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비유의 '은폐'와 '계시', '신앙'과 '믿음'의 갈림길
-The Crossroads of 'Concealment', 'Revelation', 'Religion' and 'Faith' in the metaphor of mustard seed
[연중 제11주일(나해)2021, 6. 13. 마르코 4,26-34]
1. 나는 ‘나’를 발생시키고자 한다. 시로.(이준규) 2. 물질은 정신의 지극히 이완된 과거이거나 꿈이다(질 들뢰즈) 3.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Matthew 13:31-32 Mark 4:26-34 Luke 13:18-19) |
1. 나는 ‘나’를 발생시키고자 한다. 시로.(이준규)
시를 읽을 때 ‘주정시냐’ ‘주지시냐’의 범주로 나누어 바라보기도 한다. 정서를 보여주는 ‘주정시’의 범주에도 지성에 호소하는 ‘주지시’의 범주에도 해당하지 않는 시들이 있다. 세상의 그 어떤 문학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시들이 있다. 시 자체가 하나의 범주, 장르가 되는 시들이 있다.
이준규 시인의 시집 『반복』(2014, 문학동네)에 실려 있는 「너무」는 이준규라는 유일한 장르에 해당하는 시다.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커피 너무 적은 나의 노트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겨울 하늘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한숨 너무 적은 너의 웃음 너무 적은 나의 기찻길 너무 적은 나의 묘비명 너무 적은 너의 무릎 너무 적은 너의 부츠 너무 적은 너의 단두대 너무 적은 너의 말 너무 적은 너의 매 너무 적은 나의 숲 너무 적은 나의 손가락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술 너무 적은 나의 시 너무 적은 나의 호흡 너무 적은 나의 산책 너무 적은 나의 축구 너무 적은 나의 커피 너무 적은 나의 운명 너무 적은 나의 나 너무 적은 나의 한옥 너무 적은 나의 언덕 너무 적은 나의 초당 너무 적은 나의 적지 너무 적은 나의 연못 너무 적은 나의 나무 너무 적은 나의 네모 너무 적은 나의 동그라미 너무 적은 나의 물고기 너무 적은 나의 장소 너무 적은 나의 책 너무 적은 나의 섹스 너무 적은 나의 차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너 너무 적은 나의 우리 너무 적은 나의 길 너무 적은 나의 책상 너무 적은 나의 서재 너무 적은 나의 주전자 너무 적은 나의 새들 너무 적은 나의 해 너무 적은 나의 달 너무 적은 나의 별 너무 적은 나의 대지 너무 적은 나의 겨울 너무 적은……
이준규 시인의 「너무」는 어떤 시의 범주에도 해당하지 않는 시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준규 시인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른다고들 한다. 이는 시를 하나의 범주로 묶는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든 소설이든 어떤 범주로 묶을 수 있다면 그것을 예술의 하위장르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예술은 그 자체에 어떤 범주의 해체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준규 시인은 ‘그냥’ 시를 썼다고 말하듯, 독자도 ‘그냥’ 시를 읽으면 된다. 읽다보면 어떤 스타카토처럼 운율이 느껴지고, 어떤 사유가 발생한다.
http://blog.daum.net/m-deresa/12387358
「너무」 는 시작도 끝도 없는 시다. ‘너무 적은 나의 ~’이라는 통사구조가 무한히 반복되는 세상을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너무 적은’ 것이 이렇게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너무 적은 것’이 무한한 반복을 재생한다는 것에서 문득 놀라게 된다.
한때, 한강이 북쪽창으로 보이는 아파트에 시인은 아름다운 김지혜 시인과 2층에 살았고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아름다운 가족과 8층에 살았다. 가끔 한강으로 나가는 산책로나 쓰레기 분리장 같은 곳에서 시인을 자주 봤다. 그런데 인사하지 않았다. 그때 시인의 시를 읽고 있었고, 한 주 강의 주제 였기 때문이다. 사실, 인사를 하는 것과 시를 읽는 것은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굳이 인과관계를 나누자면 과학적 인과관계가 있고, 상황적 인과관계가 있다면,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후자에 해당한다. 시를 읽은 어떤 느낌들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기 시론이 있다. 이준규 시인도 시론이라고 묶지는 않았지만 여러 지면에 발표된 것을 종합헤보면 분명한 시론이 존재한다. 그 시론은 “나는 ‘나’를 발생시키고자 한다. 시로” 라는 말에서 추론할 수 있다. ‘나’를 발생시키는 ‘사유시’ 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사유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세계를 통해서 나로 돌아오든 나를 통해서 세계로 나가든 시인의 시는 결국 ‘나’로 회귀한다.
