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키케로&셰익스피어)
- Quiconque veut porter la couronne, résiste à son poids!
[연 중 제 28주 일 (나 해) 2021. 10. 10. 마르코 10, 17-30]
1.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끝에서, 너는(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2.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의지’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3.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지혜서7,7-11/히브리서 4,12-13/마르코 10,17-30) |
1.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끝에서, 너는(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序詩)」를 읽어본다.
①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②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③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④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⑤……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①에서 화자는 이인칭화된 너(꽃)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쓰지만 너를 결코 알 수 없다. 알고자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자신을 ‘위험한 짐승’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바꾸어 너 앞에 있는 나 역시 너에게 불가지론자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는 사물과 사물,동물과 동물이 만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서로의 본질을 알 수 없음에도,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대체가능한 ‘그것’이 아니고 대체불가능한 ‘너'이기 때문에 어둠은 어둠이되, 그것은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마르틴 부버의 『너와 나』)
②에서 너와 나는 서로의 본질을 결코 알 수 없기에 ‘존재의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불과하지만, 모름에도 존재 전체를 흔들 수 있기에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는 너는 너 혼자만의 너가 아닐 것이며, 나 역시 나 혼자만의 나는 아닐 것이다. 어떤 이름도 가지지 못한 이 '무명'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너를 끝끝내 알 수 없을지언정 너를 알려고 하는 이 의지조차 포기할 수 없기에,
③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무명의 관계, 존재의 어둠 속에서 너를 알려고 하는 갈망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네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세계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화자는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붙여 그동안 경험의 총체, 모든 지식과 인식을 총동원해 너의 본질을 다시금 규명하고자 ‘한밤내 운다’
④너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이 눈물은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무정물인 탑을 흔들다가, 돌에 스며들어, 드디어는 ‘금’이 될 것 같다. 네가 누군지 알게된 인식의 밝음이 아니라 네가 누군지 알고자 하는 이 안타까운 행위는 그 자체로 금처럼 고귀한 것이다.
⑤에서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너의 본질은 끝내 알 수 없는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너’라는 존재의 본질을 알아야 하는 것인가? 너라는 존재의 본질은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존재의 무게, 생의 무게, 사랑의 무게, 즉 생명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앎만큼 행복하고, 앎만큼 불행하고, 앎만큼 기쁘고, 앎만큼 절망하고, 앎만큼 웃을 수 있고, 앎만큼 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앎만큼 자유로울 수 있고, 앎만큼 노예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앎만큼, ‘너’라는 세계를 앎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엔 앎/모름의 대립적이고 이원적인 세계를 넘어, 즉 '앎을 넘어 앎 너머로' 그 불가지론(不可知論)인 너를 넘어 즉 ‘앎 없음에 대한 앎’을 너머, ‘얼굴을 가린’ 너에게 가는 길, 이는 존재의 무게를 감당하는 대가라고 할 수 있다.
2.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의지’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키케로의 『연설문』과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4세』에는 ‘다모클레스의 검(the Sword of Damocles)’이라 부르는 기원전 4세기경 디오니시오스 2세가 권력을 부러워하는 다모클레스에게 한 말이 인용된다.
“나는 매순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산다네. 나의 권력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 아래에서 항상 위기와 불안 속에 유지되고 있지."
디오니소스 2세의 말은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Quiconque veut porter la couronne, résiste à son poids”라는 명제로 축약돼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명언이 되었다.
큰 부와 큰 명예, 큰 권력, 즉 이 세상 모든 리더의 머리위에는 자신을 겨냥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검’ 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바라는 모든 현실의 정점에는 그에 맞먹는 의무라는 기회비용이 있다는 말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명제는 어떤 부와 (정치)권력을 가지려는 이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 그에 합당한 의무의 신탁이 있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생명의 의미로 확장해 바라본 이들도 있다.
