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뮌휀 바이에른 주립 도서관 전경
우연과 운명의 갈림길, 그 환상과 실재
-The Crossroads of Coincidence and Fate, the Fantasy and Reality
[연 중 제 21주 일 (나 해) 2021. 8. 22. 요한 6,60ㄴ-69]
1.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김선우, 「낙화, 첫사랑」) 2. 그대의 집과 혼인하라, 아니 혼인하지 말라(르네 샤르, 「히프노스의 단장들」) 3.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0ㄴ-69) |
1.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김선우, 「낙화, 첫사랑」)
아침저녁으로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은 우리가 했던 모든 이별들, 모든 사랑들, 그 모든 만남들을 소환해 제 자리를 찾아주기 참 좋은 계절이다. 여름이 발산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수렴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내면으로 돌아가기 적당한 시간인 듯하다.
모든 만남에는 마땅한 그 자리가 있다. 만남의 필연적 이유에 도달하기 위해 99가지 이별해야할 이유와 한 가지 이별하지 않아야 할 이유 앞에 우리는 늘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만남의 완성이 무엇인가는 논하려면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모든 만남은 우연과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만 생각해보려 한다.
사랑과 이별의 완성은 지난 시간을 그리움이나 회한이라는 정서로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졌던 시간들을 어떤 의미로 수렴시키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없겠지만,우리에게 왔던 사랑들은 여전히 우리 각자의 삶에 ‘흔적의 존재론’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도 이 순례의 여정에 있다는 것은, 맞추어야 할 존재의 퍼즐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선우, 「낙화, 첫사랑」을 읽어본다.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김선우의 「낙화, 첫사랑」에서는 ‘흔적의 존재론’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만남의 자리를 찾는 일, 즉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어떤 길을 가르킨다고 할 수 있다. 김선우의 이 시는 정지상, 황진이, 한용훈, 김소월, 서정주, 이형기, 조지훈, 황동규, 류시화로 이어지는 ‘이별은 곧 사랑의 완성’이라는 계보를 잇는 시이다.
「낙화, 첫사랑」에서 첫 행부터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이라고 이별을 예감하는 화자가 나온다. 사랑을 동시에 할 수 없듯, 이별 역시 동시에 할 수 없다.
‘이별’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는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내 사랑의 몫으로 ~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라며 그대와의 이별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수용하겠다고 말한다.
이별도 또 다른 사랑의 완성이기에, 그대가 떠나가는 순간. 그 이후에도 비록 떠나가는 그대를 붙잡지는 않겠지만, 끝까지 자신만큼은 그 사랑을 완성해 보겠다는 다짐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별하게 될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했던 사랑에 대해서만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언뜻, 1연에서 시적화자는 그대와의 이별을 슬프고 괴로운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때가 되면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이별을 순순히 수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처럼 그대를 떠나보내는 것이 곧 소중한 그대와의 사랑을 완성하고 온전히 간직하는 것이라고 믿기에, 시적 화자는 '그대를 보내 줌으로써 그대를 다 가지겠다'는 역설적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눈물보다 더 매서운 눈물이다. 이때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라는 표현은 그대와 '나'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와의 소중한 인연을 온전히 간직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대와의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면 왜 그대를 보내 주어야 하는가. 시인의 이러한 모순형용은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화자정리'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즉 사랑이라는 것도 나와 그대의 만남으로 시작되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언젠가 끝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그대와의 사랑은, 그대가 떠나는 것으로 귀결될지라도 하나의 완성된 사랑으로 보는 것이다. 떠나가는 그대의 마지막 뒷모습을 지켜보는 행위는 비극적으로 끝나는 자신의 사랑을 그 모습대로 완성하고 완결 짓는 행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그대가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 돌리지 않고 지켜봄으로써 자신의 소중한 인연을 완성하고 만남의 의미를 자기 것으로 온전히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2연에서는 1연의 결별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과 함께 그 사랑을 통해 자기애로 넘어간다. 이 자기애의 시작은 과감한 '추락'을 의미한다. 시적 화자는 떨어지는 그대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여 자신을 구원하겠다고 말한다. 추락의 끝까지 가봐야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어설픈 슬픔은 어설픈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나'를 구원하는 행위가 무엇을 위한, 어떤 의도를 가진 행위인가 하는 점이다.