이준규 시인은 ‘나는 시를 어떻게 쓰는가’ 라는 글에서
“나는 요즘 시쓰기는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를 쓰는 일은 시를 발생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발생하게 하는 일 같다. 아무튼, 내가 시를 쓰는 행위는 ‘나’를 발생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고정되는 일이 아니어서, 계속 하게(쓰게)된다. 쓰다 보니, 쓰면서 새롭게 생성하고(발생하고)있는 ‘나’가 있을 뿐이었지 본래의 나 같은 것은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시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시를 사유의 한 형태, 그것도 내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나를 발생시켜야 하기에, 나를 매일 생각하는 자로, 매일 미지의 것을 느끼는 자로 전환시켜야 하기에, 나는 매일 쓴다. 비가 오는 날도 쓰고 비가 오지 않는 날도 쓴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 라는 문장을 쓰면서 그 문장을 쓴 나와 그 문장이 무언가 새로운 두 번째 문장을 발생시키기를 바라면서 비가 온다, 라고 일단 쓴다. 나는 연습 중이다. 나는 쓰는 것을 통해 어떤 사유를 발생시키고 있고 그 사유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하지 않는 나 역시 나라는 점에서, 갈 길은 멀고 희망은 없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가 나를 발생시키는 것이라면. 독자 역시 시를 읽으면서 나를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 나를 발생시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수천의 빛깔을 가진 나를 내가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이해는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사유’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수반된다. 왜 나는 나를 이해해야만 하는가? 나를 발생시키는 그 행위는 왜 반복일까?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유의 대상으로 누군가는 불의한 현실을, 누군가는 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듯, 시인은 나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내 존재이유를 긍정한다고 할 수 있다.
자화상이란 이름으로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신을 시의 대상으로 한번쯤은 삼는다. 그러나 그 때의 나란 오롯한 나가 아니라 세계와 대립항으로서의 나다. 자칫 나는 세계의 희생물로 치환함으로 자기연민과 자기분노의 극단을 노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준규 시인은 오규원의 시처럼 가장 고요한 상태의 ‘나’를 사유하고 경험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계가 최소한으로 개입된 상태의 나, 여기서 문제는 나라는 존재는 세계를 상정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나를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반복’일 수밖에 없다. ‘반복’하는 나만이 나를 해체하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반복’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들뢰즈가 간파한대로 ‘차이’를 발생시키는 ‘반복’이다.
『반복』(2014, 문학동네)이란 주제에 실려 있는 「너무」 역시 ‘반복과 차이’를 통해 세계와 마주서있는 나라는 존재의식의 표명일 것이다.
나를 사유할 수 있는 시간만큼 인간은 살 수 있다, 아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사유한다는 것은 나의 반복 패턴과 그 반복의 차이를 이해하고, 나를 세계 속에 재배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 물질은 정신의 지극히 이완된 과거이거나 꿈이다(질 들뢰즈)
오늘 이 글이 생각해볼 주제는 ‘반복’이다.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는. 흔히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로 변형해서 사용된다. 그런데 이 명제가 차이를 발생하지 않고 동어반복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스스로 종교의 매너리즘을 자처하는 길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준규 시인처럼 솔직하게 ‘나’를 사유하지 않는다면, 즉 자신의 반복패턴에서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종교는 그냥 하나의 습관이거나 직업이 된다.
이를 가장 신랄하게 지적한 이가 비트켄슈타인일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동어 반복은 모든 명제들로부터 따라 나온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동어반복은 서로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는 모든 명제들에 공통적인 것이다. 모순은 말하자면 모든 명제들의 밖에서 사라지고, 동어반복은 앞에서 사라진다. 모순은 명제들의 외적 한계이고, 동어반복은 실체없는 중심점이다”
주어와 서술어를 갖춘 모든 명제는 동어반복의 형식을 내장한다 예컨대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의 명제다. 최초의 발화 이후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발화는 회수될 수 없는 명제에 해당한다. 발화자에 의해 소비되고, 점유되는 동어반복이 된다.
