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독서, 나타나엘이여, 나의 책을 집어던져라!
- Dangerous reading, Nathaniel, throw away my book!
[연 중 제 19주 일 (나 해) 2021. 8. 8. 요한. 41-51]
1. 나타나엘이여, 나의 책을 집어던져라(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2.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 선다(파스칼, 『팡세』) 3. 수직적 차원의 육화와 수평적 차원의 육화(요한 6,41-51) |
1. 나타나엘이여, 나의 책을 집어던져라(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김경욱은 『위험한 독서』에서
“이번에는 당신이 읽을 차례야. 나를 읽어봐. 당신의 독서를 위해서라면 나는 스스로 책이 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도 있으니까.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위험해지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평안하고 또 평안한 수만 번의 아침저녁이여 안녕. 부디 당신의 독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를.”
「위험한 독서」의 ‘나’는 독서치료사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듯 ‘나’는 피상담자의 심리상태를 체크한 뒤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한다.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밥벌레라며, 어떤 책을 읽으면 칠 년 사귄 남자친구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를 묻던 당신. 서툴게 번역된 책처럼 문장이 아리송하고 문맥은 요령부득이던, 여러모로 읽어내기 쉽지 않던 당신이 어느새 ‘나’에게 속삭인다. ‘나를 읽어봐. 주저하지 말고 나를 읽어봐.’ 당신을 읽다가, 드디어 당신에게 나를 읽히고 싶다는 그 관계로 이전된다.
무엇을 읽는다는 것은, ‘위험한' 관계의 시작이다.
요즘 웹툰 만화가 책으로 출판된 소설보다 더 인기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학사에 소설가로 이름을 올린 이들이 투잡이나 쓰리잡을 하면서 간신히 글을 쓸 때, 웹툰 만화 1편이 올려질 때, 5천만윈 이상을 받는다는 것, 그렇게 인기몰이를 하는 웹툰 만화들이 다시 소설화되거나 드라마 영화화 되어 자본시장을 휩쓴다는 것, 그 내용이 디즈니랜드버전의 낭만적 사랑이야기라는 것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사랑을 그렇게라도 대리충족을 하면서, ‘아픈 사랑은 있어도, 추잡한 사랑은 없다’는 사랑 예찬론자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김경욱의 텍스트처럼 무엇을 읽는다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라면, 더 극단적 순수의식을 추구하여 관계론의 무한을 보라고 권하는 앙드레 지드가 있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나의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는 이 책을 던져버려라. --그리고 밖으로 나가라. 나는 이 책이 그대에게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어느 곳으로부터든, 그대의 도시로부터, 그대의 가정으로부터, 그대의 방으로부터, 그대의 생각으로부터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바란다. 만약 내가 메날크라면, 그대를 인도하기 위해서 나는 그대의 오른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왼손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우리가 도시들에서 멀어지는 즉시 나는 되도록 빨리 꼭 잡았던 손을 놓고 말했을 것이다. 자 이제 나를 잊어버려라.
나의 이 책이 그대로 하여금 이 책 자체보다 그대 자신에게 --그리고 그대 자신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도록 가르쳐주기를. 그러니, 나타나엘이여, 이제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너 스스로를 해방시켜라. 나를 떠나라. 나를 떠나라. 누군가를 교육시키는 체하는 것도 지쳤다. 네가 나를 닮기를 바란다고 내 언제 말했더냐?--- 나는 네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너를 좋아했다. 나는 너에게서 나와 다른 점만을 좋아했다. 교육시키다니! --- 나 자신 이외에 내가 대체 대체 누구를 교육시킨단 말이냐? 나타나엘이여, 네게 말해줄까? 나는 나 스스로를 끝없이 교육시켰다. 지금도 계속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을 존중한다.
나타나엘이여, 나의 책을 집어던져라. 거기에 만족하지 말라. 너의 진실이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찾아진다고 믿지 말라. 그 점을 그 무엇보다도 부끄럽게 생각하라. 내가 너의 양식들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너는 그걸 먹을 만큼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의 침대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너는 거기에서 잠잘 만큼 졸리지 않을 것이다.
