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빛이 (밤의)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니체)
-Wie das Licht des Mittags die Tiefe der Finsternis erfährt
[연 중 제 14 주 일 (나 해) 2021. 7. 4. 마르코 6,1-6]
1. 시가 내게로 왔다(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2.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윌리엄 셰익스피어) 3. 바오로의 가시와 인류의 가시가 만날 때(고리토2서12,7-10/마르코6,1-6) |
1. 시가 내게로 왔다(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내게로 왔다」를 읽어본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시가 내게로 왔다」에서 ‘나’는 시를 어떻게 쓰게 되는지? 시작의 네 단계로 읽을 수 있겠다.
Ⓐ시는 어떻게 ‘나’에게 오는가? 어느 날 문득, ‘나’에게 찾아온 시의 영감은-어떤 길거리에서 오고, 밤의 가지에서 오고, 결렬한 불길에서도 온다. 나는 시를 쓰겠다는 결심을 하거나 충분한 습작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느닷없이 시가 ‘나’에게 온 것이다.
Ⓑ 이렇게 문득 ‘나’에게 온 시적 영감은 ‘나’의 눈을 멀게 하고 ‘나’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한다. 그렇게 내 육체의 눈은 멀었으나,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그 불같은 영감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눈과 언어를 찾는다.- 넌센스같은 시의 첫 행을 쓰자 그 순간 새로운 세계를 보게된다. Ⓓ‘나’ 자신이 하늘, 유성, 논밭, 그림자, 밤, 우주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하나라는 것을 본 것이다.
이 시는 시인이 얻은 시적 영감을 언어로 표현하면서 우주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하나’라는 것이 ‘나’를 철저히 알게 되는 과정에서의 ‘하나’라는 점에 이 시의 미덕이 있다 하겠다.
시가 나를 찾아왔어.라는 시행에서, 모든 고귀한 것들이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을 계획하거나 기획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신비한 사건들은 ‘나’라는 개별자가 공백의 상태에서 체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영혼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기존의 상식적인 언어로는 그 상황을 표현할 길이 없다.
‘시’가 나에게 왔다는 것은 마치 ‘나’에게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사랑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와서 내 영혼을 송두리째 차지하게 되는지, 기존의 내가 쓰던 언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은 불가항력이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없다.
또한 그런 반응의 결과 역시 예측할 수가 없다. 그 반응의 결과들은 이 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시처럼 사랑을 만난 사람은 예전의 그가 아니다. 내가 만난 것이 시인지 사랑인지 알게 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무엇을 보았는가? 마리아여 말하라, 는 말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나’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주의 모든 사물과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에서 어떻게 우주와 ‘하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우주와 하나라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런 순환의 고리들은 ‘우리는 모두 하나다’고 말할 때, 그 ‘하나’는 수사적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임을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2.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윌리엄 셰익스피어)
‘우리는 모두 하나다’ 라는 것이 수사적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 되는 것은, 그 직관은 우리가 얼마나 충분하고 풍요로운 사람인 지 알게 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베드로가 되는 사건이고, 바오로가 바오로가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내가 내가 되는 사건이다. 내가 나인 것이 행복하고 네가 너인 것이 행복한 그 충만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인류의 스승들은 ‘개인의 탄생’이라고 말한다. 진정으로 ‘나’를 경험한 사람만이 이 세계는 모두 ‘하나’라는 직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만이 신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명제는 그래서 진리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그런 맥락에서 신을 열심히 부를 뿐, 신의 현존을 믿지 못하는 인류에게, 니체의 출현은 ‘나’의 탄생, ‘개인의 탄생’을 알려준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인류의 가장 큰 모순은 신을 죽이면서 신을 신봉하는듯한 포즈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체면 상태에서 ‘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니체는 ‘하나’에 몰입해 그 ‘하나’를 낳게하는 모태를 상실했다는 표현을 “한낮의 빛이 (밤의)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라고 일갈한다. 이는 빛의 부정이 아니라, 모태없는 자식이 있을 수 없다는 극단의 표현에 해당한다. 이는 단적으로 ‘개인의 탄생’의 서막으로 집단주의의 퇴장을 예견한다.
