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矜恤)을 아는 사람은 자비의 어머니를 보리라!
-Celui qui connaît la pitié, regarde le Père de la Miséricorde!
[연 중 제 16 주 일 (나 해) 2021. 7. 18. 마르코 6,30-34]
1. 사랑은 타이밍이다 vs ‘언제’ 밥 한 번 먹자! 2. 공감능력, 호모 엠파티쿠스homo-empaticus (수전 손택 & 로먼 크르즈나릭) 3. 긍휼, ejleevw (엘레에오) 혹은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ξομαι),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마르코 6,30-34/시편41 1-3)) |
1. 사랑은 타이밍이다 vs 언제 밥 한 번 먹자!
우리는 ‘사랑은 타이밍이다’ 이런 말들을 예사롭게 쓴다. 그때 그 말은 ‘있을 때 잘해’ 라는 수사적 의미로 쓴 것이지 J가 한 그 ‘오늘의 사랑’을 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 말보다 한발짝 더 나간 말이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일 것이다.
문정희의 「친구」를 읽어본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문정희의 「친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의 생이 얼마나 짧은지, 그 짧은 시간동안 ‘온몸으로 사랑할’ 시간은 얼마나, 얼마나 더 짧은지, 마치 그 찰라의 시간을 친구가 다가와 어깨를 ‘툭’ 치는 것같다고 말한다. '온몸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마도 그 사랑은 '오늘의 사랑'을 의미할 것이리고 읽어보기로 한다.
권혁웅 시인은 『외롭지 않은 말- 시인의 일상어사전』에서,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겉뜻은 다음에 길게 만나거나 아예 만나지 말자는 제안이라면 속뜻은 삶을 연장하겠다는 의지, 친구나 지인을 만나서 가장 자주 하는 인사가 이 말일 것이다. 비슷한 말로 “언제 술 한 잔 하자” 등이 있으나 활용 빈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 말을 나눌 때 우리는 정말로 밥 한 번 먹자고 제안하는 것 아닌가? 다만 “언제”를 특별히 지칭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언제” 먹나? 답은 이렇다. 언젠가는. 단, 지금은 아니고. ‘지금’을 강조해서 읽으면 이 말은 ‘너랑은 안 먹어’라는 뜻이지만 ‘언젠가’를 강조해서 읽으면 이 말은 ‘너랑 밥 먹을 때까지 우리 관계는 끝난 게 아니야’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실행을 자꾸 연기함으로써 우리의 삶(곧 너와 한 식구가 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친밀한 삶)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다. 당신이라면 어떤 쪽에 내기를 걸겠는가?
일상의 말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기 때문에 책제목을 『외롭지 않은 말』로 지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그가 발견한 말 멋에서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은 그 ‘언제’를 한없이 유예하면서, 밥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기에,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말이라도 하고 돌아서야 하는 사랑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처럼 이제 진부한 발화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8억 인류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삶의 ‘본론’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을 말하는 것은 단지 언어적, 혹은 입술로의 발화가 아니다. 그것을 누구나 무의식으로 알기에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기도 한다. 침묵은 우아하다. 침묵은 발화를 수습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해!’라고 발화하는 순간 혹독한 혹은 어리석은 뒷감당을 해야한다. 사랑은 존재증명을 요구하는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해!라고 발화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본질에 도달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실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언니 사랑해!’ 라고 문자를 보내주는 30년지기 교우가 있다.
나: 무슨 뜻이지?
그녀: 언니, 사랑해!라는 뜻이야.
나: 아니... 무슨... 뜻...있냐고?
그녀: 그냥, 언니! 사랑해!라는 뜻이야.
세상에 살다살다 사랑해!라는 말도 방어기제로 삼게 되다니! 그녀 말이 맞다. 사랑해!라는 말은 사랑해!라는 의미 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덧붙일 수도, 덧붙일 필요로 없는 말이다. '그냥' 사랑해!일 뿐이다. 사랑을 해서 당신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에서 그 일용할 양식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생명 자체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태를 갖고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래서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말은 멀어지지도 말고, 그렇다고 가까이 오지도 말라, 그 자리에 있어라!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는 것을 진실로 알고, 살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일깨워야 하는 부분이 ‘공감능력’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2. 공감능력, 호모 엠파티쿠스homo-empaticus (수전 손택 & 로먼 크르즈나릭)
‘오늘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공감능력? 공감도 능력일까?
심리학과 뇌과학, 진화생물학, 아동심리학과 교육학 등의 분야에서 얻은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에는 이미 사회적 연결에 필요한 장치가 장착되어 있다고 본다. 공감하는 능력은 거의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재능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타인과 감정적 연대를 맺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라든가,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사람들처럼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은 많아야 전체 인구의 2%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98%는 천성적으로 공감능력이 있고 사회적 연대를 맺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공감능력에 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할까?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공감능력이 사장된 이유를 대중매체의 이미지 중독, 절시증, 관음증 혹은 포르노그래프로 보고 있다. 손택의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PDA 등의 작은 화면 앞에 붙박인 채로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줬다.
