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무엇으로부터의 열정에서 무엇에로의 열정으로

나뭇잎숨결 2021. 4. 29. 12:34

 

 

무엇으로부터의 열정에서 무엇에로의 열정으로

-from passion from something to passion from something

 

 

[부 활 제 4 주 일 (나 해) 2021. 4. 25. Jean. 10,11-18]

 

 


 1.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비극적 황홀(이성복)
 2. 열정과 냉정 사이, 수렴적 사고와 발산적 사고
3. 내가 스스로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1-18)


 

 

 

 

1.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비극적 황홀(이성복)

 

시인은 시인이니까 시를 ‘잘’ 써야 한다. 그러나 시를 ‘잘’ 써서 그것을 발표하는 순간, 시인은 그것이 그의 ‘거친 호흡의 신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그가 꾼 악몽에 어울리지 않는다.(김현)

 

악몽 위에서 솟구친 언어치고는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겁거나 너무 거칠거나 너무 부드럽거나 너무 서사적이거나 너무 서정적이다. 모든 시인이 겪는 언어(기표)의 좌절이다.

 

세상만 그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언어도 그를 ‘배신’한다. 자신의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번번이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인은, 극복해야 할 것이 실은 세상 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 즉 자기 자신이었음을 바라보게 된다. 플로베르가 말한 ‘일물일어설’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성복의 「노을」, 「이별 1」, 「만남」을 읽어본다.

 

이성복의 「노을」

 

당신이 마냥 사랑해주시니 기쁘기만 했습니다 언제 내가 이런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당신 일만 생각했습니다 노을빛에 타오르는 나무처럼 그렇게 있었습니다 해가 져도 나의 사랑은 저물지 않고 나로 하여 언덕은 불붙었습니다 //바람에 불리는 풀잎 하나도 괴로움이었습니다 나의 괴로움을 밟고 오소서, 밤이 오면 내 사랑은 한갓 잠자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성복의 「이별 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이성복의 「만남」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

 

이성복의 「노을」, 「이별 1」, 「만남」은 연애세포를 건드리는 시들이다.늦은 밤, 향내나는 연필로 꾹꾹 눌러 써 보고 싶은 시들이다. ‘비극적 항홀’이라 이름 할 수 있는 부재하는 <당신>으로 인한 ‘고혹의 시간’을 건너가는 화자와 동행하고 싶게 만드는 시다.

 

부재는 언제나 현존의 대척점이자 극복해야할 상태였다. 그러나 위의 이성복 시를 읽다보면 부재가 이토록 절절하게ㅡ아름답다면 오히려 부재를 선택하고 싶게 만든다.

 

이에 송재학은 “그 ‘당신’은 소월과 만해로부터 익힌 ‘당신’이고 동양의 음양 사상에서 비롯된 ‘당신’으로 내가 양이면 당신은 음, 당신이 양이면 내가 음인 그 ‘당신’이다. 그 ‘당신’은 남녀간의 당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반면, 류철균은 “<당신>에 대한 이처럼 무력한 사랑은 세계의 악마적인 현실에 대한 시인의 숙명론과 표리의 관계를 이룬다. 만해(한용운)의 사랑이 그 서사적 공간의 무게로 인해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의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이성복의 사랑이 갖는 상대적인 한계가 분명해질 것이다. 상실된 조국과 식민지의 현실을 함축한 만해의 사랑이 물러설 수 없는 심혼의 울림으로까지 육박해 간다면, 이성복의 現詩的 사랑은 감성의 감미로운 동어반복에 그치는 것이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한용운 시의 화자는 부재하는 당신일망정 언제나 화자가 목적한 곳에 당신과 함께 이른다. 화자 중심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복 시의 화자는 당신에게 생을 저당잡힌 채 끌려간다. 대상 중심적인 시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이것이 현실직시의 정직함이라 할 수 있다.

 

1910년대 ‘피아’구분이 확실한 시대의 <당신>과 1980년대 이후 피아구분이 불확실한 시대에 <당신>은 전혀 다른 존재로 화자의 생을 점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복 시가 그린 궤적을 따라가보면 그는 규정할 수 없는 ‘목소리’를 지닌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성복 시의 <당신>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극복하려 얼마나 치열하게 언어를 갈았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마치 비트켄슈타인이 비트켄슈타인을 극복하듯, 라캉이 라캉을 극복하듯, 이성복 자신이 극복해야할 대상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상징계가 아니라 이성복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극복은 자기부정의 다른 이름이다. 이전의 자신의 시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복의 시의 파토스는 자기극복의 여정이었다. 이 파토스는 에릭 프롬이 직시한 자유처럼 ‘무엇으로부터’에서 ‘무엇에로’의 이행이었다. ‘이성복으로부터’ ‘이성복에로의’ 이행이었다.