“한낮의 빛이 (밤의)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는 명제는 니체하면 떠오르는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낮의 빛을 신이라 한다면, 어둠의 심연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을 알지 못하고 집단의 광기에 사로잡혀있는데, 과연 그가 신을 알까? 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을 빛이게 하는 것은 인간의 심연이다. “한낮의 빛이 (밤의)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는 “어둠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빛을 알랴?”로, 이는 “인간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신을 알랴”로 “나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너를 알랴”로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찌 타자를 사랑하랴”로 바꾸어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니체식 씨니컬이자 니체라는 한 개별자가 인류에게 던진 화두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비개인적인 것이 도덕적 행위의 고유한 특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처음엔 보편적 이익을 고려하는 일이 바로 모든 비개인적 행위가 칭찬을 받고 특별 취급을 받는 이유였다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개인적’ 고려를 함에 있어서만이 보편을 위한 이익 역시 최대가 된다는 것, 따라서 엄격한 개인적 행위야말로 보편적인 도덕성에 상응한다는 것 등이 현재에 이르러 점점 더 긍정적으로 통찰됨에 따라 위와 같은 견해에 대한 뚜렷한 일대 변혁이 절박해진 게 아닐까? 자신을 완전한 ‘개인’으로 만들며 모든 행위에 있어 개인의 ‘최고 안녕’을 주시하는 것, 이것이 타인을 위한 저 동정적인 감동이나 행위보다도 더 진보하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우리에게 있는 개인성을 너무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병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 훈련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자. 오히려 우리의 감각은 그것으로부터 떼어져서, 국가와 학문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마치 그 개인성이란 것이 희생으로 바쳐져야 할 사악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바쳐져 왔던 것이다.
니체는 그동안 인류에게 도덕적인 것을 ‘비개인적’인 것으로 여겨 왔지만 그가 보기에 진정한 도덕성은 반대로 ‘개인적’인 요소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성, 즉 자신에 대한 사랑이 사악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겨지는 도덕률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한다. 오히려 우리 인류가 개인성을 너무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병을 앓고 있어서 문제라고 본 것이다. 어린이 동화 인어공주처럼 나의 목소리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니체는 무엇보다 자신을 완전한 개인으로 만들어야 하고 모든 행위에 있어 개인의 ‘최고 안녕’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를 통해 우리는 서구의 근대적인 사고, 즉 ‘개인의 탄생’을 엿볼 수 있다. 노예제나 농노제 아래서 개인은 별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를 동물과 마찬가지로 취급했다. 니체가 루소를 비롯한 근대 사상가들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 전제에 해당하는 ‘개인’ ‘개별성’을 중요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집단성이 유일한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개인은 사실 의미 없는 것이었다. '나'라는 개인이 실종된 사회에서 자신을 관심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발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이를 문학적 표현으로 바꾸어 말한 사람이 롤랑 바르트이다. 롤랑 바르는 『사랑의 단상』에서 이를 ‘질투의 심리학’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은 ‘나’를 사랑하기도 전에 타인을 질투하는 것을 먼저 배웠다는 것이다. ‘제가 제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묻는 카인의 비극은 바로 ‘나’의 실종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롤랑바르트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분석하면서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에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질투가 무엇인가? 너와 나는 결코 하나일 수 없다는 것으로, 질투는 분리와 배타성의 다른 표현이다. 질투는 왜 너만 사랑받고, 너만 아름다운가라는 결여의 표현이다. 이는 너는 내가 아니란 사실과의 만남이다. 나를 나로써 발견하지 못한 자의 비극이다. 이렇듯, 젊은 베르테르의 죽음은 새로운 개인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고 바라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개인의 상실, ‘나’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류의 두려움을 칼 융은 ‘집단무의식’으로 바라보았고, 라캉은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는 ‘욕망’이론으로 바라보았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나’라는 개별자의 사회화의 장벽을 질투의 심리학 저변에 ‘확증편향성’으로 보았으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자기생산(Autopoiesis)’ 이론으로 제시한다.
