누군가를 걸려넘어지게 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걸려넘어진’ 상태가 얼마나 치명적이면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하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하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하라
당위명제로 제시되어 있는 마르코9,38-48 ⒜,⒝,⒞는 언뜻 마르코 7,1-23과 충돌하는 거처럼 보인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여기서 마르코7,1-23이 죄의 원인이 마음에 있다고 보았다면, 마르코 9, 38-48은 몸은 죄의 결과 행위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죄의 원인보다 죄의 결과에 이렇듯 더 강력한 당위명제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마르코복음이 쓰여지던 시대적 배경이자, 죄의 원인은 그 자신만을 걸려넘어지게 하는 것이지만, 죄의 결과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에서 보듯 믿음이 약한 이들을 걸려넘어지게 한다는 점에 초점이 놓여 있고 할 수 있다.
'애주애인'의 기준점을 ‘작은 이들-가장 아래쪽’에 두고 있다는 것은 십자가 신학의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자유를 타자를 위해서 내놓을 수 있는 자유의지까지 바라본 것이다. 이는 죄의 파급효과에 대한 경고이자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행위가 아님을 염두한 말이다.
또한 우리는 죄보다 그분의 자비가 크다는 것을 이미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인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늘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어떤 죄도 그분의 자비를 가릴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임을 유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자비의 은총속에 산다고 느끼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기까지 죄에 걸려넘어진 상태로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상실한 것이며, 또한 복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스스로 박탈한 것이기에, 죄를 짓지 않고 이 순례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끊으려고 단호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복음은 강조한다.
바오로 사도는 죄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로마서 7, 18-24절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하였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는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죄를 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경향성을 인류의 원조인 아담과 카인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기 3장, 4장)
여기서 아담은 하느님과 에와라는 사랑의 상황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완벽한 충족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혹은 유혹자에 초점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유혹당하는 주체에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하겠다. 어떤 유혹자가 있어도 그 스스로 내면에 빈 공간이 없으면 유혹은 유혹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내면의 텅빈 상태가 죄를 끌어당겼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철저하게 자기 존재성을 온전히 점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것인가를 시사한다.
이것은 카인에게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감사하는 맘으로 무엇인가를 봉헌하는 순간조차 자기봉헌의 의미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자기 행위 밖에서 어쩔줄 몰라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이 간파한 대로 인간은 자기 밖으로 추방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에릭 프롬은 『자유로뷰터 도피』에서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궁극적인 자유의 상태로부터 항상 도피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으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한 순간에도 더 광활한 자유의 상태로의 전환, ‘~에로의 자유’를 실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첫째, 빈자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의 경우에서처럼(성녀의 자서전에서) 성녀가 마지막까지 시달렸던 것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무신론이었다. 그렇게 뜨겁게 살았던 성녀가 ‘신이 없다’는 어둠의 심연을 끊임없이 경험했다는 것, 이는 바오로사도가 간파한 대로 인간의 존재양식이 빛과 어둠과 동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프리드리히 W.J. 셀링의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탐구』에서의 질문처럼
“자유란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에 대한 실재적이고 생동적인 개념이다. 악은 언제 끝나며 끝낼 방법은 무엇인가? 창조는 도대체 궁극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왜 처음부터 한결같이 완전한 것만 있으면 안되는가?”
왜 신은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셨는가? 라는 이 질문은 인간은 선을 추구할수록 악의 경향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과. 많은 영성가들이나 앞에서 살펴본 피히테의 자유론에서처럼 ‘인간은 자기 아닌 것이 아니고는 자신을 알 수 없는 존재’ ‘비아를 통해 아(나)를 알게되는 존재’ 라는 자기인식의 딜레마 속에서 '어둠이 아니고는 빛을 알 수 없는 존재인가'를 가설적으로 추론하게 만든다.
둘째, 죄 앞에서 인간이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은,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곧바로 자유를 제약한 것인가?라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인간을 ‘걸려넘어지게’ 하는 이 어둠의 심연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무한’과 ‘영원’을 체험하고 싶어한다는 것에서 바라볼 수 있다. 어둠을 체험한다는 것은 자유의 한계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성가들은 죄란 없다, 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왜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곧바로 자유를 제약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인간의 존재구속성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자연법칙이 지배하고, 한계효용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유한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자유의 제한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빛과 어둠을 동시에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을 찾는 외침이다.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 고 바라본 라칭거추기경의 통찰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셋째,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자유’가 아니고 ‘자유의지’라는 점에서, 인간은 늘 더 좋은 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에 대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유의지'의 최종적 실현은 바로 십자가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수 있는 자유, 자유를 타인을 위해 양도할 수 있는 자유다.십자가는 자유의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은총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자신이 무엇엔가 걸려넘어졌을 때, ‘자비’에 의탁할 수 있는 자유도 우리에게는 은총으로 주어져 있다. 자비는 우리가 신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우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그 상태로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결핍의 이름으로 귀속되는 한 우리는 자비의 은총을 거절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간파한 대로 “신은 순수한 사유이자,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이다”에서,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란 신의 자족적 실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자족적이란 온전히 자기로서 존재하는 존재, 자기 점유능력을 의미한다. 그것이 우리의 모상임을 알 때, 우리는 자연의 존재구속성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는 아니겠지만 '죄'에 자주 걸려넘어지지 않을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을 온전히 점유(통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 를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내 존재의 의미는 생이 나에게 전달했던 질문에 있다"는 칼 구스타브 융의 말을 생의 한 페이지에 적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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