 

시인이 처음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마주한 이 거대한 자본과 그 자본과 결탁한 거대한 폭력이라는 이 세계가 불화의 근원이었다. 이 세계는 아버지였고 그 희생제물은 늘 어머니거나 누이였다.

 

이성복의 초기시에서 아버지라는 상징계에 퍼붓는 성적인 욕설은 그가 할 수 있는 1980년대를 향한 언어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80년대가 끝나기도 전에 이 세계를 포기한 듯한 서정성으로 넘어가 그는 부재하는 <당신>을 더 이상 저주하지 않는다.

 

그 결절점이 무엇이었을까?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의 발간은 당시의 문학 청년들에게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많은 문학청년들이 이성복 시를 읽고 ‘벌겋게 단 시로 찍은 화인(火印)’을 하나씩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행의 지그재그식 배열, 거꾸로 끼워넣은 활자, 말장난에 가까운 말의 생략과 반복, 콜라주 수법에 의한 이질적인 이미지의 병치, 아버지와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비어와 속어의 난무는 자크 데리다의 『해체』를 읽는 것과 다름없었다.

 

화인에 부채질을 한 것은 평자들이었다. 말로 더할 수 없는 화려한 수사로 장식된 찬사까지 덧붙여지면서 이성복은 하나의 ‘현상’이 되고 ‘추종’이 되고 ‘종교’가 된다. 서울대불문과, 스승 김현, 동지 황지우, 두 번의 프랑스 유학, 이른 등단 등 그의 인생은 아픔을 소비하는 고속도로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의 시에서 제일 먼저 떠난 사람은 이성복 시인 자신이었다. 세간에 추종받으면 추종받을수록 그의 아픔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위의 연애시 이후에 쓴 두 번째 시집, 「남해금산」에 실린 시들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이성복, 「치욕의 끝」

 

치욕이여,/모락모락 김 나는/한 그릇 쌀밥이여,/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 같아/우리 떠난 후에 더욱 빛날 철길이여!

 

 

이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강이 하늘로 흐를 때,/명절 떡살에 햇살이 부서질 때/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사랑하기 때문이다//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잠길 때,/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묶일 수밖에 없다

 

이성복, 「정적 하나가」

 

정적 하나가 내 가는 길과 들판을 몰아옵니다 나직하던 발걸음 소리가 나둥그러지면 패랭이꽃이 피어납니다 당신을 찾아가는 곳 어디에나 붉은 반점(斑點)이 돋지요 거친 호흡과 신열(身熱)은 내 것이고요//휘말린 새들과 뿌리뽑힌 나무를 움켜쥐고서 순식간의 분노를 느끼게 하세요 정적이 나를 피해갑니다 달아나는 정적을 내가 입맞춤하게 해주세요

 

이성복, 「고통 다음에 오는 것들」

 

고통 다음에 오는 것들,/저 하늘엔 밀고 밀리는 배들,/정다운 사람들은 명절날처럼 盛裝하고/떡과 과일을 나누고/나뉘는 슬픔의 몫도 아름답다//고통 다음에 돌아와/저무는 들판을 양팔로 껴안고/저미는 벌레 소리에 머리 수그리면//마침내 괴로움이 켜 드는 불,/저 하늘엔 밀고 밀리는 배들,/착한 어버이들이 모여 앉아//맑은 술을 나누고 있다

 

이성복,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그 위로 밤, /그 위로 하늘, 갈라터진 별들 //마음의 갈기가 잔잔히 흔들리고 /잊혀진 곳에서 水門 열리는 소리 //그대가 헤매는 거리를 다 헤매고 /마침내 그대 자신을 헤맬 때

