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사랑, 이 시대의 순교, 시선의 윤리학
- L'amour de cette époque, le martyre de cette époque, l'éthique de la vue
[연 중 제 25주 일 (나 해) 2021. 9. 19. 루카 9,23-26]
1.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이 사랑이다(이광호, 『사랑의 미래』) 2. 행복은 가언적(假言的)인가? 정언적(定言的) 인가? 3.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루카 9,23-26) |
1.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이 사랑이다(이광호, 『사랑의 미래』)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가?
백과사전적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도서관환상이 있는 사람들이나, 글을 쓰는 사람, 또 글을 읽는 사람은 세상을 하나의 텍스트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엇을 읽고, 본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세계라는 텍스트의 ‘퍼즐’을 맞추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책 한권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숲이 하나 사라져야 한다. 그런 대가를 지불하고 한 권의 책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숲과 한권의 책, 언뜻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무의미하다는 평가를 받는 한 권의 책일망정 이 세상이 맞추어야할 퍼즐 한 조각을 맞추는 것이라면? (의미여부는 사람들의 상대적 기준이지,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무의미하거나 유의미하거나 퍼즐들이 모여서 하나의 세계라는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 그림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를까?
아마도, 그것은 J가 온몸으로 쓴 ‘사랑’이라는 빅피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풀어갈 주제는 ‘순교’다. 현대의 ‘순교’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기 위해 이 시대의 '사랑법'과 '행복론'이라는 퍼즐 두 조각을 맞추어보려한다.
먼저, 이 시대의 사랑법은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이 사랑이다’고 말하는 문학평론가 이광호 교수의 『사랑의 미래』을 읽어본다.
①자신의 몸과 영혼이 속해있는 시간대 너머로 사랑하는 것은 지독히 어려운 일이다. 현재는 언제나 위태로우며 미래는 텅 비어 있다. 사랑은 그 사람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②그 사람이 있는 장소가 그 사람을 말해 줄 것이다...잊을 수 없는 장소는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다른 이름이다. 모든 여행은 바깥을 향한 충동이라는 측면에서 ‘임사(臨死)’의 체험이다. 귀환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은 죽음뿐이다. 완전한 사랑이란 돌아올 수 없는 여행 같다.
③사랑하는 사람들은 같은 달을 다른 시간 속에서 바라본다. 그들이 함께 하나의 달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들이 다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④가장 지독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기척을 내지 않는 것, 기다린다는 것을 절대로 알리지 않는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가장 순수한 기다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다리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⑤우연이 필연이라고 믿는 사랑의 마법이 미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에도 사랑이 남아 있다면, 운명이라는 관념에 기대지 않은 고요한 열정을 갖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순수한 우연의 권능을 깨닫지 못하고 그 누구도 자기 생의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한다
⑥당신의 운명을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나의 운명을 스스로 당신의 운명에게 던지는 것...나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 걸음이 당신의 미래에 이르게 된다해도 당신 놀라지 말아요.
⑦사랑에 관한 모든 이미지는 고독하다. ‘나’는 언제나 그 풍경의 바깥에 있다...사랑은 시선의 탄생과 함께 온다. 그가 바라본 세계의 모든 것들은 그녀의 안쪽으로 휘어져 들어갔다. 시선이 정지하는 순간만 사랑은 완벽하다. 시선이란 언제나 외롭고 잔혹한 것이다”
"낭만적 약속은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의 무기력과 무의미를 간파하는 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랑의 미래』에서 바라보는 ①시간, ②공간, ③부재, ④기다림, ⑤우연과 운명, ⑥미래, ⑦시선에 관한 담론은 모두 '시간'에 관한 것이다. 그 시간은 어떤 '시선'과 연결되어 있다. 사랑하는 이가 내 앞에 있는가, 없는가, 혹은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사랑의 시선이 일치하는가. 아닌가?