이별로 인해 인생전체를 블랙홀에 빠트리지 않겠다는 것, 즉 시적 화자는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이별의 뒷모습을 수긍하며, 추락하는 자신을 ‘강보에 싸인 아이처럼’ 소중히 받아 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의 의지는 비단 추락하는 '나'와 그대 가운데 나만을 구원하겠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나'를 구원함으로써 함께 할 수 없는 그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 '그대'를 구원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용운의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조응되는 ‘아가서’가 문학적으로 유전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이별을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는 완성의 과정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첫사랑’은 최초의 사랑이라기 보다는 모든 사랑의 ‘첫’ 순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시적 화자가 경험한 '그대'와의 결별을 '낙화' 의 이미지에 대응시켜 시상 전개의 중심축으로 활용함으로써 ‘낙화’가 주는 결별의 이미지는 통상적으로 이별, 사랑의 종말, 젊고 아름다운 시간의 종식, 청춘의 뒤안길 등을 의미하는 시어로 자주 사용되어 왔는데, 이 시에서도 '낙화'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상징하기는 하되, 다른 이별시와는 사뭇 다르게 차용된다.
'낙화'를 제재로 한 다른 시에서는 보통 시적화자가 꽃이 떨어지는 모습이나 광경을 목격하고, 그로부터 촉발된 정서나 이별의 슬픔을 나타내는 경우가 일반적인 데 비해, 이 시에서는 시적 화자가 구체적 자연 현상으로서 '낙화'를 경험한 정황이 드러나 있지 않다. 즉 이 시에서는 '낙화'라는 시어에 담겨 있는 시각적 이미지와 그것이 상징하는 '이별'의 의미만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김선우의 「낙화, 첫사랑」에서 '낙화'는 낙화 그 자체가 아니라 낙화 이후의 자연현상에 주목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별 그 이후의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쓰라린 이별을 경험한 시적 화자가 '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러, 이별의 자리는 '만남의 완성'이라는 미학이 만들어 지는 것에서 그를 유추할 수 있다.
2. 그대의 집과 혼인하라, 아니 혼인하지 말라(르네 샤르, 「히프노스의 단장들」)
김선우의 시처럼, 이별을 통해 홀로 그 만남을 완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만남의 지속을 통해 두 사람이 만남을 완성하는 경우도 많다. 알베르 카뮈와 르네 샤르가 그 경우다. 중국에 관포지교가 있었다면 유럽에 카뮈와 샤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와 르네 샤르의 편지』 는 프랑스 문학의 두 거장이 오랜 시간 주고받은 서간집으로 누군가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상황들, 섬광 같은 행운처럼 삶을 바꿔 놓은 상황들을 성찰해보게 하는 만남과 우정에 대한 진핵이 담겨있다.
편지의 내용을 읽어본다.
