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 자기부정의 ‘반(反)-명제’를 통한 자기긍정의 여정

나뭇잎숨결 2021. 5. 13. 18:21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사랑, 자기부정의 ()-명제를 통한 자기긍정의 여정

 

[부 활 제 6 주 일 (나 해) 2021. 5. 9. Jean. 15,9-17]

 



1.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창조한다(니체)
2. ‘난 널 사랑해의 내적 논리(롤랑바르트 & 알랭바디우)
3. 살아있는 삶을 살다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자(요한 15,9-17/부활6주강론)

 

 

1.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창조한다(니체)

 

고정희의 「더 먼저 더 오래」를 읽어본다.

 

①더 먼저 기다리고/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②더 먼저 달려가고 /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③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요

 

④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⑤더 먼저 외롭고 /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⑥더 먼저 상처받고 /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저희가 상처로 얼싸안은 절망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⑦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⑧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부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 사랑의 삼보-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 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사랑은 우리의 전 존재를 뒤흔드는 사건이다.

 

사랑이 우리의 전존재를 흔드는 사건인 것은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땅에 느닷없이 던져진 존재인 내가 과연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행위이자  ‘나는 살고 싶다’는 외침이기에 그렇다. 이 존재확인을 특정 대상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면 그 확인은 늘 빗나간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부정의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자기긍정에 이르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보여주는 사랑도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 세상이 갖고 있는 사랑법이나 신론의 부정을 통해 ‘나는 사랑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신이다‘. ‘나는 있다’라는 자기 긍정에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정희의 「더 먼저 더 오래」는 바로 자기부정(나는 없다)을 통한 자기 긍정(나는 있다)을 노래한 잠언(箴言) 시다.

 

①~⑦연까지는 진복팔단의 구조를 차용해 “더 먼저 ~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중에 ~하게 될 것이요”라는 통사구조의 반복을 통하여, 이를 거듭해서 확인시킨다. 이 확인은 타자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 반복과 차이를 통해 사랑의 주체인 ‘나’에서 ‘사람들아’로 확장되어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넘어가는 ⑧에 이르러 ‘사랑으로 씨 뿌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상처, 눈물, 외로움 가운데서 일곱가지 무지개가 솟고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가 찬란하리라’라는 축복에 이른다.

 

고정희의 「더 먼저 더 오래」에서 ‘사랑에 빠진 자’가 도달한 곳은, 일반적인 사랑의 명제를 뒤집는 반-명제를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둘’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사랑의 ‘단신 투혈’이라고 할 수 있다.

 

⑧에서 ‘더 먼저 더 오래한 사랑’이란 결국 사랑의 삼보-상처, 눈물, 외로움 가운데서 완성된 사랑이라는 점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화자가 사랑의 ‘고통불가피론’을 통과하며 완성한 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바라본 ‘사랑의 삼보-상처, 눈물, 외로움 은 다른 말로 ‘자기 부정’의 시간이다. 자기존재감, 자존감 제로의 상태에서 자신도, 타자도 망각한 채 오직 ‘사랑’만을 선택하였을 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랑은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기’를 바라는 이 시대의 사랑법에 정면 충돌하는 반-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고정희의 「더 먼저 더 오래」는 자기부정의 반명제를 통해 완성된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자기의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는 완성시킬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기부정은 자기긍정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고미숙은 『사랑의 달인, 호모 에로스』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라고 말한다. 즉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창조한다라고 말한다.

 

니체와 고미숙,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은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면 이는 ‘사랑의 성공’은 ‘대상 고르기의 선택’이라는 우리 시대의 사랑론을 전복하는 이 역시 반-명제라 할 수 있다.

 

니체와 고미숙은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사랑이라는 사건이 왜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일까? 이를 릴케는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에서 그 답을 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데 익숙해야 하네/두 사람이라고 불리는 그것/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에 빠졌다’라는 표현은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사랑은 한 사회를 위험에 빠트리고 당대의 도덕규범을 허물고 계급을 뛰어넘는 위험한 도발에 해당한다. 이것은 인과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땅의 논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릴케는 혼자가 되라’고 불가능한 제안을 한다.