사랑은 '시간이라는 칼날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동시에 같은 무게와 깊이로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엇갈린’ 시간조차도, 한 순간의 강렬함 때문에 언어(기억)로 봉인될 수 있기에 ‘영원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기억과 망각의 책에서 봉인을 뚫고 '기억'으로 자리한다는 점에서 '영원성'이지만, 그것은 정서적 측면의 '영원성'이지 '영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성복 시인은 ‘모든 사랑은 서러움’이라고 말한다.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2」)
오늘의 사랑이 될 수 없고, 오직 갈망과 기억속에 사라질듯 말듯한 숨결로 존재하는 사랑, 여기서 『사랑의 미래』 나 「숨길 수 없는 노래2」에서 ‘사랑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게 온’ 엇나간 사랑의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 이 시대의 사랑법 하나를 바라볼 수 있다.
이 사랑은 진행중인 ‘오늘’의 사랑이 아니라 부재하는 ‘어제’나 ‘미래’에 관한 것이다. 모든 문학은 부재하는 사랑에 관한 것만 언어화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에 괄호를 친, 오늘의 사랑이 빈 칸으로 남겨졌음에도 ‘사랑의 미래’를 타진하게 만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이 사랑’(이광호, 『사랑의 미래』)이라는 것에서, 사랑은 대상을 ‘초과하는 잉여’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 역설은 사랑 그 자체가 지닌 '초과와 잉여'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와 문학이 갈라진다. 종교가 오늘의 사랑, 현존을 말할 때, 문학은 부재의 사랑을 말한다는 것에서 그를 추론 할 수 있다.
문학은 오늘에 괄호를 치면서 미래를 바라보고자 할 때, 종교는 부재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현존’으로 채운다. 문학의 사랑이 ‘가언적’이라면, 종교의 사랑을 ‘정언적’이라 할 수 있다.
(조건에 관계되는)가언적인가? 혹은 (조건과 상관없는)정언적인가?는 오늘의 사랑뿐 아니라 오늘의 행복에도 적용되는 전제에 해당된다.
2. 행복은 가언적(假言的)인가? 정언적(定言的) 인가?
-세네카, 아리스토텔레스, 임마누엘 칸트
사랑이 어떤 시간과 시선의 문제 앞에 서 있다면, 행복은 어떤 조건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실천이상비판』에서 이를 가언적인가? 정언적인가?라는 용어로 둘의 상태를 확연히 갈라놓았다.
“만약 행복해지려면 …하라!”고 어떤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은 가언적 행복론이라고 한다면, 어떤 조건에 관계없이 무조건으로 반드시 절대적으로(Absolute Maxim) 그 자체가 최고의 가치를 지니며, 어떤 수단이 되지 않는다면 정언적 행복론이라 할 수 있다.
세네카, 아리스토텔레스, 칸트가 생각하는 '행복론'을 통해 이 시대의 행복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세네카는 『행복론』에서
Ⓐ최고의 선을 쾌락과 동일한 선상에 두었던 사람들도 그것이 선에게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자리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쾌락은 미덕과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명예롭게 살지 못하고, 명예롭게 살지 않으면 즐겁게 살지 못한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것을 어떻게 하나의 수레에 담으려고 하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왜 쾌락과 미덕을 따로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인가? 모든 선한 것들이 미덕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것들이 미덕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인가? 만약 미덕과 쾌락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로 즐겁지만 명예롭지 못하며, 반대로 명예롭지만 고통을 겪어야만 힘들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존재하겠는가?(세네카, 『행복론』)
세네카의 행복론은 에피쿠로스 학파로 대표되는 쾌락주의 윤리설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가언적 행복론에 해당한다. 미덕과 쾌락을 평등하지 않은 상태로 결합시키는 자는 선의 강한 부분을 떼어내 다른 나약함에 가져다 붙이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자유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완벽해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유는 행운의 여신의 도움 없이는 견딜 수 없게 되고 그 자체로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결국에는 불안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행여 예기치 못한 불운이 닥쳐 모든 게 바뀌면 어쩌나’ 하고 근심걱정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된다. 이는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곳 대신 불안하고 흔들리는 밑바탕 위에 미덕을 세워두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행운의 여신에 대한 기대, 육체에 온갖 영향을 주는 다양한 변화보다 더욱 불안정한 것이 어디 있으랴? 소소한 쾌락과 고통에도 흔들린다면, 어떻게 신에게 복종하고 어떠한 일도 흔쾌히 받아들이며, 불평불만 없이 운명에 순응하고 본인의 불운을 진실한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고향을 지키는 수호자나 승자가 될 수 없으며, 제일 친한 벗을 변론할 수도 없는 법이다. 세네카는 “진짜 행복한 삶이란 신뢰할 만하고 올바른 판단에 바탕을 두고 있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학』에서 제시하는 행복 역시 대표적인 ‘가언적’ 행복론에 해당한다.