⒜르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내 안에 깃든 빈자리가, 공허가 오직 당신의 글을 읽을 때 채워집니다. - [알베르 카뮈가 르네 샤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최근 몇 주 동안 당신이 몹시도 그리웠습니다. 나는 장난삼아 당신이 러시아에 있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군주처럼, 그러나 종종 눈물이 날 것 같더군요. 그러면 장난은 증발해버리곤 했지요. - [르네 샤르가 알베르 카뮈에게] 쓴 편지 중에서
⒞르네 샤르는 랭보 이후 프랑스 시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입니다. 오늘날 그는 프랑스에서 자기 노래를가장 소리 높여 외치고 인류가 가진 최고의 부를 전하는 시인입니다. 시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사랑 가까이에 있습니다. 천한 돈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딱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저 거대한 힘 말입니다. - 알베르 카뮈가 브라질 기자와 나눈 인터뷰 중에서
⒟당신은 대단한 책을 쓰셨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자랄 수 있을 테고, 공상은 숨 쉴 수 있을 겁니다. ‘용서받은 자들’은 다시 무정해질 겁니다. 우리 시대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애정 어린 존경을 전합니다. - [르네 샤르가 알베르 카뮈에게 쓴 편지] 중에서
⒠한 편의 작품을 실현할 때 찾아오는 의혹의 순간에는 오직 같은 걸음으로 걷고 있다는 걸 알고 이해하는 친구에게 기댈 수 있다. - [알베르 카뮈가 르네 샤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존재들은 그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상처를 보듬는 건 언제나 여명입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긴 현기증입니까. 우리는 결코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르네 샤르가 알베르 카뮈에게 쓴 편지] 중에서
⒢오늘날 감히 아름다움을 옹호하며 그걸 드러내어 말하고, 일상의 빵을 위해 싸우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걸 입증한 유일한 시인입니다. - [알베르 카뮈가 르네 샤르에게 쓴 편지] 중에서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 나도 당신을 잊지 않습니다. 프랑신과 당신에게 진심을 전합니다. - [르네 샤르가 알베르 카뮈에게 쓴 편지] 중에서
⒤여름을 기다리듯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비가 끊임없이 내려서 나는 그곳을 꿈꾸고 있어요. (중략) 나는 진실하면서 동시에 유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니 매 순간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이 작업을 하는 내내 고독하다고 느꼈고, 당신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곤 했습니다. - [알베르 카뮈가 르네 샤르에게 쓴 편지] 중에서
⒥그를 사랑하고, 그의 투쟁에 함께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천 가지 이유가 있기에. 르네 샤르.
⒦친애하는 르네, 그러니 당신 자신에게 대해서도, 비교할 데 없는 당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으시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의심은 우리를,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알베르 카뮈가 르네 샤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친애하는 알베르 카뮈, 창살로 장식된 벽의 구멍들을 미래의 길이라 하고, 이빨 드러낸 개 같은 저들의 마음을 인간의 동맥이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페스트』 출간 이후엔 더 이상 헛된 생각을 품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대단한 책을 쓰셨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자랄 수 있을 테고, 공상은 숨쉴 수 있을 겁니다. “용서받은 자들”은 다시 무정해질 겁니다. 우리 시대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저의 애정 어린 존경을 전합니다. 르네 샤르
⒨친애하는 르네 샤르, 당신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습니다. 요즘은 제가 말과 태도를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 오늘날 용감하게 아름다움을 옹호하고 그걸 명백히 얘기하고, 일상의 빵을 위해 싸우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걸 입증한 유일한 시인이십니다. 당신은 무엇 하나 배제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당신의 애정 어린 동감이 제게 안겨준 기쁨은 충분히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이건 『페스트』 의 장점이나 결점과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훨씬 심오한 일이지요.
누군가의 편지를 읽는다는 것은 '봉인'을 푼다고 할 수 있다. 편지는 아주 사적이고 사소한 기록물이다. 편지는 한사람을 위한 것이며, 그 안에는 말로 전하기 힘든 진심이 자주 담긴다. 여기 소설가와 시인인 두 예술가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알베르 카뮈와 르네 샤르는 약 13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알베르 카뮈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둘은 편지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만났고,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알베르 카뮈가 르네 샤르의 시를 읽고 진정한 시를 깨닫게 되었다는 편지는, 이들의 문학적 교류가 얼마나 깊고 아름다웠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알베르 카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내 일처럼 기뻐했다는 르네 샤르의 이야기는 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깊고 진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오직 작품과 발표한 글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던 두 작가가 작품 밖 목소리에도 집중하기 시작한 것. 그들이 남긴 작품 속에서 그들의 삶을 추적하고,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마음을 쏟았는지 함께 짐작해볼 수 있다. 이들의 우정 없이는 불가능했을 여러 작품의 탄생과 그들의 삶에 대해 만나 볼 수 있는 편지들이다.
