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상처의 인문학 혹은 상처의 푼크툼(punctum)

나뭇잎숨결 2021. 10. 8. 14:13

상처의 인문학 혹은 상처의 푼크툼(punctum)

- La humanité de la plaie ou la cuillère de la plaie (punctum)

 

 

 [연 중 제 27주 일 (나 해) 2021. 10. 3. 마르코 10, 2-16]

 

 
1.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 「생의 절반」
2. 상처의 인문학 혹은 상처의 푼크툼(punctum)
3.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코 10,2-16)
 

 

 

 

 

1.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장 루슬로) &「생의 절반」(이병률)

 

 

 

장 루슬로의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읽어본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벗어난 별을 보게 되거든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라//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제 자리를 벗어난 별을 보게 되거든, 느리게 흐르는 강물을 보게 되거든,에서 그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 상처받은 달팽이는 빨리 상처에서 벗어나야 하고, 저 별은 자기 궤도를 찾아야 하고, 저 강물은 다른 사물과 속도를 맞추어 좀 더 빠르게 흘러가야 한다는 주체의 시선이다. 이 시에서 <본다>는 것은, 대상의 상태를 그의 운명으로 그냥 지나쳐 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서 촉발하는 우리 내면의 투사임을 알 수 있다. 길을 가다가 멈추게 되는 풍경들은 모두 우리 내면과 그렇게 닿아있다.

 

이를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 세상에 ‘있음’이자 주고받는 ‘되기’다.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자의 통일성에 접근한다” 라고 말한다. 이 통일성은 고정불변의 형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형에서 어떤 ‘되기- 달팽이 되기, 별 되기, 강물되기'가 이루어진다. 감각은 변형의 주역이고, 신체는 변형의 행위자라는 것이다.

 

이렇듯, 상처받은 달팽이, 궤도를 이탈한 별,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은 <본다>는 행위를 통해서 화자의 삶에 어떤 변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병률의 「생의 절반」을 읽어본다.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 이불 따위를 다 불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는 걸 보면 앞으로도 한 삼십 년 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 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 남은 삼십 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 터

 

「생의 절반」의 화자는 밖의 풍경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 내면에서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간다.

 

화자는 생이란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이 전부라고 말한다. 만나는데 30년, 이별하고 그것을 잊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생의 절반이 만나는데 생의 절반은 잊는데, 사람의 한 생이란 만남과 망각 두 일로 정리된다. 말하자면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이다.

 

한 사람이 떠나고 그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하루도 안 걸리는데, 사람을 만나고 가는 시간의 무게가 생의 전부라는 아이러니와 만나게 된다. 만나는 것도 어렵고 잊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화자에게 중요한 것은 '걷잡을 수 없는 홍수이거나 무덤가에 우거진 쑥대밭'으로 만드는 바로 그  ‘사랑’이다.

 

사랑은 화자에게 생이라는 흰 백지에 찍힌 한 점의 '얼룩'일 뿐인데, 한 문장으로 요약될  생이라니.(너무 시리게 통쾌해서 사는 거 참 별거 아니네, 하고 웃다가 찡하게 만드는 시다)

 

장 루슬로의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에서 풍경에서 촉발되는 삶의 변형에 대해, 이병률의 「생의 절반」은 사람과의 만남과 잊음에서 촉발되는 생의 풍경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두 시에서 어떤 시선, <본다>는 것은 단지 '시각'이 아니라 '심안(心眼)'이다.

