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파타(Εφφαθα)!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어떻게 들을 수 있나?
[연 중 제 23주 일 (나 해) 2021. 9. 5. 마르코 7,31-37 ]
1.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이제니) 2. 좋은 책은 스스로 진화한다 (『푸른 독서 노트』,미셸 투르니에) 3. 에파타(Εφφαθα)에서 탈리타 쿰(Ταλιθα κουμ) 까지 |
1.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이제니)
이제니의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 실린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를 읽어본다.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진다. 가지 하나조차도 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낮이다.① 두 팔 벌려 서 있는 나뭇가지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가 길 작은 웅덩이 위로 몇 줄의 기름띠가 흐르고 있었다. 몇 줄의 기름띠 위로 작은 무지개가 흐르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번지고 있었다. 한 장면 두 장면 이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세계의 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②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면 됩니다.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름과 여백이 겹쳐지는 하늘이다. 흰색과 푸른색이 펼쳐지는 몸이다. 귀를 기울여 익숙한 소리들을 걸러낸다. ③어떤 말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습니다. 고요한 것들이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④주고받는 이야기의 기본적인 구조를 숙지하고 있습니다.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통합을 시도합니다. 낯선 것일수록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울 수 있습니다. 내일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을 합니다. 마음 속에 간직해온 얼굴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돌은 모든 것을 보고 돌은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말들 위로 이끼가 내려앉는다. 너와 나라는 두 개의 문이 열린다. 가지가 가지로 이어지듯 목소리가 목소리로 이어진다. ⑤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뿐입니다. 바닥에는 몇 개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⑥죽은 것이 죽은 것으로 다시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간다. ⑦흐르고 있는 그림자를 경계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엇 하나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환한 빛을 필요로 합니다. 시간과 함께 둥글게 깎이고 있는 돌을 본다. 당신을 만나는 심정으로 돌을 만난다.
이제니의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는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진다’로 시작해 ‘당신을 만나는 심정으로 돌을 만난다’로 끝난다. 이 시에서 왜 ‘당신’은 ‘돌’인가?
이를 해명하는 것이 ‘마음 속에 간직해온 얼굴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에서 화자가 왜 당신을 돌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제시된다. 당신은 부재하기에 시각이나 촉각으로 감지될 수 없는 존재, 돌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신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각은 청각과 결합되면서, 당신의 부재는 현존이 된다.
이는 평어체(시각)와 경어체(①~⑦청각)를 교차해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통합을 통해 시인은 ‘돌’인 당신의 심장을 오래오래 번역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당신,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당신, 그 당신은 ‘돌’이기에 유한이기도 하고 ‘소리’이기에 무한하기도 하다.
‘시간과 함께 둥글게 깎이고 있는 돌을 본다’에서 돌이 닳듯이, 마음에 오래 담아둔 사람도 닳는다.
이렇듯, 시인은 목격하거나 듣게 된 단 하나의 장면을 그냥 넘어서는 법 없이 오래 오래 마음에 눈에 담아둔다. 하찮은 것이 산이 되고 바다가 되고 하늘이 된다. 당신이 내 안에 너무 오래 담겨 있어서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게, 세계 구석구석에 잡혀있는 주름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이 작업은 너무나 곡진해서, 모든 사물을 이루는 언어의 벽돌을 하나씩 집어 제단을 앃는 작업과 닮았다. 마침 독자의 손에 당신이라는 한 장의 벽돌이 쥐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은 사람뿐 아니라 사물의 움직임, 그 표정을 낱낱이 읽는다. 언어적 움직임 자체가 ‘무한’을 향한 열림이 가능한지를 타진하다, ‘무한’이 닫힌 입구에서 “빛과 그림자가 혼합된 백일몽의 연속”(‘떨어진 열매는 죽어 다시 새로운 열매로 열리고’)을 겪으며 일일이 “주변을 맴도는 불확실한 움직임”(‘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을 순간순간 찾아내는 일에 몰입하게 된다.
“서 있는 자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시점에 이르러 우리는 ‘돌’인 만남으로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 그제야, “무엇 하나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진실에 도달하고(‘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드디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이름으로 남는 것이다.
‘ 말하지 않는 말들 위로 이끼가 내려앉는다. 너와 나라는 두 개의 문이 열린다. 가지가 가지로 이어지듯 목소리가 목소리로 이어진다’에서,
이제니 시에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성多聲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흘려 쓴 것, 그러니까 시인이 무언가를 겨우 포착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위를 주저하면서 써나갈 때 오히려 텍스트 위로 당도하는 무엇. 그것을 기록하려 할 때, 당신의 목소리는 비로소 탄생한다. 목소리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여백’을 통해 드러난다.
