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J, 그 평온함, 그 태연함, 그 고요함

나뭇잎숨결 2021. 6. 23. 16:01

 

J, 그 평온함, 그 태연함, 그 고요함

- That tranquillity, that nonchalance, that tranquility

 

 

[연 중 제 12 주 일 (나 해) 2021. 6. 20. 마르코 4,35-41]

 

 
 
1.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2.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사마천, 사기(史記))
3.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강해중에서)/(마르코 4,35-41)
 

 

 

 

1.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황인찬 시인의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은 ‘고요한’ 시로도 ‘격렬한’ 시로도 읽을 수 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 그것은 하얗고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고요’는 ‘격렬함’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상태들은 대립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닐 도날드 윌시를 통해 전해 진 ‘나 아닌 것이 없고서는 나인 것도 없다’는 바로 그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립쌍을 갖지 않은 유일한 상태는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대립쌍은 그 아우라가 대칭적으로 크기와 범위가 같아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크기와 무게와 같은 상태는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신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져도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그런 맥락에서, 고요하게 시를 읽는다는 것은 화자와 대상의 관계를 정서가 아닌 인격의 차원, 대칭상태로 바라본 것으로 ‘필리아’적인 읽기라 부를 수 있다. 반면 격렬하게 시를 읽는다는 것은 화자와 대상의 관계를 화자의 입장에서 감각의 전이로 바라본 것으로 관능적 혹은 에로스적인 읽기라 할 수 있다.(피터부룩스, 『육체와 예술』)

 

먼저,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을 ‘고요한’ 시로 읽어 보자.

 

화자는 조명도 울림도 없는 방에 있다. 화자는 자신이 있는 곳을 조명도 울림도 없는 ‘방’이라고 인식한다. 그것은 그 공간을 바라보는 화자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때 그 방은 존재론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한참 후에 그는 그 방안에 화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자’가 있음을 보게 된다. 백자는 ‘하얗고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이라고, 화자의 시선은 방에서 백자로 이동한다. 백자는 그 빛으로 인해 ‘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이제 화자에게 방은 중요하지 않다. 화자는 ‘단하나의’ 질문을 백자에게 던진다. 수천의 질문이 하나의 질문으로 응축될 때, 그 질문은 무엇일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했을 것이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가고 화자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끝내 얻지 못한다. 백자에게 답을 강요하거나 답을 추론하지도 않는다. 그냥 백자를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애초에 답을 기대하고 질문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화자는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수많은 여름도 가고, 화자도 사라지면서, 자기 앞에 있는 백자는 여전히 백자라는 사실을 보게된다. 

 

백자는 백자의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언제나 백자로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백자를 알게 되는 순간 화자는 자신도 알게 된다. 언제나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은 화자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냥 백자를 바라보았을 뿐인데,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된 나를 보게 된다. 단 하나의 질문에 어떤 답도 얻지 못했음에도 그 방은 여전히 조명도 올림도 없는 방이었음에도, 결국 백자와 방과 나는 같은 상태,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은 내가 백자에게 부여했던 감각인상이었는데, 어느새 내가 나를 바라보게된 어떤 이미지가 된 것이다. 이것은 나라는 화자가 백자라는 대상을 하나의 인격, ‘필리아적’인 관계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황인찬 시인의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은 ‘격렬한’ 시로 읽어 보기로 한다. 고요하게 시를 읽는다는 것은 화자와 대상을 동일선상에서 하나의 인격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면, 격렬하게 시를 읽는다는 것은 화자 중심으로 시를 읽어본다는 것이다.

 

①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②(……)

 

③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④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⑤(……)

 

⑥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⑦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서

 

 

①화자는 조명도 울림도 없는 그런 방에 혼자 있다, 사실 그런 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화자가 처한 실존 상황에서 바라본 공간의 질이다. 자기 상황에 몰입해 있던 화자가 비로소 ‘백자’라는 사물(세계)을 보게 된다. 백자는 단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조 백자가 아니라 대상(사물) 일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실존에 몰입해 있던 화자가 백자라는 세계를 드디어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기 상황의 바닥, 심연까지 간 후에 솟구친 그 빈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 건드리지 마, 나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 말 붙이지 말고 그냥 지나가, 그런 시간의 터널을 지나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빛도 진동도 없는 터널을 지나면서, 과연 이런 상태가 끝나기는 끝날 것인가? 하는 시간의 죽음 너머에서 돌연 빛을 발사하는 어떤 ‘백자’라는 세계를 본 것이다.