 

 

 

 

 

 

 

2. 상처의 인문학 혹은 상처의 푼크툼(punctum)

 

 

그렇다면 우리에게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군사 하나가 참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 34)

 

언어, 문학, 예술, 철학, 미학, 역사 등을 연구하는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은 세계의 완성이 아닌 세계의 완성을 가로막는 ‘푼크툼(punctum)’으로부터 시작한다. ‘푼크툼(punctum)’은 뾰족한 도구에 의한 상처, 찌름, 상흔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인문학은 그 상처에 반응하는 것이자, 그 상처를 참혹하게 아퍼할 수 있는 능력이자, 그것을 반전으로 치유하려는 학문이다. 그러나 그 치유는 종교에서 말하는 완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향유함으로써 상처와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롤랑바르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에서 그리움 안에 어떤 상처가 내재되어 있는지를 강하게 체험한다. 피에타의 성모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추는 것과 같다. 사진이 없었다면 부재하는 어머니를 단지 그리워만 했을 뿐인데, 또 그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면 엷어졌을 터인데, 어머니의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사진 한 장에서 어머니의 시간은 바르트에게 현재화된다. 그 결정적 순간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부재라는 상처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롤랑바르트에게 상처는 ‘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①그것은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그 장면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라틴어에는 뾰족한 도구에 의한 이 상처, 이 찌름, 이 상흔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 또 내가 이야기하는 사진들은 사실 예리한 점으로 찔려서, 때로는 얼룩져 있으므로 더욱더 내 마음에 드는 단어이다. 정확히 말해서 이 자국, 이 상처들은 점이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 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찌름, 작은 구명, 작음 흠이며, 또한 주사위 던지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나를 상처입히고 괴롭히는 우연이다(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과 인간의 충돌,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 등을 학문의 과제로 삼는 인문학은 J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그 상처를 먹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주고받은 모든 상처의 이름, 그 합산이고 그리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상처’는 가슴과 영혼의 인문학을 위한 철학적 핵심 기제로 기능했다.

 

그것은 인간이 상처 없는 삶의 불가능성 아래 위치해 있다는 실존인식이자, 인간의 삶 자체가 상처의 주체이자 객체라는 자기고발, 자기항명이기도 하다. 상처를 적극적으로 직시하고 향유함으로써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실존이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비용이 요구되는 법이다. 상처에서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지불해야할 비용이다.

 

우리가 상처의 역사 앞에서 치러야 하는 비용이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자신의 삶에 비춰 상처의 근원을 곱씹으면서 그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상처는 진정한 ‘인문정신’을 삶 속에서 인간이 다름 아닌 인간임을 실천하기 위한 스파링 파트너인 셈이다.

 

모든 만남은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왜 ‘타인은 하나의 상처이자 부활’(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사랑과 상처 혹은 사랑의 상처, 그 흔적의 존재론- L'existence de l'amour, de la blessure ou de l'amour, de la tracehttp://blog.daum.net/m-deresa/12389844]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 글은 위 글과 연장선에서, 상처는 어떻게 ‘상처의 인문학 혹은 상처의 푼크툼(punctum)’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상처에 대한 담론을 더 읽어보기로 한다.

 

 

② 주체란 우리에게 괴로워하는 자를 의미하며, 상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주체가 존재한다. 상처가 깊을수록 주체는 더욱더 주체가 된다. 주체란 내면성 자체이며 상처란 무시무시한 내면성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상처이다. 인간 깊숙이에 열려져 있는 것은 쉽게 닫혀지지 않는다. 생명의 뿌리가 머무르는 골수는 상처의 중심부이다.(로이스브르크, 『선집』)

 

③사랑하는 람은 특히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롭다. 하지만 열정과, 사람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입힐 수 있는 고통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 바로 사랑이 상처를 입힌다.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안젤름 그륀,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

 

④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상처를 줄 수 없다. 자신의 참된 자아에 위해 인도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에픽테토스, 『삶의 기술』)

 

⑤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 외에는 아무도 상처를 받을 수 없다. 모든 희생자는 타인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초래된 운명을 겪고 있는 것이다.(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사도 바울로의 서간집 주해』)

 

1차적으로 상처의 담론을 읽는 이유는 우리가 그 상처의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상처의 이름, 슬픔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만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②에서 로이스부르크는 사랑의 주체가 만들어지는 곳에서 상처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명성에서 상처는 이미 열려있다고 본 것이다.