“그 어떤 마음도 어떤 감정도, 어떤 절망도 어떤 슬픔도, 어떤 비극도 어떤 애도도, 어떤 기억도, 과거도, 미래도, 현재조차도, 목소리 속에서, 목소리에 의해, 발화의 반열에 올라선다.”(문학평론가 조재룡)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 시인은 문장들 사이사이로 문득 끼어드는 ‘어떤 목소리’로, 미처 다 말할 수 없는 무엇을, 지나간 자리를, 남겨진 자리를 환기시킨다. 그 모든 목소리들은 한 개인의 목소리이자 그 개인이 지금껏 겪어오고 건너온 모든 사람과 생의 총합이기도 하다. 고백하고 독백하는 시집 속 문장들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입 없는 말, 지워나가면서 발생하는 말이 된다. 시인은 연약하지만 분명한 용기와 애도를 담아 가만히 그 목소리들을 받아쓴다,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이자 자신 아닌 모든 당신들의 목소리를 (듣기에) 받아쓴다. 그래서 '돌'이 마치 잘 반죽된 '빵'이 될 때까지,
시인은 말한다.
“이제 나는 손을 하나 그리고 손을 하나 지우고 이제 나는 눈을 하나 그리고 눈을 하나 지울 수 있게 되었다. 지웠다고 하나 없는 것도 아니어서 미웠다고 하나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이제 나는 깊은 밤 혼자 무연히 울 수 있게 되었는데 나를 울게 하는 것은 누구의 얼굴도 아니다....그것이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면서 홀로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2. 좋은 책은 스스로 진화한다. (미셸 투르니에, 『푸른 독서 노트』)
“좋은 책은 스스로 진화한다”라고 말하는 미셸 투르니에는 세계를 어떻게 읽어내는가? 그는 『짧은 글 긴 침묵』, 『뒷모습』, 『외면일기』, 『예찬』, 『흡혈귀의 비상』, 『마왕』,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다. 그의 『푸른 독서 노트』는 누군가가 받아쓴 세계를 다시 제해석하며, 받아쓰는 두 겹의 번역기에 해당한다.
미셜 투르니에는 쓰는 것 못지 않게 다른 작가들의 책을 꼼꼼히 읽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책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 모든 개념을 그는 그의 언어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싶어한다.
『푸른 독서 노트』에서,
⒜내가 라디오에서 소설 낭독이나 시 낭송을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그 낭독이나 낭송에 만족해본 적이 없다! 늘 저렇게 읽으면 안 되는데, 나라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텍스트 해석이 온전히 독자 혹은 텍스트 낭독자인 나의 몫이라는 걸 의미한다. 책은 나에 의해 읽히기 위해 쓰인 것이고, 시는 나에 의해 암송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그것들이 요청하는 것은 나의 목소리, 나의 해석이다.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겸 지리학자는 분명 ‘쥘 베른’이다. 쥘 베른의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점을 비난한다. 사람들은 오로지 외부로만 향해 있는 그의 관심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말라르메의 섬세함, 프루스트의 분석과 대척점에 서게 된다.
⒞셀마 라게를뢰프가 쓴 『닐스의 모험』, 나는 그 책을 통해 처음으로 위대한 텍스트가 어떤 것인지 발견했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뭔가 훌륭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 책과 비슷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우리가 로스톱친을 거론하는 것은 그가 아이들을 위해 많은 소설을 쓴 세귀르 백작부인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동포들, 하물며 로스톱친 백작 자신은 거기서 받아들일 수 없는 패러독스를 보았을 것이다. 작가들의 특권이란 그런 것이다. 현재는 분명 정치가들에게 속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는 작가들의 것이다. 폴 발레리는 이렇게 쓴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탕달과 나폴레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누가 감히 나폴레옹에게 언젠가 사람들이 스탕달과 나폴레옹이라 말할 거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교사였던 마르셀 파뇰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정말 위대한 작가야! 그의 작품은 어느 구절이든 아이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킬 수 있다니까.”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에서, 사물의 근본을 이루며 서로 상대가 되는 개념 둘을 짝지어 써나간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총 116개의 개념을 닮음과 다름으로 대립되는 두 개의 개념으로 각각 한 쌍씩 엮어 개념의 의미를 찾아간다.
