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내가 너희와 함께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로
-Love, I'm gonna be with you and you're gonna be with me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나해)2021. 5. 30. Matthieu. 28,16-20]
1.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프란츠 카프카) 2. 너희 아닌 것이 없고서는 너희인 것도 없다(닐 도날드 윌시) 3.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가 나와 함께(마태오 28,16-20) |
1.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의 「6월의 나무에게」를 읽어본다.
①나무여, 나는 안다/그대가 묵묵히 한곳에 머물러 있어도/쉬지 않고 먼 길을 걸어왔음을//고단한 계절을 건너 와서/산들거리는 바람에 이마의 땀을 씻고/이제 발등 아래서 쉴 수 있는/그대도 어엿한 그늘을 갖게 되었다//산도 제 모습을 갖추고/둥지 틀고 나뭇가지를 나는 새들이며/습윤한 골짜기에서 들려오는/맑고 깨끗한 물소리는/종일토록 등줄기를 타고 오르며//저녁이 와도 별빛 머물다가/이파리마다 이슬을 내려놓으니 한창으로 푸름을 지켜 낸 청명은/아침이 오면 햇살 기다려/깃을 펴고 마중 길에 든다//나무여,/푸른 6월의 나무여
「6월의 나무에게」는 프란츠 카프카에게 이런 서정의 세계가 있었다니!하고 놀랄만한 맑고 투명한 서정시다. 나무를 나무이게 하는 것들- 사계절, 숲, 바람, 새, 물소리, 별빛, 이슬, 햇살, 하늘과 땅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이 나무다. 유월의 숲, 그 숨결을 모른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시다.
이런 서정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카프카의 서사의 세계, 카프카는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②“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어야하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③“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④“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게 문학은 취미나 직업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문학이 전부인 카프카가 서정이 아닌 서사로 그의 문학의 방향을 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프란츠 카프카 하면 떠오르는 『변신』, 『심판』, 『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⑤어느 날 아침, 잠을 자고 있던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
⑥누군가가 요제프 K를 모함했음이 분명했다. 그는 나쁜 일을 저지른 적도 없는데 어느 날 붙잡혔기 때문이다. -『심판』
⑦K가 도착한 것은 밤이 이슥한 뒤였다. 마을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은 하이데거식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상황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은 낯설고 기묘하며 적대적인 환경에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카프카의 인생과 같다. 그런데 그 주인공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그 상황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모색한다. 승부가 이미 정해진 불가능한 저항, 결국 『변신』의 그레고르도 『심판』의 요제프 K도 『성』의 K도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죽음만이 그들의 이야기를 종결짓는다. 이렇게 보면 소설의 주인공들은 카프카처럼 모두 인생에서 대패한 셈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개미 한 마리가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그 자체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일자라도, 그것이 실존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카프카 역시 그가 만난 세계가 서정시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시대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살아보기도 전에 '그래 내가 졌다'라고 인생의 백기를 던질 수는 없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서사를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프카는 『아포리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⑧천국은 하나의 목표일 뿐 그곳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지 않다. 목표만이 있을 뿐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하는 것은 머뭇거림이다. 이 막막함 한가운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희망으로 다가가려는 시도는 더욱 멀어지는 우회이며 모든 방향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제자리에서의 끝없는 유랑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의 카프카를 만나게 된다. “나무여, 푸른 6월의 나무여” 라고 노래하는 순수서정의 세계를 바라보는 카프카와, “죽음의 도제 수업, 그것이 삶이다.” 라고 말하는 카프카. 카프카 안의 이 두 사람이 카프카 문학의 실체다.
그의 자전적 경험을 참고한다면 그는 서정을 통해 서사로 반등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학에서 표출된 것은 서사지만 그의 서정이 서사를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는 천국이라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카프카의 소설은 카프카 사후에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는 카프카를 실존주의 최고의 작가로 극찬했으며,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카프카의 인생과 문학관에서 소재를 따온 『해변의 카프카』를 썼으며, 밀란 쿤데라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느림』에서 카프카의 모티브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프카에 대한 모든 찬사는 그가 생전에 받은 찬사가 아니라, 저 세상으로 떠난 이후에 받은 사후 예찬이었다.(카프카는 40세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만약 시간의 범주가 이 세상 삶으로 국한된다면, 카프카는 분명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익명의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시간과 공간은 이 세상의 범주를 벗어난다.
예컨대 한국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받은 사람들은 한번쯤 카프카의 『변신』을 만나게 된다. 그는 자기 예언처럼 ④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를 사후에 실현한 것이다.
