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마니피캇Magnificat, 삶의 '본론'은 어떤 펜으로 쓰는가?

나뭇잎숨결 2021. 8. 21. 09:31

 

루르드

 

 

 

마니피캇Magnificat, 삶의 '본론'은 어떤 펜으로 쓰는가?

- Magnificatwhat pen does the 'principle' of life write with?

 

 

[성모승천대축일(나해)2021.8.15. 루카, 1, 39-56]

 

 
1.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서정주, 꽃밭의 독백-사소단장)
2. 대지의 사랑, 무엇보다도 땅으로 내려가라 geh's zu Grunde !(니체)
3. '서둘러'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지역 헤브론까지, 다시 나자렛으로(루카, 1,39-56)
 

 

 

 

1.문 열어라 꽃아문 열어라 꽃아(서정주꽃밭의 독백-사소단장)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 –사소단장」을 읽어본다.

 

①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②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③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 –사소단장」은 고대 설화에서 모티프를 차용하여 창조적으로 변용한 시다. 사소는 신라시대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을 간 일이 있는데, 이 글은 길을 떠나기 전의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이다. 하늘에게도 못하고 땅에게도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생명체험'을  꽃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꽃밭의 독백 –사소단장」은 세부분으로 나뉘어, 어떻게 대지의 존재인 유한한 인간이 구름을 뚫고 하늘의 뜻에 닿을 수 있는가를 노래하고 있다.

 

①은 인간 세계의 유한성에 대한 좌절과 회의가 드러난 부분이다. '사소'는 인간 세계의 유한성과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뛰어넘어 영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열망과 구도의 정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기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노래, 말(타기), 활(쏘기), 매(사냥)은 이상 세계를 열망하는 화자가 이미 경험한 것으로, 현실 세계에서만 가치 있는 유희인데 번번히 그  상태로 되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소. 겨우 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고, 멎어 버렸다는 것, 현실의 한계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땅의 유희로 돌아오는 자신을 본다.

 

이상 세계를 추구하는 화자의 노력과 좌절은- 구름, 바닷가, 물낯 바닥, 문은 유한과 무한의 경계면으로 현상과 본질, 이승과 저승, 인간과 우주, 현실과 초월적 세계 사이의 경계에 서있는 화자가 이 땅의 유희에 입맛을 잃었으나 그것을 떠나지 못하는 대지의 실존 양식이 나타난다.

 

노래가 좋기는 가장 좋아도 그 소리는 구름까지 갔다가는 돌아올 수밖에 없고, 힘차게 달리는 말도 바다에 이르면 멎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된 화자. 즉 '사소'가 산돼지나 산새들에게 입맛을 잃어버렸다는 독백을 통하여 인간 세계의 유한성 뿐 아니라 그 유한성을 인식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목도한다.

 

②에서도 인간의 본질적 한계와 영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자연과 동화될 수 없는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다시 확인한다. 여기서 '개벽하는 꽃'은 소멸과 생성, 죽음과 부활이 반복됨으로써 거듭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으로 화자와 존재양식이 차별화된다. 화자는 '꽃'으로 상징된 자연의 세계, 곧 영원의 세계에 합일하려 하지만, 결국은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인 자신의 한계를 다시 자각할 뿐이다.

 

다시 말해, 신선이 되고 싶어하는 '사소'는 열심히 선(仙)의 세계를 꿈꾸고 있으나, 그때마다 영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성을 확인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은 사소가 추구하는 새로운 구도 정신의 표상으로 소멸과 생성, 죽음과 부활의 방식으로 거듭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화자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처럼’ 이상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그 본질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듭 확인한다.

 

③에서 영원의 세계에 대한 갈망과 구도의 자세는 더욱 절실하다. 영원의 세계에 도달하는 길이 ‘벼락'과 '해일'을 동반하는 일일지라도, 즉 영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화자가 극복해야 할 온갖 고통이나 형벌을 감내할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는 주술적 성격의 시어를 절규 속에는 영원의 세계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드러낸다

 

여기까지  「꽃밭의 독백 –사소단장」를 읽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 그렇게 구름속을 뚫고 저 하늘로 올라 신선계에 들어가려 하는가? 이 땅을 서둘러 떠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이는 처녀의 몸으로 생명현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 땅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소의 몸부림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의 자필

 

 

 

 

 

2. 대지의 사랑, 무엇보다도 땅으로 내려가라 geh's zu Grunde !(니체)

 

 