내 책을 집어 던져라. 이것은 인생과 대면하는 데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자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너 자신의 자세를 찾아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하지 말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 글로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면 글로 쓰지 말라. 너 자신의 내면 외외의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리고 초조하게 혹은 참을성을 가지고 너 자신을 아! 존재들 중에서도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할수 없을 존재로 창조하라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1897)은 세기말의 청춘이 시대의 질곡과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올렸던 열광적 기도문이다. 그것은 사회와 집단의 가치를 위한 자아의 희생을 거부함과 동시에 일체를 피안의 질서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자아와 타자 사이의 구분마저 사라지게 하는 환상주의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의식의 비명이며, 태양과 자연의 고장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작가가 체험한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욕구 표출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젊음이 쏟아내는 잠언이며, 경구이고 또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육신과 정신의 해방찬가다. 차라투스트라와도 닮은 ‘메날크’의 가르침을 미래의 독자 ‘나타나엘’에게 전하는 형식의 이 계시서(啓示書)는 교육적 목표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모든 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는 역설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마음 속의 책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을 당부하는 작가는 책 머리말부터 "다 읽고 나서는 이 책을 던져버려라. 그리고 벗어나라.. 너의 도시로부터, 너의 가정으로부터, 너의 방으로부터, 너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권유할 뿐 아니라 맺음말에서도 "나타나엘이여, 이제는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그것에 구속되지 말고 자유롭게 되라. 나를 떠나라"고 소리치고 있다.
앙드레 지드 자신이 자라온 엄격한 종교적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의 궤적인 『지상의 양식』은 성서의 어조를 간직한 채, 기독교가 가르쳐온 신의 존재와 금욕의 윤리를 과감하게 거부하고 있다. 너를 어떤 틀속에 가두지 말 듯, 신을 어떤 틀 속에 가두지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라다보는 대상이 아니라 바라다보는 눈길이다" 그리고 그 눈길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형태의 삶을 만끽하려는 욕망과 그 채워지지 않는 허기만이 젊음의 표징이라고 본 것이다. 포만감을 탐닉하는 젊음에 대한 가차없는 채칙을 가하며 젊다는 것은 허기를 감당하는 것이라는 논변,
메날크의 가르침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나타나엘에게 사랑이 아니라 열광을 가르칠 것임을 끊임없이 다짐한다. 사랑이 소유욕으로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라면 열광이란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에 탐닉하라는 것이다. 오직 망설임 없이 열광하는 젊음만이 모든 형태의 삶을 욕구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채워질 길 없는 허기를 달랠 수 있다고 『지상의 양식』은 권하고 있다. 기존의 문법이 아니라 생생하게 너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Section XI. Les prophéties 693. En voyant l’aveuglement et la misère de l’homme, en regardant tout l’univers muet, et l’homme sans lumière, abandonné à lui-même et comme égaré dans ce recoin de l’univers, sans savoir qui l’y a mis, ce qu’il est venu faire, ce qu’il deviendra en mourant, incapable de toute connaissance, j’entre en effroi, comme un homme qu’on aurait porté endormi dans une île déserte et effroyable et qui DE M. PASCAL 161 s’éveillerait sans connaître où il est, et sans moyen d’en sortir. Et, sur cela, j’admire comment on n’entre point en désespoir d’un si misérable état. Je vois d’autres personnes auprès de moi, d’une semblable nature : je leur demande s’ils sont mieux instruits que moi ; ils me disent que non ; et sur cela, ces misérables égarés, ayant regardés autour d’eux, et ayant vu quelques objets plaisants, s’y sont donnés et s’y sont attachés. Pour moi, je n’ai pu y prendre d’attache et, considérant combien il y a plus d’apparence qu’il y a autre chose que ce que je vois, j’ai recherché si ce Dieu n’aurait point laissé quelque marques [quelques marques] de soi. Je vois plusieurs religions contraires, et partant toutes fausses, excepté une. Chacune veut être crue par sa propre autorité et menace les incrédules. Je ne les crois donc pas là-dessus. Chacun peut dire cela, chacun peut se dire prophète. Mais je vois la chrétienne où je trouve des prophéties, et c’est ce que chacun ne peut pas faire. (파스칼의 『팡세』원문중에서) |
2.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 선다(파스칼, 『팡세』)
같은 지향점, 그러나 다른 맥락에서,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 설 때’ ‘비로서 인간’이라고 새로운 인간학을 펼친 이가 있다. 앙드레 지드처럼 끝없는 자유를 찾아 도망과 해방을 추구하는 인간이 도달한 지점이 신 앞에 서 있는 존재임을 선언한 수학자가 ‘파스칼’이다.