Ⓑ“(행복)그것은 온 생애를 통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한 마리 제비가 날아온다고 봄이 오는 것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여름이 되는 것도 아니 것처럼, 인간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하루나 짧은 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이 한 순간, 하루, 혹은 생의 한 국면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통한 인간 본질을 발현하고 실현하는 지속적인 활동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거시적인 의미에서 행복을 생애 전체를 통한 성공적인 삶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잘라 말해서 행복은 온전한 덕과 생애 전체를 통하여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행복은 또한 외적인 여러 가지 선들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적당한 수단이 없으면 고귀한 행위를 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행동에 있어서 우리는 친구나 재물이나 정치적 세력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 그것이 없으면 행복을 흐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이런 종류의 좋은 조건들을 구비해야만 될 것 같다. 이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덕과 동일시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행운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모든 선 가운데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명목상으로는 대체로 누구나 여기에 대해서 같은 답을 내린다. 즉 일반 사람들도 교양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하며, 또 잘 살며 잘 처세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이냐 하는데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같지 않으며, 또 일반 사람들의 설명은 학자들의 설명과 같지 않다. 전자는 그것이 쾌락이나 부나 명예와 같이 뻔하고 명백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때로는 같은 사람마저 경우에 다라 그것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본다. 가령, 병들었을 때는 건강을 행복이라고 보고 가난한 때에는 부를 행복이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최고선은 궁극적인 선이며, 궁극적인 선은 자족적인 것(自足 autarkeia)이다. 즉 단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자족이란 말 자체가 암시하듯이, 그것은 삶을 바람직하게 만들며, 그리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복은 자족적인 것이다.
반면, 임마누엘 칸트는 『실천이상비판』에서 가언적 행복론을 행복주의자들이라고 추구하는 행복이지 본질적인 행복은 아니라고 ‘정언적’ 행복론을 제시한다.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행복의 원리와 도덕의 원리를 구별된다고 곧바로 양자가 대립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사람들이 행복에의 요구를 포기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지켜야 할 때에는 결코 행복을 고려해서는 안 됨을 말한다”(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상비판』).