“‘끔찍함 terribilit’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 인간을 하나의 개인으로서, 인류로서 구별케 해줄 수 있는 바가 잔인하게 파괴되어 버린다. 역사적으로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의 재현물(예컨대 고문당하는 순교자나 박해받는 예수)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며, 이런 욕망은 얼마 안가 “사람들은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으로 타고났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병적일 만큼 음란한 정신 상태”의 시각적 등가물이 될 뿐. 현대에 들어와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일종의 ‘포르노그라피’가 되어버리고, 이런 이미지를 보는 행위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일종의 관음증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는 것. 그리고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 손택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이 세계를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 보자고 그녀는 제안한다. 즉, 자신이 예전에 ‘투명성’ 이라고 불렀던 태도를 가지고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참담함 사이에 얼마나 크나큰 거리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타인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손택은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던진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연민은 공감능력의 초기상태라고 보았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그런 고통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그녀는 말한다.
로먼 크르즈나릭, 『공감하는 능력-진심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에서,
공감은 자신의 관심사가 다른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아니며, 자신의 필요사항이 다른 모든 사람의 필요사항이 아니라는, 그리고 매 순간마다 어느 정도는 타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닫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감을 응용해 자기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복잡한 사회적 기술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은 도태될 것이며, 팀이 성공하려면 팀워크를 익혀야 하듯,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공감능력을 높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공감을 어떻게 응용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크르즈나릭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어떻게 타인들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는지, 또 어떻게 모두의 삶을 고무시키는지를 그들의 공통적인 습관 6가지를 통해 보여준다.
첫 번째 습관: 두뇌의 공감회로를 작동시킨다. 자기이익과 자기보존을 위해 공격적으로 돌진하는 것이 인간의 일차적인 행동 동기라는 전통적이고 다윈적인 사상, ‘호모 셀프센트리쿠스’라는 인간관은 잊어라. 새로 등장하는 인간관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타인들의 마음과 용해시키는 능력을 타고난 ‘호모 엠파티쿠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인간이면 거의 누구나 지니고 있는 두뇌 속 공감회로를 작동시킨다는 것은 곧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다.
두 번째 습관: ‘상상력을 발휘해 도약’한다.우리 앞에 공감을 일으키는 상상력의 완전한 표현을 가로막는 네 가지 근본적인 사회적·정치적 장벽이 서 있다. 그 장벽의 이름은 편견, 권위, 거리, 부인否認이다. 그 장벽을 뛰어넘는 비결은 다른 사람의 정신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의식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도약하는 것이다.
세 번째 습관: 새로운 체험에 뛰어든다. 몰입과 탐사와 협력을 통해 경험의 세계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타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능력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다. 공감하기를 배우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언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원어민들과 어울리면서 날마다 그 언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공감의 연습도 다르지 않다. 안내서 없는 모험에서 우리는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네 번째 습관: 대화의 기교를 연마한다. 오늘날 만연한, 대화 단절이라는 위기를 타개할 때에도 우리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다. 그들은 6가지의 특별한 자질, 즉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 철저히 듣기, 가면 벗기, 타인에 대한 배려, 창조적 정신, 불굴의 용기를 대화에 불어넣는 사람들이었다.
다섯 번째 습관: ‘안락의자 여행자’가 되어본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예술은 아동노동에 반대하는 투쟁이든 반전운동이든 어떤 행동을 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공감하는 자아’를 떠밀어 보내왔다. 우리는 책과 예술작품을 소비할 때 어떻게 해야 분별력을 가질 수 있고, 재미만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감하며 참여할 수 있을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것을 ‘안락의자 공감’, 즉 자기 집 거실에 앉아서도 해볼 수 있는 공감여행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여섯 번째 습관: 주변에 변화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공감의 파도는 새롭게 장래성을 인정받는 영역 세 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공감 기술을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영역, 갈등 상황을 해결하고 중재하는 영역, 기후변화에 대처하도록 미래세대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영역이다. 이제 그만 공감을 사적인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공적 생활도 바꿀 만한 잠재력을 발산시킬 때가 되었다.
수전 손택 & 로먼 크르즈나릭은 ‘우리 안의 호모 엠파티쿠스homo-empaticus’가 천성적으로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손택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크르즈나릭은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타자와 나를 정당하게 바라보는 공존의 시선이라는 데 동의한다. 우리 역시 그렇게 살지 못할지언정 그들의 제언에 동의할 수 있다.