‘인간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평생 질문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삶과 생명이 모든 인간이 쓰고있는 왕관이며, 우리의 머리 위에는 선택 ‘의지’라는 검이 매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⑥현상을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전적으로 다르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가시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 및 전체의 가장 심오한 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그 자체 속에는 이미 생존욕구. 살아남아야만 하는 생명의 맹목적인 욕망의 의지, '삶에의 의지(will to live)’가 있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명제로 바라보는데, 그는 인식론적으로는 칸트의 주관주의를 계승하여, 사물은 그것이 우리에게 현상(現象)하는 한에서만 인식된다고 보았다. 때문에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진리는 없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단순화하여 여러가지 인식 형식을 오직 한가지 인과율(因果律)의 범주로 환원하였다.
인식할 수 있는 것만 현상이요, 그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어 인과율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무엇인가 본질적인 것, 현상 이상인 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꿈이나 환상과 같이 알맹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본질의 인식은 우리들의 신체를 통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결국 우리들은 한편으로 인식의 주관(主觀)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수수께끼인 의지를 가지는 객체가 된다. 그러나 의지와 신체 관계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적인 것이며, 따라서 신체는 의지의 객관태(客觀態), 즉 객관화된 의지라고 보았다. 이것은 모든 존재에 예외없이 적용된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 곳곳에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외견상으로는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원리적으로는 같은 생명의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원인도 없고 목적도 없다.
의지의 개별적인 작용에는 원인과 목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근원적인 의지는 인과율의 밖에 선 '존재에의 무의식적 충동'이며 '살려고 하는 의지'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마음의 편안함을 얻으려고 한다면 이러한 의지에서 자유로워져 이데아를 관조(觀照)해야 하는데, 이것은 미적 태도의 본질로 예술 및 철학적 천재만이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 중에서도 특히 음악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이 미적 해탈(解脫) 역시 시간 제약을 받아서 불충분하다. 세계는 근원적으로 악(惡)이기 때문에 어떠한 노력으로써도 향락은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염세적인 체념과, 모든 물질은 근본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긍정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고자 하는 열반(涅槃)의 경지에서 비로소 참다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가 서양 사상보다 인도철학(우파니샤드)과 불교를 긍정적으로 본 것은 자신의 이러한 생각과 유사성을 갖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의지"( Wille)란 개념은, 일반적인 의미의 뜻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다른 맹목적인 감성인, "욕망", "갈구함", "추구", "노력", "고집" 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반면, 니체는 자신의 삶을 바깥의 힘이 아니라,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에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리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⑦생명체를 발현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나는 너희들에게 세 가지 변화를 말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며, 낙타가 사자가 되며 마침내 사자는 어린이가 되는가...이는 오직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 는 자기 생성의 의지인데, 이를 알기 위해선 고통의 의미에 대한 재맥락화가 필요하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생성 안에 고통의 비밀도 놓여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니체에게 의지는 가장 일반적인 현상형태에 해당한다. 즉 고통과 쾌감의 교체로 본 것이다. 순수직관의 쾌감을 통한 고통의 지속적인 치유로서의 세계를 전제로 한다. 홀로 있는 것은 고뇌하며 치유를 위해, 순수 직관에 도달하기 위한 의지의 몸짓이다. 사물들의 원천으로서의 고뇌, 동경, 결핍. 진정한 존재자는 고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고통을 통해서 진정한 존재로 거듭난다, 즉 고통을 자기자각의 원천이라고 본 것이다.
그 고통은 다시 의지에 기인한다. 그런 순환을 예술 창작에서볼 수 있는데, 예술의 출발점이 되는 ‘최고창조정신 (Genius)’의 의지는 ‘순수 직관’에 근거해서 쾌감을 준다. 다시 말해 의지가 스스로 “완전히 바깥면이 될” 때, 그러니까 최고창조정신이 원일자에 직면해서 “현상을 순수하게 현상으로 볼” 때, 의지는 쾌감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의지는 자기 스스로를 직관하면서, 즉 자기를 대상으로 보면서, ‘현상형태(Erscheinungsform)’가 된다. 이처럼 의지 안에 내재한 표상 안에서, 가상이 낳는 쾌감을 통해서 고통은 부서져 버린다. 그리고 이 표상은 생성의지에 지배된다. 여기서는 니체 스스로도 제기한 질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생성이라는 가상이 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은 다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어떻게 의지 안에서 쾌감이라는 가상이 고통이라는 존재 옆에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니체는 다음의 대답을 들려준다.