기다리라, 기다리라 //奇蹟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다보면 그의 첫 번째 시집에 실린 시들에서 그가 아버지로 상징되는 그 세계를 왜 그토록 혐오하고 증오하고 요설을 던졌는지 이해하게 되고, 그 중간에 발표된 위의 연애시들을 부재하는 <당신>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가 되며, 두번째 시집을 읽으면, 그 다음 그 다음에 발표될 시들과 그가 아포리즘에서 말하고 싶은 그의 내면 풍경을 조금은 바라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이 그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작품을 작품이 해석하는 ‘간텍스트’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아플 게 없는 거 같은 데 아파하는 사람을 조금 이해하게 된다. 시인 자신은 “자신이 아프고 병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치유의 첫 단계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 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그의 시적 탐구가 단순히 우리가 아픔과 괴로움의 상황 또는 병든 상황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억압하고 병들게 하는, 숨겨져 있거나 신비화되고 있는 근원적인 대상과의 싸움에 있음을 보여준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에서,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오히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망각은 삶의 죽음이고, 아픔은 죽음의 삶이다"

 

2014년도에 『아포리즘-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바다는 전혀 다르다. 살아 있는 내가 죽어 있는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밖에 보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내 삶은 죽음을 억압하는 일―내 뚝심으로 죽음을 삶의 울타리 안으로 밀어넣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므로. 어느 날 죽음이 나비 날개보다 더 가벼운 내 등허리에 오래 녹슬지 않는 핀을 꽂으리라. 그래도 해변으로 나가는 어두운 날의 기쁨, 내 두 눈이 바닷게처럼 내 삶을 뜯어먹을지라도.”

 

시인이 바라본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 그 진실 옆에 있다는 확실한 느낌과, 그로부터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의 뒤범벅이 우리의 행복감일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삶은 숙명적인 것으로 파악할 때 잠언적인 진술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자면, 구약의 욥기, 흑인 영가, 고대 민요에서 삶이 무거운 짐으로" 나타날 때, 그것들은 삶의 지혜와 삶의 거부를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이런 자기파괴를 통해 이성복이 결국 되돌아오는 곳은 이성복 자신이었다.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시인은 우리가 행복하다고 할 때, 그 행복의 현주소를 ‘확실과 불확실의 뒤범벅’이라는 연장선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시를 계속 쓰고, 아포리즘을 쓰고, 언어가 그를 배신할지라도 그것을 세상에 발표할 수 있는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그것은 ‘살아 있고’, ‘살아야겠음’에서 비롯된 ‘생존으로부터의 열정’이 어느 순간 ’존재에로의 열정‘으로 바뀐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2. 열정과 냉정 사이, 수렴적 사고와 발산적 사고

 

 

시인이 치열하게 자신을 고민할 때, 독자는 무엇을 하는가? 독자는 시에 맞먹는 각자의 길에서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 경보를 확인하며 ‘잘’ 사는 것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잘’ 쓰는 시인이나 ‘잘’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열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열정은 언제나 뜨겁지만은 않다. 더할나위없이 냉정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뜨겁고도 차가운 이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열정은 자유와 마찬가지로 이미 우리 자신에게 소여되어 있거나, 인간이 점유하고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어떤 소유물과 같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철학자들은 삶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열정이 온다고 보고, 뇌전문학자나 심리학자들은 발산적 사고를 유발하는 호르몬의 작용으로 보기도 한다.

 

 

언제나 현재를 즐길 것. 인생은 현재의 연속이다. 미래는 하늘에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열정을 다하는 것이 현명하다. 마음속에 식지 않는 열과 성의를 가져라. 그때, 당신은 드디어 일생의 빛을 얻을 것이다.- 괴테, 『파우스트』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미지의 영역인 미래는 신에게 맡기고, 현재를 즐기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열중하며, 마음속에 식지 않은 열정을 가질 때 일생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괴테가 인류에게 선물로  준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열정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m-deresa/12389592

 

②“사람은 그 마음속에 열정이 불타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열정이 식으면 사람은 급속도로 퇴보하고 무력하게 되어버린다. .-라 로슈프코, 『도덕에 대한 성찰과 잠언』

 

 

라 로슈프코는 『도덕에 대한 성찰과 잠언』에서 마음에 열정이 불타고 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의 조건은 다름 아닌 ‘열정’이라고 본 것이다. 이 행복은 단지 생물학적인 생존본능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의 열정’이든 ‘무엇에로의 열정’ 이든 열정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 운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먼저 열정을 가져라, 라는 말이 성립한다.

 

③사람은 누구나 열정과 희망이 있다. 그 열정과 희망이 깨졌을 때 사람은 불행에 빠진다. 희망과 열정을 파괴하는 망치는 그릇된 세계관이나 인생관 속에 있다. 그릇된 도덕관, 그릇된 습관에서 그 원인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B. 러셀, 『행복의 정복』

 

B.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도 열정은 생물학적인 조건이자 실존적 조건이자 존재론적 조건으로 보고 있다. 특히 열정을 행복의 조건으로 보고 있다. 러셀은 열정은 희망과 한 쌍이라고 말한다. 그릇된 세계관이나 인생관, 도덕관, 습관이 희망과 열정을 망치는 망치로 보고 있다.