편지에는 각자의 문학적 열정, 시대적 고민, 인간에 대한 연민이 녹아 있다. 원고를 의뢰하는 일로 1946년 처음 편지를 주고받은 둘은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한 달 내내 손 놓을 수 없는 작업에 파묻혀 있습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책상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출산은 더디고 힘듭니다. 게다가 아주 못난 아이가 태어날 것 같습니다.’ 카뮈가 자신의 작품 ‘반항하는 인간’을 집필하는 고통을 샤르에게 토로하는 부분이다.
‘1957년 10월 17일 목요일을 최고의 날로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날들 사이에서 내게는 이날이 최고의 날이자 가장 환한 날입니다.’ 샤르가 카뮈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 쓴 편지다. 우정이 깊어지면서 둘은 서로를 그리워하게 된다.
‘친애하는 알베르, 어디쯤 계십니까? 문득 당신을 잃어버렸다는 잔인한 느낌이 듭니다. 시간이 도끼의 모습을 띠는군요. 언제쯤 오시나요?’ 샤르가 카뮈에게 쓴 편지다. 두 사람이 동성의 연인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는 문학적 수사로 “두 사람에게는 각각 아내와 가정이 있었으며, 카뮈와 샤르는 문학적 동반자로 이해해야 한다”고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다.
두 사람, 두 작가가 나눈 편지를 읽는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한다. 당시 그들은 어디에 있었고, 어떤 작품을 집필 중이었고, 그들이 통과한 시대는 어떠했으며, 어떤 것을 고민했고 무엇을 사랑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들이 공통으로 나눈 과거를 함께 읽을 수 있다는 것, 카뮈가 계속 머물 집을 찾아다녔다는 이야기, 《페스트》 발표 이후 엄청났던 주위의 반응과 카뮈의 속내, 연극에 눈을 돌렸던 시기, 그의 건강 문제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작품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또한 샤르가 카뮈에게 문학적으로 얼마나 영향력 있는 시인이었는지, 카뮈의 스승 장 그르니에와는 또 다른 친밀과 유대를 어떻게 형성하고 있었는지, 전쟁 후 프랑스 문단의 흐름과 샤르에 대한 평가, 그 가족들의 이야기 역시 샤르의 시 속에는 없는 이야기들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쓴 편지는 그만큼 솔직하고 꾸밈없이 그들의 관계, 그 내면을 보여준다.
이런 아름다운 우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두 사람이 완전히 서로를 신뢰하고 그들 각자에게서 빛나는 내면을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문학적으로는 세계적인 거장이지만 그러나 인격적으로 폐쇄적이고 까칠한 두 사람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보다 그들에게 주어진 만남에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관중과 포숙처럼 각자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대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그대 앞을 지나가는 타자(세계)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르네 샤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의 집과 혼인하라, 아니 혼인하지 말라"(르네 샤르, 「히프노스의 단장들」)
샤르가 말하는 '집'은 거주지가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집'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지만,샤르는 중의적 의미로 언어와 관계(만남)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존재의 집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갔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 때, 너라는 타자(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선우, 「낙화, 첫사랑」에서 혼자서 만남을 완성했다면, 카뮈와 샤르는 긴 시간을 통해 그 만남을 완성했다. 그들이 그들의 내면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만남을 완성할 수 있었고,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0ㄴ-69)
요한 6,60ㄴ-69에도 가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0ㄴ-69을 세 부분으로 바라보기로 한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떠나는 자에게는 떠날 이유가 있고,남아 있는 자에게는 남아 있을 이유가 있다. 이글 서두에서 언급하였듯, 이별해야할 99가지 이유가 있다면, 이별하지 않아야 할 한 가지 이유 앞에 우리는 서 있다. 이천년전,당시의 유대인들, 군중들, 제자들 역시 오늘 우리처럼 이별과 만남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떠나는 제자들의 면면을 보기로 한다. 당시 ‘식인주의’의 혐오가 남아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물질주의,기적의 권능, ‘육’의 눈으로 바라보고, 듣고 있다. 이는 단적으로 자기 내면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들의 표피적인 관계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당연히 예수님과 만남을 지속해야할 이유, 그 한 가지를 결코 볼 수 없었다.