확증 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은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집단적인 경향성이다. 인지심리학에서 확증 편향은 정보의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지 편향 가운데 하나이다
니클라스 루만은 『체계이론 입문』 & 『사회의 사회』에서 확증편향은 자기애의 실종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사회와 소통의 고리가 끊긴 소외와 고립의 가장 중요한 최초의 코드인 ‘나’를 실종했기 때문으로 바라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여행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밥을 먹는다고 소통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자와의 소통은 얼마나 ‘나’를 그가 소속된 사회속에서 재생산할 수 있는가의 여부로 바라보았다.
루만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창안한 ‘자기생산(Autopoiesis)’개념을 자신의 이론에 접목하여 ‘자기생산적’ 사회체계 이론을 만들었다. ‘자기생산’이란 단어는 스스로 무(無)에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개념은 체계가 자신의 고유한 역동성으로부터 체계의 존속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작적 폐쇄성과 역동적 개방성은 생물학적인 자동생산 체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자기생산 체계는 폐쇄적인 동시에 개방적인 체계이다. 자기생산 체계는 구성요소와 작동의 측면에서는 폐쇄 체계이지만, 물질과 에너지의 측면에서는 개방 체계로 볼 수 있다.
1, 자기생산 체계는 자기구성 요소로부터 자기구성 요소를 재생산한다.
2, 자기생산 체계는 스스로 환경과 경계를 긋는다.
3, 자기생산 체계는 자기구성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변형해나가며(자기준거), 다음 단계에서 변형한 지점이나 상태로 진입한다(재투입).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가 내놓은 ‘자기생산’(Autopoiesis)이라는 개념은 루만 사회학에 중대한 통찰을 주었다. 마투라나는 생명체의 근본특성을 ‘자기생산’으로 보았다. 자기가 자기를 생산하면서 자기를 유지해 가는 것이 생명체다. 이 생명체는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그 환경과는 분리된 자율적 체계다. 체계로서 생명체는 매 순간 신진대사를 하면서 자기의 구조를 스스로 재생산해 나간다. 이 반복되는 신진대사 활동이 멈추면 생명체는 소멸한다. 체계도 이 생명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모든 것을 체계로 설명하려는 이런 야심 때문에 루만은 ‘사회학의 헤겔’이라고도 불린다. ‘정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 헤겔 철학의 거대 기획을 사회학에서 해낸 사람이 루만이라는 얘기다.
“모든 현재화된 사건들은 사건으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실현한다”
“사회적 체계는 자신의 환경에 대한 자신의 경계다. 이 경계는 모든 개별 사건에서 항상 새롭게 그려져야 한다. 또한 항상 새롭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의미경계, 즉 체계가 자신을 성공적으로 재생산하는 동안에는 체계 내에서, 체계에 의해 모든 참여자가 논쟁하는 형식으로 그려지는 경계다”
니클라스 루만은 에밀 뒤르켐처럼 기독교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하였다. 그는 종교 교리가 일면에서 한 집단의 종교적 정체성이 위협을 느낄 때 그 반응으로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다른 종교체제와 대결과 갈등에서 교리 생성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루만은 교리는 종교 공동체의 자기 반영이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다른 공동체들과의 차별적 관계를 규정한다고 보았다. 하나가 아니라 배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만은 현대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와 생물학에서 차용한 '자기지시적'이며 '자기생산적'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으며 논리학, 언어이론, 의미이론, 커뮤니케이션이론, 매체이론 등을 결합해 '사회적 체계'란 개념을 만들었다. 사회적 체계는 곧 심리적 체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심리적 체계’란 ‘의식을 지닌 인간’을 가리키는 루만식 표현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체계’란 무엇인가. 