 

③화자는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세상은 항상 이런가? 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 보시기에 이 세계가 마땅합니까? 혹은 왜 살아야 합니까? 혹은 이것이 시입니까? 단 하나의 질문은 사실 수천 수만의 질문이 응축된 그 단 하나의 핵폭탄이나 다름없다.

 

④답이 없는 수많은 여름을 보내면서,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화자는 백자에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답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된 세상은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질문은 어떤 대상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문하는 자가 스스로 그 답을 찾게 될 뿐이다. 돌연 질문하는 자가 질문을 잊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기서 대상인 백자를 보게 된다. 백자는 처음 그대로의 백자였다는 것을. 세계가 어떻튼 백자는 백자라는 것을.

 

⑥에서 화자와 대상의 간격이 사라진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을 보게된다. 점층이 무엇인가? 점층은 점점 커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라지면서 커진다니?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사라지는 것들은 대부분 희미해지고 작아진다. 그런데 점점 커지면서 백자에게 하나의 ‘마음’,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음을 읽게 된다. 김경욱 소설의 제목처럼 ‘위험한 독서’가 시작된 것이다. 내 상황, 내 마음, 내 분노, 내 좌절, 내 중심에 몰입되었던 화자가 ‘세계라는 텍스트’를 드디어 읽게 되는 순간이다.

 

⑦그래서 수많은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백자와 감각의 전이가 일어난다. 예전의 내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내가 백자인가? 백자가 나인가? 호접지몽의 상태에 이르게되고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런 시간 속에 드디어 ‘나’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나를 상대로 ‘나는 지난 여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라는 공포영화의 제목이 떠오른다. 나를 두렵게 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써, 고요하게 시를 읽든, 결렬하게 시를 읽든, 황인찬 시의 화자는 황인찬과 도플갱어가 된다.

 

황인찬 시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바로 성스러움신비감고요함이다. 황인찬의 시는 무엇보다 고요하다. 애초에 어떤 감정의 변화도 경험해 본 적 없다는 듯 황인찬의 시적 주체들은 격앙되는 법이 없고 크게 절망하거나 한탄하는 일도 없다. 그저 지켜보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담담하게 대상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다. 이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거리 두기’이자, 인간 중심적인 관점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감정으로 대상을 드러내는 대신 사물의 사물성과 순수성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보존하려는 배려다. 이러한 고요함에서 발생하는 ‘공백’ ‘여백’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소음’을 지우며 사방으로 번져 나가고, 그와 대상이 만나는 곳은 정적에 둘러싸여 이상하고 신비로운 세계로 변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백 속에는 대상을 쉽게 규정하거나 침범하지 않으려는 품격과 배려, 예의가 있다. 황인찬 시인의 등단작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은 지긋한 바라봄 끝에 ‘백자’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순결한 이미지’로 깊은 울림을 남기며 은은하게 빛나게 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무조건 성스러운 대상을 발견하여 지켜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기에 그의 시가 더욱 특별하다. 오히려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그러나 너무나도 온화하면서도 관능적으로 그는 성스러움이라는 관념의 형상을 이 땅에 구현해 낸다. 말하자면 황인찬의 시는 표면은 고요하나 심층은 역동적인 시다. 실체를 만질 수는 없지만 실체를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는 이미 실체를 감각한 것처럼 대상과 연결된다. 그의 시가 의외로 촉촉하고 감각적인 이유다. 실체보다는 실체를 가리키는 언어에서 더욱 예민하게 에로스를 탐지하는 화자, 백자의 내부는 텅 비어 있지만 그는 이미 ‘백자’라는 말을 통해 백자를 감각하고 있으며 여름의 내부가 텅 비어 있지만 이미 그는 여름을 자신의 육체 속에서 눈부시게 살고 있다. 그는 멀리 있는 신성이라는 관념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게다가 관능적으로 감각하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그 신성을 자신의 육체를 통과시켜 적극적으로 구현해 내는 ‘감각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읽기를 종합한다면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은 사물과 벗이되는 비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되는 과정', '사물과 타자와의 평등성'에서 도출된 ‘지음(知音)’을 말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2.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사마천, 『사기(史記)』)

 

 

 

‘지음(知音)’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지음(知音)은 음악의 곡조를 잘 알거나, 새·짐승의 소리를 구별해 알아듣거나,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일컬을 때를 가리킨다. 그 벗, 친구는 무엇인가? 흔히 벗하면 관중과 포숙의 사귐을 떠올린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 해당되는 관포지교管鮑之交는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귐. 친구 사이의 두터운 우정을 비유하는 말로 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벗, 친구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되었을까? 관중과 포숙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제(齊)나라는 BC685년 권력의 공백 상태에 있었고, 이때 관중과 포숙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제나라 주인의 자리를 놓고 규와 소백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이 시작되었다. 노나라에 있던 규는 관중을 군사(軍師)로 삼아 귀국을 서둘렀고, 거나라에 있던 소백은 포숙을 군사로 삼아 귀국을 서둘렀다. 관중과 포숙은 적과 적의 사이였다.