칸트가 행복이 도덕, 곧 올바른 행위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본 이유는 행복이란 개념은 너무 불명료한 것이며, 또 그 개념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은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개념은 보편타당성을 담보한 도덕성의 기초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의 요구나 가치가 행복에 의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행복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도덕법이 의지의 유일한 규정 근거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복이 도덕법칙을 부여하는 원칙으로 적합하지 않지 않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도덕의 기준도, 도덕적인 동기도 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적인 의지는 행복의 목적과 욕망과 무관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칸트의 긍극적인 관심은 인간의 삶이다. 순수 이성(이론 이성)은 실천 이성을 정초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었다. 이러한 그의 실천 철학은 사랑도 행복도 정언적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 타당한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 바로 이것이 칸트의 실천 철학의 순수한 형식인 정언 명령으로, 칸트 윤리학의 최고 원리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자율을 강조하며, 문자에만 집착하는 기존의 윤리학과 종교에서 벗어나 오로지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만을 항상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칸트는 행복론과 도덕론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설정하였다. 행복론은 경험적 원리를 그 근간으로 하며, 도덕론은 경험적 원리를 갖지 않는다. 물론 행복의 원리를 도덕성의 토대 닦기에서 전적으로 배제하긴 하지만, 그렇지만 칸트는 행복의 추구를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거나, 또 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원리와 정면으로 대립한 것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다. 양자를 구별하는 칸트의 진정한 의도는 도덕성이 문제일 경우에도 자기 행복의 원리를 따르는 것을 경계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칸트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일. 사랑.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토로했다는 점에서 그 역시 가언적 행복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3.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루카 9,23-26)
이 시대의 사랑이 부재의 현존을 추구한다면, 이 시대의 행복은 어떤 조건이 충족된 이후에야 가능한 가언적 행복론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이 대의 ‘순교’와 어떤 연관을 지니게 되는가? 즉 이 시대의 순교는 사랑과 행복과 무관한 것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전하는 루카 9,23-26을 읽어본다.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먼저, 이 시대에도 순교는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순교는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순교는 무엇인가?
이 시대의 순교는 생물학적인 피를 흘리는 순교가 아니라, 정신적인 피를 흘리는 순교라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 시대의 순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가치관에 입각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순교라고 어떤 신학자도 전한 바가 없다.
생물학적으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렵듯, 정신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으로 행복한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불행을 싫어하면서 불행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조건이 채워져야지만 행복할 수 있다는 가언적 행복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심부 담론이 유포한 물질주의를 바탕으로한 가시적인 자본주의적 행복론의 실체다. 그런 맥락에서 산상수훈에서 전하는 진복팔단을 살아내는 일이야말말로 이 시대의 정신적인 ‘순교’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강조한 세 분의 제언을 들어본다.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이것은 새로운 법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진복팔단’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법입니다. 진복팔단은 그리스도인의 갈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이며, 일정표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끄는 방향을 지시하는 방향타입니다. 바로 여기 이 길에서 방향타가 제시해주는 대로 간다면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여정을 나아갈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도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완전한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 시대의 순교란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명제를 루카 9,23-26 에서 ‘부끄러움’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낙원추방설화의 아담의 ‘부끄러움’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에서 ‘나와 내 말’은 그리스도의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 그 총체를 의미한다. 즉 그분이 보여준 궁극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이 왜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유발하는가?
[참고; 한낮의 사랑, 최소의 것에 담김 http://blog.daum.net/m-deresa/12389508]
사랑이 부끄러울 리 결단코 없지만, 진정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길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비추어볼 때, 패배와 무능, 추문의 부끄러움을 야기할 수 있다,
이를 성서의 다른 곳에서 ‘부끄러움’에 대해 이렇게 역설한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창피한 일을 당할 것이며, 치욕으로 물러갈 것입니다. 너희 이스라엘아, 너희가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5, 8-17)
⒤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로마. 10:9-13)
⒥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베드로전서 2, 6)
이사야, 바오로, 베드로는 모두 그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여부가 ‘부끄러움’의 여부를 가늠한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부끄러움은 ‘시선’에서 만들어진다. ‘부끄러움’은 티자를 통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윤리학'이자, ‘타자윤리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은 타자가 없다면, 타자가 있어도 타자의 시선을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성립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나- 타자- 삼위일체’로 이어지는 트라이앵글의 사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끄러움은 우리가 무인도에서 혼자 존재한다면 가능하지 않은 윤리임을 알 수 있다. 또는 나와 그분만 존재한다면 부끄러움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나와 그분 사이에 타자가 있기 때문에 이 부끄러움의 윤리학이 만들어진 것이다. 낙원에서 아담과 하느님만 계시다면. 에와와 하느님만 계셨다면 이 부끄러움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나와 너라는 타자가 형성되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둘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부끄러운 사랑은 없다는 말이다. 만약 상대를 부끄러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대낮에 만인에게 드러낼 수 없는 사랑은 그래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그ᅟ분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타자를 정당하게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겠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사랑의 대척점에 서 있는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은 타인 앞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평가받을까 하는 전전긍긍이자, 자기정체성이 바닥으로 추락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맛보는 어떤 정신적인 위태로움을 의미한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말한 '방어기제'는 바로 부끄러움에 대한 방어라고 할 수 있다.