천재적인 수학자요, 확률론의 창시자였던 합리론자인 그는 가능한 모든 인간적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은 무엇인가?를 추구했다. 파스칼의 눈에 비친 인간은 비참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다는 것에서 그는 인간의 무한함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인식에서 신으로의 이행’을 파스칼은 『팡세』 제15편의 주제로 삼아 무종교인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을 참된 신에게로 인도하려고 하였다.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신을 믿는 유신론자들에게 던진 도박의 이론이다.
그의 집요한 추구에서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 선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그의 수학적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였다.
여기에는 차원이 다른 신앙이란 방법이 요구되었고, 결국 인간모순에 대한 파스칼이 내린 결론은 타락 바로 그것이었다. 타락으로 인한 원죄의 개념이야말로 파스칼의 ‘인간인식에서 신에로 이행’하는 교차지점이었다. 파스칼은 신에 이르기 위해 왜 인간인식에서부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파스칼이 독단론자들의 오만과 회의론자들의 무관심을 경계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인간은 비참하고 위대하다는 이율배반, 그래서 인간은 불행하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신앙 없이는 행복할 수가 없다. 파스칼은 이 모순적 이중성을 지닌 인간을 이성만으로는 해명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래서 신앙을 개입시켜 인간과 신을 연결시켜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철학자인 동시에 종교가의 면모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인간이 인간이 누구인가를 묻다 신 앞에 도달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너’라는 타자 앞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공감의 철학을 말하는 현상학자 '막스 셸러'다.
진정한 공감은 타인(他人)으로서의 타인을 지향한다,는 셸러의 명제는 흄,애덤 스미스,루소,쇼펜하우어 등 일군의 철학자들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동감을 선악 판단의 기초로 보았던 것에 주목했다. 쉘러는 이들이 펼친 동감 윤리학은 인간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주요한 윤리학 저서인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물질적 가치윤리 Der Formalismus in der Ethik und die materiale Wertethik(』1921)는 칸트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형식주의 윤리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인간의 목적과 의도에 바탕을 둔 인간적 윤리학을 펼치게 된다.
인간의 감정을 통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위계 질서 속에 모든 가치를 배열하면서 셸러는 파스칼의 '심정의 논리' 또는 '질서'에 크게 의존했다. 순수한 사유와 대비되는 '감정'은 셸러의 가장 중요한 심리학 저작인 공『감의 본질과 형식 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1923)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였다.
너를 알기 전에 이미 너를 사랑한다. 너를 알게 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더 알고 싶은 것이다. 사랑과 공감의 가치는 관심의 원근법을 따른다. 타인이 느끼는 그대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분별없는 감정의 반작용에 불과하다 진정한 동감은 타인(他人)으로서의 타인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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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셸러는 감정이 인식의 근원이며 이성은 직관이 퍼올린 인식을 체계화하는 부차적 기능일 뿐이라며 오랜 전통의 합리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셸러는 이성 만이 아니라 감정에도 나름의 논리와 법칙이 있다는 파스칼의 사상을 이어받아 감정론적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칸트의 엄격한 이성주의적 윤리학을 비롯해 합리주의를 대담하게 뒤엎고 "감정의 가치 판단만이 선(善)을 보장한다"며 모든 감정 작용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사랑'의 해부를 시도한다.