 

소백이 망명해 있던 거나라는 제나라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규보다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당도하리라는 것을 계산에 넣고 있었던 ‘관중’은 별동대를 이끌고 소백이 귀국하는 길목에 미리 가 매복을 했다. 소백이 눈에 들어오자 관중은 활시위를 당겼고, 시위를 떠난 화살은 소백의 배에 명중했다. 소백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관중은 이 사실을 노나라에 있는 규에게 보고했고, 규는 제나라의 주인이 다 된 기분으로 느긋하게 귀국했다.

 

그런데 관중의 활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백은 다행히도 화살이 허리띠의 쇠고리에 맞는 바람에 죽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말에서 떨어져 죽은 척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제나라에 귀국하여 권좌를 차지하고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

 

환공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사를 풀어 규와 관중 일당을 소탕하고, 규와 관중을 수배했다. 그러자 규가 망명해 있던 노나라도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했지만 전쟁의 결과는 노나라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노나라가 제나라에 화의를 청하자 제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화의의 조건으로 규를 잡아 죽이도록 요청했다. 노나라는 할 수 없이 규를 죽이고, 관중까지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제나라 사신이 관중은 자기 나라 임금을 사살하려고 한 사람이므로 자기 임금께서 직접 처단할 것이라고 하면서 관중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관중은 죄수를 압송하는 함거에 실려 제나라로 압송되었는데, 관중은 이것이 자기를 살려 주기 위한 포숙의 계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중이 제나라에 도착하자 포숙이 직접 나와서 맞이하는 것이 과연 관중이 예상했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숙은 환공에게 정권을 잡은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면 자기로 족하지만, 중원의 패자가 될 생각이 있다면 자기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관중을 강력 추천했다. 환공은 포숙의 추천을 받아들여 자신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포숙은 기꺼이 관중의 아랫자리로 들어갔다. 환공은 관중을 임용한 이후 패자의 지위를 확보하였고, 제후들과 9회에 걸쳐 회맹함으로서 천하를 바꿀 수 있었다.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국정을 맡자 변변치 못했던 제나라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중은 바다를 낀 지리적 이로움을 살려 해산물을 팔아서 나라를 부하게 하여 군비를 튼튼히 하였음은 물론, 항상 민중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그리하여 영을 내리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민심이 잘 순응했다. 나라에서 의논한 정책은 백성들이 쉽게 행할 수 있었고, 백성이 바라는 것을 나라에서 잘 들어주었으며, 싫어하는 것은 제거하여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 주었다.

 

후에 관중은 포숙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지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포숙을 위해 일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더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포숙은 나를 우매하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에 따라 이롭고 이롭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갔다가 매번 임금에게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시운을 만나지 못한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싸웠다가 모두 패해서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였을 때 동료이던 소홀은 죽고 나는 잡히어 욕된 몸이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천거한 후 자신은 늘 관중의 아랫자리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제나라의 녹을 받고 봉읍을 가지기를 십여 대나 하였는데, 항상 이름 있는 대부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포숙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더 칭찬하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세상이 누가 누구를 더 칭찬한다 한들, 관중이 없으면 포숙도 없고 포숙이 없으면 관중도 없다는 사실이 더 중심일 것이다. 이 세상에 소리가 없는 사물은 없다. 이 세상에 누군가 한 생명, 한 존재로 왔다는 것은 한 음악이 이 세상에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벗을 안다는 것은 그의 음악을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지음’이라 부른다. 관중과 포숙의 우정이 지음이라 불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상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고요해졌을 때 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자신으로 꽉 차 있을때, 그 아우성 속에서는 우리는 벗은 커녕 자신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아름다운 벗, 그런 상태에 이르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자신의 품위인 ‘그대 지금 자유로운가’에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3.“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강해」중에서)/(마르코 4,35-41)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코4,35-41) 이분이 누구시기에? 그 답은 "이제 나는 너희를 (……)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2-17)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벗이라 부른 분이다. 그렇다면, 벗을 벗이게 하는 그 요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향주삼덕'이라 부르는 ‘신망애’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씨앗이다. 그런데 이 '향주삼덕'의 세 덕은 비례해서 동행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벗이라 한다면 그 1차적인 조건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은 따른 제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그분에 대한 '믿음'이었다. 제자들에게 '애덕'과 '망덕'은 문제가 없고 오직 '믿음'만 문제였었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신망애'의 현주소를 통해 우리는 과연 그분의 벗인가?를 물어야 하기에, 선행 되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처음에는 사랑만 있는 거 같다. 거기에는 희망이나 믿음은 부재하는 듯이 보인다. 사랑이 깊어지면서 희망과 믿음이 동시에 커진다. 그러다 어떤 희망도 믿음도 안 보이는 상황이 도래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차원의 희망과 믿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와 개별적으로 구체적 삶을 나누는 그런 맥락으로써가 아니라, 순례의 여정에서 내가 삶으로 누군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또 누군가 삶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점점 더 그분 안에서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태를 믿음이라고 말할까? 희망이라고 말할까? 사랑이라고 말할까? 그 상태를 성찰해 보면 다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이 처음 가졌던 그런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실존의 상황이 우리의 바람을 배신할지라도, 생명의 선물로 받은 ‘신망애’를 배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벗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은 선물로 받은 '신망애'를 어떤 상황에서도 버릴 수 없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자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제자들의 믿음을 문제 삼는 이유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너희는 왜 나의 벗임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자유롭지 못하느냐?로 바라보아도 무방하다.