이를 복음묵상에서 바오로 신부는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는다.’고 하실 때 ‘씹어 먹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셨기에, 그들은 ‘우리가 식인종인가?’라고 듣기 거북해하며 더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말은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으로 “내 가르침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 이 가르침 때문에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서철 바오로 신부)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 제자들의 이유를 들어보자.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고백이자, 삶의 좌표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고백에도 여정이 있다는 것을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고백 당시에 온전히 내면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성서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 베드로는 어떤 인물이었나? 베드로도 우리처럼 인격의 낙차가 컸던 인물이다.[글 마무리에 참고]
그럼에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는, 바로 베드로 역시 변화무쌍한 인격의 낙차를 지닌 인물이었음에도 만남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의 완성도 어려운데 인간과 신과의 만남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온전히, 단 한 번에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했기에,그는 예수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를 반복하면서 예수님과의 사랑을 완성한 인물이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희망이다.
그럼에도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갖게 된다. 왜 모든 생명이 그분에게서 왔을 것인데 변화무쌍한 베드로는 끝까지 그분에게서 내쳐지지 않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나?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우리는 이 답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에서 얻을 수 있다. 아버지께서 누구에게는 허락하고 누구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우리 각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사랑을 알 수 없다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실현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라고 말씀 하신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유다인과 일부 제자들이 듣기에 거북하다고 한 그 느낌,나를 꼭꼭 쌉어서 삼켜라, 라는 해석의 단면이다. 이는 밥을 먹을 때 꼭꼭 씹어 삼키듯, 내 사랑을 그렇게 네 삶의 자양분이 되도록 마치 살을 먹듯이 음미하고, 또 음미하면서 삼키지 않는다면 결코 사랑을 알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배나 미사 참례는 이 사랑을 가듭거듭 기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없다면, 그 누구의 사랑도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 사랑을 알 수 없는 이상, 너희가 순례의 여정에서 모든 관계는 피상적이고 표피적 시선(육에서)에서 나온 것들이고, 생존의 배고픔를 배우느라 늘 배고프고, 늘 굶주리고, 늘 목마르고, 늘 은총을 탕진한 채, 사막과 광야를 나그네처럼 헤멜것이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만큼이나 인격의 낙차가 큰 베드로가 그분의 사랑을 알게되는 순간이 언제인가?
마르코15, 72에 나오는 “그는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2,000년을 거슬러 우리 앞에 도착한 저 한 문장이 지닌 베드로의 눈물을, 골방에서 흘려보지 않고는 사랑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내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저 문장에 기대어 정말 많이 울었고, 무한한 위로받았다.)
웃음은 가식으로라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눈물은 악어의 눈물일망정 가식으로, 억지로 나오게 할 수 없다. 베드로가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던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의 내면 저 깊이로 내려가 자기의 심연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 심연에서 그분의 사랑을 보았을 것이다. 그 눈물이 베드로의 입장에서 예수님과의 사랑을 완성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의 눈물은 모든 사랑하는 이들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다. 그 눈물을 흘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다.