'동감'에 대해 저자는 "타인이 느끼는 그대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분별없는 감정의 반작용에 불과하다"며 동감이 아닌 ‘사랑’을 따르는 행위가 진정한 선에 이르는 길임을 풀어낸다. 사랑이 능동적ㆍ창조적 능력이라면 동감은 '가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단순한 반작용이다. 셸러는 동감을 도덕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이른바 '동감윤리학'의 흐름을 비판하며 "사랑만이 동감을 진정한 동감으로 만들어준다"고 강조한다.
그는 사랑은 대상의 가치를 고양시키며 대상의 이상적인 모습에까지 이를 수 있는 강력한 운동이자 창조적 정신작용이며, 이성이 볼 수 없는 영역까지도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가치 고양 능력이 결여된 감각적 사랑은 사랑의 진정한 형태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셸러는 이러한 관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모든 행위를 성적 충동으로 해석하는 프로이트 류의 심리학에 반기를 든다. 프로이트가 충동과 사랑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악은 내면의 감정에 의해, 특히 사랑에 의해 올바로 판단될 수 있다"로 요약된다. 막스 쉘러는 감정적 느낌이 인식의 진정한 근원이자 윤리의 기초라고 말하면서,느낌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허위적이라고 비판했다.
쉘러는 동감의 종류와 형태들을 분류하고 그 우열을 가리며 진정성 여부를 밝히려고 하였다. 동감을 '뒤따라 느낌' '감정 전염' '합일적 감정' '진정한 동감'의 네 가지로 분류하는 데,쉘러가 진정한 동감과 사이비 동감을 구분하는 이유는 '진정한 동감만이 진정한 선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동감이란 타인의 감정 체험에 참여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진정한 동감은 타인(他人)으로서의 타인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즉 타인과의 동일화(同一化)는 결코 동감이 아니다. 이러한 진정한 동감은 감정 상태가 아닌 감정 기능으로서,경험적으로 획득되는 기능이 아니라 선천적인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셸러의 '동감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사랑하는 만큼 동감한다'는 수평적 인간학은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 선다’(파스칼, 『팡세』)는 파스칼의 초월적 인간학과 만나게 된다.
3. 수직적 차원의 육화와 수평적 차원의 육화(요한 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전하는 요한 6,41-51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41-51을 읽고 첫번째 든 생각은 진리는 대체 몇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가? 였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은 구교이며, 세뇌당한 태중교우이며, 신학책이란 책을 거의 다 읽어본 데카르트적 예수쟁이고, 시간만 나면, 여행중이라도 평일이나 주일미사에 꼭 참례하는 골수분자고, 그런데 점점 더 예수님의 그 '사랑'을 모르겠어서 자주 쩔쩔매는 사람이다. 누가봐도 너무나 뜨거운데, 그 심연에는 녹지않은 '얼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유다인-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 그리고 몰려다니는 군중들, 그리고 제자들 그 누구의 헛발질에도 돌을 던질 수가 없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문장 앞에서 일주일을 서성이다, 내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 그냥 쓴다. )
요한 6,41-51에서 전하는 ①‘나는/ ②하늘에서/③ 내려온 / ④살아 있는 /⑤빵이다’라는 이 말씀은 ‘성체’의 신비에 대한 그분의 언명이라고 우리는 당연히 고백한다. 아니 이미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언명을 들은 청자가 다름 아닌 ‘유다인’이라는 것에서 ‘강생의 신비'는 대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①,②,③은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된 예수님, ‘나’의 정체성이다.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강생의 신비는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두 겹의 인과를 뚫지 않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이 알고 있는 요셉도 엄밀히 예수님의 친부는 아니다. 이 첫 번째 난관을 지나면, 우리가 통과해야할 문은 그분은 하느님을 당연히 ‘아버지’라고 네 번이나 호명한데서 멈추게 된다.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는 누구인가?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냐?라고 묻게되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서만 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단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호명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근거를 근거짓는 그 본체론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아가 아니다. 분명 나는 나의 아버지의 영적 유전인자를 받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랑이 어려운 것이냐?