⑧의지가 스스로를 직관하면,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을 봄에 틀림없다, 즉 존재와 마찬가지로 가상은 있음에 틀림없다, 불변하며 영원히 [...] 세계는 오직 그 하나의 의지만을 위해서 완전히 현상으로 인식 가능하다. 그 의지는 그러니까 고뇌할 뿐만 아니라, 잉태한다: 그 의지는 매번의 최소 순간에 가상을 잉태한다: 그 가상은 비실재자로서 역시 비일자이며 비존재자이고 생성자이다.(『비극의 탄생』)
이렇듯,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의지(will to live)'를 비틀어서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주장했다. 여기서 '힘에의 의지'란, 더 높은 것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한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린다. 여기서 '스스로 그 사건에 대해서 자신만의 평가'를 내리는 것은, 니체는 일종의 '창조하는 행위'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즉, 사람들은 평가를 통해 각자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며, 이러한 가치의 평가는 제각기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다.
이 가치들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의지가 곧 '권력에의 의지'가 된다. 자신만의 평가를 내려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나의 이런 가치를 '남들의 가치'보다 더 높은 곳에 두고자 하는 의지. 가치의 경쟁을 통해 서로의 가치가 자극받고 다듬어져서 점점 높아지며, 이윽고 높아진 자신의 가치로 자신의 삶을 살고자하는 의지. 그것이 바로 니체가 바라는 '권력에의 의지'였다.
따라서 니체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가치'들을 언제든지 파괴하라고 설파한다. 그것이 신, 도덕, 국가, 이념 등의 절대적으로 숭배되는 것일지라도. 니체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숭배되고 있는 이러한 가치들은 '자신의 가치'를 옭아매는 '타인의 가치'에 불과하며, 자신의 삶을 도리어 옭아매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본 것이다. 신, 도덕, 국가, 이념은 니체 생존 당시에도 절대적인 이성으로 추종받았는 데, 니체는 이것을 사정없이 부수어. 결국 철학사에서 니체 이후 모든 형이상학이고 절대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주류 철학에서 사라진다. 이로써 철학과 신학은 결별하게 된다. 흔히 니체를 두고 망치를 든 철학자라 표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니체는 나를 옭아매는 이러한 기존 가치들을 '중력'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 '중력'은 우리의 몸을 무겁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중력'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을 필요로 한다. 즉, 이 '힘'이란, 기존 가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힘'을 말하며, 또한 이 '힘'은 우리가 기존 가치를 재평가하여 새로운 가치로 만들어낼 때 생겨난다. 이러한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권력에의 의지'이며, 이를 통해 몸은 가벼워지고 춤출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남이 만들어 놓은 가치들에게 지배당하지 말고, 자신이 평가한 자신의 가치를 따르자고 주장하며, 또한 이러한 기존 가치의 재평가는, 니체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 '창조'이며, 일종의 '놀이'인 셈이다.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춤추라, 더이상 말하지 말라!'고 외친 것이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삶 자체가 인간이 쓰고 있는 왕관이며, 세상에서 추구하는 권력, 명예, 부, 건강 등만 그에 준하는 의무의 신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Quiconque veut porter la couronne, résiste à son poids”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가 어떤 ‘의지’로 삶을 풀어가야 하는지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는 주문에 해당한다.
3.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지혜서7,7-11/히브리서 4,12-13/마르코 10,17-30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받고 싶은 우리가 감당해야할 왕관의 무게는 무엇인가? 아니, 과연 ‘영원한 생명’을 동경하고 갈망하기는 하는가부터 질문해야 할 것이다.
지혜서7,7-11/히브리서 4,12-13/마르코 10,17-30를 읽어본다.
<나는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지혜서7,7-11
7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8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9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0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11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리서 4,12-13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마르코 10,17-30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르코 10,17-30은 네 개의 질문으로 <영원한 생명>이 이미 여기서 시작되고 있음에 대해 전한다.