카프카의 아버지로 대변되는 그의 가족이 그를 서사로 몰아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에게 서정이 없었다면 서사를 낳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너희 아닌 것이 없고서는 너희인 것도 없다’(닐 도날드 윌시)는 것은 카프카에게도 삶을 풀어가는 당위명제인 것이다. 카프카의 문학과 삶에서 서정이 없고서는 서사도 없다는 것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2. 너희 아닌 것이 없고서는 너희인 것도 없다(닐 도날드 윌시)
‘너희 아닌 것이 없고서는 너희인 것도 없다’(닐 도날드 윌시)가 모든 인류의 삶을 떠받치는 삶의 명제인 것을 철학사에도 확인 할 수 있다.
철학사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없었다면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는데 하이데거와 대결이 갖는 의미는 결정적이다.
흔히 하이데거의 철학을 존재론이라고 부르고 레비나스의 철학을 윤리학이라 부른다. 그렇게 본다면 이 대결은 학문분과의 대결이기에(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니므로) 애초에 레비나스가 그 대결의 방향을 잘 못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논자들은 레비나스의 하이데거의 비판은 역사적 피해의식의 발로로 바라보기도 한다. 히틀러치하의 대학자였던 하이데거와 히틀러치하에서 포로생활을 했던 레비나스의 입장에서 이 논란의 발단을 추적하기도 한다.
또는 자연종교와 계시종교 사이의 종교체험의 다름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레비나스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대립시키는 이유는 철학과 종교의 충돌이 아니라 자연종교는 익명적 존재를 절대화시키고 그것의 향유를 위해 개별자를 총동원하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고 있었기에 철학적 대결을 낳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레비나스가 하이데거에서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시간’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인간성이 무엇인가-죽음에 대한 이해>에서 레비나스가 자의적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을 해석한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런 여러 논의들로 인해 오늘날 하이데거 연구자와 레비나스 연구자 사이까지 갈라놓은 이 ‘레비나스 효과’는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에서 두 사람은 ‘시간’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차이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가능에서 스스로를 양해하며, 실존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존재자를 존재론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미래이다. 현존재는 그가 미래적인 한에서만 본래적으로 있어 왔을 수 있다. 따라서 이미 존재하는 것은 미래로부터 발현된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의 미래의 현존은 타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다. 미래를 향한 현재의 침식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 주관적인 관계이다. 시간의 조건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있다(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하이데거의 시간은 선험적시간이라 한다면 레비나스의 시간은 경험적인 시간이다. 하이데거가 바라본 시간은 사물의 진행과정이나 역사적으로 경험되고 설명되는 시간이 아니라 선험적인 ‘자기시간화’라 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이미 인간 속에 시간이 본질적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데서 시간과 시간성을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은 이 세상 종말에서 태초까지 바라본 시간이다. 시간의 스펙트럼이 레비나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두 철학이 바라보는 그 ‘미래’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이다.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은 결국 미래(죽음론)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연구자들은 대략 세 가지로 그 비판의 양상을 요약하고 있다.
첫째, 레비나스가 하이데거가 설정한 ‘미래에서 현재와 과거’를 소급하는 것에서 ‘미래에 닥칠 죽음’이라는 불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만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불안을 통해 진정으로 죽음을 마주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이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 연구자들은 레비나스가 설정한 ‘불안의 개념’에서 ‘미래라는 죽음’을 레비나스가 자의적으로 해석했다고 본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미래’는 광의의 의미에 해당한다.(과거-현재-미래가 아니다)
하이데거의 '미래'는 신앞에 서 있는 단독자의 시간이다. 죽음 앞에서 타자는 단지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죽음 앞에 직면한 이가 죽음 이후에도 마주할 모든 것, 내 경험 이전의 태초의 그 시간이라는, ‘무의 심연’을 의미한다. 모든 시간의 기점을 미래에 놓은 것은 미래만이 미래 이전과 미래 이후를 열어 놓는다고 본 것이다.
둘째,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주체가 전적으로 다른 타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고지하는 사건으로 보았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견고한 내면성이 깨지면서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보았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의 죽음에 매몰되어 타자의 죽음과 변별하여 죽음마저도 타자의 우위에 두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 철학에게 ‘타자’는 끝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미래라는(죽음이라는) ‘무의 심연’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어떤 고유한 존재성을 갖고 있는 존재인가를 바라보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됨으로써 근원적인 ‘타자’를 만나게 된다고 보았다. 근원적인 타자를 만나야지만 역사적인 타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바라보지 못한 상태에서 타자의 고유성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기만’ ‘자기체면’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성을 의심받는데, 이 근원적인 ‘나’ 인식에서 타자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그 ‘너’뿐 아니라 근원적으로 ‘있음- 타자’의 실체까지 만나게 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타자’를 무엇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가 노정된다. 하이데거의 타자는 대타자라 할 수 있다.