 

사랑에 빠진 자가 대상을 놓아두고 혼자 있을 수도 없거니와 사랑에 빠진 자는 거의 정신나간 상태로 상대를 찾아나선 상태다. 그러니 ‘혼자’는 은둔자가 되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혼자가 아니면서 혼자인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상대도 잊고 자신도 잊은 '망아'의 상태라야 가능한 경우다.

 

사랑에 빠진 것은 세상의 인과법칙만 잊은 것이 아니라 상대와 자신도 잊은 망아의 상태인 것이다. 얼마나 사랑에 미치면 상대가 어떠하든 내가 어떠하든 이 상태가 가능할까? 이 사랑은 고정희가 바라본 사랑의 삼보-상처, 눈물, 외로움 도 잊은 상태일 것이다.

 

대상에 미친 상태가 아니고 사랑에 미친 상태라 할 수 있다. 사랑을 사랑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때 릴케가 말한 사랑의 완성이란 ‘홀로’ 스스로 충분히 전개되어 완성되는 그 사랑을 의미한다. 존재자체가 사랑이 된 상태라 할 것이다.

 

 

 

 

 

우주의 어디쯤에서 일어나고 있는 에너지의 흐름들

 

 

 

 

 

2. ‘난 널 사랑해’의 내적 논리(롤랑 바르트 & 알랭바디우)

 

 

‘꽃이 핀다’에서 ‘피다’는 자동사다. 목적어가 필요 없다. 그러나 ‘사랑하다’는 ‘주어와 목적어’가 반드시 필요한 타동사다. 그래서 라캉은 『세미나1』에서 ‘난 널 사랑해’는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랑도 꽃처럼 홀로 필 수 있다면 사랑의 기쁨, 행복, 충만 옆에, 고통, 위기, 고뇌, 상실, 죽음이라는 과정이 놓여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꽃을 ‘산화공덕’이라 부른다. 이는 꽃이 피는 것 역시 그 홀로는 수행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최소한 태양과 물이 있어야 꽃도 필 수 있다. 한 송이의 꽃이 피기 위해서도 자기부정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긍정에 이르는 길을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 혹은 선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과 알랭 바다우의 『사랑예찬』에서,

 

롤랑바르트와 알랭바디우는 사랑하는 것이 왜 고통과 상실을 수반해야 하는가를 치밀하게 성찰한 인문학자들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를 롤랑바르트는 고백적 차원에서 알랭바디우는 선언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데서 일단 발화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 아닌 것과 사랑인 것은 어떤 경계를 ‘넘어’, 혹은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난 널 사랑해”, 이 문형은 사랑의 고백이나 선언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 사랑의 외침의 반복적인 발화를 가리킨다. 하나의 한계상황, 즉 주체가 그 사람에 대해 반사적 관계에 정지되어 있는 상황에 고착되어 있는 일문일어의 문장이다.(롤랑 바르트)

 

바르트는 ‘난 널 사랑해’는 충동으로 간주하기엔 문장화되어 있고, 문장으로 간주하기엔 너무 소리지르는 듯한 문형으로 어떤 언어유형으로도 분류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것은 시나 음악처럼 출처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난 널 사랑해’는 어떤 사회적 구속력도 받지 않는 모성애적인 문장이다. 어떤 거리감도 뒤틀림도 없이 천진난만한 아이의 발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단어가 상대에게서 화답되지 않을 때, 발화자를 미치광이로 만든다는 점에서 바람의 언어, 소용돌이 언어에 가깝다고 보았다.

 