⒡고양이의 성정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의 성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사람들은 개에게 스스로 문을 열고 바깥을 정복하러 떠나는 충동을 기대한다. 사람이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가 사람의 산책을 이끄는 것이다. 사람은 개가 자기를 대신해서 거리나 집 주위에 있는 들판이나 숲의 모든 구석구석을 탐험해주기를 바란다. 개의 후각―고양이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은 멀리에서도 수색을 할 수 있는 도구이다. 사람은 그 후각을 가로채고 싶어 한다. 반면 고양이는 집 안에 남아 난로가나 등잔 아래에서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꾸벅꾸벅 졸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에 잠기기 위해서이다. 고양이가 쓸데없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지혜롭기 때문이다. 개가 일차적 동물이라면, 고양이는 이차적 동물이다.
⒢스푼은 저녁에 먹는 수프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수프는 야채 국물에 빵을 찍어 먹는 음식인데, 하루의 일과가 끝난 다음 가족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스푼이 바쁘게 움직인다. 수프가 빡빡할 때에 스푼은 수프 속에 똑바로 꽂혀 있다. 수프가 뜨거우면 차게 식히느라 후후 불면서 호들갑스럽게 먹게 된다. 포크에는 어딘가 악마적인 데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쇠갈고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악마를 표현한다. 그 쇠갈고리는 아마도 신에게 버림받은 죄인들을 지옥불 속에 던지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스푼이 채식주의적 소명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포크는 육식의 상징이다. 옛날에는 ‘포크 마음대로’라고 불리는 식당들이 있었다. 그것은 돈을 조금 내고 냄비 속에 딱 한 번 포크를 넣은 뒤 집어낼 수 있는 만큼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보통 오른손은 왼손보다 더 ‘능란하다’. 왼손은 그 자체로 ‘왼쪽스럽다’. 즉, 서툴다는 말이다. 어쨌든, 인류의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왼손이 서툴게 느껴진다. 전통적으로 선(善)은 오른쪽에, 악(惡)은 왼쪽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골고다에서 착한 도둑은 예수의 오른쪽에, 나쁜 도둑은 예수의 왼쪽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최후의 심판일에도 선택된 자들은 성부(聖父)의 오른쪽에, 버림받은 자들은 왼쪽에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1789년 삼부회의(三部會議)가 처음으로 열렸을 때부터 왕당파는 의장 오른쪽에, 혁명당원들은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정치 전통은 좌파·우파라는 말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한 116개의 ‘열쇠-개념’들은 매우 소박한 추상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신은 무신론이 말하는 신의 부재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 존재인 악마에 대립되어 있다. 또한 존재는 비(非)존재가 아니라 실제의 체험이 나타내는 무(無)에 대립되어 있고, 우정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에 대립되어 있다.
미셀 투르니에 책들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유쾌한 독서노트이자, 철학 에세이이다. 그의 작품들은 신화적 상상력을 기초로 하면서 역사와 문학, 철학과 종교를 종횡으로 넘나들며 현대 사회의 여러 면모들을 재조명하고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한다.
『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은 문학과 철학을 접목시킨 투르니에 글쓰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세가지 깨달음을 안겨준다. 첫째, 삶의 모든 존재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가장 반대되는 것 옆에 섰을 때 사물은 비로소 뚜렷한 존재 이유를 드러낸다. 셋째, 이렇듯 뒤집고 비틀고 상하좌우에서 바라보면 철학이, 문학이, 생각하기가 더없이 즐거워진다. 좋은 책은 스스로 진화한다.
그의 사유만큼이나 그의 일상도 흥미롭다. 그는 마그리트 유르스나르, 파트릭 모디아노, 르 클레지오 등과 더불어, 프랑스 문단을 끌어가는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파리 근교의 한적한 마을 생 레미 슈브류즈의 사제관에서 홀로 살고 있다. 작가 생활을 시작한 1950년대 말 전 재산을 털어 인수한 사제관이다. 전원 생활에 푹 빠져 있는 그는 한 달에 한 번 파리 나들이에 나선다. 공쿠르상 심사위원들과 점심식사를 즐기면서 문학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문단 접촉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면모들을 재조명하고 재해석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원시적 상상력이 현대적 감수성으로 재해석되는데 동화적이고 악마주의적인가 하면,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철학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가 삶의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유머러스하고 쾌락주의적이기도 하다. 호메로스, 말브랑슈, 버클리, 들뢰즈, 세르지오 레오네 등의 독해는 특히 독자들에게는 빛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면서 책 뿐 아니라 세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그 지침을 제공하기도 한다.