요는, 우리가 수전 손택 & 로먼 크르즈나릭의 제언대로 공감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그 힘이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사랑은 타이밍이다vs ‘언제’밥 한 번 먹자!' 라고 나눠지는 이 시대에 과연 ‘오늘의 사랑’이 가능할까를 묻게 된다는 것이다.
3. 긍휼, ejleevw (엘레에오) 혹은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ξομαι),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마르코 6,30-34/시편41 1-3
사랑은 아름답다, 그러나 ‘오늘의 사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천국을 희망하지 않고, 죽은 후의 저 세상에서의 천국을 희망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오늘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계획들을 취소하고, 꿈을 수없이 연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의 사랑은 그럴듯한 삶이 아니라 삶에 종속된 사랑을 하겠다는 어리석은 사랑의 천명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란 주기도문의 한 구절은 누군가 오늘의 사랑을 한 대가로 우리 앞에 삶이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온 생을 사랑에 종속시킬 각오를 한 사람들만이 진정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는 주제가 붙은 마르코 6,30-34에는 바로 ‘오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J의 행적이 나온다.
이 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사랑은 타이밍이다’ 이런 말을 예사롭게 쓰면서 산다. 마르코 6,30-34을 읽어보면 ‘사랑은 타이밍’이 맞는 말인데, 그 말은, 사실 우리 삶을 위태롭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 사랑은 타이밍라는 말은 지나간 시간에 회한이 남을 때 사후적 수사로 쓰고 있다. 편하게, 그럭저럭 살다가고 싶으면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냥 언제 우리 밥 한 번 먹자’라는 말로 오늘은 아니고 그 언젠가, 라는 말로 사랑을 한없이 유예하면 된다.
왜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삶을 사랑에 종속시키는 것일까?
마르코 6,30-34을 읽어 본다.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코 6,30-34은 의미상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 의미는 인과적인 고리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 제자들에게는 한적한 곳에서의 ‘쉼’이 필요하다.
Ⓑ의 군중들에게는 ‘목자’가 필요하다.
먼저, ‘오늘’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이 타이밍’이라는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로 더 빨리 다가가게 만드는 포인트가 된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랑의 표지에 해당한다. 공생활 3년동안 예수님의 행적은 ‘오늘의 사랑’이 지닌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알다시피 위의 복음 다음에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로 이어진다. 군중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 다음 그들의 배고픔까지 채워준 사랑,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군중을 먹인 기적. 영으로 먹이고 육으로 먹인, '오병이어'의 이 기적사화는, 예수님의 다른 기적사화는 달리 오천명이라는 군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대 사건이다.
그것이, 왜 문제일까? 그동안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사화를 시작으로 예수님이 행한 수많은 기적들은 개인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었다. 그러나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만천하에 그분이 누구인가를 천명하는 사건에 해당한다. 이 기적사화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제거해야할 대상, 위협적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빵을 먹은 군중들 역시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바라보지 못한채, 그들의 정치적 숙원을 풀어줄 대상으로 헛된 욕망을 갖게 된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다. 그분이 진정 원하지 않은 수난이 그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는 것을 그분은 아신다. 그것을 알지만 그분은 ‘오늘’의 사랑 앞에서 그 시간을 유예시키거나 종식시키기 위해서, 그 어떤 액션도 하지 않으신다. 이제 막 수련기에 접어든 제자들과 함께 한가한 곳에 가서 쉬지도 못한다.
'오늘'의 사랑을 안 사람은 사랑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삶을 계산할 수도 없고, 계획할 수도 없다. 오늘의 사랑을 못 본척 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것이 ‘오늘’의 사랑 방식이 처한 위험경고표지라 할 수 있다. 사랑은 내일이라는 시간을 모른다. 예수님이 말하는 그 사랑은 ‘오늘, 지금, 여기서, 당장’ 실천해야할 바로 그 사랑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은 '오늘의 사랑'을 하라는 말이다.
Ⓐ의 제자들에게는 한적한 곳에서의 ‘쉼’이 필요하다.
Ⓑ의 군중들에게는 ‘목자’가 필요하다.
Ⓐ의 제자들에게 당연히 일 그 다음에 휴식이 필요하다. 이는 제자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다. 그런데, 제자들과 Ⓑ의 군중들의 필요가운데 예수님은 목자가 필요한 군중들의 필요에 먼저 응하신다. 오늘의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오늘의 사랑을 하게 만드는 그 마음이 무엇인가? ‘긍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다. 어머니의 마음이다. 자비의 마음이다. 예수님의 저 귱휼이 없었다면 신과 인간을 매개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없다고 할 수 있다. 긍휼의 ‘마지막’ 정점이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사실 ‘마지막’이란 단어에 좀 예민하다. 사랑에는 ‘마지막’이란 없다. 죽음마저도 ‘마지막’은 아니니까.)