‘난 너를 사랑해’는 라자로가 죽음에서 깨어나듯, 어떤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에게 도달하므로 롤랑 바르트는 이 상태를 ‘샤토리satori’를 경험케 한다고 말한다. 텔레파시 혹은 깨달음 같은 두 개의 힘이 섬광처럼 전대미문의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역설적이게도 이 발화는 상투적인 끝에 위치하여 세속화된다는 점에서 양면적 속성을 지닌다. 소비되는 고백, ‘나는 너를 사랑해’는 발화자의 진심여부와 사랑의 과정에 의해 고귀함과 비천함이라는 낙차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이들에게 이런 고백은 팜므파탈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난 너를 사랑해’는 징후가 아닌 행위의 언어로 노예(노예는 혀가 없다)인가 주인인가를 가늠하는 말이자, 언어의 극단에 위치하면서 아폴론적인 것에 반발한다는 점에서 니체가 바라본 ‘디오니소스’ 적인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듯, 이 말을 발화한 사람은 상대에게 정신적으로 무릎을 꿇은 상태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혁명을 원했고, 예수는 사랑을 원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알랭 바디우는 ‘나는 너를 사랑해’를 ‘발화’라고 말하지 않고 ‘선언’이라고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거듭거듭 선언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가 어떤 특별한 공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약속, 즉 만남이 제 우연성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지속성을 구축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충실성이 정확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알랭 바디우)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명명은 충실성을 내재한 언어로 너와 나라는 개별자가 ‘둘’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면서 무한을 경험하는 무대에 서게 되는 시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바디우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둘’을 발생시키는 남녀 간의 사랑이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라고 단언한다. 사랑은 만남으로부터 발생한다. '하나'를 벗어난 두 개의 성은 '둘'(un Deux)이 된다. 바디우는 이 '둘'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있는데, '둘'은 결국 최초의 다수이다. 다시 말해, 만남은 유아론적인 주체에서 벗어나 '둘'이라는 최초의 다수를 만들어낸다. 최초의 다수가 출현하는 지점, 그것이 바로 만남이라는 사건이며, 사랑이 시작되는 구체적 지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두 입장의 셈으로서의 ‘둘’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분리된 ‘둘’, 주어진 것으로서의 ‘둘’이다. 분리된 ‘둘’이란 전체적인 ‘분리’, 즉 제3의 입장이 없는 ‘분리’이다. 다시 말해 "두 입장은 둘로 셈해질 수 없다." 사랑은 셋을 모르기 때문에 결코 ‘둘’로 셈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라는 동일자 의식의 반-명제가 도출된다. 바디우는 사랑은 '하나'여야 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사고라며  강하게 반발한다. 사랑은 끝까지 둘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고백이 아니라 선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남, 이 우발적인 얹어짐은 하나의 선언, '사랑한다'는 선언을 통하여 고정되며 공백을 호출한다. 그 공백은 다름 아닌 ‘둘의’ 분리라는 공백이다. 공백으로서의 둘은 개별자인 나 혹은 너라는 ‘하나’를 파괴하고 '둘'을 상황 속에서 위치시킨다. 이를 바디우는 ‘분리를 넘어 분리의 진리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둘’의 성립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선언은 둘을 위해 하나를 파괴하는 언표로서의 사랑을 상황 속에 유통시킨다.

 

바디우는 이 ‘둘’의 발생에서 사랑의 고통, 시련, 위기, 고뇌 등 사랑의 ‘다리절기(boiterie)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둘은 각자의 생존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한 일치가 불가능하며, 둘 중 누군가의 희생 혹은 완급조절이 불가피하며, 두 사람의 타협이 가능했기에 걷게 되는 그 걸음이기 때문에 ’다리절기‘다.

 

롤랑 바르트가 바라본 ‘나는 너를 사랑해’는 고백하는 자에 초점이 맞춰진 직관라면, 알랭 바디우가 바라본 ‘나는 너를 사랑해’는 둘의 사건 속에서 선언된 사랑의 논리, 실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고백이나 선언에서 사랑의 고통이나 상실이 발생할까? 롤랑바르트의 견해는 사랑의 구심력(나 중심적인) 배타성 때문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알랭 바디우의 사랑의 확장성 원심력(둘의 사건) 때문으로 보고 있다.

 

롤랑바르트와 알랭바디우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자신과 대상을 ‘넘어-너머’ 서야지만 가능한 행위라고 보고 있다. 분명 사랑은 둘의 행위이지만 무엇인가를 ‘넘어-너머’선다는 것은 자기부정이 가능해야 실현할 수 있는 행위들이다. 사랑이 소용돌이인 것은 자기망각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랑이 자신의 전존재를 뒤흔드는 사건이 되는 것은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긍정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오랫동안 앓고 있던 여인

 

 

 

 

3.살아있는 삶을 살다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자

 

복음(요한 15,9-17)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주님의 말씀입니다.