 

 

④그대의 영혼이란 때로 이성과 판단력이 열정과 욕망에 대항하여 싸우는 싸움터이다. 이성이란 홀로 지배하기엔 힘이 모자라며, 버림받은 열정이란 다만 스스로를 부수어 불태워 버리는 불꽃이 될 뿐이기에. 그러므로 영혼으로 하여금 이성을 열정의 높이에까지 이르게 하라. 그리고 노래 부르게 하라. 그리하여 이성으로써 열정을 인도하게 하라. 그대들의 열정이 스스로의 부활을 통해 살아가도록. 마치 자기의 재 속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불사조처럼.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칼릴 지브란은 '신은 이성을 믿으신다'라고 전제하며 그리하여 폭풍이 불고, 거대한 바람이 숲을 흔들고, 천둥 번개가 하늘의 장엄함을 소리칠 때, 가슴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차서 자신에게 말하게 하라고 조언한다. '신은 열정으로 움직이신다'라고, 열정은 신의 세계 속의 한 숨결이며, 신의 숲 속의 한 잎인 그대들 또한 이성을 믿고 열정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반면, 심리학자들은 인간에게는 수렴적 사고와 발산적 사고의 패턴이 있으며 이는 본능적으로 생존전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수렴적 사고에 치중한 삶은 안정을 중시하는데, 이는 자기 논리에 입각하여,혹은 귀납적 추론에 의거해 우리 앞에 주어진 삶의 단면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도출한 사람들에게서,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삶을 꾸리려는 알고리즘이 작동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수렴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어떤 난관에 봉착할 때, 발산적 사고가 문제해결의 해결사로 등장하는데 이는 우리 뇌의 전두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부분 이 발산적 사고가 전두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뇌피질의 신경전달물질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심리학자와 뇌과학자에 따르면 발산적 사고 능력은 20세 이후 1년에 1%씩 악화된다. 인간의 두뇌에서 전두엽(frontal lobe)의 부피가 줄고, 기능도 약화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을 들어 마이클 모부신 미국 콜럼비아대학 겸임교수는 "25세에 발산적 사고 능력이 상위 30%였다면 65세가 되면 하위 30%로 쳐지게 된다"고 말했다. 반면 50대 이후는 발산적 사고력이 30년 이상 악화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이슈를 기존 패러다임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한다. 문제를 급격하게 해결하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갈릴 지브란과는 다른 차원에서 수렴적 사고와 발산적 사고의 통합을 주장한다.  토마스 쿤에 따르면 혁신은 수렴적 사고와 발산적 사고의 팽팽한 긴장을 통해 얻어진다고 한다. 학습을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에 따라 사고하는 방법인 수렴적 사고를 모른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열려 있다해도 발산적 사고가 실행하는 혁신을 이룰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발산적 사고력 없이 수렴적 사고만으로 혁신을 이룰 수는 없다고 보아 이 사고체계의 조화를 요구한다.

 

단적으로 수렴적 사고는 안정을 추구한다면, 발산적 사고는 혁신, 열정과 창의력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젊어지고 싶으면 발산적 사고, 즉 열정을 가져라(발산적 사고를 하라)는 말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다.

 

철학적 사유에서 열정이 비롯된다고 보는 관점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한 사고체계에 기인한다고 보든, 열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정의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3.내가 스스로 그것을(목숨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1-18)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릇된 열정의 방향을 익히 알고 있다. 네로, 나풀레옹, 히틀러, 토마스 하비 등등...그들, 열정의 질주는 수많은 생명을 담보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열정의 유무뿐 아니라 열정의 어떤 방향성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정은 항상 뜨거운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며, 열정은 항상 발산적 사고만으로 실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릴 지브란이 바라본 대로 이성이 열정을 끌어 올리는 그 상태인지 아님 더 근본적인 동인이 있는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거 같다.