 

믿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이바지하게 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믿는 자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목숨을 바치는 순교라 할지라도 그것은 강요된 희생이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가 「요한 서간 강해」에서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라고 말한다.

 

복음(마르코4,35-41)을 읽어본다.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코(4,35-41)복음을 읽고 든 생각은‘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였다. 이런 감탄은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이렇게 주신다는 게 놀랍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눈으로 확인한 것도 믿지 못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아니 인간이 스스로의 품격을 낮추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이 자유를 원하면서 자유를 반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멈춘 부분은 Ⓐ,Ⓑ,Ⓒ,Ⓓ,Ⓔ 다섯 부분이었다. Ⓒ는, 그동안 묵상에서 해결하지 못한 숙제였다. 바람을 꾸짖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저 말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은 우리와 다를 터이니 우리는 그냥 “우와 예수님 최고!”라고 박수만 치면 되는 것일까? 아님, 예수님이 행한 수많은 기적 중 우리가 해야 할 상한선은 이미 정해진 것인가? 왜 우리는 바람을 꾸짖지 못하고 호수에게 잠잠해 지라고 명령하지 못하는가?

 

Ⓒ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양식과 그분의 존재양식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존재양식(신성과 인성)을 이해하는 것은 나의 존재양식인 ‘몸과 마음과 영혼’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단적으로, 몸과 마음은 우리에게 인성과 같은 것이라면, 영혼은 신성과 같은 것이다. 

 

지난주 복음을 묵상하면서 기도를 부탁하는 분들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이 순례의 여정 중에 영혼을 체험하게 해 주십시오! 내 영혼이 몸과 마음을 이끌어가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주제를 말했다.

 

복음 안에서 ‘마음’과 ‘영혼’은 엄격히 분리되어 나타나거나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수태고지 응답인 마니피캇에서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라고, 십자가상에서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처럼 영혼은 분명 마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언급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언급되는 진복팔단에서 “내 마음이 죽을 거 같다” 는 게쎄마니아 기도 등에서 우리는 마음은 그 어떤 수위, 혹은 트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은 자주 출렁거리고 가변적이다. 아주 깨끗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죽을 거 같은 상태를 체험하거나 목마른 상태를 체험하는 바로 그 부분이 마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를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가?

 