 

오신부님의 부활6주 강론의 발췌본을 읽어본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계명이자 유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사랑은,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 살아서는 다 할 수 없는 사랑이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사랑은, 바로 그 쉽지 않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고통이 아니지만, 그리고 사랑이 고통일 수도 없지만, 사랑하는 것은 고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랑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사랑에 이르기까지는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희생을 동반하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사랑을 실천하려면, 그 사랑과 그 사랑에 따라오는 고통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는 하지만, 고통이 우리의 삶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을 이겨내야,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살아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겪으신 고통들을, 사랑을 향해서 걸어가는 길, 그 길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느껴지는 고통을 이겨낸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기는 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있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시간, 그 시간만큼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만큼이라는 것입니다”그렇게 사람이 살아있는 시간이란, 사랑하고 있는 시간뿐입니다. Ⓜ예수님의 오늘의 이 말씀은 살아있는 삶을 살다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자.”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통해서 살아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번 한 주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복음과 강론을 통해서 두 가지만 생각해 보기로 한다. (1)사랑하는 것이 왜 고통인가를? (2)어떻게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두 개의 질문에 삶으로 답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1)“사랑은 고통이 아니지만, 그리고 사랑이 고통일 수도 없지만, 사랑하는 것은 고통일 수도 있다.”

 

(2)사랑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통해서 살아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살아있는 삶을 살다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자.

 

 

(1)사랑이 고통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것이 고통일 수 있는 것은 두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사랑은 하늘의 용어다. 롤랑바르트와 알랭바디우를 통해 살펴본 대로 “사랑해”는 인간의 언어로 발화되지만 그것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다. 하늘의 소유다.

 

복음과 강론에서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강론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사랑은,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 살아서는 다 할 수 없는 사랑이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사랑”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를 요한1서(4.7-10)에서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전한다. 사랑은 하늘에서 온 것이자 하늘의 것이다.

 

하늘의 존재양식을 땅의 사람들이 하려는 것이, 사랑이다. (저 땅에다 배추를 재배해 김치를 담그는 것도 어렵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도 맛있었다, 맛없다 한다) 하물며, 사랑은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일임에랴,

 

사랑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 볼수록 사실 주체의 문제도 대상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고통의 근원은 사랑이 지닌 천상의 고유한 양식이기 때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땅의 양식 안에 천상의 양식을 담으려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작은 푸대에 하늘을 담는 행위라고 생각해보면 된다. 이 땅의 양식은 자기보존본능에 충실한 양육강식의 논리, 자기중심의 논리가 어느 정도 배어있다. 또한 그 사랑을 하는 주체와 대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완벽한 인격의 소유자들이 아니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을 사는 것처럼 위대함과 천박함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의 존재이기에 생존의 긴장감이 늘 존재한다. 그런 긴장감을 내재한 존재들이 천상의 것을 지상의 심장에 담으려는 그 자체는 이미 찢어짐, 균혈, 부서짐이라는 고통을 내장할 수밖에 없다. 요셉 랄씽어 추기경님은 이를 ‘최소의 것에 담김’이라고 표현했다.

 

(2)그렇다면 땅의 생존양식에 길들여진 우리가 어떻게 사랑의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복음과 강론에선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있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시간, 그 시간만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겨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자체의 문제현상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현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현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을 복음과 강론에서는 ‘기쁨’과 ‘살아있음‘ 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문제 자체를 없애는 것도, 문제 자체는 있으나 초월하는 것도 다시 ‘사랑으로’ 돌아간다. 요한복음 15장과 강론은 그 극복의 방법을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랑’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원점으로 회기한 듯한 사랑의 명제가 도출된다.

 

사랑을 하느라 고통이 생겼고, 고통을 해결하는 것은 사랑이고, 그것은 기쁨이다.”

 

그 사랑을 복음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강론에서는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 살아서는 다 할 수 없는 사랑이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사랑에서 그 답이 제시된다.

 

복음이나 강론에서 권하는 그 사랑은 ‘죽어야 살리라’는 바로 그 사랑이다. 이미 사랑의 고통 때문에 죽고 싶고, 죽을 거 같은데, 또 ‘죽어야 산다’라고 한다면 이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생물학적인 죽음인가?