 

요한10,11-18부활4주 오신부님 강론은 <예수님의 사랑법>에서 그 방향성을 제시한다. 양들을 위해 스스로목숨을 내놓는 목자의 사랑법이다. ‘스스로’라는 말은 자발적이고 그 자발성에는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그 사랑을 말함이다. 그 사랑법의 증인인 제자들에게도,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사랑법을 원하신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그 사랑이 가능하려면 어떤 방향성을 지녀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복음을 읽어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4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5 .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착한 목자와 삯꾼의 대립은 ‘양’이라는 대상을 위한 사랑을 누가하느냐의 문제다. 예수님의 사랑법은 철저히 인간(타자중심적)중심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다. 타자중심적인 사랑만이 계산적이지 않을 수 있다. 목자와의 대척점에 있는 사랑법을 삯꾼에 비유한 것은 계산적인 관계에 대한 경계이자 ‘이리’는 탐욕의 페르소나를 의미한다.

 

이렇게 일차적 의미로 해석한 다음, 우리 내부의 더 근본적인 사랑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안에서 착한 목자는 무엇이며, 삯꾼은 무엇이며, 이리는 무엇이며, 양은 무엇인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에서 핵심은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목자는 당연히 양이 누군지 알겠지만 양도 목자를 자명하게 알아보는가하는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언제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만약 인류가 목자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이미 세상은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진 상황으로 진술했을까?

 

Ⓒ는 교회의 확장이고 종말론적인 전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류는 그 누구도 예외없이 그분의 양떼라는 사실의 천명이다. 부활4주의 복음의 핵심은 구원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열려 있는 개방된 개념이고, 궁극에 도달할 지점인 것이다.

 

Ⓓ에서 ‘스스로’와 ‘명령’은 충돌하는 개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닿아 있다. 우리는 모두 자유의지를 갖고 이 세상에 왔음을 알고 있다. ‘명령’이라는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때 ‘스스로’라는 의미 역시 자명해질 듯하다.

 

우리가 어떤 열정의 상태를 경험할 때, 한 인간 자신이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할 때, 우리 가슴에 형용키 어려운 뜨거운 용암이 부어진 순간을 경험할 때, 미친 듯이 어떤 곳을 향해 질주할 때, 이 열정의 주제가 어디서 왔는지, 안인지 밖인지 모르면서 추동하는 힘과 인격이 마찰과 충돌을 빚으면서 어떤 곳을 향할 때, 우리는 어떤 생명의 메시지를 받았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때 우리 ‘스스로’한 것 같은 행위들이 실은 그분의 ‘명령’ 혹은 메시지에 우리가 ‘네!“라고 응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명령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충돌하는 개념이지만, 영적으로는 함께 수행되고 동행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오신부님은 부활4주 강론에서 예수님의 이 사랑법을 안정에서 열정으로, 실패의 두려움에서 사랑과 자비를 바라볼 때 가능하다는 것을 제언하고 있다.

 

Ⓔ예수님의 목소리에 익숙한 삶이란, 그것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그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라.’는 예수님의 그 목소리에 익숙한 삶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안정보다는 열정을 요구하시는 거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안정보다는 열정을 추구하신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정보다는 열정을 추구하는 삶에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보다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열정적인 삶도 무모하고 실패한 삶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열정을 갖고 살다가 실패한 경우, 그 실패는 순간의 실패라는 것입니다. 순간의 실패와 영원한 실패를 혼동하거나 착각하면, 실패가 두려워서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실패가 두려워서 열정을 버리려고 했다면, 제자들은 영원히 실패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했다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 안에 있는 ‘열정’을 다시 일깨워주시고, 다시 살아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잊어버리고 있던, ‘열정을 되찾았을 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열정을 되찾아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강론에서 제언하는 예수님이 원하는 삶은 가장 우리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서 보듯 익숙함-목소리-열정-안정- 실패-순간-영원-잊다- 되찾다-사명등의 순차적 키워드를 통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궁극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역설하신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안에 ‘잊어버린’ 열정을 다시 ‘되찾고-일깨워야’ 함을 주지시킨다.

 

강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열정잊다- 되찾다 일 것이다.

 

사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열정을 가진 이들은 실패여부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열정은 거의 자기 심장에 자신이 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외부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는다. 의연하다. 너무 아랑곳하지 않는다. 열정의 실패 여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직 열정의 상태에 진입하지 못한 채, 저것이 혹시 내가 투신할 열정의 정체일까, 아닐까를 계산해 보는 그 상태일 것이다. 열정은 세상을 이기고도 남을만한 힘이 있다. 그래서 열정은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주목하고 성찰해야 하는 부분은 밖의 세상이 아니고 안의 나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강론 Ⓙ에서 제언하는 열정잊다- 되찾다는 우리가 열정을 논할 때 가장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은 사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심장을 강타한 상황에 해당한다. 이것은 아주 뜨겁게도, 아주 냉정하게도 바람처럼 오기 때문에 획일적이지는 않겠지만, 말씀이 자신의 심장을 차지했다는 것을 본인은 분명히 안다.

