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가장 깊은 곳을 보면서 가장 높은 곳도 보는 영안
-Love, the spirit that sees the highest place while watching the deepest place
[성 령 강 림 대 축 일(나해)2021. 5. 23. Jean. 20,19-23]
1. 빨리 봄이 되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윤동주) 2. 가장 깊은 곳을 보는 사람은 가장 높은 곳도 보는 사람이다(Scheler, M) 3. ‘용서를 통한 일치’, ‘용서가 보여주는 희망’(요한 20,19-23/ 루카 12,49-53 /마테오 10: 34-36) |
1. 빨리 봄이 되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윤동주)
윤동주의 「또 태초의 아침」을 읽어본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전신주가 잉잉 울어/하느님 말씀이 들려온다.//무슨 계시일까./빨리/봄이 오면/죄를 짓고/눈이/밝아//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쓰여진 시」)라고 노래한 윤동주, 그의 시에는 시대의 아픔, 기독교적 영성, 서정의 세계라는 그가 직면한 상이한 상황을 하나의 '미학’으로 완성하려는 혈흔이 묻어있다.
윤동주 시 전편을 관통하는 시적 구조인 ‘현실인식-자아성찰- 부끄러움- 극복의지’에서 구현된 ’부끄러움‘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실존의 절규에 해당한다.
시대의 아픔, 기독교적 영성, 서정의 세계는 그 지향점이 천차만별한 낙차를 지닌 화해불가능한 세계에 해당한다. 그는 그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 어느 하나에도 오로지 투신할 수 없었던 ‘밤을 새워 우는 벌레’(「별 헤는 밤」)에 지나지 않는 자신과 ‘최후의 악수’를 하려 했기에 언제나 ‘부끄러움’ 앞에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봐도 부끄럽고, 하늘을 봐도 부끄럽고, 시를 쓰는 것도 부끄러운 총체적인 부끄러움 앞에서 ‘나’라는 자체가 걸어가는 부끄러움이었다. 하여 그는 ‘발바닥으로 손바닥으로’ 지난 시간에 대한 과거의 참회록 뿐 아니라 미래의 참회록까지 미리 쓰면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 (「참회록」)을 보게 된다. 그런 자신을 응시하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천명처럼 ‘부끄러움’을 안고 시로 ‘침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행위의 ‘죄’가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이 이미 ‘죄’라는 사실을. 그는 절대윤리가 아니라 상황윤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자신을 극단으로 미워할 수 있는지 알았으며, 사유할 수 없었다면 ‘죄’도 아닌 것이 그가 사유할 수 있는 식민지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죄’임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 ‘죄인’의 낙인을 시의 이마에 찍은 것이다.
그럼에도, 「또 태초의 아침」에서 ‘빨리/봄이 오면/죄를 짓고/눈이/밝아’ 져서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라고 말하는 화자,
여기서, 인간이기 때문에 지닌 원죄나, 시대가 만들어준 죄나, 구조적인 모순에서 지은 죄가 아니라 평범한 생존 상황에서, 사랑하고 일하면서, 이마에 땀을 흘리는 건강한 삶에서 당당하게 자기 인격에서 비롯된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진정한 ‘죄’에 대한 그리움도 그리움일까?
‘빨리/봄이 오면/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는 마지막 행에서 윤동주시의 ‘영성의 윤리학’이 태어난다.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란 다름 아닌 ‘사랑’이다. 그럼에도 그 사랑마저도 허여되지 않는 현실, 꽃 한번 피지 못하고 열매 맺는 무화과처럼 자기 몫의 부끄러움을 받아들이고, ‘이마에 땀을 흘리겠다’는 화자,
여기서 ‘땀’은 중의적으로 피땀이자 육땀이다. 생존의 긴장감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골고타에서 흘린 피땀이자, 사랑하는 가족을 부양하는 건강한 노동에서 얻어지는 육땀이다. ‘부모가 보내주는 학비로 육첩방 남의 나라에서 늙은 일본인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 그 자괴감의 정체, 그는 상황윤리 앞에 놓여 있는 자신을 이렇게 추스르고 있다.