비트켄슈타인은 동어반복의 명제는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주어부와 술부가 같다고 지적한다. ‘나’ ‘너’ ‘신’은 이미 ‘사랑’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 혹은 ‘신은 사랑이다’ 는 문형은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동어 반복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오직 말하는 자신의 신념을 공고히 하는 실체없는 중심점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형이상학)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초기 철학에서 그는 강하게 강조한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을 섬세하게 분류한다.
“물질적 반복은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요소나 순간들의 반복이다. 반면 정신적 반복은 공존하는 상이한 수준들에서 일어나는 전체의 반복이다. 앞의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고 뒤의 반복은 옷입은 반복이다. 전자는 부분들의 반복이고 후자는 전체의 반복이다. 전자는 현행적이고 후자는 잠재적이다.”
들뢰즈는 누구보다 ‘차이와 반복’에 대해 치밀한 연구를 수행한 미학자이자 철학자다. 그는 물질적인 반복은 독립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은 예컨대 ‘자유’ 안에는 이미 사랑도 정의도 기쁨도 모두 있기 때문에 관념자체가 공존하는 반복이라고 보았다. 결국 모든 종교 철학 형이상학은 독립적인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행되는 연구성과가 없었다면 철학이나 미학은 불가능한 반복이라는 점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이란 자신의 사유개념을 확립하는 데 수많은 철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참고 했고, 그가 가장 많이 주의를 기울여 바라본 철학자가 ‘모나드론’을 쓴 라이프니츠였다.
질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만일 우리의 명석한 지각의 차이적 매커니즘이 고장난다면, 미세 자각들은 그 매커니즘의 선별작용을 힘으로 무너뜨리고는 수면이나 마비 상태에서처럼 인식안으로 난입한다. 검은 바닥 위에서 색깔을 가진 무수히 많은 모든 지각은 우리가 그것을 더 유심히 살펴보면 원자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펼침은 접힘의 반대가 아니며 그것은 주름들에 다른 주름들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때로 펼침은 내가 전개하는 것, 내가 무한히 작은 주름들을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은 주름들은 바닥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데 이는 형상이 나타나면 면 위에 커다란 주름을 잡기 위해서이다”
모네는 수련 역작을 그린 화가다. 모네가 그린 수련 연작은 똑 같은 수련은 없다. 들뢰즈가 바라본 라이프니츠의 ‘주름’은 모네 연작과 같은 차이의 ‘반복’이다.
라이프니츠가 바라본 모나드론은 형이상학의 원리다. 형이상학은 불가피하게 형이하학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모나드론은 물질로 바라본 영혼론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간다. 테어남을 모나드가 발현됐다고 한다면 죽음은 모나드의 감춤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생명으로 올 때 모나드가 비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모나드는 존재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모나드를 취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나’라고 할 때, 그 ‘하나’는 무엇인가?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이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라본 ‘영혼’이다.
베드로대성전과 파도를 하나의 ‘주름’이라고 생각해 보면 된다. 전자는 형이상학의 상징성이라면 후자는 이 우주의 물리적 중력의 법칙이 적용된 물질의 반복이다. 베드로 대성전은 고정된 형식안에 반복을 내장하고 있으며, 세속과 천상을 분리하면서 세속과 천상을 연결하는 이중적 목적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엄격히 분리하면서 동시에 형이상학 안에 형이하학을 포섭하려는 이중의 목적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갖고 있던 삼위일체의 권위를 ‘일치’ ‘사랑’ ‘권위’ ‘거룩함’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동원한 것이 건축물이나 교황이나 주교들의 외적 의장들이다. 사랑이라는 관념의 구체화(건축)라 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관념은 형상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복들은 누구에 의해 재현되는가? 그 건축물을 바라보는 이가 누군가에 의해 단순 반복되거나 영속성을 갖고 반복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반복은 비트켄슈타인이 바라본 실체없는 중심이거나, 들뢰즈가 바라본, 차이를 수반한 정신의 연속성이거나 라이프니츠가 바라본 모나드의 물질화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통찰처럼 ‘물질은 정신의 지극히 이완된 과거이거나 꿈’이리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반복은 차이를 발생하고, 어떤 반복은 차이 없는 단순 반복에서 매너리즘으로 귀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Matthew 13:31-32 Mark 4:26-34 Luke 13:18-19)
‘믿음은 어떤 예기치 않은 부름이 타인으로부터 들려오는 걸 허용하는 것,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청취의 상황 속에 스스로가 놓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말한 낭시의 말은 신앙과 믿음이 갈라지는 결절점에 관한 통찰이다.