 

영성가들은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 생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는(들이닥친, 초래한) 어떤 조건들과 상황들은 일시적이고 찰라적인 것임을 바라보라. 그것은 살아있음의 과정이다. 영원의 시각을 갖고 그것을 과정으로 바라보고,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도구로 사용하라.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이고 싶은지, 영원히 누구일 것인가를 기억하라. 할 수 있을 만큼 하고 그 나머지는 신에게 맡겨라, 직선으로 현실의 소용돌이를 모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소용돌이 위를 걸어가라, 풍랑과 파도와 어둠을 보지 말고 그 너머, 사랑(십자가)을 바라보라, 고요하라! 고요하라! 고요하라! 자신의 신적 공간에 살면서 신이 보내준 사랑을 바라보라. 신의 현존을 제약하지 말고 시몬처럼, 베로니카처럼, 예수살렘 여인처럼, 우도처럼, 나그네처럼, 바람처럼, 비처럼, 태양처럼, 별처럼,,, 동행하는 모든 것 안에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라...그러면 모든 사건, 상황이 다 축복이 되리니!”

 

78억 인류, 그 누구도 고통이 없거나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없다. 남이 아는 십자가, 남이 모르는 십자가, 십자가의 크기가 작아보이거나 커보이거나 십자가를 지는 무거움은 모두 같다.

 

영성가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위해 공통적으로 ‘신적공간으로 가라!’는 제언을 한다. 이는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될 듯하다.

 

특히 고통 중에 있을 때, 특정 사람에게 위로를 기대하는 희망고문을 자신에게 행사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에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자 고통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마약이나 다름없다. 아예 위로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일단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사랑으로 짊어질 수 없다면 죽어야 한다면 죽지 뭐, 하는 심정으로라도) 고통에 집중할 때, 고통은 다른 의미로 바라보게 된다. 고통도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12사도는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분을 위로했다. 그 위로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십자가는 오롯이 그분의 몫이었다는 것이다. 나의 미망으로 초래된 고통이든, 얽혀있는 인연으로 초래된 고통이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고통이든 각자 몫의 고통은 오롯이 각자가 지고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불가항력적인 고통이나 문제 상황에 봉착했을 때, 일단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진인사대천명) 이것은 오랜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댄 순간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그 다음 내가 머무르는 그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해서 한다(문제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처음에 마음이 일으키는 풍랑에 죽을 거 같고, 때론 죽고 싶기도 하다, 그 소용돌이에 '밥'을 주지 말아야 한다. 고통부풀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평가나 분석 비난 없이 그냥 바라보아야 한다. 억지로 가라앉히려 하거나 망각하려 하지 말고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듯, 그냥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소용돌이도 차츰 가라앉을 때 쯤, 불떨기 속에도 없고, 폭풍 속에서도 들리지 않던 어떤 고요한 음성이 들린다. 그때, 문제가 해결되거나 문제를 초월하게 된다.

 

(부연)정리해보자면,

 

우리 삶의 모든 고통은 부족한 사랑때문에 초래된 현실이다. 예수님도 성모님도 제자들도 인류의 조상들도 사랑때문에 고통받는 길을 걸었다. 끊임없이 사랑이 부정되면서 그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이긴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사랑은 고통이 아니지만, 그리고 사랑이 고통일 수도 없지만, 사랑하는 것은 고통일 수도 있다.”

 

사랑은 '자기부정의 ‘반(反)-명제’를 통한 자기긍정의 여정'이라고 이 글을 시작했다. 사랑이 자기부정인 것은 사랑을 받고자 할 때 발생한다. 사랑이  ‘반(反)-명제’인 것 역시 세상의 사랑법은 모두 받는데 그 초점이 놓여 있다. 마치 자본주의의 이익창출 과정과 흡사한 교환구조를 지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이 자기긍정을 낳게 되는가? 그것은 사랑을 '하는데' 초점이 놓여질 때 가능하다. 앞에서 사랑은 하늘의 소유이자 하늘의 양식이라고 전제했다. 하늘의 양식은 주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 하늘의 양식으로 초점을 바꿀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였으며, 지금 누구이며, 앞으로 누구일 것인가에 대한 자기정체성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다. '사랑을 하는 것'은 바로 그 정체성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살아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복음과 강론에선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있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시간, 그 시간만큼입니다.” 이라는 그 심층으로 걸어가게 된다. 어떤 고통의 상황에 직면한 자신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울 때, 그것은 이미 과거의 사건이 되고 우리는 이미 '오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된다는 사실이다.

 

그때  살아있는 삶을 살다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자.”라는 제언이 지닌, 지상의 양식과 천상의 양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조금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