베드로의 그 눈물이 요한 21,17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 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자기 심연을 본 자는 타인의 심연도 당연히 볼 수 있다. 타인이 아직 보지 못하는 그 심연까지 볼 수 있다. 그가 훗날 흘릴 눈물을 그도 모르게, 미리 울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과 만났나?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오” 라고 전한 동생 안드레아의 말을 그대로 믿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베드로의 이야기, 요한 2, 42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 보시며”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눈여게 보신다’는 것은 그저 표면적으로 베드로의 키가 몇이고 피부 색깔이 무엇인가에 대한 외적 정보가 아니라 그의 심연까지 꿰둟어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체를 관통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순수함, 순정을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순수하지 못한 이유로 선택한 정략결혼이 비극적으로 끝나듯, 모든 사랑의 ‘첫’ 순간, ‘첫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사랑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바라보면, 모든 이의 ‘첫’ 만남에 이미 완성의 씨앗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만남을, 완성하는 것은, 변화무쌍한 인격의 낙차를 가진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순수한 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마치 성체를 영하듯 곱씹어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처음 어떻게 만났나? 를 기억하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오해투성이인 만남, 누군가의 노래가사처럼 보이지 않는 전쟁같은 사랑, 그 표면에서 심연까지 내려가 (우리 내면으로 내려가서) 상대를 '깊이 눈여겨 바라보는 것!' 나의 영혼이 모음을 들을 수 있는 심연으로 내려가 상대가 아직은 표현하지 못하는 그 사랑의 깊이와 아픔까지 바라보게 될 때,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정리해 본다.
“우연과 운명의 갈림길, 그 환상과 실재”, 만남이 우연으로 그치는가? 운명으로 수렴되는가는 바로 우리가 우리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이는 종교적, 신학적으로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프리즘으로 모든 관계를 '눈여겨 깊이' 바라볼 수 있을 때, 99가지 이별해야할 이유를 보는 육의 눈에서(환상), 한 가지 이별하지 않을 이유(실재),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삶에서 '사랑'이라는 '실재'를 볼 수 있는가?를 그 무엇보다 먼저 찾고 물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운명적 만남을 알아보고,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게되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어떤 비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하느님의 평화가 놓여있다.Nothing real can be threatened. Nothing unreal exists. Herein lies the peace of God."(헬렌 슈크만)
[참고]베드로의 생애에 관한 정보는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로의 편지들, 베드로의 이름으로 기록된 2편의 편지에 한정되어 있다. 〈신약성서〉에서 베드로가 직접 한 말이나 그에 관한 내용, 또는 간접적으로 그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일화에 나타난 그의 행동과 반응들을 통해 베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유부단하고 소신없이 행동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여 처음에는 이방인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거절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갈라 2:11~14). 때로는 단호하기도 하고(사도 4:10, 5:1~10), 경우에 따라서는 무분별하고 경솔하며(루가 22:33), 성급하고 화를 잘 내는(요한 18:10)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자주 온유하면서도 확고한 인물로, 그리고 예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큰 충성과 사랑을 바칠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요한 21:15~17). 〈신약성서〉는 베드로가 모세율법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뜻에서 못 배운 사람이라고 전하는데(사도 4:13), 그가 그리스어를 알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는 깨닫는 데 느렸던 것 같고 실수를 했지만 훗날 책임을 부여받았을 때는 성숙하고 유능한 인물임을 보여주었다. 복음서들은 예수 활동 초기에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받았다는 데 일치하지만, 언제 어디서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르게 기록한다.〈루가의 복음서〉(5:1~11)는 베드로가 부름받은 일은 강조하면서 야고보·요한·안드레아의 이름은 빠뜨린다. 〈마태오의 복음서〉(4:18~22)와 〈마르코의 복음서〉(1:16~20)는 위의 4명이 부름받은 일을 기록하며 루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요한의 복음서〉는 이 사건이 유대에서 일어났으며(1:28),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였고(1:35)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그는 요한을 떠나 베드로를 '메시아'(예수)에게 소개했고 이때 예수가 베드로에게 게파(베드로, 즉 반석)라는 이름(또는 별명)을 주었다고 했다. 