강생의 신비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담지하고 있는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의 난관에 봉착한다. 유다인들의 수군거림은 인과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강생의 신비 앞에서 겪는 믿음의 딜레마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주어부를 이해했을 때, 살아있는 ‘빵’이기에, 생명을 주는 ‘살’이 되는 후반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의 문을 하나씩 열어보기로 한다.
①②③은 ④‘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는 것에서 강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지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선물은 수수방관이 아니라 적어도 열리는 문을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열어야 하는 문은, 진리 앞에 우리를 개방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진리를 전했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진리인가?만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 그 자체만을 볼 수 있는 눈. 이때 베이컨이 간파한대로 ‘종족의 우상, 우물의 우상, 극장의 우상, 시장의 우상’에 갇히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진리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데 방해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란, 명제를 우리 스스로 닫지 않게 될 거란 사실이다.
그 다음 문 앞에서, ①,②, ③, ④의 문을 통과하고 진리 앞에 우리를 개방한다는 것은, 진리는 곧바로 믿음으로 수렴되지 않는 데 있다. 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진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여기서 나의 아버지는 만인 만물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아버지는 교회의 독점적 아버지가 아니다. 하늘의 의미가 무한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역사 전체, 온갖 사물, 자연현상, 영성가들의 깨달음, 사건들이 모두 진리의 통로라는 사실앞에 서게 된다.
여기가 성전이다, 저기가 성전이다라고 말할 수 없고, 모든 것이 진리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그 말씀을 듣고 배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생물, 미물까지도 눈이여, 바람이여, 파도여, 구름이여 그분을 찬미한다고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⑥‘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세상 모든 곳에 산재한 진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진리의 실체를 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여기서 맞닥뜨린다. 도처에 있는 진리에 설득당할 수 있지만, 그것을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알게 된다. 듣는 것과 보는 것, 들으면서 동시에 볼 수 있는 것, 그 상태가 무엇인가? 그것이 강생의 신비를 믿는다는 것이다. 강생의 신비를 이해한다는 것은 듣고 보는 것, 즉 믿는 것이라고 할 때,
①~⑥까지는 종적인 차원의 강생의 신비라 할 수 있다. 종적인 차원의 강생의 신비가 횡적인 차원의 강생의 신비와 크로스 될 때, 우리는 드디어 그분을 믿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에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이다.
⑦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박제된 진리가 있을 수 있는가? 혹은 고여있는 진리가 있을 수 있는가? 여기서 횡적인 강생의 의미를 ‘살아있는’에서 찾을 수 있다. 깨달음에 멈추는 진리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나눠지는 진리의 실체란 바로 우리를 끊임없이 살아있게 할 수 있는지의 그 유무에 달려있다.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 있는 삶을 산다면, 진리가 특정 종교의 전유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종적인 진리만을 추구하는 강생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진리란 일시적인 생명력이 아니라 영원이 살아있게 만드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살아 있는 진리만이 강생의 또 다른 한 축이라 할 수 있다.
⑧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바오로 서간문에서 그 ‘몸’은 요한 복음에서는 ‘살’로 표현된다. ‘몸’과 ‘살’의 대비는 ‘세상에’라는 우리가 디딘 땅의 현실을 떠난 믿음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 왜 몸이 아니고 살인가? 이는 강생의 신비가 영지주의자들이 빠졌던 ‘가현설Docetism’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육(肉)의 헬라어 '싸륵스'(σαρξ)는 뼈나 살이나 피부 등을 말하지만 특수하게 죄성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영-靈-רוח-πνευμα-spirit *혼-魂-נפש-ψυχη-soul *육-肉-בשר-σαρξ-flesh, meat *몸-身-בשר-σωμα-body)
여기서 강생의 신비에 대한 믿음은 본체론에 멈추지 않고 실체론이라는 사실 앞에 서게 된다.