우리의 몸은 우리 눈으로 보이니까 이것이 ‘몸’이다, 라고 할 수 있지만 영혼과 마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어느정도 깨끗한 상태를 영혼이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를 자유롭게도 자유롭지 못하게도 하는 그 마음은 어디 있는가? 또 영혼은 어디 있는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러나 그 반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과 영혼에 대해 어렴프시 그 존재양식이 다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바람과 호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기서, 바람과 호수와 제자들의 마음, 그 존재양식은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눈에 보이는 에너지의 흐름이 있고 눈에 감지되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이 있다. 마음은 생각을 일으키는 에너지다. 마음은 뇌가 아니다. 전신마취를 했을 때, 마음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마음은 육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마음은 우리의 세포 속에 내재한 에너지라고 보고 있다. 챠크라, 요가, 에고 같이 몸을 통해 마음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은 우리 몸은 7개의 챠크라로 구성되어 있고 그 특정 부위에 생각을 낳는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다고 바라본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디 있는가? 영혼은 우리 몸과 밖 어디에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혼은 우리 몸과 마음을 포괄하는 존재다. 우리가 성모님의 수태고지처럼 초월적인 사건에 네! 라고 응답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마음이 아니다. 영혼이다. 그래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영혼이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존재양식으로만 존재한다면 ‘하나’라는 말이 가능할까? 영혼은 나라는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우리는 ‘하나’라는 보편자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보편논쟁은 생략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같은 상황에 있는데 전혀 다른 차원의 반응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부의 존재양식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추정이 그래서 가능하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세상의 에너지 흐름을 바라보고 그것은 제자리에 복귀시킨 사랑,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한 사랑, 즉 에너지의 흐름을 조절한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마음으로 이 세상의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를 끌어당기는 중이다. 혼돈과 무질서도 에너지다.  이는 에너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마음은 생물학적인 생존본능에 민감하고 영혼은 초시간적 영원에 관심이 있는 생명에너지다. 같은 생명에너지지만 그것은 유한과 무한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에서 어떤 상황에서 두려움, ‘겁’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신망애’ 삼덕이 거처하는 곳은 영 혼이다. 영혼은 두려움을 모른다.

 

여기서 복음(마르코4,35-41)은 1차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 어떤 생의 불안과 시련에도 두려워하지 말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그분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그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이다.

 

달리 말해, 아직도 너희들은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왜 너 자신을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느 부분을 믿어주어야 하는가? 변화무쌍한 마음인가? 출렁이는 죽끓듯 한다는 그 마음인가?  아니다. 영혼이다. 아직도 너희들은 나의 벗이면서 왜 너희 자신의 ‘영혼’을 믿지 못하느냐? 아직도 너는 왜 네 영혼을 체험하지 못하느냐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영혼이 느끼는 것이지, 육체의 눈이나 마음이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왜 행복하다고 하셨을까?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제자들은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들의 두려움의 정체는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는 그분의 권능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인 두려움은 바람과 호수이기도 하다. 그들은 바람과 호수라는 외적세계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바람과 호수도 그들 마음과 같은 성분의 에너지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을 감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영혼으로 물질적인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는 훈련이 아직은 덜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영혼이 그렇게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마음이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이 세상에 개별자로 왔다. 개별자의 생물학적인 생존원리는 몸과 마음이라는 외적 표현형을 필요로 한다. 몸과 마음이 없다면 이 세계는 존재할지라도 그 형태를 가질 수 없다. 몸과 마음은 영혼의 현실태라고 할 수 있다. 순례의 여정이란, 예수님에게 벗인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체험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영혼만이 아니고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어떤 것임이 명백하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 이하 STh I,75,4).http://blog.daum.net/m-deresa/12389670

 

글을 정리해 본다.

 

앞에서 언급하였듯,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코4,35-41) 이분이 누구시기에? 그 답은 이제 나는 너희를 (……)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2-17)일 것이다. 이때 벗이라 부른다는 것은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양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 거듭 믿음의 상태를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제자들 자신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존재양식을 바라보고 그것이 제자들 자신의 존재양식임을 알고 살라는 것이다. 그때, 제자들 역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혼돈과 질서의 에너지의 흐름에 휩쓸려다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에너지의 흐름을 만인의 '선'을 위하여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그런 삶을 드디어 살게 되었다.

 

하여, 지금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두려움이나 갈등, 혼란을 느낀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 제자들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그분이 우리를 벗으로 불러주셨지만 우리는 아직 그분의 벗이 아닌 상태의 삶을 고집한다고 할 수 있다.

 

‘J, 그 평온함, 그 태연함, 그 고요함은 단적으로 예수님의 존재양식과 ‘자유’를 표상한다. 그분이 우리를 벗이라 부른 것은 그분의  존재양식도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함께 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보호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이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이 세계를 지키고 계시다면, 우리도 우리 각자의 사랑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마땅이 그래야 할 것이다.  (물론 사랑을 지킨다는 것은 확일적이지 않다. 어떤 사랑은 한없이 멀어지면서 지키고, 어떤 사랑은 한없이 가까워 지면서 지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망각도 사랑이다.)

 

그렇기에,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신 예수님의 전능은 예수님만의 독점이 아니라, 벗이라 부른 인류와의 나눔이다. 그것이 기적이다.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셨지, 내가 하는 일 가운데 어떤 일은 신적 영역이기 때문에 너희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모든 것을 나누어 갖는 것이 벗이다. 그래서 그분은 생명도 우리와 나눈 것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처럼 그 평온함, 그 태연함, 그 고요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지켜야 하는 품위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를 벗이라 불러주신 그분의 벗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사는 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