공관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는 예수가 활동을 시작한 갈릴리에서 베드로가 부름받았다고 기록하는데, 이것이 옳은 듯하다.〈요한의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역사보다는 신학에 중점을 두고 기록한 듯하다. 이 복음서의 저자는 베드로가 처음부터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달았고 예수는 베드로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시몬, 즉 반석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공관복음서들은 대체로 12사도 가운데 베드로가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서술하지만 그렇지 않은 예도 있다. 예를 들어 마태오와 루가는 베드로가 예수에게 비유에 관해 물었다고 했지만 마르코는 여러 제자들이 함께 물었다고도 한다(마태 15:15, 루가 8:45, 마르 7:17).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관복음서는 모두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변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다른 제자들보다 어느 정도 우위에 있었다고 강조한다. 제자들의 이름이 열거될 때마다 베드로는 늘 맨 앞에 나온다(마태 10:2~4, 마르 3:16~ 19, 루가 6:14~16, 사도 1:13, 갈라 2:9은 예외). 사도교회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중요성 때문에 복음서에서 그렇게 기록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의 강한 성격이 중요한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던 사람들도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했는데, 이를테면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던 사람들도 정보를 얻기 위해 베드로에게 접근했다(마태 17:24). 또한 특유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에게 비유(마태 15:15) 또는 가르침(마태 18:21)의 뜻을 물었다.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12제자를 대표하여 충성스럽게 봉사한 대가로 하늘나라에서 특혜를 누리게 해달라고 청했다(마태 19:27~28). 많은 경우에 베드로의 이름만 나오고 다른 제자들은 단지 그의 일행으로만 언급된다(마르 1:36, 루가 8:45). 특별한 사건에서 예수와 가장 가까운 3명의 제자('기둥들' 즉, 베드로·야고보·요한)가 등장할 때도 베드로의 이름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3명의 이름이 나올 때도 베드로의 이름이 늘 맨 앞에 나온다(마태 17:1, 26:37). 예수가 찾아가 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준 곳도 가파르나움에 있던 베드로의 집이다(마태 8:14). 예수가 군중을 가르칠 때 탄 배도 그의 배였다(루가 5:3).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깊은 통찰력과 신앙을 보여준 사람도 베드로였다(마태 16:15~18, 마르 8:29, 루가 9:20). 예수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만류하다가 도리어 꾸중을 들은 사람도 베드로였다(마르 8:32~33). 또한 그리스도를 부인하여 가장 강인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약점을 보인 사람 역시 베드로였다(마태 26:69~75, 마르 14:66~72, 루가 22:54~61). 그러나 훗날 그는 놀랄 만큼 성숙해져서 강인함을 되찾았고 예수에게 사명을 받은 대로(루가 22:31~32)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비록 예수를 부인하긴 했으나 마지막에는 부활을 맨 처음 목격한 증인이 되었다(루가 24:34). 〈요한의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지위는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 요한이라는 인물의 도전을 받는다. 이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37번(4복음서 전체에서는 109번)이나 언급되지만 그중 1/3은 부록(21장)에 나오며 단지 9개의 사건에서만 나올 뿐이다. 이 복음서는 대표자 및 대변인으로서 베드로의 역할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보다 친밀하게 그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제자들의 역할이 약화되면서도 한편으로 베드로가 강조되고, 예수로부터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5~16)라는 사명을 받는 것으로 보아 사도교회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큰 신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베드로와 나란히 요한도 중요한 인물로 나타난다(13:24, 18:15, 19:26~27 등). 21장에서는 베드로를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부인한 이 제자가 공관복음서에서 누리던 지위를 되찾게 해 주었다. |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파타(ephatha)!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어떻게 들을 수 있나? (0) | 2021.09.10 |
---|---|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 (0) | 2021.09.03 |
마니피캇Magnificat, 삶의 '본론'은 어떤 펜으로 쓰는가? (0) | 2021.08.21 |
위험한 독서, 나타나엘이여, 나의 책을 집어던져라! (0) | 2021.08.13 |
도서관 환상, 도저(到底)한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며 (0) | 2021.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