Q1.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부자의 첫번째 질문에서, 표면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 듯 하지만, 실은 영원한 생명 자체에 대한 동경이나 갈망이 그의 생을 채우고 있지 않음을 유추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을 모르면서 그것을 갈망하는 것 같은 착각을 자신에게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질문은 '주님 영원한 생명이 무엇입니까?'부터 질문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영원한 생명을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에서 ‘받으려면’은 상속의 의미 ‘물려받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부모에게 유산을 상속받듯, 영원한 생명도 어떤 현실적인 조건을 스스로 채우면 받는 것으로 그가 묻고 있다는 데서 1차적으로 그는 영원한 생명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는 것과 횡적인 관계론인 율법의 준수 여부를 부자에게 묻는다. 이에 그는 자랑스럽게 어린시절부터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대답한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영원한 생명을 몰랐다는 것이 그가 율법의 근본정신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애주애인이다. 그것에서 그가 영원한 생명을 절실하게 동경하거나 갈망하고 있지는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Q2.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 그리고, 그에게 부족한 2%를 채우라고 요구한다. 그 2%는 그가 가진 부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알라는 것이다.
율법의 철저한 준수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 가진 것을 팔고. 그 다음에 나를 따르라는 말에 부자는 울상이 되어 실망하고 돌아갔다고 마르코복음 사가는 전한다.
여기서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는 마르코 10,17-30의 주제가 나온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는 예수님의 그 바라봄, 시선이다. 그 바라봄은 사랑스런 바라봄이라는 데 있다.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라고 전하는 히브리서 4,12-13은 우리의 잘못을 샅샅이 찾아내려는 심판관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 사랑의 눈길에 대해 전한다.
부자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가 의미하는 그 시선의 맥락을 놓쳤다. 그 시선의 맥락을 놓쳤기에 그는 재산의 전적인 포기를 요구받았다고 오해하고 떠난 것이다. 그에게 가르멜 수도승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21장 1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만남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에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라는 이 시선의 마주침과 동일하다. 베드로의 저 고백이 어떤 대가를 지불한 상태에서 나왔는지를 바라본다면 부자는 언젠가 그분의 진의를 알아들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아는 분 앞에 우리가 있다는 앎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설명할 필요도 없고 해명할 필요도 없는 만남이다. 배신마저도 사랑의 초보상태임을 바라볼 수 있는 분 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이다.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부족한 상태로 서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이다. 그것은 축복을 축복으로 볼 수 있는 영안의 열림이다. 나의 본질을 이미 자명하게 알고 있는 분만이 나의 배고픔과 나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다.
Q3.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모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반복어법이 내포하고 있는, 부의 재배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부는 권력, 명예, 건강과 함께 분명히 하늘의 축복이고 오늘날 우리가 미친듯이 추구하는 가치관의 핵심이다.
그렇기에 ‘부의 위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재맥락화 혹은 재배치’를 할 수 있을 때 축복을 축복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부라는 축복의 왕관을 쓰고 있는 우리가 감당해야할 축복의 무게다.
성서에서 부의 장소 카파르나훔이 성적인 문란의 장소로 지목되는 코라진보다 더 강력한 경고를 받은 것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겠다. 성적인 문란은 당사자에게 그 결과가 자기분열로 돌아가지만 부는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되는 이 세계에서 누군가의 생존권 자체를 박탈하는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분배정의에 대한 장 지글러의 유엔 보고서 참고) 이것이 일차적인 부의 분배에 관한 것이라면.
더 본질적인 의미는 영원한 생명은 분배의 차원을 넘어 선 곳에 있다는 영적 차원에 대한 가르침에 있다. 영원한 생명은 물질(형상)을 뛰어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부분은 다시 Q4에서 재맥락화 된다.
"그렇기에 영원한 생명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획득가능한 것이 아니다.
[도서관 환상, 도저(到底)한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며http://blog.daum.net/m-deresa/12389961]에서는 왜 물질의 노예가 되는가에 대해 성찰.