믿음은 끊임없이 어떤 진리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면 신앙은 일단 들은 말을 고착화시켜 진리의 전체로 고정시킨다. 물론 진리는 고정된 실체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는 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의 과정중에 있는 순례의 여정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믿음과 신앙을 같은 차원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낭시는 엄밀히 신앙은 인과적인 사건, 설명가능한 사건으로 종교행위를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 종교의 전례행위에서 나오는 기도문을 단순 반복하는 행위를 신적인 찬양이나 본인의 믿음의 정도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믿음은 예측하지 못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떤 부름을 받은 사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그 사건은 부름을 받은 당사자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개별적인 은총의 신비가 된다. 믿음과 신앙이 완전히 결별하진 않았지만, 그 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가능하나 겨자씨만한 신앙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맥락이다.
마르코(4,26-34)복음이 전하고 있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는 비유를 통해 신앙과 믿음을 변별한 낭시의 통찰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성서를 묵상하다 어떤 부분에 멈추게 된다. 그 부분에서 그분이 즐겨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무엘아!” 라고 부르시듯, 오늘 그 부분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과의 대화는 무엇인가? 인격과 위격의 교환을 통해 그분의 길을 바라보고 걷게 된다는 것이다. 위격과 인격이 대화이니 그 대화가 당연히 쉬울 리 없다.
Ⓐ, Ⓑ, Ⓒ는 마르코(4,26-34) 복음에서 멈춘 부분이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마르코(4,26-34) 복음의 초점은 하늘나라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너무나 익숙한 이 비유는, 그러나 영적 체험을 할 때는 하늘과 땅이 닿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디어 알게 되는 '영적 회오리 바람'에 해당한다. 하느님 나라의 축복이 어떻게 우리 삶의 여정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버트 H 스타인은 『예수님의 비유,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겨자씨’ 비유의 축복을 이렇게 전한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의 요점은 하느님 나라의 대수롭지 않은 시작과 그 나라의 최종적인 영광 사이의 대조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 있다.Ⓓ비유의 주요 강조점은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인 모습에서 드러날 그 나라의 거대함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드러날 때의 모습 이 거대하리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하느님 나라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나라가 거대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주장은 유대인들에게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세상 끝에 하느님의 나라는 거대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것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 작고 대수롭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예상 밖의 모습으로 임했다. _ <제7장 겨자씨 비유(MARK 4:30-32); 누룩 비유(MATT 13:33)> 중에서
로버트 H 스타인의 통찰을 이해한다면 ‘겨자씨’비유가 지닌 축복은 아주 사소한 것, 보잘 것 없음에서 비롯된다에 방점을 찍는다. 우리가 자주 복음 묵상에서 놓치는 부분이 유대인을 비판하면서 실은 유대인의 틀에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를 스타인은 유대인의 ‘동어반복’이라고 칭한다.
이 세상 끝날에 하느님 나라의 최종 종결지는 물론 거대하고 영광스런 Ⓑ의 상태다. 그런데 그 시작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작고 대수롭지 않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놓치는 것은 거대하고 영광스런 하느님나라의 시작이 바로 작고 대수롭지 않은 나의 사랑, 나의 희망, 나의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놓여있다. 나의 사랑, 믿음, 희망이 너무 작아서 내 자신조차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너무 작아서 당연히 그것이 어떻게 자라고 싹이 나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는지 알지 못한다. 행위자가 행위 자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정도의 작고 보잘 것 없는 그 상태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최소의 우리 안에 담긴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어떤 씨앗보다 작으나’를 충분히, 정말 충분히 묵상하다보면 하늘나라가 ‘최소’의 '나'에 담긴다는 사실을 퉁찰 할 수 있다.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는 그 하느님 나라를 시간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매개체가 그 어느 것보다 작다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결과론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낭시가 통찰한 믿음과 신앙이 같은 것이 아님을 바라보게 된다. 여기서 겨자씨의 비유는 어떤 예기치 않는 부름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에 나를 열어 놓은 상태는 믿음이지만, 이미 유대인처럼 하느님 나라를 줄줄 외우는 그 '거시 상태'로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신앙의 매너리즘으로 본 것이다. 추종, 단순 반복, 습관, 직업으로 본 것이다.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 -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전한다.