셋째, 레비나스는 현존재는 결국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체험하는데, 그 극단적인 수동의 상태에서 인간에게 무력감을 조장하는 사건 안에서, 자신의 존재보존성을 내어던질 때만이 인간이 윤리적 주체라는 미래가 담보된다고 보고 있다.
하이데거에 있어 미래라는 시간,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은 비극에 갇힌 인간의 현존을 확인하는 기재뿐 아니라 그 유한성을 수납함으로써 죽음이라는 미래에 자신을 자유롭게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그 유한성이 아니라 죽음에 나를 던질 수 있다는 필멸성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충일하게 살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레비나스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문제 삼았던 ‘미래(죽음)-타자-유한성’에 대한 해석은 그 개념의 크기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달라짐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 땅의 시간개념을 벗어나 존재자와 존재를 규명하려는 선회를 하고 있었다면,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은 이 땅의 타자를 통해 존재의 이유에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시간의 스펙트럼에 따라 세계와 타자, 유한성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평생 만나지 못하는 별처럼 두 철학의 선회궤도 자체가 사뭇 다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자신의 타자윤리학을 통해 자기 철학 혹은 윤리학을 정립하면 되는데(철학사적으로 타자의 의미를 이렇게 정확하게 규명하기도 힘든데) 왜 하이데거의 ‘시간’의 스펙트럼을 극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 철학을 극복하려고 했을까? 그렇다면 우리도 알고 있는 것을 레비나스는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너희 아닌 것이 없고서는 너희인 것도 없다’(닐 도날드 윌시)처럼,
레비나스는 이 우주체계의 운영원리-신성한 이분법이라 일컬어지는 대립원리를 통해 ‘타자윤리학’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윤리학의 출발점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분명 있었겠지만, 하이데거 철학과 지신의 윤리학에서 ‘시간’ 개념이 확연히 다른 차원임을 바라보았을 것이며, 레비나스만의 타자윤리학이 확립되는 지점에서는 그 역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극복의 문제는 누구의 시간개념이 옳으냐 그르냐하는,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하는 시간의 방향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두 철학이 바라보는 경험적 시간과 선험적 시간은 우리 모두가 살아내는 시간의 총체라는 사실일 것이다. 혹자는 역사적이고 경험적 시간(레비나스의 시간)은 당연히 우리가 살아내겠지만, 추상적이고 선험적 시간(하이데거의 시간)을 살아낸다는 것에 레비나스처럼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각성되고 인식하면서 모든 것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각성이나 통찰조차도 우리보다 앞서 있다. 경험적 시간과 선험적 시간을 알지 못했으면서, 알고 있는 듯이 살아내는 것이자 인식하지 못하면서 우리는 두 시간을 동시에 살아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시간의 문제는 특정 학문에서 파생한 학문분과의 논쟁으로 국한할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그들이 문제 삼았던 어떤 시간, 그 어떤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가에 의해, 우리 삶의 경험, 즉 ‘사랑의 능력’, 그 크기를 확장하거나 혹은 제한한다는 점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 한혜연(서울대),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죽음론 비판에 관한 연구」 & 이영호(한양대), 「시간의 방향에 관한 소고」, & 김성호(한신대),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에 대한 제 고찰」, & 이기상(외대철학과교수),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강영안(서강대철학과교수),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 박찬국(서울대철학과교수),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 강독』)
3.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가 나와 함께(마태오28,16-20)
하느님의 삼위일체 사랑은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그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복음(마태오28,16-20)을 읽어본다.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놀라운 제안을 하신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나라’라고 생각했던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나라, 꿈꿔볼 수 있는 나라’로 받아들일 수 있게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주신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이 말씀은 ‘세상 끝 날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
강론에서 제언하는 바, ‘세상 끝 날까지’ 와 ‘세상이 끝난 후에’를 어떻게 바라보고 체험할 수 있는지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그 크기와 깊이가 어떻게 내 사랑의 능력이 되는가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내가 너희와 함께’ 와 ‘너희가 나와 함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종말론적인 표현인데 그 종말론적 표현은 오늘 다만 우리가 경험하는 차원에서 바라보는 그런 시간의 선후맥락은 아닐 것이다. 성서의 시간은 지금, 바로, 여기서 이루어지는 시간 안에서의 영원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의 메시지로 바라보아야 할 초점이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이 끝난 사후적 천국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함므라비 법전의 동태복수법을 정의라고 인식했던 제자들의 시대보다,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를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를 우리가 이미 살고있다면 그것이 삼위일체하느님이 말하는 그 사랑일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는 예수님 시대부터 줄 곳 제창되었던 복음의 명제였다.