‘빨리 봄이 오면’ 이라는 가정법을 통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에도 봄이 오면’(별 헤는 밤) 이라고 윤동주 시에 자주 등장하면 ‘봄’은 절망의 끝에서 절망을 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의 영성의 윤리학이다. 여기가 끝이다, 라고 절망으로 시의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던 시인의 또 다른 운명, 그는 그를 압박하는 유한한 세계만이 아니라 무한한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어떤 상황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은 치욕의 치욕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 그의 영성, 누구에게도 그 희망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없음에도 그는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소환한 희망, 윤동주의 미학은 유미주의적 미학이 아니라 생존상황이 부여하는 ‘부끄러움’마저 포용하는 미학이자 ‘영성의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윤동주 시의 초월과 서정은 ‘치욕’을 받아들일 수 있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자 사르트르가 바라본,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의 임무, 황현처럼 자결할 수도 없고, 신채호처럼 온 몸을 불태우는 혁명도 할 수 없고, 이육사처럼 열네번씩 옥고를 치르며 독립운동을 할 수도 없고, 한용운처럼 독립운동가의 길로 접어들 수도 없는 자신에 대한 ‘애증’의 응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없기를(「서시」)’를 바랬던 시인이 마주한 온통 부끄러운 생의 조건들, 부끄러움을 조장하는 세계에 대항하는 것은 손에 쥐어진 펜 한 자루, ‘시’ 라는 언어적 저항, 그것이 ‘슬픈 천명’임을 알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치욕, 죄도 짓지 않는 죄의 수인인을 수납하는 것, 윤동주의 문학이 ‘부끄러움’을 ‘계시’로 받아들이고 ‘영성의 윤리학’으로 넘어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2. 가장 깊은 곳을 보는 사람은 가장 높은 곳도 보는 사람이다(Scheler, M)
우리는 여기서 왜 ‘희망’을 말해야 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희망’을 보았는지를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희망’은 세계와의 대결의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라본 비전의 제시이기 때문이다.
윤동주처럼 자신의 미학과 윤리학으로 총체적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면, 또 다른 방식으로 희망을 보여주는 인물을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무한과 영원>을 알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의 도피처가 바로 수학이다. 네델란드 작가 페테 회가 수학을 바탕으로 쓴 추리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1992)에서 ‘스밀라’라는 여주인공은 수학이 어떻게 사람에게 희망의 문을 여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의 배경인 그린란드는 광활하고 열린 풍경이며, 얼음의 결정체인 완벽한 무한의 세계로 그려진다. 죽은 이웃집 아이에 대한 우정, 약한 것을 보듬는 모성, 불의에 대한 분노를 끝까지 밀고나가는 스밀라, 적어도 현재까지는 스밀라를 추리소설사상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로 손꼽는 데 누구도 쉽게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다. 스밀라를 지탱해 주는 힘은 수학을 통한 사랑이다. 그녀가 구사하는 사랑의 언어도 수학이다.
아웃사이더 주인공 스밀라는 세계의 생존규칙을 온 몸으로 알고 있다.
“재빨리 약자를 제거해버리고, 이어서 자연적 위계질서에 따라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버리는 게임의 규칙”(530p).
양육강식의 논리가 점점 세련되어 지는 세계에 맞서, 스밀라의 대항마는 그녀의 인격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나는 눈이나 얼음을 사랑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동족 인류에게 애정을 갖기보다는 수학에 흥미를 가지는 편이 내게는 더 쉽다 (68p) 얼음 결정의 구조는 '6'이라는 숫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이 얼어 이루어진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둘러싸고, 여섯개의 가지가 여섯개의 다른 세포로 뻗어간다. 이 여섯개의 세포들은 컬러 필터로 찍어서 높은 배율로 확대한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다시 새로운 육각형으로 녹아들어간다”(p. 548)
이 발언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스밀라는 눈과 얼음에 대해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합리적인 표현력을 지닌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다. 자신이 갖고 있는 수학과 얼음에 대한 지식으로 그녀는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없이 차가우면서도 또한 한없이 뜨거운 이중적 면모를 가진 스밀라가 이웃집 아이의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수리공에게 자신을 개방하면서 나눈 대화가 수학이다. 둘은 죽은 아이와 친구였다는 공통 분모로 만나,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서로의 세계에 물들어 간다.