“이게 믿음la foi과 신앙la croyance을 화해가 불가능하게끔 갈라놓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신앙은 타인에게서도 신앙이 증명되고 강화될 수 있는(그는 선한 존재이다. 그는 나를 구원한다) 일종의 동일성을 제기 혹은 가정하는 데 비해, Ⓕ믿음은 어떤 예기치 않은 부름이 타인으로부터 들려오는 걸 허용하는 것,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청취의 상황 속에 스스로가 놓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상태는 비유를 ‘은폐’의 기능으로 바라본다는 것이고, 믿음은 ‘계시’의 기능으로 바라본다는 큰 차이가 있다. 마리아막달레나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험한다. 그들의 부활체험은 하느님을 사랑하던 이전의 이스라엘 그 누구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체험이었다. 더우기 그들은 집단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유의 두 가지 성격-‘은폐와 계시’를 순례의 여정안에서 우리 스스로 선택해서 경험한다는 사실을 성찰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유대인이 될 수도 있고, 제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군중들에게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비유의 ‘은폐’적 성격을,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풀어 일일이 알아들게끔 설명해주셨다는 것은 비유의 ‘계시’적 성격을 가리킨다. 그런데, 누가 그 은폐와 계시를 수행하나? 내 신앙인가? 내 믿음인가? 누가 지금 내 완고한 ‘귀’를 열고 지금 나에게 ‘진리’를 말해주는가?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比喩』 (분도출판사, 1974)에서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현대 사회에서 그 실례를 찾아보기 힘든 예수님 자신의 특수한 대화의 형식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래 형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비유에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예레미야스(J. Jermias)가 통찰한 예수님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비유는 ‘은폐’적 성격이 아니라 ‘계시’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 안에서의 하느님나라,그 비유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 있는 사람에게 국한되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이 말이 단지 동어반복이 아니라, 생생한 육성으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음의 ‘귀’를 여는 일이다. 마음의 귀가 무엇인가? 영혼이다.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의 여부가 비유를 은폐로 혹은 계시로 확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보충 부연]Ⓑ'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작은' 상태인가? '죽음의 상태'를 경험할 때까지, 작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씨앗이 발아하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그 발아의 상태는 획일적이지 않다. 성인성녀들이나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는 생물학적인 죽음 이후 그들안에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자랐는지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모든 이들도 살아서 그 '죽음의 상태' 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우리안에 뿌려진 씨앗, 우리가 뿌릴 씨앗이 무엇인가? 그분의 사랑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죽음도 고통도 분명 아니지만 사랑이 가시적인 것이 될 때까지 '죽음의 상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내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 내가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도를 청하거나 한다.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체험하게 해 주십시오! 영혼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끌어 가게 해 주십시오!"
이 세상 순례에 믿음이 왜 필요한가? 모든 '죽음의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모든 죽음의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어제 내가 들은 것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정직하게, 일관성있게 말해주어야 한다. 이준규 시인의 시처럼 나를 철저하게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매일, 매순간 진리 앞에 겸허하게 마음을 열겠다는 자세, 그런 믿음의 상태인 나를 발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육성을 생생하게 듣는다는 것- 모든 위로의 위로가 되는 문장, 모든 희망의 희망이 되는 문장, 모든 사랑의 사랑이 되는 문장, 사랑의 결과를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걸어가게 만드는 토네이도 같은 문장, 돋음새김으로 푸른성채의 파사드에 새겨놓아야 하는 문장, 인류의 도서관에서, 세상에서 가장 알아듣기 어려운 말, 가장 자유로운 말, 평생 독해의 노력을 투자할 한 문장, 마음의 비석에 새겨야할 한 문장을 찾으라 한다면,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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