니체는 『즐거운 학문』과 『비극의 탄생』에서 오히려 사소와는 달리 ‘존재의 목적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거든 ‘대지를 사랑’하라고 외친 인물이다. 저 하늘을 바라보지 말고 땅을 보라고 충고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이중적 상황에서 오히려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한다. 형이상학적 위안에 심취하지 말고 땅을 굳건히 디디라는 그의 충고는 수많은 오역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니체는 인간은 왜 사는가에 대해,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존만이 답이라고 제시한 철학자다.(여기서는 그의 실존주의 철학이 잉태된 역사적이며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한 것은 생략한다) 니체는 인간 종의 보전에 도움이 되는 것을 행하는 것. 더군다나, 실제로는 이 종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에게 저 '보존 본능'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하고 더 무자비하고 더 이기기 어려운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본능이 정말로 우리 종과 우리네 무리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땅으로 내려가라 geh's zu Grunde! 웃음과 즐거운 지혜뿐 아니라 그 모든 숭고한 비이성을 갖고 있는 비극적인 것 역시도 종의 보존의 수단과 필연성에 속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리는... 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Amor fati: das sei von nun an meine Liebe!( 『즐거운 학문』)

 

⑤이제 학문은 강력한 환상이 가하는 박차로 인해 멈추지 못하고 한계를 향해 치닫지만, 한계에 부딪히면 논리의 본질에 숨어 있는 학문의 낙관주의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학문의 원주는 무한히 많은 점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과연 그 원을 완전히 측정할 수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데도, 고귀하고 천부적인 인간이 생애의 중반에 채 이르기도 전에 불가피하게 원주의 한계점에 봉착하여 그곳에서 해명될 수 없는 것을 응시하기 때문이다. 그 한계에서 논리가 제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급기야 제 꼬리를 무는 것을 그는 참혹하게 목도한다―여기에서 새로운 형태의 인식, 비극적 인식이 홀연히 피어난다. 이 인식을 단지 감당하기 위해서만이라도 보호책과 치료제로서 예술이 필요하다. (『비극의 탄생』)

 

 

니체는 인간 실존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운명애’라고 보았으며, 그리하여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Amor fati: das sei von nun an meine Liebe!)’고 외치기에 이른다. 이 실존에 대한 극단의 사랑은 니체로 하여금 허무주의라는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니체에 따르면 실존이라는 운명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니체는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때 인간이 위대해지며,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고통과 상실을 포함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동시에 운명에 체념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상적 세계관과 비극적 세계관의 영원한 투쟁의 대열에 서 있다고 니체는 바라보았다.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와 음악을 사랑했던 니체는 예술의 발달은 인간성정의 발달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예술의 발달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달려 있으며, 이는 번식이 두 성에 의존하는 것과 같아서 끊임없는 투쟁과 간헐적인 화해가 있는데, 그 투쟁에서 넛어나는 길ㅇ이란 비극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실존주의의 바탕이었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두 예술충동은 각각 ‘조형·영상·언어’와 ‘음악’을 충동하는 “예술가적 권력들”로서, 양자의 투쟁과 화해를 통해 서사시, 서정시, 비극 등의 예술 장르가 탄생했으며 이는 인간 실존의 축소판이라고 보았다.

 

니체 하면 떠오르는 명제,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리는...' 신은 죽었다는 그의 명제만큼, 그는 기독교를 진정한 그리스도를 현양하는 집단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죽인, 여전히 죽이고 있는 적그리스도라고 보았던 인물이다. 그는 가짜 신을 받드는 모조크리스트의 집단무의식, 가짜 형이상학과의 대결을 통해 종교가 부루짖는 모든 기존 가치에 대한 거부를 선언했다.

 

니체는 천박하고 병들고 약한 자에게, 나약함과 죄를 팔아 그 상태에 머물기를 은근히 강요하는 기독교의 도덕을 노예도덕으로서 마땅히 파기되어야 하며 대신 고귀하고 건강하고 자기 생존을 처분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주인의 도덕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고 도덕적이라는 자유주의 사상 역시 그는 의문에 부쳤다. 니체는 당대를 이렇게 진단하였다.

 

'오늘날 부르주아 사회는 퇴폐적이고 연약하다. 의지와 본능을 희생하며 합리성을 지나치게 발전시켜 탄생한 희생물이 부르주아 사회이다. 본능적인 욕구는 생명의 참된 동력이다. 이 어둡고 신비스런 세계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해야만 한다. 지나친 지식으로 의지가 질식당하면 삶의 창조력이 파괴되고 인간의 가능성이 제약받는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 기준이었던 신에 대해 그 죽음을 선고하고('신은 죽었다!'),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초인(超人)사상'을 피력하기에 이른다.