수리공이 스밀라에게 게살셀러드가 들어간 빠네파스타를 만들어주는 부분은 하드보일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고백의 정석’으로 불린다. ‘당신을 사랑해요’ 라는 2음절 대신 스밀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수학’에 대해서 말한다. 이 부분은 죽어도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하지 않는 이들의 계보에 해당한다.
"수학의 기초가 뭔지 알아요?" 나는 물었다. "수학의 기초는 숫자예요. 누군가 내게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숫자라고 말할 거예요. 눈과 얼음과 숫자. 왜인지 알아요?“
수리공은 호두까기 도구로 집게발을 깨서는 구부러진 집게로 살을 빼냈다.
"숫자체계는 인간의 삶과 같기 때문이에요. 먼저 자연수부터 시작해요. 홀수 중에서 양의 정수들요. 작은 아이들의 숫자죠. 하지만 인간 의식은 확장해요. 어린이는 갈망의 감각을 발견하죠. 그럼 갈망에 대한 수학적 표현이 뭔지 아세요?"
수리공은 수프에다가 크림을 얹고 오렌지 주스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음수예요. 뭔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감정의 공식화. 인간 의식은 더욱더 확장하고 아이들은 그사이의 공간을 발견하죠. 돌 사이, 돌 위의 이끼 사이, 사람들 사이, 그리고 숫자 사이. 정수에 분수를 더하면 유리수가 돼요. 인간 의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죠. 이성을 넘어서고 싶어 하죠. 인간 의식은 제곱근을 풀어내는 것 같은 기묘한 연산을 더하게 돼요. 그럼 무리수가 되는 거예요.“
수리공은 프렌치 식빵을 오븐에 데우고 후추 빻는 기구를 채웠다.
"무리수는 광기의 형태에요. 무리수는 문한하기 때문이죠. 무리수를 다 적을 수는 없어요. 한계를 넘어선 지점까지 인간 의식을 얼어붙어있죠. 유리수와 무리수를 더하면 실수가 되는 거예요."
나는 좀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동족 인간에게 자신을 설명할 기회를 갖는 다는 건 드문 일이다. 보통 우리는 방어권을 얻기 위해서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건 내게 중요한 일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절대 멈추지 않죠. 왜냐하면 지금도 바로 즉석에서 우리는 실수에 음수의 상상의 제곱근을 더해 확장하니까요. 이 허수는 우리가 그려볼 수는 없는 수, 보통 인간 의식이 이해할 수 없는 수에요. 그래서 이런 허수를 실수에 더할 때, 복소수 체계를 갖게되는 거죠, 얼음이 결정을 형상화하는 과정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첫번째 체계에요, 이 체계는 광활하고 열린 풍경과 같아요. 지평선이죠. 우리는 그 쪽을 향해 가지만 지평선은 끊임없이 물러서요. 거기가 그린란드에요. 내가 그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나는 갖히고 싶지 않은 거에요.(pp. 157~158)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는 커다란 이유는 ‘스밀라’ 캐릭터가 지닌 매력 때문이다. ‘스밀라’는 ‘여성’이면서 ‘아마추어’ 탐정이라는 점에서 추리소설의 계보에서 희귀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위 ‘회색 뇌세포’를 사용하여 사건을 풀어가는 명탐정 또는 유능한 사설 탐정과 가장 먼 거리에 놓이는 한편, 냉소적이지만 인간에 대한 온정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캐릭터인 ‘필립 말로’와 비교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삶에 편입해서 살아가지 않는 이 서른일곱 살의 독신녀는 세상이 브레이크를 걸어올 때면 냉소적인 유머와 독설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권력자 앞에서는 비열한 사람으로 돌변하고 패배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아웃사이더적 정의감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차가운 미지의 땅을 배경으로 얼음과 숫자, 눈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주인공과 함께 어린 소년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플롯을 따르고 있다.