3.에파타(Εφφαθα)에서 탈리타 쿰(Ταλιθα κουμ) 까지
그렇다면,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혹은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독해능력(들음)이 필요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7,31-37을 읽어본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 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우리는 구약성서가 히브리어로, 신약성서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오늘 도착한 성경은 번역의 번역을 거친 몇 번의 누군가의 입김이 쌓인 번역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에 예수님 모어(mother tongue)로 알려진 아람어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지 않은 채' 그대로 기록되고 그 뜻이 설명되는 몇몇 어형들이 남아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ܐܠܗܝ ܐܠܗܝ ܠܡܢܐ ܫܒܩܬܢܝ)
에파타(ܐܬܦܬܚ) 탈리타 쿰(ܛܠܝܬܐ ܩܘܡܝ)마라나 타(ܡܪܢ ܐܬܐ)...등등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역사 속의 예수가 썼던 말은 아람어이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히브리어(구약)와 그리스어(신약)를 어느 정도 썼다고 본다. 일단 예수가 살았던 마을인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은 아람어가 쓰였던 지방이었으므로 아람어가 예수의 모어임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예수가 당시 히브리어로만 되어 있던 구약성서를 읽는 구절이 성경에 기술된 것으로 보아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루카 4장 16-17절) 또한 이방인 지역에서 주로 쓰이는 그리스어. 로마상류층이 사용하는 라틴어 등 종합해보면 예수가 일상에서 일차적으로 썼던 말은 아람어이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맥락에서 ‘에파타(ephatha)!’는 예수의 모어인 아람어이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서에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에 해당하는 에파타(ephatha)! 가 번역되지 않고 들어왔다. 번역할 수 없는 생생한 그분의 육성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할까?
일단, 모어는 언제 우리가 사용하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ܐܠܗܝ ܐܠܗܝ ܠܡܢܐ ܫܒܩܬܢܝ) 에파타(ܐܬܦܬܚ) 탈리타 쿰(ܛܠܝܬܐ ܩܘܡܝ)마라나 타(ܡܪܢ ܐܬܐ)...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순간에 자신 안에서 모어는 단발마처럼 튀어나온다. 걸러져서 말해진 것이 아니라 심장에서 즉물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에파타(ephatha)!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할까? 그동안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그 병자의 상태에 맞는 말씀이 동시에 주어졌던 것을 기억해보자. 대부분,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러니 편안히 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에파타(Εφφαθα 열려라)' 이 말씀은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마르코 7,31-37에서 대략 네 부분으로 바라볼 수 있다.
Ⓐ에서 그분은 띠로와 시돈 데카폴리스 등 이방인 지역을 거쳐 갈릴레오로 돌아오신다. 띠로와 시론 하면 우리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했던 한 이방인 여인을 떠올리게 된다. 예수님의 복음이 특정 지역이나 종교의 카테고리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을 버려두고 다른 민족들에게로 가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버려두고 떠나신 이들은 황폐함 속에 남아 있고, 그분께서 찾아가신,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땅에서 한 여인이 나와 그분께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얼마나 위대한 신비입니까! 주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떠나오시자 이방 민족들의 땅에서 가나안 여인이 나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을 떠나셨고, 여인은 우상 숭배와 불경한 삶의 방식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여인은 찾았습니다. 그들이 율법 안에서 거부한 분을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했습니다. (라틴인 에피파니우스 『복음서 주해』 58).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들음과 말함의 시작은 누군가의 간정한 염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과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감응'안에서 ‘에파타(열려라)’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에파타(Εφφαθα)'가 무엇에 갇혀있는 그 누군가를 그분의 사랑과 연결시키는 '마리아'가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귀먹고 말 더듬는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을 그분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을 동시에 포괄하는 해방의 매시지다.
Ⓒ에서 예수님의 치유행적은 이전과 다르다. 말씀이 아니라 어떤 행위가 동반된다. 당대 유다계 및 이적 사화에는 침을 바르고 하늘을 쳐다보며 숨을 내쉬는 것은 치유행위였다. 물, 피, 술, 기름의 액체는 약품으로 하늘의 기운을 얻어 그 기운으로 병마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구약성서에서는 의술에 의존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나. 우상숭배 성격이 짙은 마술행위는 금하였다. 마술행위와 다르게 병에서 벗어나 죄인의 상태가 아닌 치유로 인류의 아픔을 덜어 주시기 위하여 예수는 인류 문명에 동참하신 것이다.
여기서 에파타!, 곧 열려라!는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멈추어야 할 부분은 ‘곧바로’라는 부사가 지시하는 '오늘'의 사랑이다. 그 언젠가로 유예된 사랑이 아니다.
Ⓓ에서 초점은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에 있을 것이다.