 

③안젤름 그린 신부는 불가피하게 받게되는 사랑의 상처 외에는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④의 에픽테토스와 ⑤의 크리소스토무스 주교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깊게 만들어 상처를 재생산한다고 말한다.

 

바르트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는 것으로부터 상처가 비롯된다는 것에 주목한 상처의 인문학자 이왕주 교수는

 

⑥살의 망각은 응시만이 교차하는 소통 없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 상처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처는 응시의 시선으로 우리가 스치는 것,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폭로시켜준다. 상처없는 삶의 불가능성을 인식하라, 그리고 향유하라 (이왕주, 『상처의 인문학』)

 

⑥에서 이왕주 교수는 사랑조차 시장을 버텨내지 못하게 될 미래에 대해, 상처보다 더 무서운 사이비 처방전에 주목한다. 가슴 없는 전문가와 영혼 없는 향락자가 판치는 세상에서 상처 입은 내 자아가 마침내 기착할 항구는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왕주 교수: 영상 시대 몸의 운명과 포르노그래피http://blog.daum.net/m-deresa/12390097

 

상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곳은 어디인가?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곳은 상처받지 않음의 불가능성, 현실은 애매성, 모호성을 용납하지 않는 그 극한의 엄밀성으로 정형화된 곳이다. 이곳은 어떠한 삐걱거림도, 조그만 헛손질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다.

 

이런 현실인식에서 인문학이 제시하는 상처에 대한 보고서들은 비슷한 명제를 던진다.

 

‘상처 없는 삶의 불가능성을 인식하라. 그리고 향유하라.’

 

상처’는 몸에 새겨진 생채기나 타자에 대한 애증 정도가 아니다. 상처는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생의 조건과 맞물린다.

 

‘상처’는 영혼에 의미를 새기는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고, 연대를 위한 강력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기도 하며, 거대집단이 은폐하거나 침묵하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목소리의 발원지가 된다. 상처가 아니었다면 결코 바라보지 않았을, 아니 못했을 삶의 진실들을 목도하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 문학, 예술마저 시장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인문학’이 사고파는 상품으로 간주되는 시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떤 신념과 가치에 승부를 걸어야 하나. 이런 절박한 질문에 상처의 망각이나 일회적인 위안은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 더우기 달콤한 처방이나 감상적인 방전은 상처의 부위를 더욱 키울 뿐이다. 무턱대고 범람하는 대중적인 인문처방은 ‘가슴 없는 전문가’와 ‘영혼 없는 향락자’만 양산 할 뿐이기 때문이다.

 

대신 '온 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처에 부딪히고, 그 안에서 예민한 감수성으로 혼돈의 시간을 살아 낼 것을 『상처의 인문학』에선 이렇게 제안 한다.

 

“아직은 표류와 방황의 긴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 서둘러 웰빙과 힐링을 외치며 한 말씀의 최종어휘들로 상황을 마감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더 고단하고, 더 지치고, 더 아파하며 상처에의 용기를 보다 명증하게 추슬러야 할 시절이다. 삶이란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늘 새롭게 떠나야 할 길 앞에 서야하는 여정이니까”

 

김진석 교수는 모순과 상처 앞에서 ‘초월(超越)에서 포월(包越:모든 것을 안고 넘어감)’로, 이왕주 교수는 더 극단적으로 ‘초월(超越)에서 포월(匍越: 배로 땅바닥을 기어서 넘어감)로’ 처방전을 제시한다.

 

 

 

 

 

 

 

3.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코 10,2-16)

 

 

 

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은 것>에서 ‘분리’가 상처의 근원임을 말한다.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기2,18-24에서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코 10,2-16에서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마르코 10,2-16은 크게 두 부분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와 Ⓑ는 맥락상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의 결과가 단지 사람하고만 갈라진 것이 아니란 점에서 그 분리의 결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귀결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창세기2,18-24)라고 외쳤던 시간들이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서 이르게 되는 '분리'는 힘은 무엇일까?