그린란드는 광활하고 열린 풍경이며, 완벽한 무한의 세계로 그려진다. 스밀라가 ‘수학’에 매달리는 것도 숫자 체계가 ‘무한’과 ‘영원’의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삶에서 일정한 시작점이나, 초기 체계, 혹은 고정점을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뉴튼의 이론, 칸토어의 무한 개념, 유클리드의 원론, 데데킨트의 수학 대선형에 관한 공리 등을 통해 어딴 치유를 이끌어낸다.
"다른 사람들이 교회의 축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나는 고독을 느낀다. 고독은 내게 있어서 은혜의 불빛이다. 나는 내 방문을 닫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칸토어(러시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일생을 보낸 수학자, 집합론의 창시자)는 학생들에게 무한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무한한 수의 객실을 가진 호텔 주인 한 사람이 있고, 이 호텔 객실에는 손님이 모두 들어차 있다. 거기에 손님 한 명이 더 도착한다. 그래서 호텔 주인은 1호실에 있는 손님을 2호실로 옮겨준다. 2호실에 있던 손님은 3호실로 옮긴다. 3호실 손님은 4호실로.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렇게 하면 1호실은 새로 온 손님을 위해서 비워진다. 이 이야기에서 내 마음에 들었던 점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손님들과 주인 모두가, 한 손님이 자기 방에서 평화와 고요를 얻을 수 있도록 무한한 수의 작업을 지극히 당연하게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독에 대한 커다란 존중의 표시다."(p.22 )
스밀라가 칸토어의 무한개념에 몰두하는 이유는 그것은 고독에 대한 존중, 스밀라라는 한 인격에 대한 존중때문이다. 자신이 자기 인격을 존중하기 때문에 죽은 아이의 인격도 끝까지 존중해주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스밀라라는 한 소설의 캐릭터를 통해 페터 회가 이 세상에 던진 희망의 이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인격을 지켜라,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인격을 끝까지 지켜줘라!
3. ‘용서를 통한 일치’, ‘용서가 보여주는 희망’ ‘용서를 통해서 얻게 되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요한 20,19-23/ 루카 12,49-53 /마테오 10: 34-36)
성령강림대축일 복음과 강론에서는 <평화-용서-일치-희망-기쁨>을 통해 희망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희망의 원리http://blog.daum.net/m-deresa/12389804)
성령이 주는 이 <평화-용서-일치-희망-기쁨>은 모두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다. 특히 강론에서는 ‘용서’가 ‘일치’와 ‘희망’의 전제임을 제언하고 있다. 어떻게 용서가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있을까? 요한복음(20,19-23 19)과 루카(12. 49-53)와 마태오 (10: 34-36) 복음에서 다르게 제시되고 있는 ‘평화’에서 그 단초를 바라볼 수 있을듯하다.