Q4.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다운 질문이 제자들을 대표해 이어진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 곳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기쁨의 전언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순례에서 경험하게 되는 상반된, 어찌 보면 대립되는 그러나 그것은 다시 통합되는 삶의 양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에 해당한다. 영적인 모든 갈등은 여기서 증폭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을 버린 사람--> 박해도 받겠지만--> 현세에서 백배나 받을 것이고-->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박해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고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우리 자신 안에서 마음과 영혼이 나뉘고, 혼과 영이 갈라지는 바오로와 베드로의 ‘내려 놓음과 드러남’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지혜서7,7-11에서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라고 전한다. 좋은 것이 내게로 왔는지 아는 것, 이는 지혜가 없으면 진정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의식수준을 넘어서』(2006)에서 형상의 세계도 좋은 것이요, 형상없음의 세계도 좋은 것인데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를 취사선택해서 싸운다는 것이다. 그분은 ‘형상없음과 형상의 관계’를 재맥락화하여 하나Oneness라는 것을 깨닫는데 38년이 걸렸다고 술회한다.
“(우리의 경험은 빛과 어둠처럼 이원성의 세계다. 그 세계 너머) 형상 없는 세계가 펼쳐질 때(어떤 번역서에서는 무와 공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고, 무한하고, 영원하고, 하나이며, 전부를 둘러싸고, 멎어있고, 말이 없고, 음직임이 없고, 존재조차 배제하는 ‘앎 없음에 대한 앎’을 포함한다. 이 상태는 명확하게 경험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이원성 너머에 있다. 거기에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이것만이 궁극의 실상이라면 그에 대해 보고할 실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서 사람은 조만감 형체없는 세계를 떠나 의식적 존재로 복귀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은 형체없음의 망각으로부터 존재속으로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주관적이고 경험적 현상을 체험한다. 형상없음과 앎 없음으로부터 존재의 충격만이 아니라 물질성의 발견에 대한, 그리고 무에서 있음으로의 복귀에 육체가 동반되었음을 발견한 것에 대한 충격이다. 전자가 무한하고 텅 빈 의식 공간에 비유한다면 후자는 태양의 심장부와 같다... 이 과정에서 육체적 죽음과는 달리 짧지만 격렬한 고통, 최후의 죽음을 경험한다. 에고/마음의 자취는 사라지고 현존의 침묵 속에 머무른다. 신성으로 창조의 전부임이 눈부신 아름다움과 빛을 발하고 전부는 모든 시간 너머에서 멎어있다. Gloria in Excelsis Deo글로리아 인 엑첼시스 데오! 그 상태 자체이다”
'세상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그분의 '현존'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를 우리가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안의 열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부자에게 버리라고 한 부가 왜 우리에게 백배나 다시 주어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처음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Q1.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동경과 갈망의 질문은 누가 하는 질문인가?
성서에 나오는 부자만의 질문인가?
우리는 지금 물질이라는 형상의 세계 속에서 오감각으로 체험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다.
종교가 있든 없든 모든 이들은 질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는 모든 이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조상들의 묘와 기일을 그토록 중시 여기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신론의 입장에서라면 사람이 죽으면 그만인데 왜 그토록 조상들의 죽음 이후가 살아 있는 후손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조상들에게서조차 통공(通功:공이 서로 통한다)을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1차적으로 인간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누구나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부자의 비유처럼 자신의 부를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로 인식할 수 없기에 부의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기에, 부, 명예, 권력, 건강 등을 재맥락화 할 수 없기에, 실은 그것들 한 가지도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돈, 명에, 권력, 건강의 노예상태를 자신에게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생의 조건들은 모두 선물이다. 그것을 재맥락화할 때, 현세에서도 백배나 얻고 내세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정말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주어진 그 좋은 것 하나도 제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 다름아닌 그 두려움은 지혜없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그분에게서 받는 것이지 우리의 능력으로 획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선물이고 그 선물은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축복을 받을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생명이라는 왕관을 쓴 우리가 감당함 몫이다. 그 생명은 나 자신을 감당하는 무게일 수도 있고, 나와 너의 관계를 감당하는 무게일 수도 있고, 나와 신과의 관계를 감당하는 무게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 동경하고 갈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질문해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위치하는가? 라는 정직한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때 지혜서7,7-11/히브리서 4,12-13/마르코 10,17-30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초대라는 사실을 'Gloria in Excelsis Deo글로리아 인 엑첼시스 데오!'로 응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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