반복하지만, 이 부끄러움은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시선’의 윤리학에 갇히는 한 우리는 진복팔단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행복론을 폄하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기피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78억5천명의 인류는 행복주의자이지 행복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행복주의자는 어떤 현실적인 조건이 주어져야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치론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행복론은 어떤 조건에도 좌우되지 않는 칸트의 정언명령 같은 절대적이고 정언적인 행복론에 해당한다. 이 시대의 행복론은 진복팔단에서 말하는 행복론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는, 중심부 담론이 유포한 행복론과 상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담론(le discours), 형상(la figure)』에서
“형상은 담론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이는 곧 형상이 담론으로 이루어진 어떤 사회적 규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게다가 형상은 담론 외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담론의 허구성을 공격하고 조롱한다. 그럼으로써 기존 담론 체계의 붕괴를 유도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중심부담론이 유포하는 행복론의 실체는 '담론과 형상'을 교묘하게 재배치하면서 형성된다. 리오타르는 그것을 '이미지의 정치학'이라 부른다. 이를 십자가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가 사건은 대중앞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형상을 철저히 훼손시키면서 예수가 설파한 사랑의 담론을 무화시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형상이 추하면 정신도 추하다는 미추의 담론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부활은 중심부담론이 제기하는 ‘본다’는 것을 전복시켜 새로운 ‘바라봄’을 낳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중심부 담론이 유포하는 ‘시선의 윤리학’에서 자유로울 때,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이 사랑이다”(이광호, 『사랑의 미래』)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에게 ‘부디 행복하시기를!’ 이런 인사를 할 때, 중심부 담론이 유포하는 행복론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담론을 뒤집는 진복팔단에서 말하는 그 행복론으로 행복하세요, 라는 의미라면, 이 글의 주제로 풀어쓰면, 매일 피를 흘리지 않는 정신적 순교를 하시고, 어느 순간 순교마저도 뛰어 넘으시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중심부 담론이 유포하는 행복론을 넘어설 때,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말에 동의하게 된다. 이 시대에 그분과 그분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길, 돌이킬 수 없는 사랑으로 접어든 것이다.
글을 정리해 본다.
“이 시대의 사랑, 이 시대의 순교, 시선의 윤리학”은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또한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가?를 묻는 두 겹의 ‘시선의 윤리학’에 관한 것이다.
시선이 순전히 어떤 사물을 육체의 눈으로 본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이 시대가 주입시키는 중심부담론에 의해 비교우위에 기반한 위치와 가치와 계급에 관여한다면 그것은 시선의 윤리학(ethos:개별적인 행위에 대한 도덕 판단, 도덕 판단의 정당성, 도덕의 본질, 도덕의 구체적 규범 간의 관계)으로 넘어간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란 보지 않고 믿는 행복, 부재의 현존에 희망을 두는 것이다. 믿음은 보는 것보다 들음을 더 중요시한다. 이는 나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
또한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아이처럼 행복할 수 있다. 타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때, 세상이 주입시키는 사랑과 행복론에서 훌쩍 넘어설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시선의 윤리학’은 이 시대에 피를 흘리지 않는 ‘사랑과 순교’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자로미터이자, 진복팔단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행복을 ‘오늘’ 살고 있는가를 묻는 신앙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진복팔단은 그리스도인의 갈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이며, 일정표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끄는 방향을 지시하는 방향타입니다.” 라는 그 행복을 사는 것이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순례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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