사회적 체계는 사회관계에서 형성되는 온갖 형태의 체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사회적 체계를 루만은 ‘상호작용’, ‘조직’, ‘사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루만이 말하는 ‘사회적 체계’는 거시적 구조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관계가 형성되면 ‘사회적 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회적 체계의 작동 방식이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정보를 알려주고 그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통은 ‘정보-통보-이해’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루만은 진화론적 관점에 서서, 사회가 성장하고 진화하며 그 결과로 세계사회가 필연적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는 사회라는 주체가 자기를 기술하는 역설적 작업이며, 불가능해 보이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루만이 ‘자기기술’이라는 역설에 대해 스피노자의 정리에 따라 기술하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이 ‘사회의 사회’인 까닭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며 미치광이가 되어 갔지만 루만이 보기에 사회는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야 하는 자’들의 집단으로 본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집단은 이미 죽음 집단이라는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자기생산체계”에서의 “자기”의 구조와 과정 및 형식」(이철, 사회사상과 문화, 21권 2호)에서,
나는 누구인가? “자기(Selbst)”란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를 구별하는 작동이다. 자기를 구별하는 작동은 어떤 경우에나 “다른 것-경계-자기”의 복합과, 이 복합이 던져지는 전체 공간을 생성시킨다. 다른 것, 자기, 공동의 경계, 그리고 전체 공간은 언제나 함께 생성되고 함께 소멸된다. 이러한 작동의 논리를 루만은 “구별함-그리고-지시함”의 동시성과 연속성의 차이로부터 도출해낸다. “다른 것-경계-자기”는 “이전-작동-이후” 또는 “상태-작동-상태”의 프레임을 배경으로 하여, 동일한 자기에 의해 지시될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 니체, 롤랑바르트, 칼융, 자크라캉, 루만은 모두 공통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나를 말할 수 없는 사회는 이미 자기생산 능력이 고갈된 사회라고 그들은 보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인간1, 인간2, 인간3...인간n이라는 기호로 불리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3. 바오로의 가시와 인류의 가시가 만날때(고리토2서12,7-10/마르코6,1-6)
너는 베드로다, 너는 바오로다, 너는 막달레나다, 라고 나의 이름을 직접 불러준 분이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코6,1-6)는 그 놀람은 우리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 그 이유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겠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것,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그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에서 이천년전 당시의 나자렛이라는 그 고향사람들만을 의미하는가?
코린토 2서12,7ㄴ-10에서 바오로의 고백을 들어보기로 한다.
형제 여러분,7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의 그 촌철살인에 해당하는 가시의 고백은 위에서 살펴본 개인의 탄생,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라는 그 말과 깊은 친연성을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애와 이기주의를 동일한 의미로 바라본다. 자기애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아가페라고 본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아가페를 실현하냐하면 그렇지도 않은데 그런 사고체계를 고수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바오로사도의 아가페의 근간은 철저한 자기애임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약함을 고백할 수 있었고, 진정한 아가페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애가 무엇인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에서 그 사랑의 기준이 내 몸이라면, 그 몸은 어떤 몸인가? 그 때 몸은 전인격을 담지하고 있는 그 몸일 것이다.
바오로의 고백은, 자기애를 갖고 있는 한 인간의 너무나 뜨거운 고백에 해당한다. 코린토 2서12,7ㄴ-10는 너무 뜨거워서 저 부분을 읽을 때마다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울컥한다. 가시로 상징되는 자신의 약점을 만천하에 고백할 수 있는 그 용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고백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결코 인간으로써는 할 수 없는 고백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은 누가 하는 것인가? 나의 '가시'가 하는 고백이다. 가시는 결여다. 사랑은 결여의 교환이라고 신형철 선생은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가시’를 갖고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쉬울까?라는 질문을 역으로 해볼 수 있다.