⑦~⑧은 강생의 신학의 한 축인 횡적인 차원의 신비라 할 수 있다.
이제 ①~⑧을 다른 측면에서 이해해 보기로 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넘어 선다(파스칼)
⒜는 신에 관한 언명이고 ⒝는 인간에 대한 언명이다. 그런데 ⒜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신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 ⒜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없이 같아져야지만 가능한 사건이다. 같아진다는 것은 개성적 차원이 아니고 본성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신적 현실과 인간적 현실이 같아진다는 것과 맞물린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정립에서 강생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다는 문 앞에 다시 서게된다. 신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인간의 기억, Ⓓ인간의 본성, Ⓔ육화의 두 차원에서 살펴본 분들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체성혈대축일 강론에서 성체성사를 ‘기억의 성사’라고 규정한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린토 1서 11,24). 에서 ‘행하여라!’에서 이 행함의 전제가 하느님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고 그 기억은 우리의 상처 입은 기억을 치유한다고 보고 있다.(http://blog.daum.net/m-deresa/12389901)
유다인들의 '수군거림'은 ‘하느님 기억’에 대한 망각의 역사를 상징한다 할 수 있다. 기억의 치유가 가능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칼라너의 신학이 이를 부연한다.
Ⓓ우리가 이 무한한 완성으로의 지정됐다는 것,즉 신비를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는 바로 우리의 실존의 성질을 결정지어 준다. 무엇에 대해 우리가 수락하고 거절하는 그 대상 자체가 신비이니, 결국 우리가 살고 행하는 것에 초자연성 자체가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현화」(顔化)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이 양자 도 다 신비이다. 인간 자체가 하나의 신비다. 아니 인간은 바로 신비다(칼 러너,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의 신학적 소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분의 대한 이해가 만나는 곳에서 강생의 신비는 완성된다. '인간 자체가 하나의 신비다. 아니 인간은 바로 신비다'라고 말하는 칼 라너의 통찰은, 인간이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의 본성이 또한 신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명한 이유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강생의 신비를 더 디테일하게 바라본 라칭거 추기경이자 베네딕또16세 교황은, 강생의 신비를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다.
Ⓔ수직적 차원의 육화는 그리스도만의 고유성을 가리키는데, 이 육화의 의미는 예수가 참된 인간으로서 영원으로부터 내재적 삼위일체의 성자로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수평적 차원의 육화란 그리스도에게 모든 인류 구원을 위한 불가분의 도구와 수단이 집중적이고 포괄적으로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칼-하인츠 멘케 ,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하여-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신학 사상』)
여기서 Ⓒ, Ⓓ, Ⓔ을 연결하여 '인간 자체가 하나의 신비다. 아니 인간은 바로 신비다' 는 통찰에서 '성체의 근원이 강생의 신비'이자,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신비는 미지 (未知)가 아니다. 칼 라너의 통찰을 좀 더 읽어 본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신비라는 것,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미지 (未知)의 것으로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렇게 알아듣지 않는 자들은 신비와 미지를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비란 아직 알아내지 못한 어떤 부분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모든 인식을 가능케 하고 이 인식된 것 안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침묵 중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란 찰나적이거나 어떻게 처리해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특징이며 우리에게 완성으로서 약속된 것으로, 하느님을 뵈옵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초자연으로 향해 가는 데 있어 우리의 현실조건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 잠겨서 바라보는 신비는 피조물에게 있어 이미 환희이며 신비로서 받아들인 신비는 영원한 사랑의 불길 속에 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가시덤불과도 같다(출애급 3. 1-2 참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를 이해하는 것이 믿음의 여정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 강생의 신비가 십자가의 신학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모르고는 무능력의 능력을 가진 그분의 '사랑'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위험한 독서'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동안 살았던 삶의 문법을 집어던졌을 때, 그 위험한 독서는 '고귀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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