그분이 치유기적에 관한 금지령은 그분이 지상에서 하셔야 하는 ‘오늘’의 사랑을 모두 완수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그분의 소문은 널리 퍼진다. '저 분이 하신 일은 모두 휼륭하다'는 이 목격담은 ‘저분의 사랑은 끝이 없구나'로 바뀔 때까지 '에파타'의 열쇠가 우리에게 맡겨졌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열어야 하는 것은 사랑에 닫혀있는 우리의 가슴이다.
에파타(Εφφαθα)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늘의 언어다. 그러나 그 언어를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에파타의 진정성에 도달하는가의 여부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늘, 지금 여기서, ‘곧바로’ 이루어지는 오늘의 사랑이 되기도 하고, 그 언젠가 이루어질 유예된 사랑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몇 주 전, 겨자씨 비유에서 살펴본,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比喩』 (분도출판사, 1974)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래 형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비유에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들을 수 있게 된다.”라고 전한다. 비유조차도 직접 들을 수 있다면 그분의 직접적인 말씀은 더욱 그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품위와 본성을 알게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림절 묵상서로 강론 중 추천받은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사람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에서
Ⓕ'사람아, 너의 신비를 생각하라!' '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명심하십시오!'(강론 XXI, 3)
기쁜 소식을 한마디로 표현한 위의 문장은 “에파타(ephatha)!”의 육성을 들은 사람의 상태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날이 언제이든 자신 안에서 하늘과 땅이 열렸다는 '에파타'를 경험한 사람은 모든 날이 성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품위가 무엇인지, 우리의 본성이 누구의 본성에 닿아있는지 알게 된 기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차적으로 우리는 에파타(ephatha)! 열려라!라는 저 말씀이 함축하는 바, 듣지 못하고 닫혀있는 것은 사랑하기 어려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우리의 닫혀있는 마음을 열고 그분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을까?그것은 들을 수 있을 때. 그것을 들어야 하는 이들에게 우리도 ‘곧바로’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들려주지 못했다는 것은 듣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에파타(Εφφαθα)는 들음-말함의 연쇄 어령에 해당한다. 그것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에파타(Εφφαθα)를 들을 수 있었다면, 당연히 누군가에게 들려주게 된다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들려준다는 것은 동시에 함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들음의 문제에서 무엇인 문제인가? 들을 수 있다면 말할 수 있다. 듣는다는 것과 말한다는 것은 거의 동시적 능력이라 할 수 있지만,무슨 말을 할까?가 먼저가 아니라 무엇을 들어야 할까가 먼저라고 할 수 있다. 들으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목소리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고 하시는 바로 그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이 아니라 자비로운 사랑일 것이며, 사랑하는 이들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을 말없이 지켜주는 사랑일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16,13-23)
Ⓗ “탈리타 쿰!”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마르코 5,21-43)
“에파타(ephatha 열려라)!”라는 이 해방의 언명은 이천년전에는 그분에 의해, 오늘은 우리에 의해서 여전히 살아 있는 언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만나는 이 세계를 우리 역시 과감히 풀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나눠갖고 있는 베드로의 열쇠를 통해,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을 아낌없이 빌어주어야 한다. 내 소원은, 바로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라고.
그러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인 ‘내가 너에게 말한다’는 이 정취의 상황에 생의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듣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일필휘지로 연결하는 말은 침묵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어렵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순례의 여정은 ‘에파타(Εφφαθα)에서 탈리타 쿰(Ταλιθα κουμ) 까지’라고 말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언젠가로 유예된 사랑이 아니라 오늘 ‘곧바로’ 즉 우리게 주어진 모든 정취의 상황에서 온 인격으로 들어야 할 사랑의 언어를 듣고, 굳어진 혀가 풀려 '에파타(Εφφαθα열려라)'의 자리를 찾아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 어제 지방에서 서울로 강의하러 오다, 백주대낮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터미널 앞에서 심하게 넘어졌습니다. 얼굴을 다치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보도불록으로 슬라이딩 하면서, 세상에 백기를 던진 사람처럼 제대로 넘어졌습니다. 너무 아프니까 창피한 것도 없어서 넘어진 곳에서 얼얼함이 가실 때까지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앉아서 저의 모어가 <아!>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옆을 지니가던 이들이 건네준 물티슈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어날 때까지, 가던 길을 멈추고 얼마나 다쳤나 걱정하면서 지켜보고 손 잡아 일으켜준 분들, 정말 고마웠습니다. 넘어지지 않았다면 그런 사랑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아침 새벽미사 때, 찢어진 손바닥 위에 놓인 성체! 제가 봉헌할 것은, 바로, 오늘 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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