타자를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척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는 거 같은 이기주의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그래서 진리의 출발점이자 사랑의 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신을 아는 것이 쉽다면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고린토2서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약함과 자신의 강함을 동시에 체험한 사람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자신의 강함을 동시에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은 가시다. 자신의 강함은 그분에게서 온 사랑이다. 장미와 가시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간의 운명을 바오로의 '가시'에서 보게 된다. 이는 자신의 가시를 아는 사람만이 신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6,1-6을 읽어본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예언자들이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은 환영을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칼 융이 간파한대로 그들이 ‘집단무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고체계마저 그들 고유의 나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인류역사를 되돌아보며 칼 융과 프로이드를 종합해 ‘내가 욕망하는 것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창세기4장의 카인과 아베의 형제비극을 성서적 측면에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인류역사의 발전단계에 투영된 질투의 심리학 혹은 욕망이론으로 읽을 수 있다. 정착민인 카인이 유목민인 아벨을 죽인 사건은 나를 모르는 자가 나를 아는 자를 죽인 사건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왜 죽어야 했을까?를 묵상해 보면 알 수 있다. 대사제 앞에서 마지막 심문의 핵심은 ‘너는 신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신이다”라는 말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분은 철저하게 바로 그 ‘나’였기 때문에 ‘신’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인생은 철저히 ‘나’이면서 철저히 ‘신’이었다. 공생활 3년이 나를 아는 자만이 철저하게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날들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공생활3년 동안 열혈당원들의 바람(국가라는 모래알로 뭉친 인류)에 동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그분이 유다로 상징되는 열혈당원들에게 권능의 한 조각을 나눠줄 수 없었던 것은, 집단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이자, 나를 모르는 국가란 무엇인가? 나를 모르는 인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마저 ‘나는 저 분을 모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철저한 몰이해의 과정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나'로 돌아가는 마지막 과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 내가 누구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그분이 나일 수 있었기에 철저히 그분은 신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를 괄호치고 우리를 말하는 것은 쉽다. 나의 사랑을 말하지 않고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것도 쉽다. 나의 사랑을 하지 않고 우리의 사랑을 하는 것도 쉽다. 나의 가시를 말하기 전에 타인의 가시를 말하기는 쉽다. 나의 들보를 말하기전에 타인의 티끌을 말하기는 쉽다. 그래서 봉사란 말을 쓰기를 꺼려한다. 봉사와 짝을 이루며 다니는 단어가 봉사-겸손-희생이다. 봉사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는 행위를 하긴 하되, 그 행위의 나의 심연을 바라보았다면, 그 단어들을 쓸 때, 왜 그 단어를 쓰고있는지 자기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를 모르면서 걷는 길은 쉽다. 쉬운 것은 언제나 자기기만이 내재해 있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와 간디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모두 자신의 신념인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은 독배나 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신념으로 살 수 없는 심장을 지닌 사람들이다. 우리와 가까운 시대의 간디를 보자. 인도는 영국이라는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물레만 돌리고 있는 간디, 영국이라는 물질주의와 인도라는 정신주의가 충돌한 지점에서. 그는 영국이라는 식민지만 본 것이 아니라 인도라는 식민지도 보았다. 칼로 영국을 물리친 자는 그 칼로 인도 민중도 다스릴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를 실현할 수 없는 시대는 모두 식민상태의 삶이다. 간디는 영국이라는 식민지나 인도라는 식민지나 인간을 식민지화하는 것은 같다고 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는 그들의 질투마저도 그들은 그들 고유의 질투, 그들 고유의 무지가 아니었다. 집단의 질투를, 집단의 욕망을, 집단의 두려움을, 집단의 무의식을. 집단의 신념을, 집단의 평가를, 집단의 비난을, 자신의 무의식으로 알고 살 인류를 보고 놀랬다고 할 수 있다. 나의 목소리를 잃은 인류를 보고 놀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이천년전의 그들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세대대 인류의 무지, 집단무의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원죄’ 개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진리를 알아볼 수 없는 인류! 자신의 가시를 알 수 없는 인류! 알 수 없기에 고백할 수 없는 인류!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서 바라본 대로 내가 우주와 '하나'에 이르기 위해, 철저히 ‘나’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 서게된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가시와 나의 장미를 동시에 안다는 것이다. 바오로의 가시와 인류의 가시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우주와 '하나'가 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바오로 사도의 저 뜨거운 고백이 인류의 가시를 씻어주는 눈물임을 알게 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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