 

그런데 돌연 그 뜨거운 말씀이 우리를 떠나버린 듯한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정의 ‘잊음-망각’의 시간이다. 돌연 말씀이 회수된 듯한 이런 순간을, 열정을 가진 이들은 주기적으로 경험한다. 열정적으로 산다고 해서 이 열정이 2차함수 그래프처럼 수직상승하지는 않는다. 뜨거운 불속에 있다가 차가운 얼음 속에 담갔다가, 담금질을 당한다, 라는 말을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렇기에 이미, 열정을 경험한 이래야 ‘잊었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다.  열정을 ‘잊는’ 경우는 대략 두 가지의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겠다.

 

Ⓚ전자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통찰 ‘영혼의 어둔 밤’이라고 불렀던 영적 상태에서 경험되는 잊음의 상태다. 영적 성장의 단계에서 하느님에 대한, 향주삼덕에 대한 열정이 돌연 그 모습을 감춰버리는 것이다. 그분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처럼 느껴질 때이다. 영적으로 어떤 느낌도 없는 상태다.

 

Ⓛ후자의 경우, 세속의 가치관으로 기울어졌을 때, 즉 자기 욕망의 소리에 휩쓸려 살 때, 말씀이 그를 떠난다. 당분간은 말씀이 자신을 떠난 지도 모르고 산다. 어떤 계기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말씀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말씀이 동행했을 때의 삶과 말씀이 떠난 상태로의 삶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도 알만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자든 후자든 열정을 ‘되찾는다’는 것은 거의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 놀랍다. 이 모두가 열정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 열정이 어디서 왔으며,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다시 말씀은 우리의 심장을 차지한다. ‘스스로’ 그 열정을 되찾고자 했을 때 찾아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스스로’와 ‘명령’은 거의 동의어에 해당한다.

 

이는 복음에서 전하는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라는 종말론적인 선언에서 확인된다.

 

즉 지금은 그분의 목소리를 거절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그분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신다는 것이자,

 

그럼에도 결국은 한 양떼가 될 것이라는 것, 왜? 이미 생명에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지만 채워지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는 생존투쟁에서 ‘쉴’ 수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 무엇이 길인지, 진리인지, 생명인지 알 수 있다. 그때에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 집의 의미를 우리가 확연히 살게 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돌아갈 ‘집’이 과연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돌아갈 그 '집'은 그분의 집이고, 그 '집'으로 우리 ‘스스로’ 돌아가게 하는 그 힘이 ‘열정’이다. 우리는 그 집에서 그분과 함께한다는 구체적인 행복을 맛볼 것이기 때문이다. 열정이 없다면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집’이다.

 

이렇듯, 열정은 믿음과 희망처럼 사랑을 끌어가는 힘이다. 믿음과 희망이 사랑의 내적이고 근원적인 힘이라면 그 내적이고 근원적인 힘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힘이 바로 열정이다.

 

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것이 열정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의 관념이고, 종교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글을 정리해보자면,

 

열정은 ‘무엇으로부터의 열정’에서 ‘무엇에로의 열정’으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가 지닌 자기보존본능에서 열정은 생명체의 공통적인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열정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무엇으로부터의 열정’은 세계내 존재인 자기보존본능에 기반하기에 존재자 일반과 분리되어 나타난다. 공존의 원리에서 멀어진 욕망과 광기와 아주 가깝다.

 

예수님의 사랑법이나 강론에서 주지하고 있는 열정은 ‘무엇에로의 열정’이다. 공존을 향해 열려있는 문이다. 열정도 자유와 마찬가지로 단일 요소가 아니다. 내적이고 외적인 복합요소라 할 수 있다.

 

존재자 일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초월적 열정은 존재자 일반을 향하는 자발성의 열정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이 열정은 실존의 터전으로서 세계를 향해 내리는 결단 속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성취된다.

 

따라서 인간의 열정은 세계로부터의간격에서 세계에로의결단으로 이전되는 역사이며, 이 결단으로부터 구체적 행동으로 이전하는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열정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는 사건은 항상 누군가의 열정이 필요하다.  신은 우리의 도움없이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다.