요한(20,19-23 1) 복음을 읽어본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루카(12. 49-53)와 마테오(10: 34-36)에서,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평화는 루카와 마테오 복음에서 말하는 평화와는 사뭇 다르다. 루카와 마태오 복음에서 평화는 ‘불’의 상태를 겪어낸 후의 ‘평화’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모두 경험한 제자들은 그 ‘불’의 시간을 통과한 후이기에 그분의 평화의 인사에 기뻐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2019년 연중 20주일 강론에서 ‘사람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놀랄만한 제언을 하고 있다.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기적을 바라고 찾아야 하는 그 상황까지 받아들인 이후에 얻어지는 평화’를 진정한 평화라고 바라본 것이다. 복음에서 또 미사 전례 때 수없이 건네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평화의 인사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바라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성령을 받아라’라는 축복 다음에 ‘용서’가 왜 먼저 언급되는지? 성령 칠은도 있고 성령의 열매도 있는데, 굳이 요한복음 사가가 ‘성령’과 ‘용서’를 연결한 이유를 바라볼 수 있을 거 같다. 우리가 파견된 자로 평화의 인사를 건네기 위해 마지막으로 통과해야할 ‘불’이 바로 ‘용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강림대축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누구’는, 다시 말해서 용서의 대상은, 앞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그 ‘누구’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우선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용서 없이는 희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희망을 스스로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 사람에게 있는 희망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용서하신 것은,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그들에게도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일치를 꿈꾸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용서하지 못할 때, 하느님의 힘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 ‘하나 됨’, ‘일치’를 이루는 길 중에 하나는, 용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치는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실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가 ‘일치’와 ‘희망’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은, 용서는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는, 은총의 상태, 즉 아우구스티누스가 전한 ‘신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고는 ‘누구든지’ ‘무엇을’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용서를 통한 일치’ ‘용서가 보여주는 희망, 용서를 통해서 얻게 되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그렇다면 강론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 ‘용서가 일치의 전제조건이자 용서가 보여주는, 용서를 통해서 얻게 되는 희망’이라면, 우리는 용서에 대한 깊은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사랑의 크기를 정할 수 없듯이 용서의 크기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강론은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평화에 대해서 ‘사람은 기적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연장선에서 용서에 관해서 ‘사람은 자기 인격을 결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라는 대응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나 용서받아야 하는 상황이란 그것이 물질이나 육체를 통해서 추락과 훼손과 상처를 경험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인격’으로 수렴된다. 용서 받아야 하는 것도 용서해야 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자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가 진정 자신의 인격을 알고 있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수반한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많은 영성가들이 ‘죄’란 없다고 말한다. 죄가 없기 때문에 ‘용서’라는 말 자체가 없다. 그러나 종교는 ‘죄’가 있다고 말한다. ‘죄’가 있기 때문에 ‘용서’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용서가 ‘죄’를 있게도 하고 없게도 한다면, 또한 일치와 희망의 전제라면, 죄와 용서의 소여성이 인간에게 귀속되어 있다면, 죄와 용서의 공간은 어디인가? 아예 몇 번이라는 한계를 둘 수 없는 것이 용서라면, 그것은 신의 위격과 대응되는 인간의 인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그것은 신의 위격을 침해할 수 없다. 오직 죄를 짓는 우리 자신에게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 주어진다면, 자신의 인격이 불가침의 성역처럼 그 누구에게서도 침해받을 수 없는 성역임을 알게 된다면, 윤동주처럼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지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큰 바위를 던져도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또 내가 돌멩이하나라도 던질 기세만 봐도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는 인격의 교환 여부, 공감 여부에 좌우되는 것일 거다.) 여기서 잠정적으로 용서받아야하고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란 ‘인격’의 인식여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사소한 것에서 상처를 받던 시간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 것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영성가들이 죄와 용서의 영역에서 죄와 용서가 없다고 한 이유를 조금 이해할 듯하다. 나에게 사랑을 준 것만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될 때, 그때 용서란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죄인이 아니라 죄의 상황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M 셸러와 N하르트만의 ‘인격개념’에서,
셸러는 "인격은 지향적 작용의 수행에 있어서만 실존하고 생활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본질상 대상은 아니다."(Scheler, M,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물질적 가치윤리』)
이 점에 대하여 하르트만은 작용과 인격이 대상으로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윤리학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왜냐하면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윤리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능동적인 초월작용(정조, 의지, 행위)이 곧 가치판단의 대상이다. 여기에서는 셸러가 그 대상성을 부정한 것이 대상으로 되는 것이다."(Hartmann, N, 『존재론의 새로운 길 Neue Wege der Ontologie』)
셸러는 인간의 인격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면 하르트만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절대적인 개념과 상대적인 개념이 합쳐진 곳에서 ‘용서’라는 희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르트만은 인격은 가치와 의미성취를 구한다고 보았으며. 인격은 자기의식에서 의미를 성취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타자의 인격을 소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순전한 도덕적 존재이자 그 가치의식이 아닌 바의 인격의 본질에 대하여 자기의식은 도리어 모순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은 반드시, 그를 '위해서' 자기가 있을 수 있는 자를 구하게 된다. 이 동경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타인의 인격뿐이다. 이 타인의 인격만이 인격의 의미성취에 대한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주는 독특한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의 거울이다. 인격은 자유고, 도덕적 가치의 부대자임이 인격의 근본요소다. 양자가 합해서 인격의 통일된 형이상학적 근본성질을 이룬다고 보았다.