Ⓑ는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는 것은 인류의 가슴을 건드린 새로운 사랑의 명제에 해당한다.
여기서 ‘세상 끝난 후’를 시간 밖에서의 영원으로 바라볼 것인지, 시간 안에서의 영원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의해 다시 Ⓐ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의 상태를 통해 ‘부재의 현존’ 그 사랑을 사는 것도 대단한 영적 축복임을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바라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복음에서 전하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는 것은 후자의 삶까지 포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미 이 세상이 끝난 후의 그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의 사랑은 단지 이 세상의 순례에 국한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의 순례가 끝나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이 모두 하느님 나라가 된 그 이후에, 그 사랑을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참된 존재를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 아닌 것을 창조하지 않고도 우리 자신의 사랑의 능력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은 이 세상이 완벽하다고 말한다. 전자는 불완전을 통해서 완전함으로 간다면, 후자는 완벽함에서 이미 완벽함을 체험하는 것이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이 표현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를 이해하게 된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에서 Ⓐ’‘너희 아닌 것이 없고서는 너희인 것도 없다-시간과 공간을 분리된 것이다’를 체험할 수 있다. 이는 대립적인 세계를 통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늘 변증법을 시도해야 한다.
이 세계는 빛과 어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명히 나눠진 세계이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 세계를 통과하기가 어렵다. 여기는 시간과 공간이 분절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참된 자신을 체험하기 위해서 대립적이고 부정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제거해야 한다.(이 시간은 레비나스의 시간이다) 이것은 우주를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연장선에서 대립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생존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반면, Ⓑ에서 Ⓑ’‘시간과 공간은 같은 것이다-바로 지금 여기서’ 신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 있다(이것은 하이데거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별의 일생처럼 자신의 과거를 지금 관찰하고 있다. 이때 여기의 세상은 완벽하다. 많은 영성가들이 전쟁과 가난과 질병의 시대를 완벽하다고 바라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죄가 초점이 아니라 사랑이 초점인 이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대립적 세계를 체험하지 않으려면 체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개체성을 철저히 체험할 수도 있지만, 개체성을 넘어 보편성을 ‘지금, 이미, 여기서’ 체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체험의 유무는 세상의 존재이유, 운영원리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있음’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여부에 의해 우리가 경험하는 오늘, 지금, 여기의 ‘시간’이 선택된다는 점이다.
전쟁과 기근과 빈부격차와 질병을 이 세상의 ‘있음’으로 볼 것인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사랑을 ‘있음’으로 볼 것인가의 선택 여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에서 시간과 ‘이 세상이 끝난 후’의 그 시간은 바라보기 위해서 ‘시간’에 대한 이해의 정립이 필요한 이유이다.
Ⓐ에서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를 조건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 있는 냉혹한 현실이다."
Ⓑ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시간은 어디서 오는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데로 흘러...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부터 오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 결국 아직 없는 데서 있지 아니한 데로 옮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시간을 살 것인가를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수도 있고(화이트헤드의 시간), 세상 끝난 후에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지금, 여기서, 오늘 살 수도 있다(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무엇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의지’로 그럴 수 있다.
우리는 함므라비 법전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무자비한 양육강식의 논리로 살 수도 있고, 적어도 함브라비 법전의 동태복수법으로 그 협의의 정의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불가능의 가능, 그 사랑’으로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의 폭은 사랑처럼, 그렇게 크고 그 한계를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랑의 능력은 행위의 능력 이전에 생각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오쇼는 사랑은 행위동사가 아니라 상태 즉 형용사라고 바라보기도 한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간으로 살고싶은지 그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자유의지’는 다른 말로 ‘영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의지나 몸의 의지가 아니다.
이때 ‘영혼의 의지’란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 하나가 된 의지를 의미한다. 성부성자성령, 그 삼위의 하느님의 사랑이 하나이듯, 영혼은 자유의지를 알기에 몸과 마음에게 사랑을 강요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자발적 하나에 해당한다. 우리는 여기서 ‘몸을 다하여, 정신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금 성찰할 필요가 있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 참고)
우리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사랑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그 사랑을 교리적으로 이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때 우리는 복음에서 말하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는 삼위일체 사랑, 그 한계를 정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 사랑의 능력의 무한성과, 강론에서 제언하는 ‘세상 끝 날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의 그 삶을 기쁘게, 감사하게 살게 될 것이다.
[덧붙임] ‘세상 끝 날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세상이 끝난 후에는 너희가 나와 함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라’ 를 묵상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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