 

분명 모든 만남은 축복일진데, 그것은 이상적인 제안이고 실제적으로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을 갈라놓을 정도의 인간을 사로잡는 그 분리의 힘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베드로 전서와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분리의 근원을 ‘선을 위한 열성'의 빗나감에서 또 '타인에 의해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에서 상처의 일차적인 가해자는 타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임을 적시한다.

 

상처의 원인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우리 '본성의 망각'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가해'에서 상처가 비롯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면서 타인에게서 상처가 올 수도 있겠지만 그 상처는 우리 영혼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는 견해다.

 

Ⓓ여러분이 선을 위해 열성자가 된다면,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겠습니까?(베드로전서 3,13)

 

Ⓔ상처를 입는 자는 타인에 의해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상처를 받는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사도 파울로스 서간집』)

 

Ⓓ와 Ⓔ에서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망각할 때, 상처의 가해자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본성을 잊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내적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로 대체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찌르는 것들이 바오로의 가시처럼 외적인 가시가 아니라 내적인 가시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맺어주신 만남을 갈라놓을 정도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내적인 푼크툼, 찌름, 그 분리의 요인은 무엇일까?

 

Ⓕ자신의 참된 자아에 의해 인도받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밖에 있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에픽테토스, 『삶의 기술』)

 

Ⓖ그대는 그대임(Deinsein)에서 온전히 빠져나와 그분의 그분임(Seinsein)으로 녹아들어가야한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마이스터에크하르트 선집』)

 

Ⓕ의 에픽테토스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 이상을 욕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잊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모든 상처 가운데 자신이 자신에게 가해자가 되는 이 상처가 가장 치명적인 상처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분리'라는 이름의 상처는 자기 가해에서 만들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입힌 상처, 자상(自傷)은 유다의 예에서 보듯, 또 우리 자신의 순례의 여정에서 보듯, 감사할 줄 모르고, 그분 현존을 무화시키고, 자비를 거부하게 만든다.

 

Ⓖ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그대임’에서 ‘그분임’으로 ‘녹아들어갈 때’, 즉 그분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일치하는 곳에서 모든 실재를 자명하게 볼 수 있다고 전한다. 실재를 볼 수 있다면, 우리의 본성이 무엇인지 자명하게 알 것이고 따라서 상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적자유란 실재를 볼 수 있는 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글을 정리해 보자면,

 

“상처의 인문학”에서는 ‘본다’는 것에서 상처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면 종교에서는 실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고 보고 있다. 전자의 ‘본다’는 것은 이성이나 감성 혹은 의지의 한 측면만으로 보는 선택적인 시선이라면, 후자의 눈은 실재 전체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의미한다.

 

이때, 안젤름 그륀 신부의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제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주제와 연결하여 타인에게서 오는 사랑의 상처 외에는 그 어떤 상처도 실재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래도 여전히 남는 것은 ‘사랑의 상처’다.

 

사랑은 상처일 수만은 없다. 사랑은 행복이고 기쁨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상처는 존재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이 세상의 생존방식이 아니다. 사랑은 하늘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생존방식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당연히 사랑은 상처나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사랑이 온전히 이 땅에서 실현되기 위해선 지상의 생존방식의 변형으로만 가능하다. 즉 천상의 양식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이 이전될 때까지,

 

‘ 포월(包越:모든 것을 안고 넘어감)에서 초월(超越)로, 때론 포월(匍越: 뱀처럼, 벌레처럼, 자기 상처를 핥는 라자로처럼 배로 땅바닥을 기어서 넘어감)에서 ‘초월(超越)로' '~되기"를 마다치 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희생, 배려, 용서, 이해'라는 행위는 아름답지만, 피땀이 묻어있는 단호한 선택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관계의 '진주'이기에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희생, 배려, 용서, 이해'라는 이 사랑의 진주 역시 필연적으로 상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것을 자유의지로, 내적으로 깊이 받아들일 때,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상처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절절히 체험하면서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우리가 만나게 된 사람들, 사물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라는 주제는 너무 아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