‘가엾게’ 라는 말은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ξομαι)로 ‘애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 마음속에서 움직이다' 라는 뜻이다. 그리스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우리말 성경에서 ‘불쌍히 여기다’ 혹은 ‘자비’로 번역되어 있다. 스플랑크나는 ‘내장, 애타는 마음, 사랑’에서 유래한 단어다. 심장, 폐, 간 같은 신체 부위를 뜻하면서 그 속에 있는 감정을 뜻한다. ‘참척’을 당한 어머니들이 느끼는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아픔이자, 피에타의 성모님을 관통한 그 아픔이 스플랑크니조마이이다. 몸속 장기로 느껴 가여워한다는 뜻이다. 이는 가엾게 여기는 ‘라함’(racham; 자궁)에서 나온 이 단어는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긍휼’, ‘자비’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감정 차원보다는 사랑의 표현이나 행위(탈출기33:19; 열왕기하 13:23; 시편 102:13) 등으로 드러난다. 죄에서 돌아섰을 때, 주어지는 용서의 은혜를 표현할 때 쓰이기도 하고(사도행전 14:1),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긴 주인(마태오 18:23-35),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루카 15:11-32), 강도를 만났던 자를 불쌍히 여겨 살려낸 사마리아인(루카 10:25-37)에서 이 긍휼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나온다.
시편 제41편에 자비(긍휼히)를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Blessed are the Merciful)라고 자비를 베푸는 그 자체가 복임을 전한다.
Ⓒ복되어라, 딱하고 가난한 사람 알아주는 이여, 불행한 날에 야훼께서 그를 구해 주시리라. 그를 지켜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땅 위에서 복을 주시며 원수들에게 먹히지 않게 하시리라. 병상에서 그를 붙들어 주시리니 자리를 떨쳐 일어나게 되리라.
또, 마태오복음에서도 자비를 베푼 사람은 그들 역시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인을 향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자비(긍휼)’이라고 하신다. 이렇듯 긍휼, 자비의 정신을 외면한 채 형식만 중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율법의 핵심으로 정의(크리시스; krisis), 자비(엘레오스; eleos), 신의(피스티스; pistis)를 거론하신다.(마태오 23:23).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오 5:7) 율법학자들과 바라시이파들아, 너희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희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로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을 대수롭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이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냐? 이 눈먼 지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마테오23 23-24)
바오로사도는 병과 슬픔에서 그 치유의 근원이 하느님의 자비(긍휼)하심에 있음을 고백한다.(필립비서 2:27)
Ⓔ사실 그(에바프로디도)는 병이 나서 죽을 뻔했으나 지금은 하느님의 자비로 다 나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자비를 베푸셔서 나에게 겹치는 슬픔을 면하게 해 주셨습니다.
성서의 핵심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 역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렇기에 긍휼을 입은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다(로마서 12:8) 또한 긍휼은 구제와 자선 등으로 나타나며 긍휼을 베푸는 일은 심판 날 긍휼을 받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디모테오 후서 1:18) 있으며,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에게 하느님은 심판을 내리실 것(로마서 1:29-32; 야고보서 2:13)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물론, 그 심판은 스스로의 사랑없음을 자신의 생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군중들의 무엇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까?는 좀더 확장된 영적 상태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에 불쌍하게 생각이 들었다고 복음은 전한다. 여기서 목자는 무엇을 하는 이들인가? 그들은 길리요, 진리며, 생명을 전하는 이들이다. 군중들이 가엾은 것은 그들이 단지 굶주렸기 때문에, 아프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진정 가엾은 마음이 든 것은, 그들 자신의 목마름의 그 근본원인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대의 목자들인 정치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그들을 더 가여운 상태로 몰고 갔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군중들은 자신들의 배고픔의 정체를 정확히 몰랐을 수도 있다. 본질적인 가르침보다는 병이 낫거나 아님 빵이라도 실컨 먹었음 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가시적인 기적 앞에, 권능 앞에 납짝 엎드리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 분이 가르쳐준 ‘많은 것’들이라는 문맥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목자의 덕목이자 양이 느끼는 그 배고픔의 실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이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목자가 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배고픔을 느끼는 양도 동시에 우리 안에 공존해 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은, 스스로가 자신의 목자가 되어 자신 안의 양을 잘 돌봐야하는 그 영적인 상태까지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가 목자가 되었을 때만 '오늘의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오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오늘의 사랑, 그 길은 우리에게 고통과 희생만 있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자가 되어 우리 안의 양을 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할 수 있을 때, 그 오늘의 사랑은 ‘순수한 기쁨, 고요한 평화, 무한한 해방’이라는 선물도 함께 있음을 통찰하게 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우리를 도구화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긍휼(矜恤)을 아는 사람은 자비의 어머니를 보리라!(Celui qui connaît la pitié, regarde le Père de la Miséricorde!)는 말이 의미하는 바, 오늘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진정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글을 마무리 하며,
행복
-靑馬 유치환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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