 

초인이란 첫째, 대지(大地)의 의미다. 이 땅에 충실할 뿐, 하늘나라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않았다. 둘째,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다. 셋째, 초인이란 영겁회귀의 사상마저 깨달을 수 있는 자다.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자가 바로 '초인'이라고 설파한다. 스스로 초인이 되고자 했던 그, 

 

니체의 극단적인 대지에 대한 사랑은 허무주의(니힐리즘)를 초래했다. 그러나 그 허무주의를 '동일한 것이 계속하여 다시 돌아오는' 영겁회귀의 사상으로 그는 붙잡으려 했다. 그리하여 선악을 초월한 입장(선악의 피안)에서 도리어 현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강조하라고 그는 외친다.

 

광야에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다'고 외친 세례자 요한이 있었다면, (시대를 달리해)그 맞은 편에 '무엇보다도 땅으로 내려가라 geh's zu Grunde !'고 외친 니체가 있었다

 

 

 

 

 

 파티마

 

 

3. '서둘러'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지역 헤브론까지, 다시 나자렛으로(루카, 1,39-56)

 

 

하늘에 대한 사랑, 대지에 대한 사랑은 과연 대척점에 놓인 삶의 양상일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라고 전언하는 루카 1,39-56를 읽어보기로 한다.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Visitatio Mariae)은 루카 복음서의 내용(루카 1,39-56)에 근거하여 가톨릭에서는 해마다 5월 31일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로 지내고 있다.

 

마리아방문축일 복음을 성모승천 복음으로 다시 묵상하면서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이 지니는 의미는, 단지 기독교적 의미를 넘어 하늘에 대한 사랑, 대지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삶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즉 마리아가 삶의 본론을 무엇으로 쓰고 있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왜 루르드와 파티마에 그렇게 성지순례 인파가 몰리는가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루카 1,39-56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바라보면,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와 Ⓒ는 대지에 대한 사랑,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면 Ⓑ는 하늘에 대한 사랑, 위로부터의 영성에 해당한다. 이를 달리말하자면(2020년, 2021년 주님수난성지주일 강론 참고) Ⓐ와Ⓒ가 마리아 삶의 ‘본론’의 시작이라면 Ⓑ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삶의 ‘결론’에 해당한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글을 쓸 때, 일반적인 글에서는 본론과 결론이 인과적으로 서술되지만(따라서, 그러므로 하는 문장 접사를 통해) 그러나 삶의 본론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에서 본다면, 결론과의 관계속에서 본론이 동일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는 마리아는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예고(성모 영보)를 들은 후에 나자렛을 떠나 사촌 엘리사벳이 사는 예루살렘 남쪽의 헤브론으로 '서룰러' 간다. 나자렛에서 헤브론까지는 거리가 160.9344km쯤 된다. 누구나 산책을 하거나, 등산을 하거나, 순례를 하기에, 160킬로미터가 얼마나 먼길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약혼자 요셉조차도 이해시킬 수 없었던 마리아의 수태고지는, 즈카리야조차 이해시킬 수 없었던 엘리사벳이라는 사촌언니이자 인류를 향해 마리아로 하여금 160킬로미터를 '서둘러' 걸어가게 한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엘리사벳의 노령의 잉태소식을 접한 마리아의 발걸음을 따라가보면, 이 길은 3년후, 피에타의 성모에 이르는 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서둘러'에 멈춰보자!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람을 향해서 그 머나먼 길을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형이상학으로 사랑을 방어한다면 무관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형이상학이 방어기제로 작동될 때, 종교적 엄숙주의에 빠지거나, 사랑이 도그마가 되거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을 지을 수 있다. 또는 자기 몸으로 그것이 표출될 수도 있다 (이 문장은 내 경우다.  며칠동안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이 아펐다. 내가 형이상학으로 방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은 좀 무서운 일이다. 글의 주제를 온 몸, 온 인격으로 묵상하지않으면 쓸 수가 없다. ) 왜 그렇게 J가 율법학자나 바라사이에게 분노했는지? 그들은 누구보다도 독실한 신자였다. 그렇기에 스무살도 안된 소녀인 그녀가  엘리사벳을 향해 '서둘러' 갔다는 것에서,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마리아는 인류의 아픔과 좌절과 무능과 실패와 낙담과 절망이 있는 곳에 함께 계신다고 할 수 있다.