반면, 셸러는 인격을 그 어떤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같은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확실히 이성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이념, 사고와 동시에 또한 일정종류의 직관, 즉 근본현상이나 본질 내용의 직관, 다시 더욱 특색있는 일정한 계급의 정서적 또한 의지적인 제작용-가령 선, 사랑, 후회, 외경, 정신적인 경이, 至福과 절망, 자유로운 결단등-도 함께 포함하는 정신이다”
셸러는 우리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에 신의 위격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신의 위격을 볼 수 있게 때문에 세계를 깊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셸러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는 사람은 고립된 인격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神과 맺어져 있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서 세계를 향하여 궁극에 모두가 하나인 것을 실감하는 인격이다.
‘가장 깊은 곳을 보는 사람은 가장 높은 곳도 보는 사람이다’라고 것은, 인간을 알았다면 당연히 신을 알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셸러의 인격개념은 최고가치로서 개별인격임과 동시에 근원적으로는 신 앞에 사랑의 연대책임을 짊어진 생생한 인격이기도 하다. 인간의 깊은 것을 볼 수 있다면, 신의 높은 것도 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하르트만의 인격개념과 셸러의 인격 개념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합쳐진 곳에서(하르트만에서- 셸러로 넘어가는) 용서와 희망에 대해 (타자에게 쉽게 강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만들어진다. 용서가 희망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그 단초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내게 인격이 있다면 그대에게도 인격이 있을 것이고, 그 인격은 하르트만의 교환적 인격에서 셸러의 은총적 인격으로 넘어갈 수 있고, 그때 우리는 타자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인격을 마주볼 수 있게 된다. 설사 타자의 행위를 볼지라도 그것은 불가피하게 그가 그것만큼밖에 할 수 없었기에 이루어진 미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게 주어진 시간(남은 시간)은 사랑을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죄나 용서가 필요없다고 하는 영성가들은 신의 사랑을 경험하고 묵상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다. 죄나 용서라는 개념은 영원이라는 시간안에서 사랑을 경험하는 도구나 수단, 찰라라고 직관한 것이다. 또한 용서나 사랑은 '받는데' 초점이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데' 초점이 놓여있는 은총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때 십자가상에서 '저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는 그분의 자비의 기도에 의탁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에 해당하지 않을 인류가 없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강론에서 언급된 그 '누구'는 바로 '나' 자신도 포함되는 그 포괄적인 인류에 해당한다. 내가 하는 일이 사랑이 아닌 줄 나 자신도 몰랐다고 내 인격권을 방어할 때 타자의 인격도 방어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죄는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의 미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그 '누구든지' 아직 그분의 사랑을 충분히 알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서로 기다려 주고 믿어주는 그 마음이, 희망의 문을 연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죄'를 묵상하기 보다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일컫어 '절망을 모르는 현실'이라고 한다. '절망을 모르는 현실'은 '죄'의 묵상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직관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둠을 어둠의 힘으로 몰아낼 수는 없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적어도, 세계가 나를 용서하게 만들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세계를 용서할 수 있는 인격의 크기를 만들 수는 있다. 내가 세계를 향해 희망의 문을 열어 놓을 때, 희망은 희망의 길을 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른 성채(城砦)에서 올리브산으로, 올리브산에서 푸르른 성채(城砦)로 (0) | 2021.06.10 |
---|---|
사랑, 내가 너희와 함께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로 (0) | 2021.06.03 |
사랑, 현존의 부재에서 부재의 현존으로 (0) | 2021.05.20 |
사랑, 자기부정의 ‘반(反)-명제’를 통한 자기긍정의 여정 (0) | 2021.05.13 |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M(Mevnw머무름)’이 있다. (0) | 2021.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