 

임신한 몸으로 엘리사벳을 향해 '서둘러' 간 마리아였기에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술이 떨어졌음을 주인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이며, 자기 아들의 비참한 죽음을 안고 인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몽소승천인가 그냥 승천인가? 성모님이 발현이다, 아니다는 어쩌면 다 소모적인 논쟁에 해당한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가 집에 돌아가서 무엇을 했을까? 기도만 하고 있었을까? 혹은 대지를 사랑하는 일만 골몰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마리아의 여정에서 하늘과 땅이 언제나 함께 있었음을 알고 있다. 영적으로만(기도로만) 나자렛에 있지 않고, 그 먼거리를 '서둘러' 달려가 엘리사벳이 해산할 동안까지 3개월을 그 곁에 머무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우리의 기도는 대지의 언어와 하늘의 언어를 섞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엘리사벳은 또 누구인가?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가능하지 않은 노령의 여인. 구약의 한나처럼 생물학적인 출산연령에서 벗어난 상태, ' 이 나이에 무슨?'에 묶여 있던 상식적인 믿음을 가진 남편 즈카리야는 자조적 웃음으로 말문이 닫혀 있는 상태이고, 그런 엘리사벳의 반쪽의 축복을 완성하기 위해 160키로미터를 '서둘러' 걸어가 수발을 드는 임신중인 마리아!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구세사의 거시적 시나리오에 해당한다. 이 거시적인 시나리오에 등장한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네!'라는 응답은 대지와 하늘이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의 하늘에 대한 사랑, 위로부터의 영성은 Ⓐ와Ⓒ라는 대지에 대한 사랑,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를 『아래로부터의 영성』 (안셀름 그륀, 마인라드 두프너)에서

 

Ⓓ영적 삶의 길은 대개 위로부터의 영성으로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위로부터의 영성을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접목시켜야 하는 때가 온다. 이 두 길을 잘 접목시키면 활기를 유지하면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영적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놓여 있는 구체적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하며,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하는 데에 이 구체적 현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위로부터의 영성이 지닌 위험은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에서 발생한다. (안셀름 그륀, 마인라드 두프너, 『아래로부터의 영성』)

 

 

Ⓔ 겸손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나 지위를 가진 사람에 대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가지는 하나의 상대성에서 유발되는 행위가 아니라 ,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경험한 하느님에 대하여 가지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자세이다. 여기서 겸손은 인간이 가진 제한성을 인식하는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제한성은 단순히 인간이 지닌 힘들이 제한되어 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휠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닌 인간의 무의미성까지, 인간이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O. F 볼노브,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

 

Ⓕ은총은 우리의 무의식 세계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가 작용한다. 은총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존재이며 우리의 육신과 영혼 전체를 거쳐 작용해 성장해 나가야 하는 존재이다. (자기) 약함에서 달아나려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에서 달아나려는 것을 뜻한다. 깊은 신앙으로 무장하여 우리 약함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우리 약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약함 안에서만 하느님의 사랑과 그 권능이 우리를 건드려 상처 입힐 수 있다. 유혹과 약함 안에 머물기 … 이것이야말로 은총과 접촉하고 하느님 자비의 기적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형태의 참된 자기수련은 자신의 완전한 무력함을 체험하게 한다. (앙드레 루프, 『시토화 걷는 길』)

 

Ⓓ는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우리가 지녀야하는 덕목으로 겸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에서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위로부터의 영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유혹과 약함 안에, 실망과 좌절, 무능함과 실패에서 그것이 은총과 접촉할 수 있는 자비와 기적의 기회'라는 것을, 전하고  있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위로부터의 영성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 가능해야함을 보여준 축복에 해당한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요셉과 즈카리아의 이해여부와 상관없이 구세사의 여정에서 하늘의 뜻을 ‘네!’라고 응답한 여인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나 완벽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유혹과 약함 안에서, 실망과 좌절, 무능함과 실패에서 그것이 은총과 접촉할 수 있는 자비와 기적의 기회'라는 것을 인식하고 '핍진하게' 살아낸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 삶 자체가 승천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다시말해, 마리아와 알리사벳은 대지에 대한 사랑은 하늘에 대한 사랑과 분리되거나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이들에 해당한다. 그래서 지난주 요한복음 묵상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주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몸'이 아니라 '살'이라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응답 역시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성지순례를 하는 이유는, 삶의 본론을 새롭게 쓰겠다는 무의식의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죽어서 천국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성지 순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즉 살아서 천국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글을 정리해보자면,

 

마니피캇Magnificat, 삶의 '본론'은 어떤 펜으로 쓰는가?’에서 이런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지에 대한 사랑과 하늘에 대한 사랑이 동시적일 때, 즉 '유혹과 약함 안에, 실망과 좌절, 무능함과 실패에서 그것이 은총과 기적, 자비와 맞닿는 시간으로 바라볼 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본론'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우리 안의 두 사람, '사소'와 '니체'가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하늘'을 뜨겁게 사모한 '사소'와 '대지'를 뜨겁게 사랑한 '니체'가 결합할 수 있다는 가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